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과 인간을 읽다의롭고 용기 있는 이들의 혼백, 구름따라 흐른다입력 2023.07.11. 17:31양기생 기자
[마을과 인간을 읽다]⑤영광 불갑면 쌍운리
정유재란 당시 의병 모아 싸운
조선 의학자·의병장 강항부터
항일운동가 현암 이을호 선생
독재에 맞선 박관현 열사까지
불의에 항거한 이들 역사 결집
박관현 열사 생가에서 본 마당
[마을과 인간을 읽다]⑤영광 불갑면 쌍운리
우리는 모두 각기 뿌리가 있는 나무다. 태어난 곳에 뿌리를 박고 뿌리를 내리고, 멀리 뻗어가면서 살아간다. 식물학적 뿌리를 넘어, 시대와 공간을 넘고 새로운 곳에 뿌리를 옮기기도 한다.
고향은 떠난 이들의 뿌리다. 우리는 그래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거기 부모 형제와 마을 사람들, 조상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식물학적 뿌리를 넘어 생물학적 뿌리는 어쩌면 자기 존재의 본질이기에 수구초심이나 모천회귀는 본능인지 모른다.
불갑초등학교 전경
밀재를 넘으면 넘실넘실 저수지가 나온다. 영광군을 적시는 젖줄 불갑저수지다. 일제 강점기 산미 증산계획에 의해 강제 노역으로 축조된 호수로 영광의 문지기나 나름이 없다.
예전엔 수리시설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물질적 가치 그 이상이다. 수변공원을 조성했고, 주변의 멋진 경치를 즐기려고 좀 살만한 사람들이 호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노인들은 파크 골프를, 젊은이들은 낚시와 캠핑을, 동호인들은 자전거를 타는 등 여가 및 취미 활동 명소가 됐다.
밭에는 농부들이 담배 농사를 짓고 있다. 담배 농사보다 고단한 일도 드물다. 모종을 이식하고 노랗게 변한 잎을 따고, 새끼줄로 2~3개씩 꿰어 그늘진 곳에 빨래처럼 말린다. 잎을 말릴 그늘이 많지도 않고 장마라도 지면 습기로 눅눅해서 품질이 떨어져 가격 하락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리 집도 담배 농사를 지었다. 작열하는 햇살 아래 일련의 작업은 시난고난 고단하기 그지없었다.
박관현 열사 동상
불갑저수지 입구에 박관현 열사의 동상이 있다. 왼손에 원고를 들고, 오른손을 불끈 쥐고 웅변하는 모습에서 금방이라도 대중의 가슴을 파고든 쩌렁쩌렁한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듯하다.
쌍운리에는 애국지사 강항 선생을 모신 내산서원과 현암 이을호 선생 묘소, 그리고 박관현 열사 생가가 불과 1㎞ 남짓 거리 일직선상에 있다.
박관현 열사를 만나러 발길을 재촉한다. 전남대 교정과 도청에서 독재 타도와 민주화를 열망하던 질풍노도와 같은 당신의 연설이 떠올리며 다다른 마을, 쌍운리.
우리나라 가장 많은 지명이 백운리다. 쌍운리는 오직 한 곳, 이곳뿐이다. 산세가 좋고 물이 좋아서 서울과 광주에서 귀촌 귀농한 사람들이 제법 많다. 다행히 길 입구에서 어르신이 나를 보고 선한 눈인사를 한다. 40여년간 쌍운리에서 소를 키우고 계신 최의주(81) 어르신이다.
박관현 열사 이야기를 해주시는 최의주 어르신
박관현 열사 아버지는 농번기 때도 자기 일을 놔두고 이웃집 쟁기질부터 해주신 분이란다. 막걸리 한잔하시고 너털웃음 지으신 정 많고 마음 따뜻한 분이어서 동네서 싫다는 사람 없이 우대받고 산 분이라며 가뜩이나 사람도 없고 인심도 박해진 요즘 부쩍 그립다고 하신다.
박 열사 가족 중에 막내 숙부 박종손(83)씨가 마을을 지키고 계셨다. 소를 보는 안목이 뛰어나서 송아지만 보고도 그 소의 건강 상태와 품질을 귀신같이 알아낸다. 지금도 불갑면 소 키우는 사람들을 잘 도와주는 선량한 분이란다.
박관현 열사 생가
박관현 열사는 머리도 좋았지만, 부모를 보고 배워서인지 무엇보다 착실했다고 한다. 광주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다녔는데, 고향에 올 때면 차비를 아끼려고 삼학리에서 내려 걸어왔단다. 차비를 아끼고 아껴서 부모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의복을 꼭 사 왔고, 마을에서는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며 검소와 근면이 몸에 뱄다고 하신다.
