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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민국수호 천주교인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김광한
인과응보(因果應報)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
김동인(金東仁)의 대수양(大首陽)과 이광수(李光洙)의 단종애사(端宗哀史)
강원도 영월의 청렴포 대한민국 지도처럼 생긴곳에서 단종이 세조에게 유배돼 독약먹고 죽은 곳
김광한
1)인과응보란(因果應報) 자신이 저지른 과보(果報)나 업을 자신이 받는다는 뜻으로, 스스로 저지른 결과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여기서 업은 나쁜 업을 일컫습니다. 자업자박(自業自縛)과 같은 뜻으로, 자신이 쌓은 업으로 자신을 묶는다는 말입니다.자기가 꼰 새끼로 자신을 묶어, 결국 자기 꾐에 자기가 빠지는 것을 뜻하는 자승자박(自繩自縛)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밖에 과거 또는 전생의 선악의 인연에 따라 뒷날 길흉화복의 갚음을 받게 된다는 뜻의 인과응보(因果應報)에도 자업자득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자업자득에는 무슨 일이든 결국 옳은 이치대로 돌아간다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뜻도 담겨 있습니다.
스스로가 지은 선과 악의 업(業)은 반드시 자기 스스로가 받게 되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이르는 말이 바로 자업자득입니다. 비슷하게 사용되는 불교용어로 '자승자박(自繩自縛)'이 있습니다. 제가 만든 줄로 자기 자신을 옭아매듯이 말과 행동을 잘못함으로써 스스로 옭혀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즉 제 스스로 번뇌를 일으켜서 괴로워함을 비유하는 용어입니다.
업이란 말은'전생의 업 때문'이라든지, 자업자득이란 의미 때문에 다분히 부정적이고 숙명적인 이미지를 주는 듯하지만, 본래 범어 'karman'의 번역이며 '행위'라는 뜻입니다. 업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작용된다고 하는데 이 업으로부터 윤회 사상이 발달되었습니다. 선.악의 업을 지으면 그것에 의해 즐겁고, 고통스러운 과보가 생깁니다.이를 업인에 의해 업과가 생긴다고 합니다. 업이 삼세에 걸쳐 실재하므로, 업이 현재에 있을 때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어떠한 미래의 결과가 될 것인가가 결정되고, 과거 세에 지은 업의 결과가
현재에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선행을 애써 쌓으셔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업'이란 선을 권하는 적극적인 행위인 것입니다.업의 결과를 이끄는 힘을 업력(業力),업에 의한 괴로운 갚음을 업고(業苦), 악업으로 인하여 생긴 장애를 업장(業障)이라고 합니다. 지옥에서 중생의 선악에 대한 업을 비추는 거울을 업경(業鏡), 과거생에 지은 업을 숙업(宿業),또 그물 처럼 사람을 잡아 미혹한 세계에 머물게 함을 업망(業網)이라 합니다. 자기가 지은 업의 갚음을 자기가 받지 않으면 안되는 이치, 그것이 자업자득입니다. 선업을 쌓아 좋은 과보를 얻는 긍정적 이미지인 '자업자득'을 이루어 보시지요.
<김태달교수의 불교이론>
2)조선조 27대 임금 가운데 신하나 남들에게 피를 많이 흘리게 한 임금이 제 7대 임금 세조이다.그는 일곱살난 조카인 단종을 귀양보내 고 그것도 모자라 사약을 내려 죽이고 스스로 임금이 된 패륜의 응보를 철저하게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그에 대해 훗날 많은 사람들은 소설이나 영화로 그를 주인공으로 만들었다.세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작가의 생각이 들어가 있어 어느 작가는 패륜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 그가 살면서 이룩한 업적에 초점을 맞추기도 했고 또 다른 작가는 그의 패륜과 인명 살상은 임금으로서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여 악인의 전형적인 인물로 그리기도 했다.
그의 왕위 찬탈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주위인물들을 미화 시킨 작가가 금동 김동인이다. 김동인은 장편 운현궁의 봄 단편으로 배따라기 같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김동인의 <대수양>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양의 편에 서서, 수양의 왕위찬탈에 정당성을 '가득'부여하는 방향으로 계유정난을 그렸다. 세종에 대한 평가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마음과 차이가 없지만, 문종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수양>은 전 왕 세종이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져 강한 문화를 만들어낸데 비해, 문종이 '유'만을 강조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전왕이 이룩한 업적들을 망가트리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병약한 몸에서 비롯해 질투심이 많은 등(특히, 능력있는 수양대군을 향한 질투) 성격적으로도 그를 깎아내려 상대적으로 수양을 드러나게 했다. 단종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만큼 너무도 무능력하게 그려, 수양이 보필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대수양>은 김종서를 비롯해 황보인 등을 처단하는 장면을 최소화했다(김종서를 권력욕에만 가득한 무능력의 극치로 그렸다). 또한 신숙주의 배반(변절)장면은 아예 그려내지도 않았고, 사육신과 생육신의 이야기도 없었다.마치 불법적ㅇ로 정권을 잡은 자를 비호하는듯한 내용으로 일관되어있다. 그렇다고 시대가 다른 인물을 미화했다고 세조와 측근으로 향응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런가 하면 친일파 문제로 툭하면 이름이 올라가는 춘원 이광수는 달랐다.이광수는 여러 작품, 무정과 유정 등에서 선보이듯 우리 문학을 빛나게 해준 작가이면서 그 문장의 수려함은 따를 자가 없는, 당대의 천재였다.이광수의 <단종애사>는 정사에 충실한 역사소설로, <단종애사>는 우리가 아는대로 계유정난을 그렸다. 왕위에 눈이 멀어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는 것을 그대로 그려냈으며, 한명회의 지략을 잘 그려내 그가 살생부를 들고 영의정 황보인을 필두로 하나씩 죽여가는 장면을 너무나도 섬뜩하고 실제감있게 묘사했다. 나아가 <대수양>이 수양대군을 칭송하기 위해 선별, 삭제해야만 했던 생사육신의 단종복위 시도와 실패로 인한 죽음, 그리고 금성대군의 이야기까지 모두 잘 그려냈다.
