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미셸 푸코
이 방송은 The School of Life의 Michel Foucourt를 참고하여 만들어진 유튜브 동영상 방송입니다.
미셸 푸코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자이자
그리고 역사가였습니다. 그는 근대 부르주아 자본주의 국가의 권력을 변증론적으로 비판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여기서 국가란 경찰, 법원, 교도소, 의사, 정신과 의사 등을 포함합니다. 그의 목표는 다름 아닌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히고 그리고 그것을 마르크스주의적, 무정부주의적인 유토피아의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도서관과 세미나실에서 보냈지만 엄청난 인기를 얻었습니다,
엘리트 파리의 지식인 사회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그래서 장 폴 사르트르는 그를 깊이 존경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학에서 공부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여전히 많은 추종자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가 극도로 꺼려했던 그의 배경은 실은 매우 특권층이었고 푸코는 이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자들의 취재를 막으려 했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엄청난 부자였고
프랑스 중서부 푸아티에의 성공한 외과의사 집안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폴 푸코 박사는 미셸이 부르주아 프랑스에 대해 싫어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미셸은 표준 상류층 교육을 받았습니다. 즉 그는 엘리트 예수회 기관에 다녔고 그는 성당의 복사(服事) 즉 제단 소년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자식이 의사가 되길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미셸은 다른 남자애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자해(自害)를 시작했고 자살을 끊임없이 생각했습니다. 대학 시절인 22살에는 화가 고야 (Goya)의 고문 그림으로 침실을 장식했습니다.
그는 자살을 시도했고 아버지의 강압에 못 이겨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정신과 의사 즉 파리에 있는 존 디어 (John Deere)를 만났습니다. 의사는 현명하게도 미셸의 많은 고통은 그가 동성애를 유지해야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특히 극단적인 피학적 음란증 즉 매저키즘에 대한 그의 관심은 푸코로 하여금 예절바른 사회에 대한 감각을 버리게 했습니다.
점차적으로 푸코는 프랑스의 언더그라운드 문화에서 유명한 게이 현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마약상과 사랑에 빠졌고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성전환자와 함께했습니다. 20대에 그는 스웨덴, 폴란드 그리고 독일 등지로 유학을 갔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의 성적 취향이 비교적 제약을 받지 않고 살수 있었습니다.
그 사이 푸코는 프랑스 학계의 사다리를 승승장구했습니다.
그의 지적인 삶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사건은
1953년 여름, 푸코는 27살이었고 휴가 중이었습니다. 그 때 푸코는
이탈리아에서 연인과 함께 있으면서 니체의 저서, 시의적절치 못한 명상, 인생에 대한 역사의 장단점이라는 책을 만남니다. 이 책은
1874년에 출간된 프리드리히 니체의 작품으로, 그의 네 권의 명상록 중 두 번째 작품입니다. 이 논문은 니체의 초기 창작기의 중요한 작품으로 간주됩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역사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거나 잘못 판단하는 동시대 학자들을 비판합니다.
니체는 인생에 대한 역사의 장단점에서 학자들이 우리의 감각을 독살했다고 비난합니다. 즉 역사를 어떻게 읽고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켰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마치 역사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우기 위하여 흥미도 없이 억지로 읽어야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즉
과거에 모든 것이 어땠는 지를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마치 국사 시험을 보기 위하여 국사를 공부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니체는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이런 역사 학습 태도를 냉소적인 분노로 거부했습니다.
과거 자체를 위하여 역사를 배우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역사를 읽고 공부하는 유일한 이유는 개념과 사례를 통해서 더 나은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니체의 에세이는 그 때까지의 어떤 저서보다 푸코를 지적으로 빠르게 해방시켰습니다.
푸코는 그는 작업의 방향을 바꾸고 특별한 일종의 철학적 역사가가 되기로 결심을 합니다. 즉 곧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사람, 당대의 시급한 문제들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8년 후, 그는 출판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즉 그의 첫 번째 걸작으로 인정받는 광기의 역사입니다. 영어 원본은 광기와 문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표준적인 견해는 우리는 이제 정신 질환을 가진 사람들을
과거보다 훨씬 더 인도적인 방식으로 다룬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들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약을 주고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돌보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태도가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문명에서 철폐하고 싶어했던 태도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논증합니다, 즉 푸코는 르네상스 시대의 상황이 그 후보다 실제로 광인들에게는 훨씬 더 좋았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광인은 미쳤다기보다는 마음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일종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성의 한계를 보여줬기 때문에 일종의 지혜를 가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광인들은 자유롭게 방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푸코의 역사연구에 따르면 17 세기 중반에는 정신병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탄생했다고 합니다. 정신병 치료는 끊임없이 의료화되고 제도화되었습니다.
