주대환 인터뷰, “문재인 정부는 상위 10% 기득권 대변...조만간 바닥나 국민이 실망할 것”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2000년 민족사에서 가장 큰 사건"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의 공동대표. 최근 반(反)대한민국적 좌파사관(올드레프트)에서 벗어난 ‘뉴레프트(new left)
사관’의 관점에서 우리 현대사의 주요 쟁점을 짚어보는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를 펴냈다. /조선DB
“젊은 시절 나는 혁명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나는 과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혁명가도 못 되고, 노동운동가도 못 되고, 정치가도 못 되었다.” 최근 나온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나무나무)라는 책의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에 한 발이라도 걸쳐본 사람 치고 주대환(周大煥·63)이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이는 없다. 서울대 종교학과 출신인 그는 민청학련 사건(1974년), 긴급조치 9호 위반(1978), 부마항쟁(1979년) 등으로 4차례나 구속되었고, 1980년대에는 김철순이라는 가명으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등에서 지하 조직 활동을 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는 공개 합법적인 진보정당으로 전환하자는 이른바 ‘신(新)노선’을 처음 제안한 사람이기도 하다. 1992년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았으며, 2000년에는 민주노동당 창당을 기획했다. 2004년 민노당 정책위의장 선거에서 다수파인 NL(김일성 주체사상파) 계를 꺾고 당선되었고, 2008년 민노당이 분당될 때 진보정당을 포기하고 그 판을 떠났다.
현재는 사회민주주의연대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면서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을 겸하고 있다. 진보진영 일부에서는 그가 ‘변절했다’고 비난하지만, 그가 낸 <좌파논어>라는 책 이름에서도 보듯이 그는 여전히 좌파를 자처하고 있다.
그가 최근 펴낸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라는 책의 부제도 의미심장하다. ‘나는 4·19의 시(詩)만 읽은 게 아니
라 5·16의 밥도 먹고 자랐다.’ 주 대표는 책의 서문에서 자신이 걸어온 사상적 궤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난 40여 년 동안 내 생각의 틀은 모택동 사상, 레닌주의, 마르크스주의, 페이비언 사회주의, 루스벨트의 뉴딜 진보주의를 거쳐 왔다고 느낀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면 나의 사상은 유라시아의 베이징, 모스크바, 베를린을 거쳐 도버 해협을 건너서 영국으로 갔다가, 다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그리고 이제 태평양을 건너서 한국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제야 한국을 어슴푸레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는 “나는 이 책에서 감히 ‘새로운 사관(史觀)’으로 대한민국의 70년사를 바라보고자 하였다. 나는 이 사관에 ‘뉴레프트(new left) 사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밝혔다. 그래서 그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먼저 말씀하신 ‘뉴레프트’ 사관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뉴레프트 사관이 비판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사관은 ‘올드레프트(old left)’ 사관입니다. 즉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란 책이 만든 프레임에 갇혀 있는 기존의 ‘민족주의 사관’을 일컫는 것이죠. 저는 이를 비판 극복하는 뉴레프트 사관으로서 ‘민주주의 사관’을 제안합니다. 올드레프트의 민족주의 사관은 ‘후진국형’ 진보의 정신세계를 구성한다면 뉴레프트의 민주주의 사관은 ‘선진국형’ 진보의 세계관을 구성합니다.”
대한민국의 요직과 핵심을 차지한 86세대
-역사 전공자도 아니시면서 올드레프트의 민족주의 사관을 비판 극복하는 일에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 일은 왜 중요하죠?
“현재 50대 초반인 소위 386, 486하던 ‘86세대’가 바로 이 민족주의 사관으로 대한민국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중진이 되었습니다. 전교조나 공무원노조, 민주노총뿐만 아니라 언론이나 문화 분야에서도, 그리고 정치권이나 학계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요직과 핵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저는 봅니다.”
