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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만원 현상공모>
2022년 제7회 신인문학상
제7회 신인문학상 심사과정
•원고마감 : 2022년 3월 31일
•응모편수
- 시 부 문 : 167명 응모(작품편수 852편)
- 에세이부문 : 48명 응모(작품편수 139편)
- 평 론 부 문 : 3명 응모(작품편수 3편)
『시와산문』 신인문학상 부문별 예심
•예심일자 : 2022년 4월 12(화) AM 11시
•예심 심사위원
- 시 부 문 : 이현애, 김영자, 김양숙, 김명아
- 에세이부문 : 주병오, 이은숙
- 평 론 부 문 : 황정산, 장병환
〈예심 통과작〉
- 시 부 문 : 김현철, 「606호 살바르산」 외 26명
- 에세이부문 : 강현욱, 「자신 안에 깃든 희망이라는 신」 외 8명
- 평 론 부 문 : 예심통과작 없음.
『시와산문』 신인문학상 부문별 본심
•본심일자 : 2022년 4월 14일 AM 11시
•본심 심사위원
- 시 부 문 : 황정산, 장병환
- 에세이부문 : 김금용
〈본심결과 당선작〉
- 시 부 문
대수상(1명) _김미연, 「잉여의 습관」 외 2편
우수작(3명) _강신명, 「무유無有의 방」 외 1편
양우정, 「스모킹 건」 외 1편
김 우(김현철), 「돌아오지 않는 슬픔의 갯수」 외 1편
- 에세이부문
대상상(1명) _장철호, 「카세트 라디오의 시간 여행」
우수작(2명) _송다은, 「여신들에게」
_배혜정, 「동화 같은 촛불」
<2022년 제7회 『시와산문』 신인문학상 시부문 예심평>
문학사에 기록되는 한 페이지를 위하여
코로나19 팬데믹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다 지구촌 환경이 암울로 둘러싸여 있는 어수선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모전에 응모했다. 사람들이 시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시작詩作을 해서 공모에 응한다는 것은 상황적 절박감 속에서도 출구가 있다는 희망이다. 출구를 지켜나가는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응모해 주신 여러분들에게 우선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문학이란 시대적인 상황과 무관할 수만은 없다. 그러므로 문학인은 어려운 현실을 감당해야 하고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이 책무인 것이다. 얼마 전 대형서점에 들렀다가 점점 더 구석으로 몰리는 초라해진 시집 코너를 보면서 시의 현주소를 들킨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시인들은 무엇이 삶의 진실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 끊임없이 시를 쓴다.
올해 공모전에 응모된 작품 수는 총 218명의 994편이며 시의 경우 167명의 852편의 시가 전국적으로 고르게 투고되었다. 심지어 독일, 영국, 뉴질랜드, 캐나다 등 해외 여러 나라에서 응모해 주셔서 상기된 마음으로 예심에 임했다. 응모된 작품들을 살펴보면 소재의 다채로움과 기법의 다양성을 가지고 내면의 자아를 날카롭게 응시하는 수준 높은 작품들이 많아서 선자의 입장에서 행복했다. 앞으로 문단에 활력을 불어넣을 저력 있는 신인들이 대거 문을 두드렸다고 본다. 공모전을 시행하면서 신인들에게 기대하게 되는 요건은 얼마나 오래 시단에 살아남을 것인가이다. 이를 위해선 열정을 가진 지속적인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과 자신감을 담보하는 개성적인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즉 주제가 선명하고 사유의 깊이를 지니며 통찰력이 예리하고 긴장감 넘치는 작품을 형상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본심에 올린 작품들은 이러한 요건에 가까운 가능성을 지닌 작품들이다. 선자들은 응모된 작품들이 구사하고 있는 언어의 참신성과 소재의 독창성 그리고 일관되게 주제를 이끌어가는 작품성에 관심을 가지고 상상력과 시적 언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미래의 시가 어떻게 다가올 것인지 가늠해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선자들은 공모전의 취지에 맞게 총체적인 삶의 진실을 추구한 참신성, 당돌한 감각과 정서를 끌어내는 실험성, 시적 형성력이 높은 완결성을 위주로 쓴 작품들을 당선의 가능성에 기대를 두어 본심에 올렸다. 본심에 올린 작품들은 김현철의 「606호 살바르산」, 강신명의 「드라이아이스가 녹는 방식」, 양우정의 「을지로 어느 저녁」, 서은석의 「낡은 몸을 부치다」, 박누리의 「숨의 봄」, 손양지의 「거리낄 것 없는 산책」, 여주찬의 「발자국의 해변」등 총 27명의 작품을 본심에 올렸다.
응모된 한 편 한 편의 작품들은 당락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문학사의 소중한 자산이자 희망이다. 응모된 작품들을 읽는 동안 다수의 작품들은 오랜 습작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면서 이들이 가졌을 반복되는 회의와 뼈를 깎는 고통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그들에게 우선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한다.
가끔 머지않은 미래에는 알파고가 시를 쓰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저력 있는 많은 신인들이 시의 문을 두드리는 것을 보면서 여전히 출구가 있다는 희망적인 말을 전하고 싶다.
문학의 저변을 넓혀가고자 열정을 가지고 응모한 신인들의 옥고가 최종심에서 발견되어 당선이라는 기쁨이 전해지길 기대해 본다. 그리고 당선의 선을 넘지 못한 분들은 더욱 분발하시어 내년을 기약하시기 바란다. 본심에 뽑힌 당선자들과는 좋은 작품으로 지면에서 만나길 희망한다.
_ 예심 심사위원: 이현애 김영자 김양숙 김명아
<2022년 제7회 『시와산문』 신인문학상 에세이부문 예심평>
수필, 어떻게 쓸 것인가?
비록 그 어원은 다르나 오늘날에는 수필을 산문散文, 영어로는 에세이라고도 하며, 흔히들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 하는데, 리듬이나 운율 등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쓴 산문 형식의 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필은 글쓴이의 생활 태도, 인생관과 세계관 및 개성과 인간성 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문학입니다. 그러므로 수필에는 자기 점검 및 반성이 내재되어 있는데 김태길 교수 같은 이는 “솔직함은 좋은 수필을 쓰기에 가장 긴요한 덕성이다”라고 하면서 수필을 일상생활의 한 주제에서 삶의 사색적 철학적 차원의 문제로 이끌어갈 수 있는 글로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수필을 쓰는 데 있어 비유와 상징이 소홀하였다면 수필의 색깔이 퇴색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피천득 교수는 그의 주옥같은 명저 중 하나인 「수필」에서 “수필은 청자靑瓷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조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라고 함축적 비유를 통해 수필의 진수眞髓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심오한 지성과 품격이 내포되어있는 이 글을 읽노라면 향기로운 인생길을 산책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계간 「시와산문」이 유능한 문학 작가 발굴을 위하여 공고한 신인문학상 공모 에세이 부문에는 48명의 인재가 총 139편의 수필을 응모하였습니다. 대체로 열정 어린 작품들이었습니다만 아직도 우리 문학계에서 수필이라고 하면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 너무 쉽게 보는 경향이 없지 않아서 수작秀作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예심에서는 강현욱의 「자신 안에 깃든 희망이라는 신」, 송다은의 「기술에 대하여」, 김덕진의 「물성망대 가는 길」, 이희숙의 「아들의 마지막 선물」, 김선녀 의 「내 사랑 책갈피」, 장철호의 「갈라타 다리에서 다시 만난 손」, 김갑수의 「돌부처들」, 배혜정의 「동화 같은 촛불」, 황정식의 「내 삶을 변화시킨 말」 등 아홉 사람이 선출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윤여정의 「줄탁동시」, 구명주의 「5월에 어떤 만남」, 안태선의 「늙지 않는 꿈」, 조승희의 「내가 사랑하는 생활」 등도 눈에 띄는 작품이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작가의 꿈을 이룬다는 것은 또 하나에 뜻있는 나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요 문학과 혼인하는 것입니다. 모쪼록 많은 독서량과 사색을 통한 습작을 생활화하여 좋은 작품을 발표하시기 바랍니다.
