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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판 매계 조공 신도비명(參判梅溪曺公神道碑銘)
우리나라의 문치(文治)는 성종 임금 때보다 융성한 적이 없었으니, 도의(道義)와 문장을 갖춘 훌륭한 선비들이 많았다. 이때에 매계(梅溪) 조 선생(曺先生)이 임금의 특별한 은혜와 지우를 입었는데, 혼조(昏朝연산군)에 이르러서는 가장 혹독한 화를 당했으니, 군자들이 애통하게 여긴다.
공의 휘(諱)는 위(偉), 자(字)는 태허(太虛)이며, 창녕(昌寧) 사람으로 신라 태사 계룡(繼龍)의 후손이다. 족보는 중간에 일실되었는데, 고려 초에 이르러 휘(諱) 겸(謙)이 태조(太祖)의 둘째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며, 관직이 대악서승(大樂署丞)에 이르렀는데, 대대로 여덟 대에 걸쳐 평장사를 지냈다.
고조 휘 우희(遇禧)는 시중을 지냈고, 증조 휘 경수(敬修)는 밀직부사 상호군을 지냈다. 조부 휘 심(深)은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부친 휘 계문(繼門)은 현령을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니, 두 세대가 추증의 영예를 누린 것은 공이 높은 관직에 올랐기 때문이다.
모친은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황명(皇明) 경태(景泰) 갑술년(1454, 단종 2) 7월 경신일에 김산(金山경북 김천) 봉계촌(鳳溪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겨우 5세에 문자를 알았고 재주와 생각이 탁월했으며, 7세에 이미 시(詩)로 이름이 났다.
문충공(文忠公)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공의 자형(姊兄)이었는데, 10세부터 그에게 가서 배웠다. 한번은 참판공을 따라 서울에 갔는데, 종숙(從叔) 충간공(忠簡公) 조석문(曺錫文)이 공을 보고서 기특하게 여겨 직접《소학》을 가르쳐 주었다.
장성하자 다시 함양(咸陽)에서 점필재에게 수학하였는데, 폭넓게 강론을 하였다. 점필재가 늘 말하기를 “내가 태허와 강론하면 마치 강수(江水)와 하수(河水)가 쏟아지는 듯하니, 태허는 참으로 나의 스승이로다.”라고 하였다.
신묘년(1471, 성종 2)에 삼장(三塲)에서 장원을 차지하였고, 임진년(1472, 성종 3)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갑오년(1474, 성종 5)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사국(史局)에 들어갔다. 얼마 후에 한림연(翰林宴)에 연좌되어 김산(金山)으로 귀양 갔다.
병신년(1476, 성종 7)에 특별히 명을 내려 채수(蔡壽), 유호인(兪好仁) 등 여섯 명과 함께 장의사(藏義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도록 하였고, 다음 해에 또 홍문관의 정자에 선발되었다. 공은 또 채수 등과 함께 송경(松京)으로 유람을 갔는데, 그때 수창한 시가 세상에 전하니, 국가의 성대함을 떨쳤다고 할만하다.
계묘년(1483, 성종 14)에 시강원을 신설하여 공을 문학으로 삼았다가 응교로 자리를 옮겼다. 부모가 연로한 까닭에 봉양을 위해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나갔는데, 고을을 다스리면서 학교를 부흥하고 인재를 기르는 것을 급선무로 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공에게 지은 시를 뽑아 올리라고 명을 내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상주한 말이 임금의 뜻에 맞으니, 공의 부모에게 쌀과 콩을 하사하도록 명하고, 교서를 내려 표창하기를,
“그대가 문장으로 입신하여 경연에 참석해 가까이에서 보필하였기에 내가 인재로 여긴 지 오래이다. 그런데 부모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곁에서 봉양하기를 원하여 가까운 고을의 수령에 제수하였으니, 이는 부득이한 형편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가 시종신이었던 까닭에 감사에게 하유하여 그대의 부모에게 곡식을 보내게 해서 고을 사람들이 그대가 옛것을 공부한 역량으로 인해 그 영광이 부모에까지 미치게 된 사실을 알게 하니, 그대는 잘 알도록 하라.”
