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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보현행자의 서원』 중 「수순분」을 함께 읽으며 불광의 보현행자임을 기억합니다.
~~~부처님을 큰 나무에 비유하오면 중생은 나무의 뿌리요, 보살은 꽃과 과실이시옵니다. 만약 나무뿌리에 물을 주면 어찌 지혜의 꽃과 과실이 무성하지 않겠사오며, 여래이신 나무가 환희로 장엄하지 않으오리까? 부처님께서는 중생으로 인해서 대비심을 일으키시고 대비심으로 인하여 보리심을 발하시며, 보리심으로 인하여 정각을 이루신다 하시니, 중생을 공경하고 받들어 섬김이 이 어찌 부처님을 받들어 섬김이 아니오리까? ~~~
금주의 법어--수희공덕원(隨喜功德願)
금주의 법사--경원사 주지 효림 스님
코로나가 시작한 것이 햇수로 만2년이 되어갑니다. 예방 백신접종이 80% 넘으면 집단면역이 생겨서 잘 극복될 것으로 알았는데 새로운 변이종이 나와서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잘 극복되리라 봅니다. 인류 문화사적으로 보면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정도가 아니라 인류를 끊임없이 괴롭혀 온 전염병이 있었지만 다 극복했습니다. 다만 우리가 오늘날 코로나를 보면서 반성해야 할 부분은 없지 않아 있습니다. 병이 어떻게 생겼고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분석하기 앞서 20세기에 와서 인류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는데 그것으로 1차대전, 2차대전이라는 전쟁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사람을 많이 죽이느냐 하는 쪽으로 발전을 했습니다. 폭탄 하나만 터뜨리면 도시 하나가 날아갈 정도로 살상무기가 발전해서 스커드 미사일이라는 흔하게 쓰는 무기 한 방에 몇 십억씩 하는 것을 여름에 소나기처럼 쏟아부었습니다.
그런 문화를 발전시키는 인류가 산불이 한 번 나면 최강국이라는 미국이 산불 하나를 못 꺼서 보통 일주일, 보름, 두 달 이상 탑니다. 산불은 물만 갖다 부으면 간단하게 끌 수 있는 건데 폭탄은 퍼부으면서 흔한 물은 퍼붓지 못해서 불을 못 끕니다. 산불 하나 못끄는 인류의 문명이 코로나를 정복하기가 쉽겠습니까? 이번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는 방향 전환을 크게 해야 합니다. 산불도 잘 끄고 재난도 잘 극복하고 더불어서 생명을 살리는 쪽으로 문명이 발전해야되는데 생명을 죽이는 쪽으로 계속 발전해왔다는 겁니다. 잘못된 문명입니다. 광덕스님의 사상 가운데 하나가 항상 생명을 살리자입니다. 뭐가 불성이냐 하면 우리 생명의 본성자리가 불성이라는 주장을 많이 하셨습니다.
불광법회가 생긴 자체는 불교사에 하나의 혁명입니다. 지금은 각 사찰에서 정기법회를 해서 익숙해져 있지만 그 이전에 불광법회가 정착되기 전에는 사찰에 정기법회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광덕스님의 큰업적입니다. 더불어 찬불가도 많이 활성화시켜서 저도 큰스님을 본받아서 법회를 새롭게 획기적인 방법으로 해보려고 찬불가를 부르게 합니다. 옛날에 스님들이 법문할 때 게송을 하나씩 읊으면 인례스님이 목탁으로 나무아미타불 염송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을 데려와서 해보는데 호응이 좋으면 계속 하고 아니면 그만 두겠습니다.
대승불교는 큰 대(大), 수레 승(乘)으로 여럿이 한꺼번에 타고 가는 수레라는 뜻으로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대승불교는 재가불자들이 중심이 되어 인도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입니다. 재가불자들이 일으킨 대승불교가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 하면 수행의 일상화입니다. 산중에 스님들이 출가해서 세속 인연을 다 끊고 오로지 도만 닦는 수행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결혼하여 가족과 더불어 생업에 종사하면서 일터에서의 일과 대인관계 자체를 수행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일상생활의 수행화를 이룬 것이 대승불교의 가장 큰 업적입니다. 보현행원 노래 듣겠습니다.