_ 예심 심사위원: 주병오 이은숙
<2022년 제7회 『시와산문』 신인문학상 시부문 본심평>
진지한 사색과 새로운 언어탐색
이번 『시와산문』 신인상 시 부문에는 예년에 비해 많은 예비 시인들이 참가했다. 200명이 넘은 투고자에 투고된 작품만 1,000여 편에 달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회적 활동이 줄고 반면 자기만의 사색과 창작활동에 투여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서가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그간 우리 『시와산문』의 신인상을 통해 많은 좋은 시인들이 발굴된 성과가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이 아닌가 자랑스러운 생각이 든다.
투고 수가 많아서인지 작품의 수준도 이전보다 훨씬 뛰어났다.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고 또 출품작이 많아 예심 심사위원들이 많은 고생을 했다. 그래서인지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도 이전의 심사 때와 달리 훨씬 많은 27명의 예비 시인 작품 130여 편이었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이 많아 각각에 대해 언급하기는 곤란하나 우리 사회의 현실과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은 작품이 많아졌다. 시창작 교실 같은 데서 배운 표현 기교의 무비판적 답습이나 언어의 유희에 치중하는 작품이 줄어들고 진지한 사색과 새로운 언어에 대한 탐색을 보여 주는 작품이 많아진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예심을 통해 본심에 넘어온 응모작이 많아 심사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고 또 많이 고민하게 되었지만, 심사위원들은 김미연의 「잉여의 습관」을 대상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쉽게 합의했다. 그만큼 작품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김미연의 작품은 우리의 일상에서 때때로 확인되고 있는 삶의 슬픔과 허무를 예리한 시선으로 잡아내어 감각적인 언어로 잘 표현해내고 있다. 오랜 습작 기간을 거치면서 자기 나름의 시적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전도유망한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외에도 세 명의 시인을 우수상 당선자로 선정했다. 김우의 「돌아오지 않는 슬픔의 갯수」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환경 파괴 현장을 고발하는 주제의식이 돋보였다. 하지만 좀 더 시적 표현이 다듬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양우정의 「스모킹 건」은 ‘위험사회’라는 신조어가 있을 만큼 우리의 삶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삶의 위험성을 긴장된 언어로 잘 표현한 작품이다. 다만 시에서 쓰인 이미지 간의 유기적 연결이 조금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강신명의 「무유의 방」은 거침없는 시상의 전개는 좋았으나 호흡이 긴 산문형의 연들에서 다소 시상의 흐름이 끊기는 약점이 있었다.
이 네 분 시인의 당선을 축하드린다. 모두 우리 『시와산문』의 발전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들이리라 기대된다.
_ 시부문 본심 심사위원: 황정산 장병환
<2022년 제7회 『시와산문』 신인문학상 에세이부문 본심평>
탄탄한 구성과 소외된 사물에 대한 사랑
본심에 올라온 예심통과자 9명의 후보작은 모두 수준이 상당해서 놀라웠다. 여러 잡지나 백일장 등을 통해 접해왔던 산문 수준이 아니었다. 수필의 기본작법대로 “붓 가는 대로, 생각한 대로, 느낀 대로,”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자기 감상이 주제가 되는 대부분의 산문 속에서 예심통과자 9명의 작품들은 소외된 사물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나만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삶에 대한 관찰과 그 철학적 깊이를 보여 주었다고 본다.
대상으로 장철호님의 「카세트 라디오의 시간여행」 외 2편을, 우수작으로 송다은의 「기술에 관하여」 외 2편과 배혜정의「동화 같은 촛불」 외 2편을, 심사위원 모두의 합의로 선정했다.
이 중 대상작인 「카세트 라디오의 시간여행」은 AI(인공지능) 시대에 쓸모없어진 카세트 라디오를 소재로 아버지에 이어 할머니까지 무너질 수 없는 가족 관계, 진정성 있는 삶의 가치를 일깨우는 전개를 보여 준 점이 새로워 눈길을 끌었다. 아버지의 낡은 유품인 카세트 라디오가 삼대에 이어 두 자식에게까지 “사랑은 세대를 연결하는 고리”로 소통됨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우수작을 받은 송다은의 작품 3편은 논문을 쓴 듯 논리정연한데, 그 중 특히 「여신들에게」에서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곡해를 성녀, 하녀, 마녀로 분류하여 논리적인 비판의 힘이 돋보였다. 시사성 있는 주제를 다룬 송다은님의 짧고도 굵은 목소리는 내용대로 여신의 원형인 힘이 느껴져 좋았다.
이어 배혜정님의 「동화 같은 촛불」 외 2편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희망 하나를 품고 지내는 젊은 시절의 만남을 회상하며 오늘의 나태함을 자책하는 글이 잔잔한 울림을 주었다.
비록 이번에 수상은 못 하였지만, 김덕진, 김갑수, 강현욱, 이희숙, 김선녀, 황정식님의 산문들도 서정성과 개성이 돋보이는 글이 많았다. 특히 강현욱님의 글은 1인칭 소설 작법으로 의식의 흐름을 따라 나’를 ‘나’밖에서 들여다보는 서술방식이 호기심을 갖고 문맥을 따라 읽는 즐거움을 주었다. 김갑수님의 「돌부처」 작품도 역사성이 있어 관심 깊게 읽었다. 그 외에도 김덕진, 이희숙, 김선녀, 황정식님의 글에서 일상의 소소한 느낌을 수미상관식으로 엮어낸 구성 등은 기초가 단단함을 느끼게 했다. 단 너무 교훈적인 표현이나 기행문으로만 치우치는 것은 피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내년에는 이분들도 이어 수상하게 되는 영광이 있기를 바란다.
_ 에세이부문 본심 심사위원: 김금용 (시인, 『현대시학』 주간)
<시부문 대상>
잉여의 습관 외 2편
김미연
민낯은 육각일 수도, 아니면 팔각일 수도 있겠다.
산업단지 안의 다수의 포도알은 상냥하지.
햇살 무더기가 반지하의 작은 창안으로 후두둑 쏟아진다.
그럼에도
축축한 방안에 갇힌 나의 살갗에
끊임없이 비늘이 잉태되는 건
습생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탓인거야.
까만 비닐봉지 안에 밀봉된 그 날의 저녁 공기.
전자렌지 3분의 규칙에 감금된 빈곤은
이번 생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매번 편의점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초록의 소주병을 타고
녹슨 노동의 서사는 비릿한 골목길에 너저분하게 배열되는 중이지.
취한 피는 맹렬히 몸 안을 배회하며 증폭되고
썩은 고기를 삼킨 하이애나처럼 더부룩한 삶은 계속되고 있어.
정형과 부정형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
나의 중심축이 길을 잃고 좌우로 절뚝이는 삶을 버티는 것처럼
비틀어진 입술에서 내뱉는 단어가 조악하게 열지어 서 있는
문장 속으로 생의 보푸라기가 여기저기 돋아난다.
골목에 떠도는 파편들이 떠돌다 끝내 나의 어깨에 닿자,
곤궁에 포자된 습관을 손에 움켜쥔 채로 생을 내달린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은 잉여의 텅 빈 자리를 다시금 채우는 일일 것이다.
우리의 방주
외로운 무리들이 서로를 호명하며 텅 빈 자궁을 지나요
누구의 잘못이 모두의 잘못은 아니에요.
내 하루는 당신보다 앞섰지만 나는 당신보다 높진 않죠
당신은 왜 이리 부적절한가요?
