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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쉐린 타이어의 역사
조회수 3.3만2021. 10. 18.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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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착식 타이어에서 공기 없는 타이어까지
1844년 찰스 굿이어가 황과 라텍스를 이용해 탄성이 높은 고무를 발명했다. 이후 1847년 로버트 윌리엄 톰슨이 가황 고무를 덧댄 바퀴를 개발했다. 그 구조는 단순했다. 기존에 사용하던 철판이나 가죽을 고무로 대체했을 뿐이었다.
1900년대 굿이어 타이어 제조 공장 풍경 (출처: dyler)
이렇게 제작된 휠은 노면의 충격을 제대로 흡수할 수 없었다. 주행 중 차체 진동이 증가해 승차감과 안전성이 낮았다. 이런 불편함은 1886년 세계 최초로 특허 받은 내연기관 자동차, 페이턴트 모터바겐이 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1888년 초기 던롭 타이어와 존 보이드 던롭 (출처: awwards)
타이어 발전은 의외로 더뎠다. 1888년 스코틀랜드 출신 존 보이드 던롭이 공기압 타이어를 발명했다. 이로써 승차감이 개선됐지만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본드로 바퀴와 튜브를 접착해 수리와 교환이 쉽지 않았다. 타이어가 문제가 있으면 휠까지 교환해야 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런 불편함은 1891년 한 형제가 탈부착이 가능한 자전거 타이어를 발명하여 해소될 수 있었다. 그들이 바로 프랑스의 미쉐린 형제였다.
자전거 타이어를 개선하다
이전 미쉐린 형제는 타이어뿐만 아니라 자동차 산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가업을 물려받으면서 인생에 커다란 전환을 맞게 되었다. 1886년 조부의 공장을 물려 받기 전까지 앙드레 미쉐린은 금속 프레임워크 회사를 운영한 사업가였다. 그의 동생 에두아르 미쉐린은 미술을 전공한 화가였다. 그런 그들이 가업을 이어받자마자 파산 위기를 맞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업을 접을 준비를 하던 중 미쉐린 형제에게 기사회생할 기회가 찾아왔다.
앙드레 미쉐린과 에두아르 미쉐린 형제 (출처: Michelin Guide)
1889년 어느 봄날 타이어 수리를 맡기기 위해 자전거를 실은 수레가 미쉐린 공장을 찾았다. 파손된 타이어는 던롭이 특허를 받은 제품이었다. 천으로 감싼 고무 튜브가 바퀴와 접착제로 붙어있어 정비가 쉽지 않았다. 많은 도구와 시간 그리고 복잡한 과정이 필요했다. 수리 후 자전거를 타본 에두아르 미쉐린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1889년 파손된 던롭 타이어 자전거를 실은 수레 (출처: Michelin)
공기압 타이어가 가진 높은 승차감과 영민한 핸들링 그리고 편안함은 이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다만 정비성이 낮아 아쉬웠다. 이것만 개선한다면 높은 수익이 생길 거라 믿었다. 1년 후 그들이 원하던 타이어가 완성됐다. 하루라도 빨리 자신들이 만든 개선된 제품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탈착식 타이어로 우승하다
이듬해 1891년 파리-브레스트 자전거 레이스가 열렸다. 이 경주의 거리는 1,196km로 자전거와 타이어 내구레이스라 불리기도 했다. 미쉐린 형제는 당시 스타 레이서 샤를 테롱을 섭외했다. 그의 자전거에 자신들이 개발한 탈착식 타이어를 사용했다. 결과는 1위였다. 던롭의 타이어를 사용한 2위 선수와 9시간 정도의 차이를 기록했다. 타이어 수리 시간이 짧아 격차를 크게 벌릴 수 있었다.
1891년 미쉐린 타이어의 우수성을 입증한 샤를 테롱 우승 기념 타일 (출처: Michelin)
이후 샤를 테롱 선수의 명성과 함께 미쉐린의 기업 이미지도 상승했다. 매년 우승을 원하는 사이클 선수가 약 1,000명 이상 미쉐린 공장을 찾아왔다. 물론 매출도 올라갔다. 이로써 미쉐린 형제는 가업으로 상속받은 공장의 파산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독창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미쉐린 형제가 만든 제품은 기존 던롭 공기압 타이어의 아류작이라 목소리를 높였다. 얼마 후 자전거와 경차에만 적용된 던롭의 특허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냈다.
