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대사간 홍우서 묘지명(大司諫洪禹瑞墓誌銘) - 이재(李縡)
[생졸년] 1662년(현종 3)~1716년(숙종 42) / 향년 54세
대간 홍중웅(洪仲熊)은 나와는 망년지우로 과분하게도 동방(同榜)인데다 또 동료로서 진퇴와 영욕을 늘 함께하였다. 나는 평소 남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관직을 사양하고 한가로이 지낼 때에는 벗과 어울리는 일이 날로 소원해져 집밖을 나서면 공 외에는 달리 갈 데가 없었다.
공을 만날 때마다 기뻐하며 돌아가는 것도 잊었는데 이따금 술을 마시고 시를 읊조리니 풍류가 넘쳐흘렀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9년이 흘렀다. 나는 노쇠하고 병든 채 아직 죽지 않고 온갖 변고를 겪었는데 옛날 공과 노닐었던 것을 추억한들 아득하여 얻을 수 없으니, 공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또 스스로 슬퍼할 따름이다.
공의 아들이 내게 공의 묘지문을 부탁한 지도 이미 몇 해가 지났으나 힘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문득 이렇게 미적거리다 하루아침에 내가 죽게 되면 장차 지하에서 공을 볼 낯이 없을 것이라 스스로 생각하여 마침내 눈물을 훔치며 묘지문(墓誌文)을 짓는다.
공은 휘가 우서(禹瑞)이고 호가 서암(西巖)이며 중웅(仲熊)은 그의 자이다. 현종(顯宗) 임인년(1662, 현종 3)에 태어나 5세 때 큰 글자를 썼으며 7세 때 글을 지었다. 경오년(1690, 숙종 16)에 진사에 합격하여 숭릉 참봉(崇陵參奉)에 보임되었다. 임오년(1702)에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분관되었다가 시강원 설서, 승정원 주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예문관의 正九品)ㆍ대교(待敎)ㆍ봉교(奉敎)가 되었다.
우리 동방(同榜) 중에 인재가 가장 많았기에 소인들이 매우 시기하여 몰래 시골 사람을 사주해 상소하였으나 계획대로 이루지 못한 일이 예전에 있었는데, 4년 뒤에 적신(賊臣)권첨(權詹)과 강이상(姜履相)이 뒤늦게 고관(考官)의 친속은 모두 급제자 명단에서 빼 버려야 한다는 대계(臺啟)를 올렸다.
성상께서 그 무고함을 살펴 통렬하게 배척하였다. 공은 또기주관(記注官) 때의 일로 느닷없이 무함을 받아 다른 이와 함께 대질 심문을 받았는데 성상께서 평소 공의 충실(忠實)함을 알고 있었기에 결국 공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얼마 뒤 승진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오르고, 예조 좌랑,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보덕 박행의(朴行義)가 서연(書筵)에서 진 서산[眞西山,진덕수(陳德秀)]을 모욕하고 비방하였으며, 대사성 이제(李濟)가 경생(經生경학을 공부하는 유생)과 토론하다가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다고 노하여 그를 끌어내어 쫓아버렸는데, 공이 상소로 그들을 탄핵하여 박행의는 파직되고 이제는 추고(推考)를 받았다.
무자년(1708, 숙종34)에 홍문관에 들어가 부수찬과 부교리가 되었다. 당시 성상께서왕자를 위해 집터를 구하고 있었는데,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한두 명의 대관과 함께 옛 공주의 집을 강제로 사들이라고 청하면서아첨하는 말을쏟아내었다.
최석정이 또《예기유편(禮記類編)》을 편찬하였는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의리와 배치되었기에 조정의 신하와 유생들이 계속해서 변론하고 배척하다가 견책을 받은 이가 많았다. 공이 이 두 가지 일을 함께 논하였으나 성상께서 살피지 않다가 얼마 뒤에 크게 깨닫고 최석정에게 죄를 주고 그 책을 불태웠다.