-86세대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의 영향으로 대한민국 건국(建國)이나 대한민국의 발전 과정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군요.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이 필독의 현대사 교과서였습니다. 그 책을 학창 시절에 읽은 세대가 이른바 86세대죠.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만든 프레임으로 바라보면 대한민국의 탄생은 매우 부정적인 사건입니다. 친미파(親美派)인 이승만(李承晩)이 김구(金九)를 비롯한 민족주의 세력을 배제하고 친일파(親日派)와 손잡고 세운 단독정부가 대한민국인 거죠. 농지개혁도 실패하고 친일 청산도 못 했으니 이후의 발전과정에서도 정의가 실종되고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읽은 사람은 많았다고 하지만,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책이 만든 프레임은 그 세대 전체가 공유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세대도 포섭하고 있지요. 박근혜 정권이 무너지는 데는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고 한 무리수도 한몫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만큼 일반 국민들은 기존 교과서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의식이 없고, <해방 전후사의 인식>의 프레임은 강합니다.”
2017년 5월 11일 오전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수석비서관 등에 대한 인선발표를 하고 있다. 민정수석비서관(왼쪽에서 두 번째)에는 조국 서울 대법학전문대학 교수가 임명됐다.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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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권 교체가 있었으니까 그 이야기도 잠시 하고 넘어가시죠. 대한민국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소위 86세대가 주도하는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보수우파 진영에서는 좌파정부가 탄생했다고 우려가 큽니다.
“제가 보기에 문재인(文在寅) 정부는 좌파정부가 아닙니다. 상위 10%의 기득권을 대변하는 정부가 어떻게 좌파가 될 수 있습니까. 현재 우리나라의 소득 점유율을 보면 상위 10%가 국민 소득의 48.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OECD 최고의 불평등 사회인 미국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민주당의 주된 지지 기반은 바로 상위 10%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대기업 정규직, 공무원, 교사 같은 사람들은 세계적인 수준의 임금과 연금을 챙기고 있는 반면, 나머지 하층 노동자들과 자영업자들은 형편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아래 밑바닥의 하층 노동자들은 200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하고도 경쟁해야 하는 처지다 보니 임금이 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타파하여 임금의 평준화를 이룰 꿈도 꾸지 않는, 탐욕스런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나, 기초연금 20만원에 기대서 살아가는, 폐지를 줍는 빈곤 노인들을 외면하는 전교조 선생들이 어떻게 좌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상위 10%가 주로 지지하고, 그들과 나머지 국민들의 이해관계가 대립함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후보가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상위 10%는 주로 중년의 기성세대일 텐데 청년들 다수가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먼저 캥거루족이라든지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상위 10%가 곱게 키운 자식들이죠. 또 소득이 많은 사람은 부양가족도 거느릴 수 있고 주변을 챙기거나 교회에 헌금을 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 캥거루족은 정신적 캥거루족이 된다고 봅니다. 대체로 10% 정도의 국민은 상위 10%와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있고요, 그래서 ‘20대 80의 사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대환 대표는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시야가 좁고, 평등 가치 지향이 분명하지 않았다"며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빈부격차의 확대를 저지하기보다는 (대기업 정규직) 조합원들만 중산층으로 빠져나왔다"고 비판했다. 사진은 현대차 노조의 파업모습.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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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친노 패권은 상위 10%의 기득권을 대변"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20%는 80%에 비하여 소수가 아닙니까? 왜 80%가 20%를 못 이깁니까?
“그렇습니다. 이데올로기적 지배는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조선의 양반은 10%쯤 되었지만 90%를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선이 아닙니다. 그래서 곧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난한 아버지를 둔 ‘흙수저’ 청년들과 하층 노동자들이 떠들기 시작할 것입니다. 뉴레프트 운동은 바로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려는 노력입니다.”
-대표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좌파는 아니지만,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역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좌파라고, 문재인 정부의 성격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대통령 참모 중에는 과거 주사파 출신도 있고, 소위 ‘강남 좌파’라 불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역시 86세대가 정권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당연한 것이고, 이제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들이 앞으로 열심히 잘해서 그 공과(功過)에 대하여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안희정 충남지사에게서도 보듯이 86세대가 철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50대로서 더 이상 학생 시절의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거에 주사파였다는 이유로 그들에 대하여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인지요.