뱀의 허물이 벗어놓은 것은 의 이력
나의 끈적한 붉은 혈관들이 점멸해가는 풍경을 들여다봐요
추억하는 것들은 항상 내 테두리를 잘라먹는 것만 같아요
전례 없던 파격은 엎질러져 있거나 생채기를 내기 일쑤죠.
그리고 그것은 나의 오리지널을 버리는 것
근육을 가진 나무가 새순을 혼내키는 장면이 끝나면
언니와 나는 당신 앞에서 껍데기를 잃어요.
텅 빈 목소리를 사이좋게 나누어 먹고 나서
빈 공간속으로 우리의 목소리를 한 웅큼 집어넣었어요.
결국, 빈 것 안에 빈 것이 수두룩하죠.
당신의 심장이 언니와 나의 방주가 되어준다면
어쩌면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있을 거예요.
베텔게우스Betelgeuse*를 잃다.
태양을 건드리는 게 아니었어.
뒤바뀐 지평선이 내 눈꺼풀 위에서 흘러내리기 때문이지.
저기 초신성의 미로를 찾아봐
저 벨트의 수풀을 들춰보면 세 명의 마리아가
거룩한 기도를 하며 공전하고 있어.
언제든 다시 돌아오려무나.
너의 계절을 쓰러뜨리러 오는 전갈의 독 속에
견줄만한 행성은 모두 겨울의 숲에 갇혀있으므로.
독소에 녹아내리는 척수를 껴안는 달빛
저기 여인과 나의 소실점에 표식을 세워두자.
잃어버리지 않도록 말이야.
잃어버린 행성의 파편이 궤도를 떠돌다
테두리에 갇힌 불빛과 함께 공멸해 가는 시간.
비대칭인 얼굴을 달빛에 헹구고
뒤틀린 궤도에서 빙하를 캐자.
그래, 그렇게 나는 눈의 장막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여인의 활은 얼어붙은 채로 나를 겨누겠지
번식된 여인의 달빛이
궤도 밖에서 포란 된다.
파문된 성직자의 언어처럼
도륙된 나의 행성도
마침내 으깨질 테니.
그리고, 섬광의 덫처럼 아름다울 너의 종말을 위하여.
*
베텔게우스-오리온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로 곧 수명을 다할 것이라고 천문학자들은 예견하고 있다.
견딤의 시간, 그리고 쓰일 기회
글쓰기를 시작한 지 일 년 남짓, 시를 쓰며 저의 모든 감각이 언어를 만나 스스로를 치유하며 견디고 위로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견딤이 쓰임을 결정한다’라는 정호승 시인의 말씀처럼 견딤의 시간이 쓰일 기회가 저에게로 와 주었습니다.
글을 쓰며 견뎌온 시간들이 쌓여 제 글을 읽는 분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각지도 못한 등단 소식에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게 사실입니다. 시인이라는 무게의 중압감을 잘 견뎌내고 열심히 배워나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매일을 견디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시를 짓고 싶습니다.
저의 시적 쓰임을 허락해 주신 시와 산문 관계자 여러분, 심사위원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시적 상상력을 키우는데 유년 시절의 풍요로운 기억을 선사해 주신 저의 부모님, 글 쓰는 저를 지지하고 응원해 준 남편과 딸 수민이와 당선의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시부문 우수상>
무유無有의 방 외 1편
강신명
시간 더미 속 죽음이 수북이 쏟아져 나온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겨울 철새로 날다 너 닮은 가지 끝에 매달려 너를 탐닉하는 일 손길 닿지 않는 것들은 이미 부재로부터 빠져나와 죽어있던 나의 안부, 조롱에 갇힌
죽음을 한 장씩 찢는다 바람 소리로 돌아오는 따옴표들
흐린 눈빛 감추며 돌아선 너의 심장을 수배하며 머문 뼛속까지 서걱대는 외길 떠도는 먼지가 모든 죽음의 결정체라면 새벽은 동쪽으로 머리를 누이지 말았어야 했다 말라붙은 솜털에 입술을 대본다 채 태우지 못한 표정 뒤로 마지막 눈물 한 방울 배인 내가 보는 세상은 너의 꿈일지도 몰라
죽음을 한 장씩 찢었다 바람 소리로 지워지는 물음표들
어둠 붉은 밤에는 피톨 너머 저장된 빛이 한동안 숨을 끌고 갔다 귓불에 바짝 붙은 바람 속살거리면 풀렸던 동공이 땅을 딛고 말을 건넸다 구름 덮인 수면 헤치며 침잠하는 꽃잎들 모든 끝은 소리가 매듭을 짓는다 얼룩진 혼잣말이 빈방 삼키기 전 너를 놓아줄게 피멍 들어 떨어져 나간 발톱 밑 새살 돋는 건 꿈이 아니라서
틈새에서 온전히 죽지 못해 엎드려 울던 언어들아
이젠 내 머리 위 햇살이 될 것
너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것
아몬드 나무를 지나는 시간
1.
아몬드를 씹습니다
오도독오도독 상처 난 기억을
빈틈없이 조각냅니다
멀미하는 해마를 돌아 잘린 통증이
수면 아래로 사라집니다
아프다고 비명을 지를 법도 한데
살점이 뜯겨도 무감각합니다
돌을 던지고 흔들어도 소리 없이
차오르는 호수와 같습니다
하얀 꽃망울 다져 움츠린 시간 견딘
흔적 위로 환절의 방식이 적힌
이정표가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2.
아몬드는 부서질수록 빛납니다
황토색 주름진 껍질은 아픈 배 쓰다듬던
노모의 손마디 같기도 합니다
별빛 담긴 술잔에 시름 걸친 청춘이
잠꼬대로 밤을 털어내는 길목
멀찍이 돌아서서 지켜보는 아버지의
젖은 헛기침 소리도 들립니다
잊혀진 노래는 손때 묻은 이빨 자국이
선명할수록 정담으로 끈끈해집니다
가파른 저녁 지나 접시에 담긴
수많은 웃음과 울음이 밤새 뒤척이는
그림자를 보듬고 있습니다
3.
아몬드는 아몬드의 방식을 믿습니다
약속으로 번성한 아몬드의 속살
마주 보며 뜨겁게 고이던 길은
시간이 되새김질한 또 다른 이름일까요
세찬 물살에 길들여진 모든 감각이
아몬드의 여정을 따라갑니다
반쯤 잘린 아몬드를 들여다봅니다
여과된 어둠이 총총 박혀 있습니다
이타적 습성이 배인 안쪽을 깨물면
말갛게 씻은 모서리가 창문을 엽니다
빛바랜 발자국 솎아낸 고랑 따라
오도독오도독 달아오른
아몬드가 아몬드를 받아 적습니다
4.
단단한 것들은 슬픔에 익숙합니다
까끌한 통증에 목이 메지만
서로를 부축해서 얼룩을 지웁니다
궤적 검게 응어리진 자리 박차고
은하계를 도는 아몬드의 꿈
열꽃이 남긴 지문 속 동그란 입술로
나란히 베어 문 아몬드는
어제만큼의 오늘이 빈방을 꽉 채울
오래 기다린 걸음의 정면입니다
오도독오도독 오도독
새벽 쏟아지는, 울창해지는, 타올라 깨무는,
대가 없는 다정입니다
절박한 화두에 순응하고 일어서게 한 힘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상실이 분명하지 않은 시절을 보내면서 삶과 죽음은 머리맡에 놓아둔 책이며 펼치지 않아도 넘어가는 페이지임을 안다는 것은 곧 어른이 되어가는 시작이었지요. 죽음 뒤에 남은 사람들이 거미줄처럼 얽힌 고통의 매듭을 푸는 것이 삶이라면 절박한 화두에 순응하고 일어서게 한 힘은 바로 학창 시절 릴케나 하이네의 시집을 손에 쥔 채 멀찍이 바라보던 시의 정원이었습니다.