경인년(1710)에 병조 좌랑을 거쳐 다시 수찬과 부교리가 되었다. 박세당(朴世堂)의 손자 박필기(朴弼基)가 조정의 금령을 따르지 않고 박세당의 혼미한 유언을 따라 박세당이 죽은 후에 졸곡(卒哭)이 지난 다음 조석의 상식(上食)을 그만두었다. 이 일로 옥사에서 대답할 적에 선정(先正)을 비방하여 주자에까지 미쳤다. 공이 차자를 올려 그 죄를 청하면서 예법을 무수히 인용하자 성상께서 명쾌하다고 칭찬하고 박필기는 마침내 원배(遠配)되었다.
시골의 유생 가운데 윤증(尹拯)을 논척한 이가 있었는데 성상께서 매우 노하여 갑자년(1684, 숙종 10)두 대신이 윤증을 유현(儒賢)으로 대우하지 말라고 했던 주청을 뒤늦게 허물하고, 이어 이러한 논의가 국사에 무익하다는 하교를 내렸다. 공이 두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려 바로잡고자 했는데, 그 차자에 아뢰기를,
“나라가 있으면 국사가 있고 국사가 있으면 시비가 있으니, 옳으냐 그르냐에는 논의가 있기 마련입니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공정하게 듣고 함께 살펴 시비를 분명히 하여 지당한 데로 귀결시킨다면 논의를 꼭 미워할 필요는 없고 되레 국가에 이익이 됩니다. 만약 경수(涇水)와 위수(渭水)처럼 엄연한 시비를 구분하지 않고 무익하다고 결단한다면 세도가 이 때문에 무너질 것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과 민정중(閔鼎重)은 공정하고 충성스러우며 정직하다는 것을 성명하신 성상께서도 아는 바이거늘 지난 일을 뒤늦게 끄집어내어 조금도 돌아보고 아껴주지 않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예우하는 의리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성상께서 크게 진노하여 모두 삭출하고 얼마 뒤 원찬(遠竄)을 명하였다.
공이 무안(務安)으로 유배 갔는데 적소에 가서도 꼼짝 않고 앉아서《근사록(近思錄)》을 읽으며 날마다 일정한 공부과정을 두었고, 이따금 시를 읊조렸는데〈수조(水調)〉의 유의(遺意)가 있었다. 이해 겨울에 방환(放還)되었다. 서용된 다음 당시 사람들이 공을 헐뜯기를 그치지 않아 또 쫓겨나서 은율 현감(殷栗縣監)에 보임되었다. 청렴결백하고 화락하게 정사를 펼치자 백성이 부모처럼 공을 사랑하였고 돌아갈 적에는 길을 에워싸고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였다.
홍문관으로 돌아와 사서를 겸하였다. 당시이돈(李墪)의 과옥(科獄)이 일어나 그 무리들이 조사하는 일을 망치려고 번갈아 현혹시키는 말을 하였는데 대사간 이제(李濟)와 교리 이하원(李夏源)의 말이 가장 심하였다. 공이 그들을 논핵하여 이 두 사람은 삭직되거나 파직되었다. 이조 정랑으로 옮겼다가 다시 홍문관으로 돌아왔다.
계사년(1713, 숙종 39)에 성상의 존호를 올리는 것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는데, 공이 성상에게 받지 말도록 권하였다. 성상께서 윤허하자 지평 김유경(金有慶)이 상소를 올려 존호를 올리는 것을 청한 여러 신하들을 배척하였는데 그 말이 직설적이라 성상의 뜻을 거슬렀다.
공이 간곡하게 넌지시 간하자 성상께서 “나를 아껴주는구나.”라고 말하며 온당치 않은 하교를 특별히 고쳤다. 이조의 낭관을 여러 차례 지냈는데 중간에 헌납 겸문학으로 옮겼으며 항상 지제교를 겸대(兼帶)하였다. 하루는 성상께서 새로운 우황(牛黃)을 들이라고 명하였는데, 우황을 얻기 위해 죽인 소가 무수히 많았다.
