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6주(나) 쉬어라12,07,22
김형수 비오 신부님
사랑합니다.
마르코는 선교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들떠서 기뻐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합니다(마르코6,30-34). 제자들이 나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쳤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제자들은 바빴습니다. 하는 일마다 성공했습니다. 몸은 지쳐있었지만 마음은 신났습니다. 의기양양(意氣揚揚)했습니다. 달리는 말에도 채찍질을 가한다(走馬加鞭)는 말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의 또 다른 격려 말씀을 기대했습니다.『너희는 선택된 백성이다. 하던 일을 계속해라.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너희가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는 일꾼이다. 나는 너희만 믿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은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너희는 사람도 마을도 없는 곳으로 따로 가서 잠시 쉬어라(6,31 참조).』 창세기의 기록을 눈여겨봅니다(창세기2,3).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다.』
쉼(休息)은 멈춤입니다. 멈춤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이 세상의 일이나 생각을 떠나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나아감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감은 세상을 정복하지도 다스리지도 못하는 인간 스스로의 한계를 돌아보고 무한하신 하느님을 우러러봄입니다.
쉬라고 하시는 예수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성경(聖經)을 더 찾아봅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우리들처럼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리셨고(마태오4,2), 목말라하셨고(요한19,28), 시장해 하셨으며(마태오 21,18),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셨고(요한11,35), 피곤해하셨으며(요한4,6), 식사도 하셨습니다(마르코14,3).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이 과로로 쓰러지지나 않을까 염려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따로 사람도 마을도 없는 곳에 가서 잠시 쉬어라.』 현대인의 쉬는 문화는 또 다른 스트레스를 불러옵니다. 그와 달리 주님께서는 쉼의 기본적인 원리를 제시하셨습니다. 진정한 쉼은 『따로』 가져야 하고, 『외딴곳 - 사람도 마을도 없는 곳』으로 가야하며, 『잠시』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쉼은 육체적(肉體的)인 회복(回復)뿐 아니라, 영적(靈的)인 재충전(再充電)을 의미합니다. 기도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느님 안에 행복해 하는 쉼(休息)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만큼 활동과 책임으로 꽉 찬 생애는 또다시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하기 위해서 외딴곳으로 자주 가시어 따로 기도하셨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과 통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제자들처럼 세상의 습관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삶이 있어야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 있어야합니다. 하느님께서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어야합니다. 모든 다른 소리를 차단하고 조용한 가운데 하느님 앞에서 기다릴 때, 영혼의 침묵이 하느님의 음성을 더욱 분명히 들리게 합니다. 흙으로 빚은 연약한 인간은 쉼(休息)을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나 가족 단위로 한적한 곳에서 따로 자주 쉬기도 하고 기도하며, 예수와 함께 참 쉼(休息)을 경험하는 습관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12,1).『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 조용한 마음의 쉼터(安息處)로 들어서면, 세례를 받던 때에 들었던 말씀이 다시 들릴 것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께 하신 그 말씀을 나에게 다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부드럽게 말씀하시지만 끊임없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에 조용한 장소를 마련하고 그 말씀을 듣게 되면, 우리는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완성될 ‘나’를 미리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만 하면 우리는 더 이상 목자 없는 양(羊)이 아닙니다.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잃고서 아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온하고 고요하고 기쁜 곳에서 쉴 줄 아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조용한 쉼터를 찾게 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되면 우리는 감각을 뛰어 넘어 탈혼 상태에 들어가게 되고, 천상 기쁨으로 가득차서 지상 것을 잊게 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실제로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게 되면, 일상생활(日常生活)에서 보다 더 성실하고 알찬 인간(人間)이 됩니다. 사실 우리에게 불행한 것은 창조주(創造主)와 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그분 곁에서 세상과 자기 삶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만 있다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일과도 가까워지고, 하느님과도 가까워집니다. 이웃과도 가까워지고, 자신과도 가까워집니다. 그러니 행복한 인생여정(人生旅程)의 연속(連續)입니다. 그 체험을 한 후에 이스라엘의 예언자(預言者)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베풀어주시는 하느님, 은혜로운 하느님을 만나 뵈웠기 때문입니다(호세11,1; 예레3,19 참조).
성경으로 돌아가 우리 앞에 사신 분들이 쉬는 모습을 살펴봅니다.
탈출기(20,8-11)의 기록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
탈출기(23,10-12)는 쉬어야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너희는 육 년 동안은 밭에 씨를 뿌려 그 소출을 거두어들이고, 칠 년째 되는 해에는 땅을 놀리고, 소출을 그대로 두어 너희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고, 남은 것은 들짐승이나 먹게 하여라. 너희 포도원도, 올리브 밭도 그렇게 하여라. 너희는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그래야 너희 소와 나귀도 쉴 수가 있고,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
신명기(5,12-14)도 인간이 쉬어야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희 하느님 야훼가 분부하는 대로 해야 한다.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소와 나귀와 그 밖의 모든 가축과 집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그래야 네 남종과 여종도 너처럼 쉴 것이 아니냐?』
룻기(3,13)는 쉬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룻에게 쉬어야할 이유를 설명합니다.『이 밤은 여기서 지내어라. 내일 아침에 그가 너를 맡겠다고 나서면, 좋다. 그가 너를 맡을 것이다. 만일 그가 싫다고 하면, 내가 반드시 너를 맡아주겠다. 날이 샐 때까지 여기에서 쉬어라.』
시편(62,5)은 하느님 안에 쉬기를 소망합니다. 『내 영혼아, 오직 하느님 품속에서 고이 쉬어라, 나의 희망은 오직 그분에게 있나니.』 시편(116,7)은 또한 하느님께 감사하는 뜻으로 쉬라고 합니다. 『야훼께서 너를 너그럽게 대하셨으니, 내 영혼아, 너 이제 평안히 쉬어라.』
다니엘(12장 참조)에게 누가 쉴 수 있는가를 알려줍니다.『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단련을 받아 깨끗해져서 빛날 것이다. 악한 사람들은 끝내 눈이 열리지 않아 악한 짓을 계속하겠지만, 슬기로운 지도자들은 눈이 열려 환하게 알 것이다. 그러니 그만 가서 쉬어라. 세상 끝 날에 너는 일어나 한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잠 못 이루는 밤이 있습니다. 자야할 때 자지 못하면 얼마나 힘듭니까? 우리의 영혼도 쉴 때가 있어야 합니다. 잠들 때가 있어야 합니다. 영혼이 쉴 수 있도록 늘 용서(容恕)하고 늘 받아주고 늘 참아주고 늘 사랑하는 법을 마음에 익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 안에 안주(安住)하는 사람입니다. 마태오(11,28)는 산상수훈에서 누가 예수님께 가서 쉴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