정원 한 귀퉁이 혼자 울 수 있는 방 그곳은 누구든 머물 수 있는 치유의 숲입니다. 세월의 흔적을 안고 출발점에 선 지금 저는 무척 두렵지만 속엣말을 멈추진 않을 것입니다. 맑게 흐르는 시냇물에 지친 발을 도란거리며 아름다운 꿈을 함께 꾸기를 소망합니다.
이 모든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먼 곳에서 자신이 못다 이룬 꿈 대신 잘 해냈다고 손뼉 치고 있을 누구보다 시를 사랑하고 가장 가까이서 시의 세계를 깨우쳐 준 한 사람, 그대가 남긴 시와 또한 너무나 소중했던 이들 단 한 번만이라도 더 하고 싶었던 말들…. 보고 싶습니다. 내 삶의 이유가 되어준 우리 아이들 고맙다. 사랑한다. 앞으로도 열심히 진심을 다해 살자. 그리고 추억 속 벽에 걸렸던 카라얀처럼 삶을 조율하는 오빠, 고맙고, 존경해요.
감사한 마음을 전해야 할 분들이 많습니다. 시의 길에 초석을 놓아주신 최정신 시인님을 비롯하여 이명윤 시인님, 김부회 시인님, 귀한 가르침 고맙습니다. 시마을의 여러 문우님과도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계간 『시와산문』 심사위원 선생님, 제 작은 손을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달아주신 날개가 녹슬지 않게 투명한 빛으로 채우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눈물을 닦아주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일일이 거론하진 못하지만,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해 주신 모든 분께 거듭 사랑과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스모킹 건 외 1편
양우정
배후를 밝혀내기 전
빗나간 의도가 명치 끝을 스칠 때
눈알이 허공을 훑다 깜빡이는 찰나의 순간을 조심해
가령
조심스럽게 뒤꿈치를 들고 나가려다 새장 속 새를 보거나
팔레트 속 굳어버린 색색의 초상화를 발견할 때
눈을 마주치지 마!
새가 눈을 쪼거나
초상화가 말을 걸어올지 모르니까
그럴 때
목을 빼고 넣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 알게 될 거야
치킨게임을 좋아한다고 했었지
바깥은 안보다 늘 시끄럽다는
시차 때문이라던 너의 말
그렇다고 운을 믿지는 마!
뫼비우스의 띠는
한번은 벗어나지만 두 번째는 제자리니까
풀과 나무는 더는 너를 읽지 않아
부푼 페달을 밟는
질긴 혐오는 위험하다는 신호일 수 있으니까
연기가 코앞에서 사라지기 전
위험한 자작극임을 자백하라던 말
기억하지
활자의 근황 따위 관심 없다던 네가
소문이 무성한 활자가 되어버릴지도 모르니까
브리핑룸을 지나지 말라는 경고
잊은 건 아니겠지
확률 게임 속
블랙박스는 언제나 웃고 있다는 것
잊지 마
이발소 있는 풍경
산자락이 등을 댄 사람들을 품어주는
하늘과 맞닿은 동네
달이 꿈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골목으로
무럭무럭 늙는 이발소가 있다
면도칼의 팽팽한 칼 선 사이로 숨어든
봄 햇살이 깜박 조는 이발소엔
언제나 고집스럽게 다이알 비누 냄새가 난다
베어지지 않으면 날아오를 수 없는
단서조차 없는 세상의 경계를 지우느라
뾰족뾰족해진 날개들
어두운 저녁으로 날아들 때쯤
또 하나의 달이 되는 삼색 네온
알전구처럼 빛나다 사라진
좀체 읽히지 않는 먼 기억의 숲
한 올 한 올 감별해내는 이발사 손끝에
밤보다 더 깊이 뿌리내린
오래된 골목 푸른 발목 위로
접혀있던 푸념들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른다
담장 아래 실금의 거울 안
버려진 화분 위로 밑동이 실한 푸른 잎이
밀랍의 골목을 탁본하고
새벽어둠이 걷힌 골목이 다 들어간 거울 속
어떤 봄 밭보다 따뜻하다
골목은 숲의 습성을 닮아가는 중이다
진심이 담긴 글을 쓰기 위해…
위안을 찾으려고 시작한 일이
덤으로 큰 영광을 얻게 되어 몸들 바를 모르겠습니다.
고립과 단절의 이야기들 그 향을 입히던
보잘것없고 조촐한 식탁을 환하게 만들어주신
계간 『시와산문』과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더없이 감사한 마음 놓아 드립니다.
진심이 담긴 글을 쓰기 위해 지치지 않고 끝없이 정진하겠습니다
시의 끈을 놓치지 않게 대문을 늘 열어주신
시마을 문우님들과 이 기쁨 나누고 싶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슬픔의 갯수 외 1편
- 안락사
김 우(김현철)
파르르, 몇 그램 치사량에 점령당해 축생의 습관을 내려놓는 송곳니,
듬성듬성 머리카락 빠진 마을 입구에는 떠나지 못하는 유년이 엎질러진다
잘 길러진 휘파람을 끼우던 청각이 먼저 자리를 뜨고 판자촌 헐렁한 쇄골 아래
갇힌 달빛, 조등처럼 창백하다 검은 콘크리트 가루를 상복으로 입은 바람만
조문객 없는 빈소를 지킨다
오래된 느티나무 그늘까지 휘감던 왁자지껄은 사라진 지 오래
면사무소 서류에 찍힌 지문들, 하나 둘 사라진다
허리가 구부정한 도시의 그림자는
미소를 닫았고 신생아 울음소리도 바람을 등진 이명일 수밖에
굴착기로 파헤쳐진 키 낮은 마을의 민낯은
마지막 속옷 같은 수줍음을 띠다가도 철거민의 한숨이 잠긴 아쉬운 동거가 되고
어둠을 먹으면 다시 시치미를 삼킨 석장승이 된다
창공에서 두 팔 벌린 타워크레인이 마을의 내장을 후비기 시작하면
소꿉장난 같은 집 주인들의 허락 아닌 허락된 지문을 빌어 시작되는 안락사,
크레인의 촉수가 땅속 깊이 박힌 느티나무의 심장에 가까워질수록
돌아오지 않는 슬픔을 삼킨 휘파람 소리는 멀어져 갔다
천둥 같은 초침 소리가 저승 입구를 서성이고
밤하늘 저편 주삿바늘 같은 삭정이가 날카롭게 파고들자
황혼의 스러지는 잔불을 따라 호흡마저 부러진 도시, 서서히 눈을 감는다
손님 하나 없는 동네 앞 편의점 티비에서는
주택시장 안정을 위해 신도시 개발을 확대하겠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학계 뜨거운 관심이 쏟아졌다
- 외치*
보이세요 엄마 검은 하늘이 수상해요
두드리지도 않았는데 물길이 열려요 아세요? 오래전 엄마의 부드러운 전설을
빨 때마다 노래가 들렸어요
누군가 거대한, 이라고 외치자 일제히 물구나무서던 잿빛 산
끝내 갇혀버린 나의 마지막 잠
바위를 깨물어본 적 있나요 그때는 꼭 맨발이어야 하죠
어깨처럼 반쯤 흘러내린, 비와 바람은 제발 놔두세요 아니 아니 멧돼지 말고요
그렇다고 소리의 지느러미를 꺼내 먹진 않잖아요
보이세요 엄마 산이 헤엄쳐요 사냥감을 풀 위에 내려놓고 물 밑에 장대를 담그면 거기,
범선처럼 거대한 주파수가 꼬리쳐요 그날 반쯤 마른 토기 안에 별들이 수북했어요
밤하늘을 헤엄치던 어골문* 지느러미 달린 검은 산
호랑이, 사슴, 멧돼지는 알죠 바위 속에도 오솔길이 있다는 걸
호피를 두른 아이가 벽을 열고 집으로 가요 시간을 닫으면 안쪽에 커다란
바다가 있어요 고래 등에 올라탄 작은 발가락은 넓적한 휴식이에요
따뜻한 바람, 처음 보는 곤충들, 애벌레 등에 업혀 조금씩 기어가는 햇살
눈썹과 턱이 과묵한 나뭇잎으로 음부를 가린 여자가 노래에 흙을 버무려요
늑대 울음이 돌아올 시간, 토기를 만들까요 그늘에서 잘 말리면
타잔의 함성을 담아두기 딱이죠 눈을 감고 물, 하면 담수가 되는 들판
올리브나무가 가오리처럼 날아올라요 지난밤 내 안으로 추락한 해안선
모래펄이 넘실대요 몰랐어요? 내 꿈이 추장이라는 걸
깔.깔.깔
새순 같은 웃음이 앞니 빠진 설탕보다 달아요
이런! 돌도끼가 몰려와요 언덕을 재빨리 부위별로 나눠요
암각화를 믿지 않는 엄마가 보여요 짐승 가죽을 입고 사라진 아이를 찾아
매머드보다 느린 속도로 유영하는 엄마
- 머리맡에 피리를 둘게요
그날 우리는 사슴을 덮고 모닥불을 피웠어요 곡물과 순록을 먹었죠
들판에서 아버지가 주신 마른 늑대를 입고 잠깐 눈을 붙였을 거예요
나는 대체 얼마 동안 잠을 잔 걸까요
바람이 도착했어요 일만 년 전 들판을 가로질러 내게
이젠 눈을 감지 않아도 달이 뜨는 엄마, 내 정강이에서 피리 소리 들려요
- 어제는 내 눈알 속으로 바오바브나무 씨앗이 이사를 왔어요
윙- 윙-
가락바퀴에 그날의 졸음이 아직도 실처럼 감겨요
- 이봐, 3지구 발굴 허가 나왔어? 지질조사 결과는?
