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3일 신축년새해 주일예배 설교요약문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이 마음 속에 심으신 영적 혼미-
본문: 전도서 3:1-15 첫 찬송: 70장 피난처 있으니 봉헌찬송: 433장 귀하신 주여 마침찬송: 552장 아침 해가 돋을 때 교독문: 93
가향교우님들에게 보내는 신년인사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 1년 코비드 팬데믹의 환난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분투하셨습니까? 사회적 거리두기로 개인적으로 보내는 시간은 훨씬 더 많았겠지만, 여러분 각자의 마음은 코로나 속보, 경계태세, 속절없이 무너지는 연약한 우리이웃들의 아우성에 평안을 다 빼앗겼을 겁니다. 분명히 이런 때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할 순간인 것은 알겠지만, 왠지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하는 탄원기도가 잘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냉담함도 코로나 19바이러스처럼 퍼져가고 찬양과 기도, 말씀묵상과 이웃사랑의 실천에도 별다른 진보를 보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태양력은 2021년 신축년 새해가 밝았다고 말합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1년 더 동행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불확실성 때문에 2021년 신축년이 별다른 감흥과 기대를 불러일으키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겁니다. 예, 맞습니다. 지금은 오래참음과 인내가 절실히 요청되는 순간입니다. 불확실성과 함께 동행하는 연습을 더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부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경외심 잃지 말고 신실함을 잘 지켜주시길 간구합니다. 확실한 사실은 지난 1년 가향교회 교우님들이 각자의 삶터에서 벌인 믿음의 분투가 결실한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기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반드시 결실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교준 목사님과 가향교우님 여러분들이 새로 시작한 온라인 새벽기도, 온라인 수요예배 등도 머지않아 선한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대면예배의 활기는 없지만 하나님의 영은 정중동 방식으로 역사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런 낙심스러운 상황에서도 신실함을 지키는 여러분 각자가 하나님께 품고 간구했던 크고 작은 기도제목들도 때가 되면 성취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표적구원이 오지 않더라도, 아무런 좋은 일도 없이 하루하루가 무덤덤하게 지나간다고 해도 하나님께 고요히 엎드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이 주신 이 독특한 때를 잘 견디어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전도서 3:1-15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절을 보내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위로입니다.
천하범사에 있는 때와 기한 전도서 3:2-8은 스물 여덟개의 이항대립쌍으로 분류된 기한과 때에 관한 하나님 말씀입니다. 1절은 히브리어 음역하면 이렇습니다. <러콜 즈만 붜엩 러콜 헤페츠 타하트 하샤마임>.
단어풀이: 러=전치사 <위하여>, 콜=<모든>, <각각의>, 즈만=적합한 때, 붜=그리고. 엩=때, 러=전치사, <위하여>, 콜=<모든>, <각각의>, 헤페츠=<의도>, <기쁘게 행하는 의도>, 타하트=<아래서> 하샤마임=<하늘>.
1절의 직역은 이렇습니다: <하늘 아래 모든 일 위한 적합한 때가 있고, 모든 의도를 위한 때가 있다>. <하늘 아래서>라는 이 어구는 전도서의 열쇠어입니다. 하늘 아래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불확실하고 예측불가한 현상이라는 것이 전도서 1:1-4의 주제입니다. 지혜로운 기획과 계획을 하고 지혜롭게 행동했는데 그 결과가 지혜가 아니라 우매무지였음이 드러나는 식입니다. 헛된 일은 손으로 바람을 움켜 지려는 일처럼 인간의 이해를 벗어나고 비껴간다는 말입니다. 1절은 이 세상 일은 이항대립적인 쌍들의 일들이 교대로 일어납니다. 우는 것이 적당한 때가 있고 춤추는 것이 적당한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1절은 모든 고통스러운 일도 언젠가 끝나고 좋은 일에도 시효가 있으며, 이항대립적인 쌍의 일들 중 어떤 때 더 좋은지 어떤 일이 더 좋은지 알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적절한 때에 적절한 행동을 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암시가 깃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은 이 스물여덟 쌍의 때 잠언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행하신 모든 행사도 이 때 관련 잠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먼저 이항대립적인 쌍들을 차분히 분석해 봅시다.