“글쎄요. 개개인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전체적으로 주사파라든지 그런 과거를 명쾌하게 밝히고 떳떳하게 전향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른바 전향을 하면 변절자로 낙인이 찍혀서 옛 동지들로부터 엄청난 인간적인 모욕을 받고, 진보진영에서는 더는 활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영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결국 보수진영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주사파였던 사람이 고위 공직을 맡게 되면 전향을 언제 어떻게 하였는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공평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안희정 같은 사람도 책인가 어디서 과거를 밝히라는 요구에 대하여 반발하는 말을 써놓았다고 하던데 그건 맞지 않습니다. 한편 건방진 태도이고 한편으로 교언영색(巧言令色)의 이중플레이지요.”
-지금은 이석기 같은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생각을 그들 모두가 가지고 있지는 않겠지만, 대한민국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은 여전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을 ‘올드레프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86세대 운동권 주변 사람들이 이제 더는 주사파나 김일성주의자는 아니지만, 여전히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의 정신세계 속에서 성역은 백범 김구 선생입니다. 상해 임시정부이고요, 그들은 ‘이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인 것은 모두가 친일파 때문이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면서 바로 자신들이 청년들과 하층 노동자의 눈에 기득권일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안 합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아마 그런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할 겁니다. 그들을 나는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그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보시는지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특유의 솔직한 어법으로 자신을 (정신적으로) 83학번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문재인 대통령 역시 86세대와 코드를 맞추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원래 문재인 대통령은 정치에 뜻을 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다 알아서 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라며 그를 끌어내어서 대통령 만들 수 있는 것이 그들(86세대)의 힘입니다.”
-그런 민족주의자들, 친북 좌파적 성향의 사람들이 재벌개혁하고 소득 재분배해서 대표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불평등을 막겠다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상위 1%의 재벌과 특권층에 대해 공격을 하겠죠. 모든 것이 박근혜(朴槿惠)와 그 일파 탓이고 재벌 때문이라고 할 겁니다. 다소간의 효과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특권층에 대한 공격은 바로 상위 10%가 차지한 기득권에 대해서 방어하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입니다. 자유한국당 친박(親朴) 패권이 상위 1%의 특권층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민주당 친노(親盧) 패권은 상위 10%의 기득권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개혁은 조만간에 바닥이 나고, 국민의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어서 이른바 ‘촛불 혁명’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이른바 적폐청산을 하겠다고 했는데요.
“저는 적폐라는 어려운 단어가 무슨 말인지, 사전을 찾아보았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적폐청산은 왠지 구한말 선비들의 ‘위정척사’ 비슷하게 들립니다. 아마 이 정부는 보수 정권이 했던 4대강 사업이나, 국방비리 같은 것을 조사하고 인적 청산을 하는 것이 적폐청산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적폐청산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는 없죠. 외과 수술을 해야 하는 데 마사지 좀 해주니 ‘시원하다’하며 만족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요. 한국 사회의 문제는 마사지 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건국에는 다양한 세력이 참여"
-다시 대한민국 역사 이야기로 돌아가시죠. 대표님은 제헌(制憲) 헌법(憲法)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을 무척 강조하고 계시는데요.
“제헌헌법은 ‘해방이 되면 이런 나라를 만들 거야’라고 우리 선조들이 꿈꾸던 그 꿈을 한 글자 한 글자 새겨 넣은 것입니다. 제헌헌법을 만든 198명의 국회의원이 바로 건국의 아버지들입니다. 헌법 8조에 평등(平等)을 규정하고 있고, 9조에서 14조는 자유(自由)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자유와 평등의 나라로 건국된 것이죠.”