- 기자 양반, 거기 선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니까! 빨리 나와요.
- 가장 중요한 것은 트라울*이 아닙니다. 제군들의 손이 진짜 발굴 도구죠.
*외치(Oetzi) - 석기시대 미라 이름.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인간미라
*어골문 - 토기 표면에 새긴 물고기의 뼈와 같은 무늬. 빗살무늬
*트라울 - 작은 흙손 형태의 문화재 발굴 도구
서른 번의 가을이 지나간 재회, 그리고 수상 소식
사춘기 때 흠모했던 그녀와 고교 졸업 후 서울로 유학을 오면서 헤어졌어요.
한동안 잊고 살았던 그녀가 주책스럽게 다 늙어서 다시 기억이 나는 거예요. '그녀도 아직 나를 잊지 않았을까?' 몇 번의 망설임 끝에 혹시나 하며 연락을 했는데 다행히도 그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서른 번의 가을이 지나간 재회였음에도 여전히 그녀는 예뻤고 그녀를 보는 순간 제 가슴에는 마른천둥이 수백 수천 번 넘게 쾅쾅거리더군요. 다시는 그녀를 놓칠 수 없음을 알기에,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라도 시간을 쪼개며 그녀와 데이트를 했고, 그녀와 함께 하는 미래의 아름다운 꿈을 꾸었습니다.
하하하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요. ‘그녀를 다시 만난 것만도 운이 좋았다.’ 생각했는데, 그녀가 재회 기념 선물이라면서 “계간 『시와산문』 신인상 수상”이라는 대박을 선물해 주네요. 역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건 저에게는 완전 행운입니다.
그토록 보고 싶은 사람은 눈 안에 넣어야 더 아름답고, 사랑하는 사람은 두 손을 꼭 잡고 구름 위를 걸을 수 있어야 더 행복함을, 다 늙어서 새삼스레 확인 하네요.
끝으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와의 재회에 도움을 주신 ‘시와 건달들’ 문우님들, ‘시시각각 밴드’ 회원님들, 그리고 그녀에게 더욱 우아한 손길이 닿을 수 있도록 까막눈인 저에게 미세한 부분까지 가르쳐 주신 김명희 시인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겨우 그녀를 사랑하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는데, 그 초보 사랑도 사랑이라고 수상작으로 뽑아 주신 고명하신 심사위원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이런 좋은 기회의 장을 마련해 주신 계간 『시와산문』과 장병환 이사장님에게도 심심한 감사를 표합니다.
<에세이부문 대상>
카세트 라디오의 시간 여행
장철호
창고 깊숙한 곳에서 골동품처럼 변해가는 고철 덩어리를 끄집어낸다. 오래된 구식 카세트 라디오. 그 위로 하얗게 덮여 있는 먼지를 불어낸다. 빛바랜 기기의 주파수 표시가 마음을 파고든다. 0과 1 숫자로 표시된 디지털이 아닌 투박한 아날로그의 모습이다. 무심한 듯 코드를 꽂고 주파수를 맞추려고 다이얼을 돌려보았다. 전원은 들어오는데 주파수를 맞춰도 방송이 잘 잡히지 않는다. ‘치이익-치이익-’손가락을 살살 돌려가며 주파수를 찾아가는 과정은 마치 미지의 존재와 컨택을 시도하는 것처럼 비밀스러운 재미가 느껴진다. 그동안 이사를 몇 번이나 다녔는데도 아버지의 카세트 라디오는 한 식구처럼 따라다닌다. 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면 라디오든 음원이든 언제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다. 문명의 이기는 오래된 추억마저도 창고 속으로 꼭꼭 숨겨 버렸다.
닳고 닳은 열림 단추를 누르니 ‘삐거덕’ 입을 내밀듯 낡은 테이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무이’라고 적혀 있는 손때 묻은 테이프다. 너비 10cm, 길이 6.3cm, 높이 1.3cm의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두 개의 원통 릴로 감겨있는 소형 자기 저장매체, 호기심에 테이프 줄을 당겼다가 계속 빠져나오는 바람에 새끼손가락을 넣고 돌리기도 했다. 그것도 안 되면 볼펜이나 젓가락을 구동용 톱니 구멍에 끼워 넣고 돌렸던 기억도 난다. 구멍 뚫린 두 개의 톱니바퀴를 돌리면 테이프의 갈색 줄은 서서히 되감겼다. 아버지는 그런 카세트테이프를 계속해서 되감곤 했다. ‘찌익 찍’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테이프는 신기하게도 아버지의 손길 한 번에 치료가 되었다. 카세트테이프는 본체에 넣을 때마다 어느 방향으로 끼워 넣어야 하는지도 언제나 헷갈렸다. 녹음 방지 탭이 있는 윗부분을 아래로 가게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테이프가 읽히는 부분을 먼저 넣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무작정 쑤셔 넣기도 했다. 이렇게나 번거롭고 복잡한, 다소 성가시기까지 한 카세트 라디오를 아버지는 무척 좋아했다.
나의 손가락은 익숙한 듯 검은색 재생 버튼을 눌렀다. 메케한 냄새와 함께 라디오에선 묵직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지지직거리며 느리게 돌아가는 옛날식 테이프는 삶에 지쳐 늘어진 내 모습 같기도 했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카세트 라디오에서 음치에 박치로 무장한 오래된 아버지의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아버지의 노래는 아무리 똑바로 들어 보려 해도 삐딱했다. 음정과 박자는 무시한 채 옛날 무성 영화의 연사처럼 대사로 일관되는 노래였다.
“아빠 노래 어떻노? 괜찮나?”
“그게 무슨 노래고?”
