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 물은….>/구연식
우리는 농경문화 민족으로 씨 뿌림과 가꾸는 일은 가축의 힘을 빌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확하여 알곡을 도정(搗精)할 때는 경우에 따라서는 수력을 이용하는 물레방아를 활용했다. 그래서 농촌과 산골을 아우르는 물레방앗간 지붕은 고향의 모든 것을 모아놓은 박물관처럼 그리도 좋았다. 고향을 그리는 수채화에는 언제나 어머니 얼굴처럼 물레방아가 빠지지 않고 피사체(被寫體)로 등장하고 있다.
우리의 근대문학 주제에는 ‘물레방아’가 자주 등장하며 갑순이와 갑돌이의 풋풋한 사랑의 장소도 물레방앗간이었다. 이렇게 물레방아는 그리움의 상징으로 때로는 꽃반지를 끼워주며 새끼손가락을 걸고 미래를 약속했던 철부지들의 언약 장소이기도 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터만 남음 물레방앗간 자리를 지나가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많은 것들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물레방아 도는 내력> 노랫말에는 벼슬도 명예도 사랑도 황금도 싫다. 라고 했다. 부귀영화가 아닌 소박하고 검소한 전원생활을 노래한 농촌의 청년들이 지게 목발 장단에 맞춰 버들피리 불며 논밭으로 소를 몰고 향하면서 오직 고향만을 지키겠다는 노스탤지어 영혼을 읊조리는 노래였다.
그런데 산업화와 근대화 문물이 들어오면서 제도권에서는 기성세대의 여운을 지워버리며 재 진입을 막고 신진세대 그들만의 세력을 안착시키려는 슬로건이 등장했다. ‘흘러간 물은 다시는 그 물레방아를 돌리지 못한다.’라는 구호 아래 흘러간 물을 축출하고 있다. 흘러간 물이 된 것도 서러운데 궤변 같은 선동적 용어로 원용(援用)하고 있어 흘러간 물을 씁쓸하게 한다.
흘러간 물이 있었기에 물레방아는 쉬지 않고 지금도 돌고 있다. 어제의 물은 오늘의 물에게 그리고 오늘의 물은 내일의 물에게 물레방아를 간곡히 부탁하면서 다음 할 일을 향해 먼 여정을 떠난다.
수차(水車)에 온몸이 피멍 들게 부딪쳐 돌게 한 다음, 숨 돌릴 틈도 없이 낭떠러지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산골짜기 오두막 앞의 개울을 지나서 내려가고 있다. 조금 더 내려가니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웃고 있는 초록색 들판을 갈라놓은 시냇물이 되어 둥둥 떠내려가고 있다.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보다 더 중요한 생명의 양식인 5곡을 가꾸러 드넓은 전답으로 내려가고 있다. 어쩌면 이기적이고 눈앞의 세상만 챙기는 인간보다 몇 백 배 나은 삶을 살고 있다. 나이 들어 은퇴한 사람을 흘러간 물에 비유하며 물의 임무를 물레방아에 한정 짓고 있다. 인류의 모든 문명의 흔적은 기성세대들의 피멍 들게 부딪히고 곤두박질친 헌신과 희생의 결과이다. 그런데 흘러간 물을 폄하(貶下)하는 주장은 서푼짜리 탐욕에 사로잡혀 자연의 도도한 흐름을 부정하며 자가당착적 모순이다. 가장 언짢은 것은 순수하고 자연적인 물을 정치적으로 오염시키는 것이다.
나는 공직에서 퇴임한 지 10여 년도 훌쩍 넘었다. 물로 치면 ‘흘러간 물이다.’ 때로는 새로운 물한테 문전 박대 격으로 흘러간 물 대접을 여러 번 받았다. 그 옛날 물레방아를 돌렸던 시절이 아른거려 눈시울이 붉어져 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쓸모없는 물이 된 자신을 다독거리며 위로해 본 적도 많았다. 이제는 상전벽해가 된 세상이다. 흘러간 물은 나처럼 옹졸하고 자기 집착적인 삶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 발전적이고 세상에 도움이 된다. 하면서도 쉽게 그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흘러간 물임을 인정하지 않고 마냥 옛날에 젖어 있는 나 자신도 반성해야 한다. 이제는 물레방아도 전기로 돌리고, 흘러간 물을 다시 끌어 올려 물레방아를 돌리고 있다. 흘러간 물 현재의 물 그리고 미래의 물 별 의미가 없어졌다. 세상만사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 하는데 언짢은 일은 쉽게 털어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라 허전함이 엄습하여 우울증으로 나를 가두어 놓는다.
도가(道家)의 대표적 사상가 노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 삶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실천적 원리를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하여, 인간의 사심이 개입되지 않은 물의 물리적 현상을 권장했다. 그러므로 과거의 물 현재의 물 그리고 미래의 물을 구분하고 집착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고 물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신이 나에게 절대적 힘을 준다고 해도 시간의 흐름은 되돌릴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혼돈(混沌)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나이에는 아집스러운 편견은 버리고 많은 사람이 공유하며 만들어 놓은 약속에 좇아서 살아가야 바람직한 삶이다. 고인 물 취급하지 않고 흘러간 물로만 인정해도 고맙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