이광수가 <단종애사>를 먼저 신문에 연재했고, 그에 대한 반발로 김동인은 <대수양>을 연재했다. 이광수가 친일파이고, 김동인은 친일을 거부하다 일왕에 대한 불순으로 감옥에 간 적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김동인은 친일파 이광수에 대한 반발로 <대수양>을 쓴 것이다. 강한 힘을 바탕으로 한 민족적 영웅이 필요한 시기 일제강점기를 살며, 김동인은 수양에게서 그런 모습을 본게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그 시도는 좋았고, 계유정난의 다른 해석은 신선했으나 너무 설득력이 떨어지며, 인물상정을 위해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줄거리의 흥미가 떨어졌다.역사소설은 자신의 주관보다 역사가 처했던 인물의 객관성이 중심이 되어야하는데 김동인은 이광수보다 한참 밑이었다.
3)
조선조 시대의 임금 들과 측근의 이야기는 거의가 조선왕조 실록에 기인한다.사관(史官)에 의해 임금의 일상생활을 쓴 것에서 추출한 것이 소설과 연극이고 시와 영화이다.작년에 타계한 신봉승이란 불세출의 작가이자 극작가가 바로 강릉 출신의 신봉승(
1933년 5월 23일 (강원 강릉시) ~ 2016년 4월 19일 (향년 82세) )이다.신봉승은 실록을 알기 쉽게 소설로 만들어서 대중화 시킨 장본인인데 신봉승의 세조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을 소설화한 내용을 소개한다.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한명회이다.물론 홍윤성과 같은 깡패도 등장한다.
4)한명회는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는데, 1녀를 당시 한명회 와 더불어 세조의 최고 측근인 신숙주의 장남에게 시집을 보냈습니다. 최고의 정난공신이 사돈으로 뭉친 것이지요.한명회는 이어서 3녀를 세조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에게 시집보냈습니다. 그리고 해양대군은 형인 의경세자가 세자 가 된 지 2년 만에 죽자, 의경세자의 아들을 제치고 세자가 되는데, 이는 해양대군의 장인이 한명회라는 점이 고려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한편, 남편인 의경세자의 죽음으로 인해 중전이 되어 보지 못한 채 대궐에서 밀려 난 의경세자의 부인(나중에 인수 대비)은 세자가 된 시동생의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을 간파 하고, 시동생인 해양대군이 죽게 되면 그 후임으로 자기 아들을 왕으로 세울 요량으로(아니면 시동생을 죽여서라도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하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세조에게 빌다시피 하여 한명회의 4녀를 자신의 둘째 아들 잘산군의 며느리로 맞아들였고, 결국 소원대로 자을산군은 예종에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정리하면, 한명회는 1녀를 신숙주에게, 3녀를 세조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에게, 4녀를 세조의 첫째 아들의 둘째 아들 에게 시집을 보냈고, 3녀는 남편인 해양대군이 왕(예종)이 됨으로써 왕비가 되었으며, 4녀는 남편인 자을산군이 예종 의 뒤를 이어 왕(성종)이 됨으로써 왕비가 된 것입니다.
참고로, 한명회는 말년에 한강가에 정자를 멋들어지게 지어 놓고 유유자적하였는데, 그 정자의 이름이 '압구정' 이었고, 여기에서 오늘날의 압구정동이라는 명칭이 유래 되었습니다.이와 같이 칠삭둥이 한명회의 영광은 전무후무한 것 이었고, 죽기까지 영화를 누렸지만, 계유정난 이후 곧 동생 이 죽고, 왕가에 시집간 딸들도 17세와 18세에 모두 죽었으며, 본인도 손자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하게 되니, 역사가 공평하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아무튼 세조 이후의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기운이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세조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부병에 몹시도 시달리다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해양대군(예종)이 즉위한 다음 날 거짓말처럼 세상을 뜨니 재위 13년 3개월, 향년 52세에 불과하였습니다.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상당한 치적을 쌓기도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식들이 모두 20세에 죽었고, 한명회의 여식이기도 한 며느리들도 17세와 18세 에 모두 요절하였으니, 세조와 한명회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복수를 한 것으로 보아야 할까요?
인과응보 사필귀정 자업자득 자승자박
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가,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름 예문 놀부가 벌을 받게 되는 것은 말하자면 인과응보이다. 그 인과응보의 한 가운데 세조 즉 수양대군이 있다.
조선의 국책이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임에도, 세조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불교에 의존하였는데, 경복궁 내 함원전에 내불당을 설치하고, 원각사를 증축하여 10층 석탑을 봉헌하였으나 고통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새벽, 세조의 꿈에 분노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나타나 세조를 향하여 꾸짖으며, “너는 내 아들의 왕위를 빼앗고도 부족하여 벽지인 영월로 내쫓더니, 이제는 목숨까지 끊으려 하느냐? 이제 내가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며 세조의 몸에 침을 뱉고 사라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