“아니다. 잘 들어 보거라. 어떤 게 좋노?”
아버지는 노래가 끝이 나면 항상 자신의 노래를 평가해 달라고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들어도 똑같은 걸 어떻게 평가해줘야 할지 나는 늘 난감했다. 깜빡 졸다가 손뼉이라도 쳐 주는 날에는 더욱 신이 나서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안방에는 아버지가 녹음한 테이프로 라면 상자를 한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지간히 노래에 소질이 없었던 아버지는 하루도 노래 부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중학생 시절 아버지는 매일같이 나를 곁에 앉히곤 카세트에 연결된 작은 마이크로 노래를 불렀다. 검은색 재생 버튼과 빨간색 정지 버튼을 동시에 누르면 녹음 기능이 작동했다. 불편한 몸 때문에 녹음 버튼을 누르면서 노래 부르는 것이 힘들었기에 버튼을 누르는 역할은 항상 나의 몫이었다. 아버지의 몸은 유난히 약했고 구부정한 허리와 걸음은 뒤뚱거렸다. 어린 시절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허리를 심하게 다쳤는데 어려운 형편 때문에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다. 결국 성인이 되어서 허리에 병이 재발하고 말았다. 가는 병원마다 가망이 없다고 남은 시간을 편하게 보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가망 없는 아들의 두 손을 놓지 않았다. 산과 들로 돌아다니면서 좋다는 약은 다 찾아서 먹였다. 아버지는 순전히 할머니가 달여준 조약造藥의 힘으로 살아났다고들 했다. 아버지는 새 생명을 얻었지만, 장애를 가진 몸으로 살 수밖엔 없었다. 기적적으로 제2의 인생을 사셨던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했고,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다. 그렇게 좀 살만해지고 아들로서 효도하려던 시절이 오자 야속하게도 할머니는 기억의 테이프를 감아버렸다. 결국 시골의 작은 요양 병원으로 입원했고 아버지는 할머니를 늘 그리워했다.
따뜻하던 날씨가 차가워지고 쌀쌀한 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요양 병원에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를 받으시곤 아버지는 외출을 서둘렀다. 장롱에서 정장을 꺼내고, 특별한 날에만 신는 까만 구두를 닦았다. 읍내에서 택시를 부르고 나와 함께 서둘러 할머니가 계신 곳으로 향했다. 요양 병원 문을 열자 할머니는 누워서 눈만 겨우 뜨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런 할머니 곁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그러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울고 넘는 박달재는 할머니가 노점상을 하면서 입에 달고 불렀던 애창곡 1번이었다. 그런 할머니를 위한 마지막 선물을 계획했던 것이다.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을 녹음하며 불렀던 그 노래를 할머니 곁에서 목청이 떠나가도록 불렀다. 녹음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감고 되감았던 이유를 그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노래는 할머니를 위해 준비한 마지막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음정과 박자는 중요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들의 사랑 노래를 들으며 며칠 후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할머니가 떠난 후 아버지의 카세트 라디오도 멈췄다. 자신의 역할이 끝난 줄 알았는지 하얀 이불을 덮고 자며, 우리가 이사할 때마다 강아지처럼 따라다녔다.
“이제 낡은 물건은 좀 버리세요. 고철이나 다름없는걸.”
어머니는 낡은 카세트 라디오를 보물단지처럼 다루는 아버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할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셨는지도 모른다.
카세트테이프는 기나긴 시간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테이프 톱니바퀴는 두 아이를 둔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를 되감아 놓았다. 아버지가 우리 곁을 떠난 지도 몇 년이나 흘렀는데 라디오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아내 역시 쓰지도 못하는 낡은 카세트 라디오를 버리라고 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할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눈물이 담긴 추억을 떠나보내기 싫었다. 아버지의 기일이 다가오고 있다. 창고 속에서 숨죽여서 기다리던 라디오가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엔 두 아이에게 할아버지의 노래를 들려줄 참이다. 사랑은 세대를 연결하는 고리라고 한다. 두 분의 사랑이 그러했듯 나와 아이들의 연결 고리도 그렇게 엮였으면 좋겠다. 오래전 할머니와의 만남을 준비했던 아버지의 그 마음처럼.
카세트 라디오의 시간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물음표?’의 고리가 펴지는 순간!
아침을 채우는 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졌습니다. 귀를 간지럽히는 커피포트의 휘파람 소리와 언덕배기를 돌아온 이름 모를 들꽃 향기, 꼭 전할 말이 있다는 듯 지저귀는 까치들까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의 아침은 잔잔한 물결처럼 찰랑거렸습니다. 늘 똑같은 풍경, 매일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쩌면 새로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렘은 달콤한 목소리로 한가로운 오후 나무 벤치로 찾아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시와 산문 문학회입니다.”
오랜 기다림에 대한 보상이라는 듯 따스했으며 퍼즐을 다 맞춘 것처럼 후련했습니다. 완벽한 하루는 언제나 걷는 길도 두근거리게 했습니다.
꾸준히 글쓰기를 해 왔지만 정작 꺼내 놓지 못하고 가둬 두었던 길잃은 흔적들이 마침내 가야 할 방향을 찾았습니다. 뿔뿔이 흩어져버린 감성과 낱말 조각들을 건져내면서 숱한 고민을 해야 했던 시간들이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니어서 더욱 기쁩니다. 오랫동안 가슴 한쪽에 자리 잡고 있던 과연? 이라는 물음표의 고리가 이제야 펴지는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는 나의 발걸음을 잡는 것들과 함께하려 합니다. 돌담 틈새에 핀 민들레 한 포기와 꿀벌들의 이유 있는 윙윙거림이 그것입니다. 누군가 던진 돌에 번지는 달무리의 사연과 아이들의 구겨진 신발 속에 숨겨진 것들은 비밀스럽기까지 할 테고요. 작고 사소한 것에서 발견하는 삶의 의미야말로 저의 존재 가치를 더 귀하게 해 줄 것으로 믿습니다.
부족한 작품의 가능성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님들, 시와 산문 관계자 모든 분께도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당선 전화를 받을 때 온몸을 감싸며 흐르던 따뜻했던 치유의 느낌을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항상 아들이 잘되기를 응원해주시는 어머니, 그 어떤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워했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사랑하는 두 아들과 아내에게도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에세이부문 우수상>
여신들에게
송다은
전근대 인류 사회에서 일반 여성이 가질 수 있었던 위치는 성녀, 하녀, 마녀에 국한되었다. 이 중에서 두 가지 속성이 서로 결부되어 나타나기도 했고, 뮤즈는 어느 계층에나 속할 수 있었고, 각 속성마다 하위 호환도 있었지만 큰 틀은 변함없었다.
성녀는 사회에서 여성들이 지향해야 할 일종의 이상적인 여성상이었다. 성녀를 묘사한 그림에서 성녀들은 하나같이 젊고 아름답다. 성녀의 이름을 물려받은 딸들도 많았다. 21세기 기준으로 가톨릭에서는 아직 현재 진행 중이지만, 여자는 사제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성녀나 복녀는 될 수 있었는데 가장 확실한 방법은 순교하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기적을 일으켰다고 인정받거나 포교를 한 공적이 있으면 목숨을 버리지 않아도 시성 받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이 길 역시 교회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야 가능했다. 당연히 평범한 여성이 성녀가 되기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처럼 어려웠고, 때로는 그 길이 피로 얼룩져 있었음에도 그 길을 권고받았다.
하녀는 여성 대부분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이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선택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이에게 헌신하는 어머니는 아름답지 않아도 추앙받을 수 있었다. 성녀이자 하녀로 남기를 권고받은 어머니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 자식에게 자식을 키울 수 있어 좋았다고 말하기를 요구받았다. 자식이 힘들 때 조금이라도 비위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 서운함의 대상이 되었다. 불한당들이 쓰는 욕의 대명사가 되는 일도 숙명이었다.