-헌법 정신을 강조하는 이들은 많이 보아 왔지만, 제헌헌법의 가치를 강조하는 분은 오늘 처음 만납니다. 87년 헌법 이전의 헌법들은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는 분들도 있는데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헌헌법에 농사를 짓는 사람이 농지를 소유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대원칙이 박혀 있습니다. 실제 농지개혁법은 1949년 국회를 통과했고, 1950년에 마무리되었지만, 헌법에 이렇게 명시되어 있으니 농지개혁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를 했다고 하지만, 어쨌든 임기를 지켰잖습니까? 김일성(金日成)하고 비교를 해보세요. 이승만은 헌법에 따라 임기를 마치면 선거를 했고, 4년밖에 안 되는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하려고 그렇게 무리수를 두는 과정에서 추락해간 거 아닙니까?”
-1987년 헌법 이후 민주정부가 출범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의 민주정이 1987년 이전에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86세대의 무식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민주주의 역사가 자기들로부터 처음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독립협회로부터 내려오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다시 공부해야 합니다.”
-조금 전에 제헌헌법을 만든 198명의 국회의원들을 ‘건국의 아버지’로 표현하셨는데, 우리 역사에서는 건국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무척 생소하게 들립니다.
“제헌헌법을 만든 분들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면 누구를 건국의 아버지라고 할까요? 이승만 대통령을 놓고 국부(國父)니 마니 하는 논란을 벌이는 방식은 단 한 분의 아버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부 김일성 같은 사람을 찾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왼쪽부터 인촌 김성수, 해공 신익희, 죽산 조봉암. 주대환 대표는 "우파들은 이승만 대통령뿐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이들 세 명의 공적을 함께 기려야 한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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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학문적으로는 상당히 진척된 것 같은데도 왜 대중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극단적인 의견대립이 흡사 해방 정국의 좌우갈등, 좌우익 진영의 내부 갈등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저는 이승만 대통령이 재평가받기를 원하는 분들에게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이 세 분을 함께 모시라고 말합니다. 인촌은 한민당의 오너, 해공은 한독당의 배신자, 죽산은 공산당의 변절자였습니다. 대한민국 건국은 이처럼 다양한 세력이 참여하여 논쟁하고 갈등하는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해방공간의 복잡하고 유동적인 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선조들이 고뇌하고 토론했던 과정을 입체적으로 잘 엮으면 젊은이들에게도 얼마든지 재미있고 매혹적인, 그러면서도 교훈을 주는 역사를 꾸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우남 이승만의 원맨쇼로 만들어서야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우리 사회의 친일파 논쟁은 '정신병 수준'"
-최근 불거진 건국절(建國節) 논쟁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솔직히 저는 광복절을 건국절이라고 꼭 바꾸어야겠다는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잘 모르니 결국 (제 느낌으로는) 추진하는 측이 너무 성급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대하는 사람들도 문제가 있습니다. 일부 좌파들과 민족주의 진영에서 1948년에 건국되었다고 하면 마치 무슨 큰 잘못이나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정치인들도 여기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의 조소앙(趙素昻) 선생이 ‘건국강령’을 쓴 게 1941년 무렵입니다. 여운형(呂運亨) 선생은 1944년 광복 직전 ‘건국동맹’을 만들고, 광복 직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건국이 1948년 8월 15일에 되었다는 건 너무나 명백하여 논란거리도 아니죠.”
-현행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다는 점을 내세워 1948년 건국 주장은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헌법 전문에 그런 촌스럽고 노골적인 표현이 들어간 것도 문제이지만,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된 엄연한 사실을 말한다고 임시정부를 부정하거나 위상을 깎아내리는 건 아니죠.”
-친북좌파 민족주의자들은 아무에게나 ‘친일파’ 딱지를 붙여 놓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친일파 논쟁을 보면 거의 ‘정신병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로 일본은 군국주의로 치달아 1930년대 말이면 완전히 전시(戰時)체제입이다. 다이쇼(大政) 데모크라시 시절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특히 미국하고 전쟁을 일으킨 1941년부터는 교사까지 칼을 차고 다니는 살벌한 전시 체제였습니다. 거의 광적인 분위기였죠. 그 시대를 모르면 쉽게 민족주의자들의 선동에 넘어갑니다.”