하니, 공이 전문(箋文)을 올려 감사의 뜻을 아뢰었다.
문헌공(文獻公)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이 당시에 본군(本郡)에 살고 있었는데, 공과는 동문수학했던 사이이다. 늘 공무의 여가에는 함께 경전을 강론하였으며, 그가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그를 위하여 상을 치러주었고, 또 장례 물품을 마련해 주었다. 함양 군수의 임기가 끝날 무렵 부친상을 당하자, 임금이 특별히 명을 내려 쌀과 콩을 하사하였으니, 지방관에게 부의(賻儀)를 주는 것은 공에게서 시작되었다.
공은《가례(家禮)》대로 상을 치르고, 상복을 벗고 나서는 의정부 검상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장령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자급을 뛰어넘어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 겨울에 대부인을 모시고 비로소 서울의 동쪽 낙봉(駱峰: 낙산(駱山) 아래로 돌아와서는 돌을 모아 계단을 만들고 화초를 심어 그윽한 흥취를 보탰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가 사는 곳을 가리켜 매계(梅溪)라고 하였다.
임자년(1492, 성종 23)에 도승지로 자리를 옮겼으며, 가을에 점필재의 상을 당해 곡을 하였다. 계축년(1493, 성종 24)에 호조 참판으로 승진하고, 가을에 연로한 모친을 이유로 상소를 올려 돌아가기를 청하고 축수연을 베푸니, 당시 사람들이 영예로운 일이라 여겼다.
갑인년(1494, 성종 25)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을 적에는 목소리와 얼굴빛을 엄하게 하지 않아도 교화가 온 도에 두루 미쳤다. 이해 겨울에 성종이 승하하자, 공이 애통한 마음에 살려는 마음이 없었다. 시를 지어 애통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담자, 사림이 전하여 암송하였다.
을묘년(1495, 연산군 1)에 한성부 우윤을 거쳐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가을에 다시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얼마 후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무오년(1498, 연산군 4)에 동지중추부사 겸 부총관에 임명되어 성절사(聖節使)로 연경에 조회를 갔는데, 당시는 혼조(昏朝연산군)의 시기라 큰 사화(史禍)가 일어났다.
과거에 점필재가〈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는데, 공이 점필재의 문집을 편찬하면서 이 글을 문집에 넣었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공이 실록을 편수하면서 또 이 글을 기록하였는데, 적신(賊臣) 유자광(柳子光) 등이 대역(大逆)이라고 무함하여 점필재는 부관참시를 당하고 탁영은 극형을 당하였으며, 한 시대의 명류(名流)들이 재앙에 걸려 거의 남아나지 않았다.
공 역시 그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연산군이 명을 내려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압록강 가에 이르면 죽이라고 하였다. 공이 요동(遼東)에 이르러서야 이 소식을 들었는데, 일행은 모두 놀라 어찌할 줄을 몰랐으나 공은 유독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안색에 변화가 없었다.
압록강에 이르자, 곧장 서울의 감옥으로 붙잡아 오라는 명이 내렸는데, 마침내 의주(義州)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공은 유배지에 있을 때 규정(葵亭)을 짓고 기문(記文)을 지어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1년 동안 그 곳에 있다가 순천(順天)으로 유배지를 옮겼는데,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공 역시 희천(煕川)에서 이배(移配)되어 왔다.
공과는 동문수학한 사이라 서로 강학을 하였고, 고을 관아 서쪽 경치 좋은 곳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어 임청대(臨淸臺)라 이름하고 그곳에서 소요하며 예측하기 어려운 재앙이 닥치는 줄도 몰랐다. 마침내 계해년(1503, 연산군9) 11월 26일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0세였다.
