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헌집 제9권 / 묘갈명(墓碣銘)
증 통정대부 이조 참의 동호 강공 묘갈명 병서
(贈通政大夫吏曹參議東湖姜公墓碣銘 並序)
진양 강씨(晉陽姜氏)의 시조는 휘 이식(以式)으로 고구려(高句麗)에 벼슬하여 병마원수(兵馬元帥)가 되었다. 고려 말 휘 회중(淮仲)은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호가 통계(通溪)이다. 조선조에 휘 효정(孝貞)은 감찰(監察)을 지냈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는 휘가 세응(世應)이며 조부는 휘가 숙(璹)인데 두 분 모두 충순위(忠順衛)를 지냈다. 아버지는 휘가 복남(福男)으로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참의(參議)를 지낸 해(海)의 따님이다. 본생의 조부는 휘가 우(瑀)로 곧 직장공의 백부이니 진사를 지냈으며 호가 모암(慕庵)인데, 진사를 지낸 동생 매곡공(梅谷公) 휘 서(瑞)와 함께 모두 효자에 정려(旌閭)되었다.
생부는 휘가 복휴(復休)로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생모는 모씨(某氏) 모(某)의 따님이다. 2남을 두었으니, 공은 둘째 아들이다.
공의 휘는 기룡(起龍)이며 자[表德]와 생년에 대하여는 전하지 않는다. 충효의 가문에서 생장하여 음직으로 감찰(監察)에 보임되었는데, 충성을 바치려고 하나 그러할 만한 곳이 없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그러다 마침 임진왜란을 만나 숙부 충렬공(忠烈公), 형 초정공(草亭公)과 함께 이구동성으로 충의(忠義)를 떨쳐 죽음으로 스스로 맹서하였다. 충렬공은 심충장(沈忠壯)의 의진(義陣)에 달려가 삭녕(朔寧)에서 순절하였다. 초정공은 곽망우당(郭忘憂堂) 의진을 좇아 기강(岐江)에서 공을 세웠다.
반면 공은 호남(湖南)의 김천일(金千鎰),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 세 절사(節士)와 진양성(晉陽城)에 들어가 밤낮으로 힘을 다해 견고하게 성을 지켰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의사(義士)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신하가 된 자는 살아서는 마땅히 충성을 다해야 하고 죽어서는 마땅히 의리를 바쳐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북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고하여 말하기를 “신은 힘이 다하여 나라에 보답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는 드디어 촉석루(矗石樓) 위에서 죽음을 당하였으니, 계사년(1593, 선조 26) 6월 30일이었다. 시신을 받들어 진주(晉州) 오곡(梧谷) 자좌(子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철종 신유년(1861, 철종12)에 임금이 정려하도록 하명하고 특별히 이조 참의를 증직하였다.
아, 윗대에 쌍효(雙孝)의 정려가 있고 아랫대에 쌍충(雙忠)의 정려가 있어 한 집안에 충과 효 모두가 있으니, 어찌 그리도 장한가. 공이 세 분의 절사와 동시에 순절한 것에 대하여는 읍지(邑誌)에 실려 있다. 의리를 주장하여 굽히지 않다가 왜놈들에게 죽음을 당하였는데, 이 사실은 이송암(李松巖)이 지은 《사성강목(四姓綱目)》에 나타나 있으니 이 책은 참으로 후한 덕을 기록한 책[敦史]이다.
아내는 숙부인(淑夫人)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종남(終南)의 따님이니, 묘소는 남편과 합장되어 있다. 2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우황(遇璜)은 감정(監正)을 지냈고, 차남 계황(啓璜)은 부정(副正)을 지냈으며, 딸은 유영춘(柳榮春)과 이직(李稷)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손자와 증손자는 많아서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후손 달영(達永) 찬희(瓚熙)가 공의 행략(行畧)을 받들고 내가 우거하고 있는 곳에 찾아와서 묘갈명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늙고 피폐함으로 굳이 사양하였지만 되지 않았다. 이에 삼가 행록에 담긴 내용 중 중요한 한두 가지를 뽑아 묘갈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선 채로 죽은 곧은 충성은 / 立殣貞忠
서리 햇살과 나란히 다투네 / 霜日幷爭
구차하게 살아서 초목에 함께 돌아가기보다는 / 與其偸生而草木同歸
어찌 천백세 뒤까지 죽어서도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것과 같겠는가 / 曷若千百世死有令名
<끝>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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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贈通政大夫吏曹參議東湖姜公墓碣銘 並序
晉陽姜氏。初祖諱以式。仕高句麗爲兵馬元帥。麗末有諱淮仲。大提學。號通溪。我朝有諱孝貞。監察。寔公高祖。曾祖諱世應 。祖諱璹。皆忠順衛。考諱福男。直長。妣昌寧成氏。參議海女。本生祖諱瑀。卽直長公之世父也。進士號慕庵。與弟進士梅谷公諱瑞。俱㫌孝。考諱復休。僉正。妣某氏。某女。生二男。公於序季。諱起龍。表德若生年不傳。生長忠孝家。蔭補監察。自言報效無地。適値島夷孔棘。與從父忠烈公。兄草亭公。同聲奮義。以死自誓。忠烈公。赴沈忠壯陣。殉節朔寧。草亭公從郭忘憂陣。立功岐江。公則與湖南金千鎰, 黃璡, 崔慶會三節士。入晉陽城。日夜盡力堅守。及城陷。顧諸義士曰。爲人臣者。生當盡忠。死當效義。乃北向跪告曰。臣力竭矣。無以報國。遂遇害於矗石樓上。癸巳六月三十日也。奉窆于晉州梧谷子坐原。哲廟辛酉。自上命㫌其閭。特贈吏曹參議。噫。上而有雙孝之㫌。下而有雙忠之㫌。一室忠孝。何其壯也。與三節士同時殉節。載在邑誌。仗義不屈 屈。遇害倭冦。著於李松巖四姓綱目。允爲一部敦史也。配淑夫人星山李氏。忠順衛終南女。墓合封。有二男二女 。男遇璜監正, 啓璜副正。女柳榮春, 李稷。孫曾蕃不錄。公後孫達永瓚煕。奉行畧來余寓。而責墓銘。以耄廢。固辭不獲。謹撮一二。而爲之銘曰 。
立殣貞忠。霜日幷爭。與其偸生。而草木同歸。曷若千百世。死有令名。<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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