주 대표는 “반민특위 조사 대상에 오른 적이 없는 김성수와 조봉암 선생도 요즘에 와서 친일 시비의 수모를 당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김성수 선생의 경우 1962년에 추서된 건국훈장을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조봉암 선생의 경우 2011년 대법원에서 1959년 재판을 재심하여 무죄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보훈처는 건국훈장 추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당시 모든 신문이 폐간되고 유일하게 남은 총독부 기관지에 실린 작은 기사 하나를 근거로 친일 혐의를 씌운 것이죠. 52년간 간첩혐의를 벗고 나니 이제는 친일파라고 하니 유족들이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차겠습니까.”
-왜 21세기에 여전히 친일파 논쟁이 벌어지는 겁니까? 지난 대선(大選)에서도 여러 명의 민주당 대선 후보들이 친일파 청산을 외쳤는데요.
“친일(親日) 청산을 주장하는 사람한테 제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 친일파 본 적이 있느냐?’ 1962년, 63년에 태어난 이들이 친일파를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도 아직도 우리나라의 모든 문제가 친일파 때문이라는 생각이 그들의 머리에 꽉 박혀 있습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에 있는 단 하나의 이유를 찾았다는 식입니다. 미안하지만 이런 생각은 전혀 검증되지 않은 허상이고요, 빗자루를 안고 허깨비와 씨름하는 꼴입니다.”
경남의 거제시 고현동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내 흥남철수기념 조형물 옆에 세워진 김백일 장군 동상(왼쪽). 김백일 장군이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경남의 일부 시민단체 회원들이 동상 철거를 요구하며 검은 천을 두르고 쇠사슬을 묶었다(20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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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나 백선엽(白善燁) 장군 같은 분들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니, 해방 당시 반민특위에서 박정희나 백선엽 같은 일본군 또는 만주군 하급 장교 부류는 애당초 친일파니 뭐니 하는 검증 대상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해방 당시 20대 청년인데 친일을 하면 얼마나 했겠습니까. 혈서(血書)요? 입학 나이 제한에 걸리니까 그랬겠죠. 창씨개명(創氏改名)? 창씨개명 안하고 소학교(초등학교)라도 갈 수 있었나요?”
-우리나라 역사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흐르는 건 아닌가요?
“남한은 친일파가 권력을 잡았고, 농지개혁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하여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봉건 잔재가 남아서 남한은 여전히 반봉건 사회이고, 또 미국의 식민지다. 그러니 여전히 민족해방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 북한은 어쨌든 독립운동 항일투쟁을 한 사람들이 만든 나라 아니냐. 또 친일 청산과 농지개혁을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정통성이 북에 있는 게 아니냐 하는 것이 86세대 민족주의 사관의 관점입니다. 이를 집중적으로 비판한 것이 뉴라이트 자유주의 사관이고요.”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2000년 민족사에서 가장 큰 사건"
-대표님은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에 대해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는데요.
“북한은 지주들에게 무상몰수(無償沒收)해서 무상분배(無償分配)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요. 국가에서 40%의 세금을 거두어 갔습니다. 40%는 일제 강점기 못지않은 엄청난 고율의 소작료입니다. 지주가 그냥 국가로 바뀐 거지요. 농민들이 토지를 사고팔 수도 없으니 소유권이 없는 겁니다. 그 후 집단농장을 만들었으니 농민들 입장에서는 다시 빼앗긴 겁니다.
이에 반해 남한에서는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했는데, 소출의 30%를 5년만 내면 내 땅이 되었습니다. 이 30% 상환이 부담스러워 분배받은 땅을 포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애당초 남북의 농지개혁은 비교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주 대표는 “해방 당시 85%의 농민이 소작농이었는데, 당시 국민의 70%가 농민이었다”며 “그들을 대대로 소작농이라는 천형(天刑)에서 해방시킨 것이 1949년의 농지개혁이었다”고 말했다.