한훤당이 그의 상을 치러주었고, 서제(庶弟) 조신(曺伸)이 운구를 하여 돌아왔다. 이듬해 3월에 황간(黃㵎) 마암산(馬巖山) 아래 선영에다 장례를 치렀는데, 이해 가을에 다시 사화가 일어나 또 구천에서 화를 당해 시체를 삼일 동안 꺼내놓았다. 예전에 요동 사람이 공의 길흉을 점치면서,
천 장 물결 속에서 몸이 빠져 나올 테지만 / 千層浪裡飜身出(천층낭리번신출)
응당 바위 아래에서 사흘 밤을 유숙하리라 / 也須巖下宿三宵(야수암하숙삼수)
라는 시구를 지은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징험되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제일 먼저 신원하여 공을 특별히 이조 참판으로 추증하고, 그 자손들을 녹용하는 명을 내렸다. 숙종 때에는 이조 판서로 추가로 추증하고 시호를 문장(文莊)이라 하였다.
공은 평산 신씨(平山申氏)와 혼인하였는데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의 후손이자 현감 윤범(允範)의 따님이다. 자식을 낳았으나 죽어서 종제(從弟) 군수 조척(曺倜)의 차남 사우(士虞)를 후사로 들였으니,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사우는 집안의 환란을 애통해하여 두 차례 별제(別提)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세 아들을 낳았는데, 윤희(胤禧)는 시정(寺正)이고, 윤신(胤申)은 군수이며, 윤지(胤祉)는 현령이다. 후손은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사람됨이 영특하고 기국(器局)이 넓어, 평소에 장자(長者)의 풍모가 있다고 일컬어졌다. 일찍 큰 인물을 만나 귀의하였으며, 함께 종유하던 사람들은 모두 한 시대의 큰 유학자와 뛰어난 선비들이었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난 데다 학문의 힘으로 배양하여 비록 다급하고 경황이 없는 순간에도 편안히 대처하여 말을 빨리하거나 안색이 갑자기 바뀌는 일이 없었다. 허백(虛白) 홍귀달(洪貴達)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공은 삼대(三代)와 양한(兩漢)의 문장이 아니면 공부하지 않았고, 재상의 도리는 고요(皐陶), 기(夔), 익직(益稷), 설(契)을 기준으로 삼았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가 학문을 할 때에는 도달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았고, 단지 죽고 난 뒤에 그만둘 뿐이었다.”
하였으니, 공의 대략을 알았다고 할 만하다.
아, 공이 천 명 가운데 한 번 태어날 만한 성군을 만나서 임금의 계획을 빛내고 성대한 시대를 노래한 일은 진실로 고금에 견줄 만한 이가 드물다. 그러나 평탄하고 험난한 운수는 일정하지 않아 사림이 양구(陽九)를 만나서 결국 한훤당, 일두와 같은 여러 현인들과 함께 전해지게 되었으니, 비록 혹여 생전에 화를 면했다고 할지라도 결국 죽은 뒤에는 화를 면하지 못했다.