공(公)이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소를 양으로 바꾼 것과송(宋)나라 인종(仁宗)이 구운 양고기를 찾지 않은 일을 인용하여 경계하자, 성상께서 깨닫고 즉시 명령을 중지시켰다. 군자감 정에 올랐다가 응교로 옮겼는데, 이날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 그 후로 여러 번 승정원에 들어가 차례로 우승지에 이르렀다.
갑오년(1714, 숙종 40)에 형조 참의를 거쳐 외직을 청해 안동 부사(安東府使)가 되었는데 다스림이서쪽 고을의 정사와 똑같았다. 겨울에 대사간에 제수되어 돌아왔고 병조 참지, 예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병신년(1716, 숙종 42) 3월 8일에 풍질(風疾)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5세였다.
공은 총명하고 단아하며 공손하고 간결하였다. 훌륭한 재능을 지녔으나 절대 자만하지 않았으며,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일이 없었으나 또한 구차하게 따르지 않았다. 평소 담소를 나눌 적에는 솔직한 모습이 넘쳐흘러 바라보면 온화하여 쉬이 친할 만하였으나 다가가면 함부로 친하게 대할 수 없었다.
좌우에는 거문고와 책만 두고서 온 방이 고요하였으니 비록 성시(城市)에 살았으나 아득히 속세를 떠난 사람의 생각이 있었기에 공을 만난 이들은 그가 현달한 관리임을 알지 못하였다. 조정에 있을 적에는 언의가 방정하여 한결같이 임금의 덕을 바로잡고 사림을 부지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으며, 강연(講筵)에 참석해서는 말투가 나긋나긋하여 임금을 잘 인도하였으니 논사(論思)의 체격을 깊이 얻었다. 이 때문에 임금의 지우가 날로 깊어져 차츰차츰 크게 쓰였기에 공이 죽었을 때 그를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공히 깊이 애석해하였다.
공의 맑고 단아한 재량이 본디 어진 사대부의 마음을 감복시키는 점이 있으나 그의 순수하고 독실한 집안에서의 행실은 나보다 상세하게 아는 자가 없다. 내가 어렸을 적에 고모부인 담포[淡圃, 홍수헌(洪受瀗)] 상서(尙書)를 모실 기회가 있었는데 상서는 공의 계부였다. 상서는 공을 언급하게 되면 “효자로다, 효자로다.” 하였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 전에 듣지 못한 것을 더 많이 듣게 되었다.
성인이 효(孝)를 논하면서, 평소에는 공경을 지극히 하고 봉양할 때는 지극히 즐겁게 해드리고 병을 앓으실 때는 지극히 걱정하고 돌아가셨을 때는 지극히 슬퍼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지극히 엄숙히 하라는 다섯 가지 조목을 갖추었는데, 공은 능히 이런 점이 있었고 그 지성으로 간절히 하는 뜻이 늘 마음속에 관통하였으니 이에 상서공의 말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임을 더욱 믿게 되었다.
또 듣자니 공이 제사를 앞두고 축문을 쓰면서 한번은 “나는 ‘효자(孝子)’ 이 두 글자에 매우 부끄럽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점이 바로 공이 효자가 되는 까닭이다. 이미 이렇게어버이에게 순종하였으니 벗에게 믿음을 받고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은 것이 마땅하다. 그 나머지 세세한 행적은 생략해도 괜찮을 것이다.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고려 태사 은열(殷悅)에서 나와 대대로 이름난 분들이 있었다. 휘 명원(命元)과 휘 처후(處厚)는 모두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를 지내고 휘 수량(受湸)은 부사를 지냈으니 바로 공의 3대이다. 정암(靜菴) 조 선생(趙先生조광조(趙光祖))의 현손으로 군수를 지낸 송년(松年)이 공의 외조부이다. 공은 적성(積城) 경용동(庚龍洞) 묘향(卯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를 합장하였으니, 부사 익선(益善)의 딸이자 화포(花浦) 충정공(忠正公) 홍익한(洪翼漢)의 외손녀이다. 2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 계흠(啓欽)은 진사에 장원하고 직장을 지냈으며 2남 계현(啓鉉)은 생원이며, 딸은 각각 목사 김태연(金泰衍), 도사 조영증(趙榮曾), 사인 윤업(尹澲)에게 시집갔다.