“저는 이 농지개혁이 2000년 민족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토지혁명이라는 것은 쿠데타나 혁명의 슬로건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실제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겁니다. 토지혁명이든 농지개혁이든 엄청난 유혈혁명이 일어나도 잘 안 되는 겁니다. 필리핀이나 남미의 여러 나라를 보세요. 수도 없는 정변이 났지만, 여전히 대지주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잖아요. 저는 대한민국 건국과 동시에 이루어진 토지혁명이야말로,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 주나라 문왕과 무왕의 시대 이래로 가장 성공적인 토지혁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농지개혁 때문에 6·25 때 농민들이 열심히 싸웠고, 공산화가 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1949년 정부가 농지개혁을 하려고 보니 이미 대상 면적의 절반 이상이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지주들이 대세가 기운 것을 인정하고 헐값에 땅을 팔아버린 겁니다. 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은 거저 주기도 했습니다. 결국 전쟁이 터져서 인민군들이 내려와서 보니 이미 농지개혁이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농민들이 인민군에 호응하여 손뼉 치고 환영할 이유가 없었죠.”
-농지개혁을 통해 대한민국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있다면요.
“대한민국의 소작농이 모두 자영농으로서 새 나라의 국민이 된 겁니다. 완전한 새 출발입니다. 자영농의 나라로 대한민국이 건국된 거죠. 사람들은 1950년대 농민들이 문맹률이 높고 민도(民度)가 낮아서, 선거에서 막걸리나 고무신에 현혹되어 아무나 막 찍었다고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자기 이익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하게 찍었어요. 자영농을 비롯한 당시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당당한 주인으로서 주권을 행사한 겁니다.”
-신생 독립국이 어떻게 그런 엄청난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었을까요?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운(運)도 좋았습니다.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국민당을 타이완으로 몰아냈는데 그게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겁니다. 또 북한에서 토지개혁을 먼저 했고요. 이런 상황에서 미국 국무부와 군정(軍政) 당국이 판단을 한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농지개혁의 실무 책임을 죽산 조봉암 선생에게 맡겼다는 겁니다. 그분은 아시다시피 원래 박헌영과 함께한 공산당원이었습니다.”
-공산당계 인물에게 농지개혁을 맡긴 거군요.
“죽산은 독립운동도 누구보다 치열하게 하신 분이고, 건국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누구보다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승만은 아들뻘인 조봉암이 제헌국회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농림부 장관으로 전격 발탁합니다. 조봉암 농림부 장관이 차관과 농지국장, 기획실장 등 서너 명과 함께 밤을 새워 농지개혁법안의 기본 골자를 만든 겁니다. 강정택 차관과 강진국 농지국장도 굳이 이야기하면 좌익계 인물들이었습니다.”
주 대표는 “흔히 우리나라는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만약 지주와 친일파가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면 친일파의 다수에게서 경제적인 토대를 완전히 몰수해버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친일파 몇 명 잡아서 사형선고를 내린 경우와 비교했을 경우 훨씬 더 실질적인 친일파 청산 조치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평등의 가치에서 출발한 신생 대한민국
-농지개혁을 통해 대한민국이 ‘평등의 가치’를 유전자로 가지게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원래 평등은 좌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농지개혁을 통해 모든 농민이 자영농이 되었고, 자영농이 열심히 일하고, 그 자식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현대 학문과 과학기술을 배우고, 산업을 발전시키고, 민주주의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신분질서가 완전히 해체되면서 절반은 왕후(王侯)의 후손이고 절반은 장상(將相)의 후손이 되었으니, ‘홍길동의 꿈’이 실현된 나라가 된 거죠. 그러니 평등 가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제대로 직면하면 좌파도 대한민국의 탄생을 긍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겠군요.
“우리는 조상들의 희생으로 좋은 나라에 살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봉건잔재를 청산했기 때문에 지난 60년 동안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였습니다. 저 또한 시골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고, 훌륭한 분들과 친구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밥 먹다가도 ‘정말 다행이야. 이 시대 이 나라에 태어나서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탄생 과정을 보면 물론 부끄러운 점도 많다’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점이 부끄러운 점인가요?