공이 지은 규정(葵亭)이나 임청대(臨淸臺)에 관한 기문을 보면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하여〈이소(離騷)〉의 남은 뜻을 깊이 얻었으니, 천 년 뒤에도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탄식하고 무릎을 치기를 그만두지 못하게 할 것이다. 시문은 재앙을 겪은 뒤에 흩어졌는데, 문집 약간 권이 지금에야 비로소 세상에 간행되었다. 그의 후손 세호(世虎)가 신도비를 세우고자하여 조카 부(𩅿)를 시켜 신도비명을 부탁하니, 사양하지 못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점필재의 도에서 / 佔畢之道
공이 그 문장을 얻었네 / 公得其文
그 문장은 어떤 것인가 / 其文維何
경술에 근원을 두었네 / 經術根源
〈귤송(橘頌)〉으로 인정을 받아/ 橘頌見許
문단에서 명망이 높았네 / 望隆詞垣
선릉[성종(成宗)]의 시대에는 / 在宣陵世
문치가 성대하였으니 / 文治郁郁
옥당과 금마에는 / 玉堂金馬
재주있는 선비 넘쳤네 / 材彥雲蔚
공은 그 사이에서 / 公處其間
은혜와 예우 최고였지 / 恩顧最渥
잠시 수령으로 나가기를 허락하고 / 暫許懷章
빈번히 하사품 내렸네 / 錫賚便蕃
옛날을 상고하는 힘으로 / 稽古之力
임금의 칭찬받았네 / 上有褒言
천운은 반복되어 / 天運往復
평탄한 길 있으면 가파른 길도 있는 법 / 有平則陂
사행길에서 돌아오자마자 / 星軺纔稅
편여를 타고 / 箯輿載馳
남북의 산천으로 / 南北山川
쫓겨나 떠돌았네 / 放逐流離
무양(巫陽)이 내려오지 않고/ 巫陽不降
유배지에서 혼을 불렀네 / 鵩舍魂招
남은 재앙 다하지 않아 / 餘禍未殄
바위 아래에서 사흘 보냈네 / 巖下三宵
예로부터 문장은 / 從古文章
영달하면 미워하는 법 / 命達是憎
당적(黨籍)의 영화가 / 黨籍光華
붕우에게도 미쳤으니/ 爰及友朋
한훤당 일두와는 / 寒暄一蠹
죽어서 함께 전해졌네 / 死而同傳
영락한 처지에서 지은 글에도 / 零落文藻
충성과 애국을 잊지 않았으니 / 忠愛眷眷
수조(水調)의 남은 뜻 / 水調餘意
천 년 후에 볼 수 있도다 / 千載可見
마암(馬巖)의 무덤에 / 馬巖之阡
화벽(化碧)이 묻혀 있으니 / 化碧攸藏
내가 명시(銘詩)를 지어 / 我作銘詩
무궁한 후대에 보이노라 / 用示無疆
<끝>
[脚註]
[주01] 참판 …… 신도비:
이 글은 조위(曺偉, 1454~1503)의 신도비이다. 조위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이다. 7세에 시를 지
었고 1474년(성종5)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등을 거쳐 사헌부와 홍문관의 벼슬을 역임하고 함양 군수가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무오사화가 일어나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순천으로 옮겨진 뒤, 그곳에서
죽었다.
[주02] 삼장(三塲):
시험의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를 말한다.
[주03] 한림연(翰林宴)에 …… 갔다:
조위가 금주령을 어기고 한림연에서 술을 마시고 소를 잡고 유밀과(油蜜果)를 베풀어 풍악을 울린 죄로 처벌 받은 일을 말한다. 《成宗實錄 6年 8月 4日ㆍ10月 3日》
[주04] 당시는 …… 일어났다:
무오사화를 말한다. 1498년(연산군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들이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이 사화는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면서 자신이 기초한 사초(史草)
속에 김종직의〈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삽입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이므로 다른 사화와는 달리 이처럼 ‘사화(史禍)’라
고 일컫기도 한다.
[주05] 이해 …… 일어나:
갑자사화를 말한다. 1504년(연산군10)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 사건과 사사 사건을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연산군이 알게 되
면서 촉발되었으나, 조정 신하들 간의 암투로 격화되어 많은 인물들이 희생되었다. 이후 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달하였다.
[주06] 양구(陽九):
큰 액운(厄運)을 이른다. 음양가(陰陽家)의 설에 따르면, 4617년을 주기로 순환하는 1원(元)의 처음 106년째가 되면 큰 재해가 일
어나는데, 이를 양구라 한다.《漢書 卷99 王莽傳》
[주07] 이소(離騷)의 …… 얻었으니:
조위가 유배를 당해서도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소〉는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작품으로, 조정에서 쫓겨난 후의 시름과 연군(戀君)의 정을 노래하였다.
[주08] 귤송(橘頌)으로 인정을 받아:
굴원의〈귤송〉에 “나이 비록 어리지만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年歲雖少可師長兮]”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김종직이 조
위가 나이는 어리지만 재주가 매우 뛰어나다고 칭찬했던 일을 가리킨다.《楚辭 卷4》
[주09] 옥당(玉堂)과 금마(金馬):
옥당서(玉堂署)와 금마문(金馬門)으로 한(漢)나라 때에 학사들을 초대하였던 곳이었는데, 뒤에는 한림원(翰林苑)이나 한림학사
(翰林學士)를 지칭하였다.