계흠의 장남은 조해(朝海)이고 차남 붕해(鵬海)는 요절하였으며, 딸은 사인 이명환(李明煥)의 아내이다. 사위 김태연의 아들은 인대(仁大)이고, 사인 서일수(徐日修)와 조재복(趙載福)은 그의 사위이다. 사위 조영증의 사위는 사인 박사근(朴師近)이다.
공은 독서를 매우 좋아하여 남들보다 박식하였으며, 글을 지을 적에는 붓만 잡으면 곧 완성하였는데 시 짓기를 더욱 좋아하여 시가 노련하고 굳세어 격조와 아취가 있었다. 유고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상국이의현(李宜顯)이 공을 위해 묘갈문을 짓고 부인에게 별도의 묘지문이 있으니,다시 상세하게 다루지 않고 다만 앞서와 같이 그 대략을 서술한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감악산의 남쪽 / 紺岳之南
상수역의 북쪽에 / 湘水之北
넉 자의 봉분이 있으니 / 有崇四尺
그 사람 옥과 같네 / 其人如玉
<끝>
--------------------------------------------------------------------------------------------------------------------------------------------------------
[脚註]
[주01] 대사간 홍공 묘지:
저자가 홍우서(洪禹瑞, 1662~1716)를 위해 쓴 묘지명이다.
[주02] 권첨(權詹)과 …… 올렸다:
헌납 권첨과 정언 강이상(姜履相)이 아뢰기를 “과거가 공정하지 못함이 1702년(숙종28) 알성방에서 극에 달하였으니, 과장(科場)
을 엄정하게 하고 훗날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시험관과 상피(相避)의 관계에 있는 자들을 모두 삭제해야 합니다.”라고 청하
였다. 당시 고시관이 이세백(李世白)이었는데, 그와 상피(相避)의 관계에 있는 자들을 모두 낙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주03] 기주관(記注官) …… 풀어주었다:
1701년(숙종 27)에 무고(巫蠱)의 변고가 일어나자, 숙종은 후회하고 한탄하여 급히 장희재(張希載)를 처형하고 민암(閔黯)에게
역률(逆律)을 추가로 시행하였다. 이때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민암을 풀어줄 것을 청하면서 민암은 연좌되었을 뿐 역모가 아니
라고 하니, 듣는 자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홍우서(洪禹瑞)가 당시 입시한 사관(史官) 윤성시(尹聖時)가 경연의 내용을 기록한 것을 우연히 가져다가 친구의 물음에 답하였는
데, 사간(司諫) 윤세수(尹世綏)가 마침내 이것을 가지고 최석정을 탄핵하니, 최석정은 앞의 말을 숨겼으며, 그 무리들이 따라 호응
하여 경연의 주기(注記)를 무함이라 하였다.
홍우서가 이에 대해 자세히 변론하니, 최석정을 두둔하는 자가 그를 체포하여 윤성시와 대질 심문할 것을 청하였다. 숙종이 홍우서
와 윤성시를 함께 대질시킨 다음 판결하기를 “홍 아무개는 반드시 공연히 없는 말을 만들어 낼 리가 없으니 피차의 곡직(曲直)을 분
별하기가 어렵지 않으며, 사신을 체포하여 조사하는 것은 후일의 병폐에 관계되니, 모두 함께 석방하라.”라고 하였다.《陶谷集 卷
13 司諫院大司諫洪公墓碣銘》
[주04] 왕자를 …… 청하면서:
여기서의 왕자는 연령군(延齡君)을 가리키고, 공주는 정명 공주(貞明公主)를 가리킨다.