미혼의 하녀들은 상급자나 주인들로 인해 위험에 노출된 상태로 일하곤 했다. 특히 노예들이 심한 짓을 당했다. 수리남의 여자 노예들은 코토미시라는 의상을 입었다. 코토미시는 속옷을 몇 겹씩 껴입고 겉옷까지 부풀려 입어야 했기에 착용자를 매우 뚱뚱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아름다움은 하녀들에겐 재앙이었다. 그녀들은 언제든 성적 노리개로 전락할 수 있었으므로 일부러라도 그 옷을 입어야 했다. 간편한 옷만 입고 일한 알리다라는 노예는 가슴이 잘려 나가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노예주가 그녀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질투심에 휩싸인 노예주의 부인이 벌인 짓이었다.
성녀의 순교는 고귀하고, 하녀의 사망은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치부되었다면, 마녀의 사형은 정당한 일로 여겨졌다. 심문 과정에 인권은 고려되지 않았다. 무더기로 사형을 집행하거나 반인륜적인 고문을 가해도 마녀라는 낙인만 찍으면 그만이었다. 의심만 받아도 재판이라는 도마 위에 올랐다. 마녀는 사람을 타락시키는 무시무시한 요물이란 취급을 받았지만, 오늘날 그녀들의 다른 이름은 피해자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녀이자 마녀에 속한 창녀는 아이러니하게도 하녀라는 속성의 유용함 덕분에 사형을 피하는 데 유리했다. 하지만 그것이 인권이 보장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공창제가 폐지되기 전 일본의 유녀들의 평균 수명은 30세 미만이었다. 시신은 조켄지라는 절에서 따로 맡아주었다.
앞서 서술한 글은 서구 중심적인 내용이지만 유교 문화권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성녀라는 명칭은 열녀나 효녀, 마녀는 요녀라는 차이점만 존재한다. 전근대의 여성관은 동서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열녀가 되려면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어야 했고, 하녀는 주인을 잘못 만나면 흠씬 구타당해 사망할 수 있었으며, 요녀로 낙인찍히면 살인이나 강간을 저지르지 않아도 군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사형당했다.
이 세 가지의 틀에 들어맞지 않는 여성들도 물론 존재했다. 본인의 노력이나 선택에 의해 영향을 받는 세 가지 사례와는 다르게, 권력자의 딸로 태어나거나 부인이 되면 여왕이나 여제가 되는 일도 가능했다. 보편적인 케이스가 아니다 보니 운이나 출생에 더 의지해야 하는 자리였다.
힘을 가진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세상은 끊임없이 틀을 깬 여자들을 어떻게든 기존의 틀에 맞춰 판단하려고 애썼다. 그렇기에 같은 여전사일지라도 화 목란은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에 나간 효녀로 칭송받을 수 있었지만, 권력자의 눈 밖에 난 잔 다르크는 구국 영웅에서 마녀로 전락해 화형당했다.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후에야 잔 다르크는 복권되어 성녀로 시성 받았다.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수많은 여자에게 단 3가지 길만 허락하는 게 과연 옳은가? 대단히 단순하고 평면적이지 않은가? 오늘날 종교 극단주의와 내전 등으로 사정이 열악한 국가들을 제외하면 여성들이 갈 수 있는 길이 많이 늘어났다. 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의 문이 열렸고, 도전할 수 있는 직업의 가짓수도 늘어났다. 다만 아직 구시대의 인습을 벗어나지 못해 갈등하고 혼란을 겪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 급작스럽게 변한 사회상을 잘못 이해하여 안팎으로 노동을 하며 돈도 벌어야 하는 이중고를 강요받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타개책을 찾아야 할까. 권력자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손바닥 뒤집듯 성녀에서 마녀로도 전락할 수 있었던 철의 시대를 거슬러 황금의 시대에서 답을 찾아봐도 되지 않을까.
남신 못지않게 여신들도 많았던 시절, 그녀들은 각각의 개성과 힘을 거느리며 존재했다. 데메테르는 대지를 다스렸고, 아테나는 지혜를 관장했다. 세간에서 간혹 오해하는 바와 달리 ‘남성적인’ 영역이라 일컬어진 분야도 다스렸다. 일본 신화에는 태양신 아마테라스가 있고, 이집트 신화에는 하늘의 신 누트가 있다. 그리스의 전쟁의 신 아테나가 로마의 미네르바로 이어졌다. 인도의 전사 신 두르가는 악마들과 싸워 거뜬히 승리를 쟁취했다. 한술 더 떠 ‘검은 여자’라는 이름의 칼리는 적의 피를 전부 마셔버리는 파격적인 모습도 선보였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여신들은 신흥 종교에 편입되거나 잊히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녀들은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그 여신들의 행동양식이 전부 어디에서 왔겠는가. 웃거나 우는 여인, 싸우는 여인, 가정을 보살피는 여인, 파업하는 여인, 치장하는 여인들의 모습에서 다양한 여신들이 엿보인다. 신화가 누군가가 지어낸 아름다운 이야기일수록 그것은 더더욱 현실의 모방이라는 말이 된다. 여신들이 초자연적인 권능을 사용하지 않을 때면 그녀들은 한없이 인간을 닮았다. 현대에는 그런 여신들을 롤모델로 삼는 여인들도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셈이다.
바야흐로 다양성이 강점이 되고 각광을 받기 시작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여신과 여인 사이에 단단한 벽을 세워 가르고, 여신은 숭배하면서 여인은 폭행하는 일은 너무 미개하지 않은가. 신화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엄연한 사실이라 믿는 사람들도 여신들의 유지를 잇는 이는 결국 사람이라는 점에 동의해야 하리라.
요새는 여신이라는 단어가 그저 외적으로 예쁜 외모를 가진 사람에게만 붙여주는 칭호로 변질한 것 같아 내심 안타깝다. 필자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여신이 있으니 그중 원하는 여신을 롤모델로 삼거나 공부하길 권하고 싶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두고 쓰지 않는다면, 우물 안 개구리로 남는다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여신인 이들이여. 혹은 여신들의 원형인 이들이여.
수많은 글을 쌓아 올리고 또 쌓아 올린 후
멋모르고 등단을 기대하던 시절, 대학 재학 중에 당선 연락 한 번은 받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막연한 기대였다. 어느 날은 밤을 지새우며 퇴고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글, 쓰지 말까…
당선 소식을 접하자마자 역시 사람에게 잘하고 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단을 고대하던 8년하고 반, 가족 앞에서 온갖 힘든 티를 내며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후에야 글은 사람을 향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결코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는 글임에도 제 에세이가 선택받은 이유는 심사위원분들께서 가능성을 보시고 인정해 주셨기 때문이었으리라. 감사드린다. 만약 대상을 받았더라면 쉽사리 자만에 빠졌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당선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시고 축하해 주신 우리 가족에게 감사드린다. 나의 에너지는 가족에게서 나온다. 드디어 이 말을 전할 수 있어서 기쁘다.
나의 글의 소재가 된 타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내가 그분들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세상을 모르는 채 혼자만의 공간 안에 틀어박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을 것이다.
단 한 문장을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글을 쌓아 올리고 또 쌓아 올린 후 만든 저 문장에, 이 마음을 오롯이 담을 수만 있다면.
동화 같은 촛불
배혜정
할 일 없이 티브이를 쳐다보고 있자니 자꾸 마음이 허해진다. 저 어린 이십 대들은 벌써 부자가 되고, 많은 이들의 응원을 받는구나 싶어 부러워지기에 이른다. 기분이 내키지 않아 오십 개의 채널을 위아래로 몇 번이나 돌려본다. 그러다 하필이면 빈 채널에서 리모컨이 먹통이다. 대충 빗고 대충 입은 내 모습이 티브이에 비친다.