자전거를 넘어 자동차로
그들은 파리-브레스트 자전거 레이스에 함께 참가했던 푸조 타입 3 쿼드리사이클(Peugeot Type 3 Quadricycle)과 같은 자동차에서 해답을 얻었다. ‘경차보다 무거운 자동차 타이어라면 기존 특허를 벗어날 수 있어!’ 이런 생각으로 세 대의 타이어 테스트용 자동차를 제작했다. 자전가나 경차보다 무거운 하중을 견딜 수 있는 타이어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수백 번의 타이어 테스트 주행 중 시험용 차 두 대는 파손됐다.
탈착식 공기압 타이어를 채용한 최초의 자동차 '번개' (출처: Michelin)
다행히 한 대가 살아남았다. 보트용 다임러 4마력 엔진과 푸조 섀시 등으로 제작한 차였다. 사람들은 그 차를 ‘번개’(L'Éclair)라 불렀다. 지그재그로 빠르게 달리는 모습에 생긴 애칭이었다. 수백 번의 시도 끝에 그들이 원하던 자동차용 공기압 타이어가 완성됐다. 이때쯤 세계 최초 자동차 레이스가 준비 중이었다. 100시간 안에 파리에서 보르도를 돌아오는 1,178km 장거리 레이스였다. 미쉐린 형제가 만든 새로운 타이어를 뽐낼 절호의 기회였다.
드디어 1895년 6월 파리-보르도-파리 경주 대회가 개최됐다. 초기 자동차 시대답게 증기, 전기, 석유 등으로 달리는 자동차 30대가 참가했다. 그 중 미쉐린 형제는 참가번호 46번을 달고 21번째 출발선에 섰다. 그들의 자동차 ‘미쉐린의 번개’(L'Éclair of Michelin)는 다른 레이스 카와 다른 목적이 있었다. 세계 최초로 차량용 탈착식 공기압 타이어를 장착한 자동차로 공식적인 기록이 필요했다. 또한 그 타이어의 우수성을 대중에게 알리고 싶었다. 이런 이유로 그들에게 순위는 목표가 아니었다.
1895년 파리 보르도 파리 경주 대회에 참가한 미쉐린의 번개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제한 시간 100시간을 초과했지만 중도 포기하지 않고 완주한 것이 커다란 의미였다. 주행 중 타이어가 22번 파손됐지만 빠르게 고쳐 다시 달렸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달린 마라토너 같은 모습에 대중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미쉐린 형제의 이름을 자동차 업계에 처음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미쉐린 탈착식 공기압 타이어는 여러 메이커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수익이 늘어날수록 미쉐린 형제는 자동차가 만들어내는 사회, 문화의 가치를 높이려 노력했다.
사회를 위한 지속적인 혁신
그런 생각으로 미쉐린 형제는 도로 표지판 제작 설치하는 사회적 사업을 시작했다. 운전자의 편의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또한 미쉐린 맨과 미슐랭 가이드를 만들어 친숙한 기업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수익이 생기지 않는 사업이라도 사회에 이로운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1898년 마리우스 로시용이 그린 미슐랭 맨의 스케치 (출처: Michelin)
1946년 ‘래디얼 타이어’도 그런 아이디어로 세상에 나왔다. 타이어 코드가 원주 방향에 직각으로 배열돼 가벼워졌다. 이로써 30% 상향된 내구성과 연비 그리고 주행 안정성까지 끌어낼 수 있었다. 이 타이어가 가진 우수성으로 인해 업계에 불만이 터져 나왔다. 타이어 교체 주기가 길어져 판매량 감소로 이어지리라는 우려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래디얼 타이어와 원주 방향으로 직각으로 배열된 타이어 코드 (출처: Michelin)
당시 대부분의 고객은 기존 바이어스 타이어보다 가볍고 우수한 성능의 래디얼 타이어를 찾았다. 미쉐린의 판매 전략 즉 ‘혁신을 통한 새로운 시장 개척’이 옳았던 것이었다. 현재 95%의 자동차가 래디얼 타이어를 사용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자전거·자동차용 공기압 타이어, 래디얼 타이어 등을 제외하고도 미쉐린의 혁신적인 제품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카본을 제거해 환경을 위한 그린 타이어, 튜브리스 타이어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미쉐린은 제로탄소 시대에 발맞춰 공기가 필요 없는 업티스(Uptis)란 제품도 개발했다.
공기주입이 필요없는 에어리스 업티스 타이어 (출처: Michelin)
미쉐린은 이 타이어로 20% 정도의 타이어 폐기물 발생률을 낮추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2024년까지 기존 타이어를 100% 재활용해 업티스 타이어를 제공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처럼 미쉐린은 대중과 환경을 위한 혁신을 이어나가는 기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글 윤영준 (자동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