2. 날 때 (엩 라레데트) 죽을 때 (엩 라무트) 심을 때(엩 라타아트 뽑을 때(엩 라아코르) 3. 죽일 때 치료할 때 헐 때 세울 때 4. 울 때 웃을 때 슬퍼할 때 춤출 때 5. 돌을 던져버릴 때 돌을 거둘 때 안을 때(집착) 안는 일을 멀리 할 때 6. 찾을 때 잃을 때(잃어버렸다고 포기할 때) 지킬 때 버릴 때 (하숼리크) 7. 찢을 때 꿰맬 때 잠잠할 때 말할 때 8. 사랑할 때 미워할 때 전쟁할 때 평화할 때
이 스물여덟개의 이항대립쌍을 통해 전도서 기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9-10절을 잠시 건너뛰고 11절을 보세요. 전도서 기자의 메시지가 약간 드러납니다.
첫째, 하나님이 모든 것, 스물여덟쌍의 이항대립적인 일들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앗싸 야페 쁘이토)고 말합니다. <때를 따라>라는 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적당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중국의 <주역(The Book of Changes)>은 각 때에 맞는 적합한 행동들의 원리를 정리한 통계적인 행동훈(訓)들의 모음집입니다. 아주 손쉬운 행동훈은 이것입니다. <밀물이 올 때 배를 띄워라> <봄에 파종하라> 등입니다. 이것들은 비교적 손쉬운 시간적중적인 행동훈입니다. 그러나 좀 더 복잡하게 파고 들어가면 지금 우리가 맞이한 시간과 때에 맞는 적합한 행동이 무엇인지 분별하기가 힘듭니다. 히스기야가 피부암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사 39장) 이사야의 도움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여 15년의 생명을 더 연장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치유를 축하하러온 바벨론 사절단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는 치명적인 외교실책을 범합니다. 바벨론과 동맹하여 앗수르와 전쟁을 벌이기로 맹약합니다. 그리고 5년 후 유다왕국은 앗수르 제국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거의 절단났습니다. 전쟁할 때와 평화할 때를 분변하지 못하여 그 때에 맞는 행동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전도서 3:1-8은 기한과 때에 맞게 우리가 범사에 대응하는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전도서 3:2-8은 원리적으로 옳은 행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둘째, 천하범사는 반드시 시효가 있다는 말입니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는 때는 웃는 때에게 자리를 물려줍니다. 어느 때가 다른 때보다 반드시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보기에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을 뿐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든 일이 각자 알맞게 하나님의 목적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지구에서 벌어지는 자연현상, 동물, 식물들의 기막힌 동역과 상호의존과 협력관계망을 거의 모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하시는 일들 중 거의 대부분은 인간의 관심 밖에서 벌어지는 자연통치행위입니다. 남아메리카 대륙 사막의 먼지를 공중에 퍼 올려서 남아메리카 바다에 쏟아내는 폭풍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할까요? 지구생태학 저널리스트인 데이빗 애턴버러(David Attenborough)에 따르면 지구생태계가 얼마나 기막히게 조화로운지를 다채롭게 설명합니다(netflix Our Planet series 중 One Planet). 남미대륙의 사막의 모래먼지가 폭풍에 의해 하늘에 치솟았다가 페루 해안에 떨어집니다(매년 지구상의 20억톤이나 되는 먼지가 하늘로 치솟았다가 4분의 1이 해양영토에 뿌려져 해양플랑크톤과 미세조류들의 영양분이 됩니다). 사막모래에 담겨있던 영양분이 해양작은 동물들(크릴 새우들)의 먹이가 되고 그 작은 동물들은 고등어의 먹이가 되고 고등어는 돌고래의 먹이가 되고 가마우지의 먹이가 됩니다. 고등어떼가 심해에서 놀다가 돌고래에 쫓겨 해양수면 쪽으로 도망가면 바닷가에서 먹이를 구하는 가마우지와 해양갈매기들의 먹이가 됩니다. 특히 가마우지는 해수면 6미터 아래까지 다이빙해서 고등어를 사냥하며 고등어개체수를 평형상태로 유지시키는 데 기여합니다. 미생물학자, 세균학자, 해양생물학자, 동물학자, 식물학자들이 오히려 어떤 점에서는 신학자들보다 더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얼마나 조화롭고 상호의존적이며 공생적인가를 날마다 해마다 발견하여 논문을 써 냅니다.