[주10] 무양(巫陽)이 내려오지 않고:
무양은 죽은 이의 넋을 불러온다는 전설상의 여자 무당으로 상제(上帝)가 인간 세상에 내려 보냈다고 하는데, 《초사(楚辭)》〈초혼
(招魂)〉에 나온다. 곧 넋을 불러올 수 있는 신통한 무당도 하늘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11] 당적(黨籍)의 …… 미쳤으니:
조위를 비롯하여 크게 사화(士禍)를 입은 그의 벗들이《무오당적(戊午黨籍)》에 실린 일을 말한다.
[주12] 수조(水調):
송(宋)나라 신종(神宗) 때 소식(蘇軾)이 귀양지에서 지은〈수조사(水調詞)〉에 “내가 바람을 타고 돌아가고 싶지만 또한 임금 계
신 궁궐 높은 곳이 추위를 이기지 못할까 염려되네.[我欲乘風歸去, 又恐瓊樓玉宇, 高處不勝寒].”라고 하였는데, 이 노래가 전파
되자 신종이 듣고는 “소식이 끝까지 임금을 사랑하는구나.” 하면서 죄를 감하여 귀양지를 옮겨주었다.《古今事文類聚 前集 卷11
坡詞愛君》
[주13] 화벽(化碧):
주(周)나라 경왕(敬王) 때의 대부(大夫)인 장홍(萇弘)이 왕에게 간하다가 죽음을 당했는데, 그의 피가 벽색(碧色)으로 변했다는 고
사에서 비롯되어 신하가 충성을 다하다가 살신(殺身)하는 경우를 말한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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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參判梅溪曺公神道碑。
國朝文治。莫盛於成宗。彬彬多道義文章之士。當是時。梅溪曺先生恩遇特異。逮昏朝。遘禍最酷。君子哀之。公諱偉。字大虛。昌寧人。新羅太師繼龍之後。譜牒中逸。至麗初有諱謙。尙太祖第二女。官至大樂署丞。世爲平章凡八世。高祖諱遇禧侍中。曾祖諱敬修密直副使上護軍。祖諱深早卒贈兵曹參議。考諱繼門縣令贈吏曹參判。兩世追榮。以公貴也。妣文化柳氏。皇明景泰甲戌七月庚申。生公於金山鳳溪村。公甫五歲。能知文字。才思卓越。七歲已有能詩聲。佔畢齋金文忠公宗直。公姊兄也。自十歲已往學焉。嘗隨參判公往京。從叔父忠𥳑公錫文見而奇之。親授小學。旣長復從畢齋于咸陽。講論博洽。畢齋每稱吾與大虛講論。若决江河。大虛眞我師也。辛卯三塲居魁。壬辰生進。甲午擢文科。由槐院入史局。已而坐翰林宴謫金山。丙申特命同蔡壽,兪好仁等六人。賜暇讀書于藏義寺。翌年又選玉堂南床。公又嘗與蔡壽等同遊松京。有酬唱詩什行于世。可謂鳴國家之盛矣。癸卯新設侍講院。以公爲文學。遷應敎。以親老乞養得咸陽。其治以興學育材爲先。先是上命公抄進所製詩。至是又上奏稱旨。命賜父母米豆。仍又下書褒諭曰。爾以文章致身。昵侍經幄。爲予所器者久矣。以親老辭職。求侍養得除近郡。蓋出於不得已也。予以侍從之故。下諭監司。致餼于爾親。