[주05] 최석정(崔錫鼎)이 …… 쏟아내었다:
숙종이 왕자를 위하여 집터를 구해서 선조의 부마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의 옛집을 사들이고자 하였으나, 홍주원의 종손
석보(錫輔)가 버티고 팔려 하지 않았다. 숙종이 몹시 노하였으나 아직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는데, 예조 판서 이인엽(李寅燁)이 성상
의 뜻을 엿보고는 “그 집터가 평소 명당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살 만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최석정이 이조 판서 조상우(趙相愚)와 함께 계사하고 번갈아 청하여 성상의 허락을 얻고야 말았다.《陶谷集 卷13 司諫院
大司諫洪公墓碣銘》
[주06] 두 대신:
김수항(金壽恒)과 민정중(閔鼎重)을 가리킨다.
[주07] 수조(水調):
임금을 그리워하는 노래이다. 원래 곡조의 이름으로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지었다고 전하는데, 이후 소식(蘇軾)이 귀양 가 있으
면서 이 곡조에 맞춰 지은〈수조가(水調歌)〉가 널리 유행하였다.
[주08] 이돈(李墪)의 과옥(科獄):
1712년(숙종 38) 6월 대사간 이의현(李宜顯)이 상소하여, 이해 정시 과거에서 고시관이던 예조 판서 이돈이 과장에서 나가 집으로
간 일과 궁궐의 문이 열려 거자(擧子)들이 멋대로 출입한 정황이 있는 등 여러 가지 부정의 소지가 있음을 적시하고, 이에 대해 분명
히 밝힐 것을 극론하였다. 이에 이돈이 체포되고 과옥(科獄)이 진행되었으며, 마침내 죄상이 밝혀져 이돈은 아산현(牙山縣)에 부처
(付處)되었다.
[주09] 제(齊)나라 …… 것:
전국 시대 제나라 선왕(宣王)이 흔종(釁鍾)에 쓰기 위해 끌려가는 소를 보고 가엾이 여겨 양으로 바꾸라고 명한 일로, 이 내용은
《맹자》〈양혜왕 상(梁惠王上)〉에 자세히 보인다.
[주10] 송(宋)나라 …… 일:
북송(北宋)의 인종(仁宗)은 어질고 인자한 황제였다. 인종이 한밤중에 출출하여 구운 양고기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자신이 구운 양
고기를 찾게 되면 이후로 요리사들이 산 짐승을 죽여 불시의 수요에 대비할까 염려해서 시장기를 참았다는 고사가 전한다.《宋史 卷
16 仁宗本紀》
[주11] 서쪽 고을의 정사:
황해도의 은율 현감을 지내고 있을 때의 정사를 가리킨다.
[주12] 어버이에게 …… 것:
《중용장구》제20장에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는 것이 방법이 있으니, 붕우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면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할 것
이다. 붕우에게 믿음을 받는 것이 방법이 있으니, 어버이에게 순종하지 못하면 붕우에게 믿음을 받지 못할 것이다.
어버이에게 순종함이 방법이 있으니, 자기 몸에 돌이켜보아 성실하지 못하면 어버이에게 순종하지 못할 것이다.[獲乎上, 有道, 不
信乎朋友, 不獲乎上矣. 信乎朋友, 有道, 不順乎親, 不信乎朋友矣. 順乎親, 有道, 反諸身不誠, 不順乎親矣.]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13] 이의현(李宜顯)이 …… 있으니:
이의현이 지은 홍우서(洪禹瑞)의 묘갈문은《도곡집(陶谷集)》권13의〈사간원 대사간 홍공의 묘갈명[司諫院大司諫洪公墓碣
銘]〉을 가리키고, 청송 심씨(靑松沈氏)의 묘지문은《도곡집(陶谷集)》권16의〈숙부인 청송 심씨의 묘지명[淑夫人靑松沈氏墓
誌銘]〉을 가리킨다.
[주14] 감악산(紺岳山):
경기도 적성(積城)에 있는 산의 이름이다.
[주15] 상수역(湘水驛):
경기도 적성에 있는 역의 이름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