정신병자들은 더 이상 소위 정신이 멀쩡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족과 떨어져서
정신병원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신병자들이 단지 다르다는 것을 관용하기 보다는 그들을 치료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푸코의 그 다음의 위대한 책 즉 클리닉의 탄생에서 그 전과 매우 유사한 기본철학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목표는 의학이었습니다. 푸코는 이전보다 더 광범위하게 의학을 체계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즉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학이 더 인도적으로 되었다는 견해를 공격합니다.
푸코는 물론 인류가 지금 더 나은 약과 치료법이 있다는 것을 인정은 합니다. 하지만 18세기에는 전문 의사가 탄생했고 그리고 그는 불길한 인물이었다고 조롱합니다. 즉 전문의사들은 항상 환자를 의학적인 시선과 비인간적인 태도를 가지고 환자를 바라본다고 합니다. 이는 환자를 인간이 아니라 신체 장기의 집합체로 본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진료를 받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의학적 시선 아래 있다는 것이고 의사는 그를 단지 신장이나 간이 고장난 것일 뿐,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푸코는 감시와 처벌을 저술했습니다.
푸코는 국가 형벌에 대한 그의 전형적인 작업 즉 역사 비판을 수행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일반적인 견해는 감옥에 갖혀 형벌을 받는 것이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지는 것보다 훨씬 더 인도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푸코는 이런 일반적인 견해에 반대합니다. 즉 현재 권력이 친절해 보이지만 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친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수들로 하여금 공개적인 반란과 항의를 조장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유죄 판결을 받은 시신은 동정심과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갈등보다는 사형집행인
수치심의 메뚜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역사에 있어서는 망나니가 수치를 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공개 처형은 종종 죄수를 지지하는 폭동으로 발전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감옥 시스템이 발명되면서 모든 일은 닫힌 문 뒤에서 비공개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는 우리는 더 이상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근대적 형벌 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푸코의 눈에는 근대의 형벌제도는 야만적이고 아주 원시적으로 간주됩니다.
푸코의 마지막 작품은 여러 권으로 구성된 성의 역사입니다.
《성의 역사》는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인 미셸 푸코가 쓴 4권으로 구성된 연구서다. 푸코는 이 책에서 "성"이라는 개념이 독립적인 삶의 영역 및 담론적 대상으로 형성된 과정을 탐구하며, 모든 개인이 "성"을 가진다는 관념이 서구 사회에서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제1권에서 푸코는 "억압 가설(repressive hypothesis)"을 비판합니다. 억압 가설은 17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사회의 부상으로 인해 서구 사회가 성을 억압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푸코는 이 시기에 오히려 성에 대한 담론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봅니다. 전문가들은 성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적 감정과 행동을 고백하도록 장려했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18세기와 19세기 동안 사회는 결혼의 틀에 맞지 않는 다양한 성적 정체성에 점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동, 정신 이상자, 범죄자, 동성애자와 같은 "일탈 (perversion)의 세계"를 포함합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고백과 과학적 탐구를 통해 성이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제2, 3권에서는 그리스와 로마 고대 사회에서 성의 역할을 다루며, 각각 고대 그리스의 성 윤리와 로마 시대의 자아 배려에 초점을 맞춥니다.
책은 엇갈린 평가를 받았습니다. 일부 평론가들은 푸코의 통찰력과 담론 분석을 칭찬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의 학문적 접근과 자료 사용 방식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이 책은 성에 대한 서구 사회의 시각과 이를 둘러싼 담론을 재조명하며 학계와 대중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프코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게이 바에서 에이즈에 걸려
1984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푸코의 마지막 공헌은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 즉 지금에 대한 잘난 척하는 것에 대하여 도리어 과거를 돌아보고 일을 하는 방법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푸코는 우리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려는 게 아니라
그는 우리가 몇 가지 교훈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학계 역사학자들은 푸코의 저작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정확하다고 생각하며 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떤 문서나 다른 문서에서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지만 푸코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역사란 좋은 아이디어의 창고였고 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습격하고 싶어했습니다.
역사기록을 그대로 두기보다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과 제도를 살펴볼 수 있는 영감으로 그 역사와 진화를 살펴봄으로써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푸코는 놀라운 일을 했습니다. 그는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삶을 향상시키고 철학적으로 풍부하게 다시 말하지만, 그는 영감을 주는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