이화여대 장윤재 교수의 최근 논문, <기후붕괴, 문명의 전환 그리고 신학의 재구성>([황홍렬 편, 코로나 19와 한국교회의 회심 [서울: 동연, 2020], 43-72쪽)은 코로나 19팬데믹은 지구생태계가 얼마나 놀라운 의존과 협력으로 작동되는지, 동식물, 피조물 각각이 얼마나 인간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지를 설득력있게 제시합니다. 이 책 69쪽에 <에코데믹, 끝나지 않은 전쟁>의 저자 마크 제롬 월터슨의 글을 인용합니다. <대중 매체는 대개 새 질병과 싸우는 (인간의) 전투만을 따로 떼어내 다룰 뿐, 수많은 질병들을 아우르는 더 큰 이야기인 생태학적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우리가 이렇게 생태적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된 새로운 전염병들을 에코데믹(ecodemic), 생태병, 혹은 환경전염병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보면 1년째 계속되는 코로나 19사태는 이전의 삶의 방식을 해체시키고 새로운 삶의 방식, 즉 생태학적 평화공존영성의 삶을 기르쳐주시려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과정일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 백신이나 치료제개발의 개가를 올리는 거대 제약회사는 동물착취와 희생의 중심현장입니다. 코비드 19팬데믹은 고통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에게는 헛되고 무익한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과 새롭게 소통하고 자연과 동물과 새로운 공생관계를 열어가는 창조적 고통일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사태로 신음하는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톰 라이트), 코로나 19가 생기기까지 고통당했던 피조세계에 와서 인간의 자연파괴로 상처입으신 하나님의 고통을 알고 회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샐리 맥페이그).
하나님은 이항대립쌍의 행사하심으로 인간을 교육시키며 연단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에는 카드가 두 장이 들려있습니다. 이 둘 어느 한가지는 좋고 나머지 다른 한 가지는 나쁜 것이기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고 속단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과 평화 둘 다를 지으십니다(사 45:7-8). 둘 다 당신의 목적에 맞게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은 이항대립적인 쌍들이 서로를 밀어내고 순환하는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적응시키셨습니다. 이 순환은 선순환도 아니요 악순환도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신을 만물의 척도라고 자랑해도 천하범사의 시간과 때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시키려고 하나님은 이런 규칙적이지만 신묘한 순환을 운행하십니다.
우리는 위에서 예시된 스물여덟가지의 이항대립적인 때와 기한 중 어딘가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때와 기한의 시효를 알고 행동할 것을 가르칩니다. 히스기야 왕처럼 평화해야 할 때에 전쟁을 벌이는 것은 자기파멸적인 치명상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2-8절의 이항대립적인 쌍들 중 하나는 좋고 다른 하나는 나쁘다고 봐서는 안됩니다. 각각은 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들입니다. <아름답게 하셨습니다>(11절). 그런데 이 때와 기한의 원칙을 모른 채로 무조건 수고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9-10절은 이 때와 기한의 원리를 도외시하고 애를 쓰는 것, 즉 수고와 노고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이항대립적인 때와 기한의 반복적인 순환 속에 사는 인간이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신비한 역사하심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기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때와 기한의 변동을 통해 인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 영원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과의 교제, 즉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을 것을 기대하십니다. 보통 경건한 감정을 표현한다고 이해되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말의 히브리어 어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인간)의 마음에 올람을 주셨다>.
이 구절에 <사모하다> 동사는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번역(Tanak Translation=put eternity in the mind)이나 대부분의 영어성경들은 <영원을 주셨다>라고 말합니다. 영원은 너무 심원해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비밀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 올람은 캄캄함(감춤/비밀/깨닫지 못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감추다, 캄캄하게 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알람의 명사형입니다. 따라서 <영원> 혹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나탄 올람>(God has given olam)은 아주 이차적인 의미에서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말이 됩니다.
올람은 <감춤>, <비밀>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고 <영원>을 의미하기도 하기에 이런 비유적인 번역, 즉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번역할 수는 있습니다. 굳이 쉽게 풀면 <때와 기한>에 대한 하나님의 규칙적이지만 신묘한 범사경영이 인간에게는 비밀처럼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파악하지 못한 채 어느 정도 혼미함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경우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해가되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매우 짧은 기간, 간단한 이해관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주 긴 영원한 관점에서 어떤 일을 행하시고 기획하십니다. 하나님이 인생에게 일으키는 일들은, 하루 아침에 피었다가 반나절에 시들고 마는 화초같은 덧없는 인간이 그것들의 시종을 다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의 시종을 다 파악하지 못한 채 인간은 오리무중상태, 즉 비밀 직면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유진 피터슨의 번역 message 성경 전도서만이 제 번역과 같습니다: He has left us in the dark[한국어 메시지 전도서: 하나님이 우리를 무지 가운데 두셨고). 그래서 하나님의 길고 긴 관점(시종을 다 파악하는 관점)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것이 개역개정이 말하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11절의 번역은 이렇게 됩니다.