그의 옛집, 생가는 고요했다. 대문 앞 은행나무와 행랑채 옆 늙은 감나무가 고인의 유년을 지켜보았을 성싶었다. 그가 앉았을 툇마루에 앉아서 그가 되어 앞산을 바라본다.
박관현 열사 생가 툇마루에서
어쩌면 이 툇마루에서 그는 시대의 변혁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그가 꿈 꾼 3가지 변혁, 어용단체 호국단을 학생 중심의 학생회로 바꾸는 것, 독재 사회를 민주사회로 변혁하는 것, 하층 사회 개혁을 위해 교도소 처우를 개선하는 것,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던 암울한 시대에 세상을 개혁하기 위해 새벽 기관차처럼 온몸으로 돌진했던 열사였다.
그 순박한 효자를, 공부만 하던 아이를, 성실한 아이를, 청운의 꿈을 꾸며 살아갔을 그 청년을 누가 분노케 했으며 누가 그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단 말인가.
박관현 열사 생가 대문
마을을 벗어나 다시 돌아오는 길에 '불갑산 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희생지'가 보인다. 최의주 어르신 말씀대로 영광에서만 해방 전후로 2만 2천여명이 죽었다. 43년생인 당신이 8살 때였던 어느 날, 막 부임한 경찰서 기동대장이 스무 살 이상 청년들은 전부 마을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마을 청년 20여명을 녹사리 저수지 아래로 끌고 갔다. 그리고 대검으로 닥치는 대로 찔러 죽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가보니 모두 예닐곱 군데 대검에 찔려 죽고 유일하게 형만 살아있더란다. 여섯 군데를 찔렸는데 운이 좋았다. 아버지와 엄마가 부축해서 집으로 데리고 와서 치료하니 제법 호전됐는데, "최정주가 살아났다는 말을 듣고 왔다" 하며, 경찰이 와서 잘 걷지도 못한 형을 집 밖으로 끌고 나가더니 얼마 후, 대문 앞에서 "탕"하고 총소리가 나더란다. 그 충격으로 한 달 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사망신고조차 못할 정도로 집안이 쑥대밭이 되었던 때를 기억하며 최의주 어르신은 끝내 울먹이다 눈물을 보이신다.
수은정 내산서원
쌍운리 마을 앞에는 강항 선생을 모신 내산서원이 있다. 정유재란 때, 왜군에 맞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으던 의병장 활동을 하다 체포됐고, 일본으로 끌고 가서도 일본의 지리 정세 등을 몰래 적어 보낸 애국지사 '간양록'의 작가 강항 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그들 역시 제국주의 침략자의 악행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던가. 좌우 이념 갈등으로 인한 주민들의 고통, 청년 박관현의 꿈과 생을 앗아간 군부독재의 잔인한 총칼. 쌍운리 마을 구름은 여느 마을처럼 민족의 아픔을 내려다보며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박관현 열사 동상
욕망은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잘못된 욕망은 자기는 물론 타인의 삶까지 파멸시킨다. 박관현 열사가 법정에서 앙상한 뼈만 남은 몸으로 "피를 뿌린 자는 반드시 피로 망한다"라며 최후 진술한 것도 바로 그런 의미다. 그래서 희생과 사랑이 위대하고 고귀하다. 우리가 배우고 익힌 것은 바로 그런 사랑, 그런 삶을 살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역사는 '와 피아와의 투쟁'이라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은 아와 피아와의 처절할 정도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말의 역설인지 모른다. 싸우기도 어렵지만, 사랑하기는 더 어렵다. 불의에 항거하는 사랑은 모두를 위한 사랑이기에 위대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싸움은 평화를 지키고 누군가의 생명을 지키는 편에 서는 싸움이다. 그게 정의고 용기다.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고 끝내 자기 신념을 믿고 사랑했던 쌍운리 사람들의 삶에서 이기적이고 파편화되어 가는 오늘날, 시대의 방향과 길을 모색해 본다.
불갑산 지역 민간인 희생자
불갑저수지의 평화도 그 수면 아래로 애절한 역사가 있고, 쌍운리 구름 아래도 역사의 아픔이 곳곳에 서려 있다. 그 기틀 위에 지금의 평화도 행복도 꽃이 피고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쌍운! 하나의 의로운 구름이 새벽 기관차, 박관현 열사라면, 남은 하나는 혹시 우리가 아닐까. 정의와 평화 민주를 위한 일이라면 주저 없이 언제든 나서는…. / 박용수 시민전문기자
박용수는 화순 운주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수필 쓰기만 고집해 왔다. ‘아버지의 배코’로 등단하여, 광주문학상, 화순문학상, 광주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광주동신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며, 작품으로 꿈꾸는 와불, 사팔뜨기의 사랑, 나를 사랑할 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