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 7. 5. 11:49
네덜란드 덴하흐(Den Haag, 헤이그) 에이컨다위넌(Nieuw Eykenduynen)
공동묘지에 있는 대한제국 헤이그특사 이준 관련 묘역.
건립시기 : 1907년 7월 17일
소재지 : 네덜란드 헤이그 니우 에이컨다위넌(Nieuw Eykenduynen) 공동묘지
한국 봉환 전 네덜란드 덴하흐(Den Haag, 헤이그) 에이컨다위넌(Nieuw Eykenduynen) 공동묘지에 있는 대한제국의 헤이그특사 이준 열사 묘이다. 1907년 6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1906년 4월에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는 회의를 발의한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초청장을 비밀리에 받았다.
고종 황제는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 이상설(李尙卨), 이위종(李瑋鍾), 이준 등을 특사로 파견하였다.특사들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여 1907년 6월 25일경에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하였고, 숙소인 융 호텔(Hotel De Jong)에 태극기를 내걸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서 외교권이 박탈된 상태였으므로, 평화회의 본회의 참석이 봉쇄되었다.
특사들은 참석하기 위한 노력을 다각적으로 펴나갔지만, 일본 대표의 방해로 끝내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회의를 취재하던 프랑스·독일·영국·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 기자들에 의해서 보도되었고, 특히 기자단협회 회장인 영국인 스테드(William T. Stead)의 전폭적 지지로『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erence)』에 호소문이 게재되었다.
7월 9일에는 기자협회에 귀빈으로 초청되었는데, 이위종은 프랑스어로「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주제로 열정적인 연설을 하여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이처럼 특사들은 일제에 의해 강요된 ‘을사늑약’이 무효임과 함께 일제의 불법적인 행위를 고발하였지만, 외교권의 박탈로 인해 활동이 어렵게 되면서, 7월 14일에 이준은 순국하고 말았다.
당시 이준의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이위종, 장지연, 박은식 등이 기록한 여러 자료에는 ‘분사(憤死)’라고 되어 있다.
그 뒤 이상설은 7월 17일에 이준의 유해를 헤이그 교외에 자리한 니우 에이컨다위넌 공동묘지에 임시로 묻었다.
9월 6일에는 이위종과 함께 102길다 95센트의 돈을 지불하고서 영구임대의 형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1963년에 이준 열사의 유해는 한국으로 옮겨져 서울의 수유리에 안장되었지만, 옛 무덤 자리에는 흉상과 함께 ‘일성이준열사의 묘적’이라는 글자를 새긴 비석이 건립되었다. 현재는 이준 열사의 활동과 순국에 관한 안내문도 함께 부착되어 있다.
[참고문헌]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Ⅷ(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 편,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2008)『국외 항일운동유적(지) 실태조사보고서』Ⅱ(문화관광부·독립기념관·한국근현대사학회 편,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2002)『이상설전(증보판)』(윤병석,일조각,1998)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준열사구묘역(李儁烈士舊墓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