使鄕里知爾以稽古之力。榮及其親。爾其知悉。公上箋陳謝。一蠹鄭文獻公汝昌時居本郡。於公爲同門道學交也。每於簿牒之暇。相與講磨經傳。及其丁憂也。爲之治喪。且營辦其葬具。秩滿遭父喪。上特命賜米豆。外官致賻自公始。公執喪如家禮。服闋除檢詳。遷掌令。超擢爲同副承旨。冬奉大夫人始還京城之東駱峰下。聚石爲階。種花卉以助幽趣。時人指其居曰梅溪。壬子遷知申事。秋哭畢齋喪。癸丑陞拜戶曹參判。秋以親老上章乞歸。設壽宴。一時榮之。甲寅出按湖西。不大聲色治。化洽於一道。是冬成廟賓天。公痛絶若無生。有詩以寓哀慕之情。士林傳誦。乙卯由漢城右尹。拜大司成。秋復按湖南。未幾遭內艱。廬墓三年。戊午拜同知中樞府事兼副摠管。以聖節使朝京。時當昏朝。史禍大起。蓋畢齋嘗作弔義帝文。公編其文集。而是文在其中。濯纓金公馹孫修史時又錄是文。賊臣柳子光等誣以大逆。畢齋剖棺。濯纓置極刑。一時名流罹禍殆靡遺。公亦被株連。燕山命待還至江頭而殺之。公至遼東。始聞此報。一行皆驚懼失措。公獨顔色不變。若無聞也。及至鴨綠。旋命拿致京獄。遂有義州之謫。公在謫築葵亭作記。以寓戀闕之思。居一年量移于順天。寒暄堂金文敬公宏弼亦自煕川移配。公以同門友。相從講學。以府治之西。有川石之勝。累石爲臺。名以臨淸。逍遙其中。不知禍色之叵測也。竟以癸亥十一月二十六日卒于鵩舍。享年五十。寒暄堂爲治其喪。庶弟伸奉柩還。明年三月葬于黃㵎馬巖山下先壠。是秋士禍更作。又遭泉壤之禍。暴尸三日。遼人嘗占公吉凶。有千層浪裏飜身出。也須巖下宿三宵之句。人莫曉其意。至是始驗云。中廟靖國。首雪寃枉。特贈吏曹參判。仍命錄用子孫。肅廟朝加贈吏曹判書。諡曰文莊。公娶平山申氏壯節公崇謙之後縣監允範之女。嘗字而不育。以從弟郡守倜之次子士虞爲嗣。從遺命也。士虞痛家難。再除別提不就。生三子。胤禧寺正,胤申郡守,胤祉縣令。後承多不能盡記。公爲人英特。氣宇寬弘。素號有長者風。早得大賢。以爲依歸。所與遊皆一代宏儒俊士。天分旣高。培以學力。雖顚沛章皇之際。處之安泰。無疾言遽色。虛白洪公貴達嘗謂公文章非三代兩漢不居。相道以皐,夔,稷,契爲準。餘子有不數。其爲學不至不止。直斃而後已。可謂得公之大略也。噫。公遭逢千一之聖。所以煥王猷而鳴盛際者。固古今之鮮匹。而平陂不常。士林陽九。卒與寒暄,一蠹諸賢同傳。雖其或逭於生前。終至不免於身後。觀其所爲葵亭,臨淸之記。忠愛惻怛。深得楚騷遺意。千載之下。尙可以令人噓唏擊節而不能自已矣。詩文散逸於禍餘。文集若干卷。今始刊行于世。其後孫世虎將樹大碑。使從子𩅿乞銘。不能辭。銘曰。
佔畢之道。公得其文。其文維何。經術根源。橘頌見許。望隆詞垣。在宣陵世。文治郁郁。玉堂金馬。材彥雲蔚。公處其間。
恩顧最渥。暫許懷章。錫賚便蕃。稽古之力。上有褒言。天運往復。有平則陂。星軺纔稅。箯輿載馳。南北山川。放逐流離。
巫陽不降。鵩舍魂招。餘禍未殄。巖下三宵。從古文章。命達是憎。黨籍光華。爰及友朋。寒暄一蠹。死而同傳。零落文藻。
忠愛眷眷。水調餘意。千載可見。馬巖之阡。化碧攸藏。我作銘詩。用示無疆。<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