“먼저 자력(自力)으로 일본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해방시키지 못한 겁니다. 외세(外勢)를 등에 업은 채 싸우다가 분단도 되고, 심지어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했으니 부끄러운 점이 많죠. 사실은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미군정과 우익이 야합하여 낳은 자식이라고 해도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생아라고 해서 훌륭한 유전자를 갖지 말라는 법이 있나요? 공자도 사생아였습니다.”
주 대표는 “역설적이게도 대한민국이 일군 성공과 발전, 특히 자본주의 발전으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며 “자유와 평등의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위태로워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2005년 9월 21일 여야5당 정책위의장 회의에 참석한 주대환 의장(맨 오른쪽). 오른쪽부터 주대환, 원혜영(열린우리당), 맹형규(한나라당), 김낙성(자민련), 김효석(민주당) 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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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빈부(貧富)격차와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자영농의 나라로 건국되었고, 중산층이 두터운 나라로 유명했는데, 아주 빠른 속도로 불평등한 나라로 바뀌고 있습니다. OECD 국가 중에 거의 미국 다음으로 불평등이 심한 나라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에 따라 청년 실업과 노인 빈곤 문제가 심각하고, 자살률이 높고, 출산율은 낮고, 청소년이 행복하지 않은 나라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때문에 저는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평등이라는 유전자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동안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노동운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시야가 좁고, 평등 가치 지향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빈부격차의 확대를 저지하기보다는 (대기업 정규직) 조합원들만 중산층으로 빠져나왔습니다. 오히려 빈부격차 확대에 일조한 책임이 있습니다. 또 근간에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연공서열제 등을 개혁하기 위한 역대 정부의 노력에 저항하기도 하였습니다.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들은 ‘전두환 시절이 더 좋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젊은 시절 노동운동의 뒤를 따라다닌 사람으로서 참으로 통곡하고 싶습니다.”
주사파가 등장하게 된 이유
-앞으로 우리나라에도 대표님께서 말씀하시는 평등 가치를 실현하는, 수준 높은 노동운동이 등장할까요?
“한국에서 지금 빈부격차가 대물림되면서 계급이 만들어지려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계급사회로 변질되는 것을 저지하고, 평등한 나라로 되돌리려는 새로운 노동운동, 차세대 노동운동이 하층 노동자와 청년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선진국형 진보, 진정한 좌파가 등장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려고 하니, 평소에 궁금했던 문제가 새삼 생각이 났다.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1980년대에 와서 주사파가 갑자기 등장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민주화운동도 광기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주사파가 탄생합니다. 전두환을 몰아낼 우군(友軍)을 찾다가 북한이라는 존재를 재발견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북한의 물리적·군사적 힘에 끌렸지만, 생각을 그 방향으로 발전시키다 보니 북한이 정신적·도덕적 힘도 가진 것으로 믿게 된 겁니다. 만주의 무장 항일투쟁, 보천보 전투 이런 게 얼마나 멋지게 보입니까? 반면 자기들의 ‘정당한 주장’을 반대하는 놈들은 모조리 친일파의 후손이라고 생각하게 돼버린 거죠.”
주 대표는 “한국 자본주의가 급성장하는 시기에 기성세대가 열심히 돈벌이하는 사이에 전두환이라는 악마를 죽이는 거창한 일을 스무살 어린 학생들이 한 것”이라며 “대학교는 이미 해방구나 마찬가지였고, 탄압이라는 것도 북한처럼 삼족(三族)을 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잠깐 잡아넣었다가 풀어주는 정도니 학생들의 간덩이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20대 초반의 아이들, 공부 잘한다고 어릴 적부터 칭찬만 받아온 아이들이 바로 레닌 같은 혁명가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겁니다. 이른바 ‘82학번들의 혁명놀이’가 시작된 것입니다. 제 이야기의 핵심은 주사파도 시대의 산물이고, 그들의 탄생에는 지금의 보수 세력의 책임도 있다는 것입니다.”
30년 전의 그 ‘철없던 주사파 청년들’이 이제 50대 장년이 되어 대한민국의 중추를 장악하였다. 그들이 지금이라도 주대환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출처:주간조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