<모든 각각의 일을 하나님은 각각의 때에 적합하게 행하십니다. 심지어 그들의 마음 안에 감춤(비밀, 오리무중상태의 인식불가능성 상황)을 주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행사의 처음부터 끝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앞에서 예를 들었던 히스기야 왕은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이 마지막에 무엇을 가져올지 몰랐습니다. 바벨론과 군사동맹을 맺은 것이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습니다. 히스기야의 바벨론 사절단 환대와 동맹체결이 140년 후 바벨론 제국의 침략을 초래했고 자신의 후손들의 바벨론 유배를 불러왔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일의 시종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마음에 심으신 올람, 감춤, 비밀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행사시종을 파악하지 못하게 만드는 영적 인식능력 혼미 때문입니다.
14절의 <영원히 있을 것이다>라는 구절도 거의 같은 의미입니다. 14절의 직역은 이렇습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각각의 일, 그것은 감춤(올람)/혹은 비밀이 될 것입니다. 그것에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그렇게 행하십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삼가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올람, 즉 하나님의 일들의 시종을 파악하지 못하게 인식능력을 앗아가 오리무중 상태에 두신 목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심어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의 회복은 10% 경제성장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인류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이 스스로 지구최강 포식자라는 오만을 깨고 하나님의 창조주권, 통치권을 받아들이며 엎드리는 것이 인류의 행복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설정하신 자신의 한계와 영역을 잘 지키고 다른 피조물과 동식물과의 조화로운 공존을 추구하는 생태적 사고가 하나님 경외의 핵심입니다.
하나님 경외는 하나님의 창조질서 존중 계명을 삼가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정계명을 전심으로 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부정계명을 삼가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첫 계명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삼가하며 인간이 지구의 최강 포식자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아 지구를 섬기는 하나님의 청지기 부왕임을 자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지구를 하나님 몸 대하듯이 거룩하게 대하고 거룩하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른 피조물들인 동물들을 하나님 마음으로 다스리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땅에서 나오는 모든 소출과 부를 이웃들과 함께 누리며 하나님의 선물에 무한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경건하게 축소시키고 자기의 탐욕과 권한을 거룩하게 제한하며 그 제한된 자리에 이웃의 인권과 생존권을 영접해 들이라는 것입니다.
코비드 19팬데믹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촉발된 경건회복훈련의 시기입니다. 우리는 언제 코로가 19사태가 끝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코비드 19팬데믹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심어준 올람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건한 자기위축을 맛보아야 합니다. 코비드 19 팬데믹 상황에서 저는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주신 영적 오리무중 혼미 때문에 하나님의 행사 시종을 파악하지 못하는 가운데 위축감을 맛보고 있습니다. 기도응답도 없습니다. 백신개발소식도 위로가 안됩니다. 하나님이 제게 심어주신 올람 때문에 저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옴을 새벽마다 밤마다 느낍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올 때 저는 영적으로 소생되기 시작합니다. 예배가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평소에 간과했던 하나님의 창조주권 관련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이런 영적 오리무중 상태에서 우리는 아주 소박한 행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 손으로 행한 수고로 먹고 마시는 생계를 유지하는 일상의 행복입니다. 둘째, 이 작은 일상에서도 여전히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공동체에 속한 다른 지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환난의 날에는 이 작고 규칙적이고 소박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엄청 나게 중요합니다. 행복한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결론 이처럼 허무한 날들, 때와 기한들의 반복 속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손으로 하는 노동의 수고를 즐기는 소확행을 누리도록 초청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는 손노동의 수고로 하나님의 선물을 누렸던 지난 날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때였는가를 매일 실감하는 하루하루입니다. 우리가 손으로 한 노동의 결과 번 소득도 이제보니 하나님의 선물이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습니다. 노동할 것이 없는 환난의 시대입니다. 코비드 19팬데믹은 확실히 파괴적입니다. 그러나 이 파괴적인 일 다음에 반드시 건설적인 일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은 코비드 19를 통해 파괴일변도로 인간문명을 위협하시거나 연약한 인간피조물을 고통스럽게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뭔가를 세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코비드 19환난으로 확실히 찢으십니다. 그러나 이 찢으심은 하나님의 꿰매실 시간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은 인간의 이해범위를 벗어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고 기다립니다. 때와 기한으로 이루어진 이 시간 속박적인 삶을 벗어나 하나님과 영원히 거하는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사실상 하나님의 행사의 시종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영적 무능력이며 이 영적 무능력에서 오는 하나님 경외심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삼가 하나님 전심사랑계명과 이웃사랑계명을 준행하는 데 가일층 전심을 쏟는 성도가 하나님의 영원에 참여하는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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