발아래 놓인 길을 느린 보폭으로 걷다 보니 어느새 사십 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예고 없이 찾아온 박탈감이 권태와 허무를 초대했다. 이것들의 소소한 파티를 멍하게 쳐다보다 어느새 졸리웠는지, 딴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더니 곧 옛 기억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스무 살 대학 생활의 첫 방학에 친구와 나는 경험해보지 못한 아르바이트를 해보자고 신이 났었다. 구인 신문에 난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어렵지 않게 배우면서 일해요' 광고를 보고 염색 공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상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비주얼의 슬레이트 건물에 들어서자, 매캐한 공업용 페인트 냄새가 숨을 막았다. 내 또래의 여자아이들은 우리의 등장에 잠시 얼굴을 들어 경계의 눈빛만 비추고는, 다시 붓질을 했다. 사장 부부 둘은 방독 마스크를 끼고 있었고 아이들은 그냥이었다. 눈이 따가웠지만 쥐여 주는 붓으로 커다란 천에 라인을 따라 색칠했다. 사장 부부 둘이서만 장갑을 끼고 아이들은 맨손이었다. 페인트가 닿으면 손이 따가웠다.
그렇게 하루하루 독한 냄새에도, 따가운 페인트에도 적응하면서 한 달여간 우리는 일을 했다. 1분이라도 지각하거나, 물감이 조금이라도 번지면 월급의 상당 금액을 차감했으므로, 한 달 뒤 우린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친구의 엄마가 찾아가서 항의했고 우린 일부를 받을 수 있었지만, 위험한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했다고 꾸중을 들어야 했다.
그곳에 남은 다른 친구들이 마음에 걸렸다. 일이 끝나고 버스를 기다리면서 간간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들은 몇 달째 월급을 못 받았다. 대부분 보육시설을 졸업하고 온 친구들이었고 가진 돈도, 가족도 없었다. 성실하게 일해서 남들처럼 살아보겠다는 희망을 안고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출구 없는 감옥이었다. 남자 사장은 숙소에 찾아와 보란 듯이 아무렇지 않게 성폭력을 했다. 나는 왜 가만히 있냐고 같이 소송이라도 해보자고,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고 사정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의 그 경계의 눈빛으로 뒷걸음질 쳤다.
공장 사장들은 끈끈하게 연결되어있고, 잘못 찍히는 날엔 일자리를 얻을 수 없게 된다고….
그렇게 발붙일 데 없이 어디론가 떠난 친구들이 있다고….
그들은 고작 스무 살 내 또래 여자아이들이었다.
그렇게 쓰라린 여름방학이 지났다. 겨울 방학에는 학업에만 집중하리라 다짐하고 있던 어느 날, 고등학교 친구 하나가 연락이 왔다. 삼촌의 회사에 일손이 급하니 며칠만 일을 도와 달라는 것이다. 친구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멀리 서울까지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도착한 곳은 신천동 연립주택들 사이 사무실이었다.
좁은 공간에 검은색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어안이 벙벙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에 가방과 휴대폰을 뺏겼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나는 항의했고, 친구는 일주일만 자기를 믿고 시간을 내어 달라고 호소했다. 당장은 빠져나가기도 힘든 분위기를 읽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나와 비슷한 차림의 또래들과 봉고차를 타고 이동했고, 비슷하게 생긴 연립주택들 속 몇 개의 지하 방에 나뉘어 집단생활을 했다. 작은방에서 여덟아홉 명이 숙식을 함께했고, 조그만 화장실이 딸려있었다. 제 발로 찾아왔거나 나처럼 속아서 왔거나, 그곳에 발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이 그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방 밖에는 지키는 사람이 있었고, 낮에는 봉고차로 어디론가 이동했다. 그곳에서는 한낱 돌덩이가 어떻게 다이아몬드가 되는지를 알려주는 열변이 끊이지 않았다. 나와 함께 생활을 시작한 또래들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에 흥분했다. 어두웠던 얼굴에 웃음꽃이 번졌다. 환호성과 열망으로 가득 찬 그곳이 나는 슬펐다. 거기 있던 이들이 꿈에서 깨지 않고 계속 머무를 수 있다면, 희열과 희망으로 인생을 가득 채울 수도 있었을까….
저녁이 되면 커다란 양푼에 간장으로 대충 비빈 밥을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작은 상을 둘러싸고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상 위에는 촛불 하나가 켜져 있었다. 한명 한명 돌아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린 시절부터 동생들을 돌봐야 했던 소녀 가장, 병원비가 없어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할머니와 살고 있다는 동갑내기, 부모님의 사업이 망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몇 살 위 언니, 인지장애가 있는 또래 여자 친구…. 마음을 후비는 삶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곳이 거짓이라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눈을 반짝이며 희망을 이야기하고 서로를 응원하던 그 말갛던 얼굴이 촛불에 어리어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친구와 약속한 일주일을 보냈고, 쉽지 않은 몸싸움까지 거치면서 겨우 빠져나왔다. 그리고 며칠이나 지났을까…. 어느 평범하고 나른한 오후에, 익숙한 그곳을 뉴스를 통해 보았다.
빛나던 얼굴들이 죄인이 되어, 고개를 숙인 채 지하 방을 빼져 나오는 장면이 텔레비전 화면에 꽉 찼다.
그 모습이 슬픔에 어리었다….
스무 살에 만난 내 또래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들의 이십 대보다 지금의 사십 대가 좀은 편안할까. 그들의 티브이는 몇 개의 채널에 박탈감을 싣고, 몇 개의 채널에 촛불이 켜질까.
먹통이 된 빈 채널에 비친 그들이 말갛게 빛나길 바란다.
괜스레 내 권태와 허무가 머쓱하여, 슬며시 파티장 불을 끈다.
새로운 삶이 청하는 악수
반갑고 고마운 소식을 받고 어안이 벙벙해서 앉아있자니 옛날 생각이 났다.
오랜 시간의 강을 거슬러 중학교 2학년 때의 기억이다. 키가 크고 서글서글한 눈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인기짱인 국어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발표를 시키고는, 내가 교과서적인 답이라도 할 때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왜 그렇게만 생각하냐,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냐”며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고는 ‘돌배’라는 별명도 지어 주었다. 점심시간 산책길에 만나기라도 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내 눈을 들여다보며 돌을 보고도, 떨어진 나뭇잎을 보고도 생각을 하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생각이 많은 아이가 되어버렸다.
선생님은 학교 지하 창고를 손수 쓸고 닦아서, 기증받은 책들로 채운 도서관을 만들었다. 나는 매일 그곳에서 선생님이 내어 준 숙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음을 두드리는 글을 만나고, 친구들과 시 쓰기 경연대회를 하면서 놀았다.
글을 써보리라 마음을 먹고, ‘데이만을 읽고’라는 제목의 독후감을 200자 원고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 써 내려갔다. 그리고 신춘문예에 투고했다… 그땐 휴대전화가 없었으니 우편으로 연락이 와야 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매일 대문 앞 우체통을 지키고 서 있었다. 당시 심사를 보셨던 심사위원님들께 소소한 웃을 거리가 되었기를 바란다.
삶이 나를 이리저리 흔들어 허망해질 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어디서 새어 들어왔는지 모를 햇볕이 눈 부시게 따뜻하다.
글쓰기는 인생 여정에 아픔이 스밀 때마다 찾는 오래된 친구다. 『시와산문』이 나의 에세이를 선택해 준 것은 좀 더 살아보라는 위로이자, 새로운 삶이 청하는 악수다.
첫댓글 축하드립니다. 잘 읽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동 먹는 작품, 좋은 평설 심득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