내 이제 두 손 모아 청하옵나니 시방세계 부처님 우주 대광명
두 눈 어둔 이내몸 굽어 살피사 위없는 대법문을 널리 여소서
허공계와 중생계가 다할지라도 오늘 세운 이 서원은 끝없사오리
내 이제 엎드려서 원하옵나니 영겁토록 열반에 들지 맙시고
이 세상의 중생을 굽어 살피사 삼계화택 심한 고난 구원하소서
허공계와 중생계가 다할지라도 오늘 세운 이 서원은 끝없사오리
오늘 세원 이 서원은 끝없사오리 하니까 가슴 뭉클하네요. 제가 파주 보광사에서 주지를 했는데 그때 우리 사회에 유명 인사들이 공개적으로 유언장 쓰는 것이 유행했어요. 그래서 나한테도 어느 유명 잡지사에서 유언장을 써달라고 요청이 와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언장을 썼습니다. 핵심내용은 이런 겁니다. 상좌들에게 유언장을 쓰면서 내가 죽고 나서 너희의 기준이 아니라 부처님 말씀에 기준해서 봤을 때 임효림이란 승려가 부처님법에 어긋나고 불도수행에 게으르고 탐욕을 부리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 입증되면 나를 스승으로 생각하지 말고 장례 대충 치르고 49재도 하지 말고 나를 기념하는 부도도 세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객관적 기준으로 내 저금통장에 그때 기준으로 5백만원, 지금은 스스로 생각에 상향해서 천만원 이상이 저금되어 있으면 우리 스님은 탐욕이 많다고 판단해서 나 대신 너희들이 대중 앞에서 참회하라고 했습니다.
불교를 망치는 가장 큰 근본원인은 탐욕입니다. 불교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과 인류를 망치는 것도 근본은 탐욕입니다. 오늘날 종단에 문제가 생기고 우리 일반 사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도 탐욕 때문입니다. 재가 불자도 올바른 불자가 되려면 탐욕을 버려야 되는데 항차 스님이 되어서 끝없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주변을 피곤하게 하고 종단과 불교를 망치고 사회를 병들게 한다면 그 사람을 어찌 사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보시기에 스님이 먹물 옷을 입고 가사장삼을 했으니까 존경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스님들이 자기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가사가 대단한 것처럼 하지만 가사는 원래 하나의 보자기로 둘둘 말아서 입었습니다. 스님만 입는 게 아니고 원래 인도사람은 사리라고 해서 지금도 입고 다닙니다. 옛날에는 디자인이 발달하지 않아서 로마황제도 천 하나 걸치고 다녔어요.
인도에는 장례 풍습이 공동묘지에 매장하지 않고 그냥 두어서 풍화로 없어지게 하는데 그 시체를 덮었던 옷을 스님들이 가사로 만들어 입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경전을 읽으면 감동적인 것이 많은데 그 중에 부처님을 길러주신 마하파자파티가 직접 물레를 돌려서 실을 뽑고 베를 짜서 부처님 옷을 만들어 갖다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께 입으시라며 옷을 만들어주니 부처님은 승단에 공양하면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입을 거라며 거절했는데 양모는 계속 부처님이 입기를 원합니다. 보다 못한 시자인 아난도 부처님께 입으시라고 권하지만 끝내는 부처님이 그 옷을 입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스님들이 좋은 차 타고 좋은 옷 입고 다니는 걸 부끄러운 줄 알아야 되는데 그걸 모릅니다. 명색이 고승이란 스님들이 더 탐욕이 많고 더 화려한 옷을 입으려 합니다. 승복은 검소하게 입으려고 나온 옷으로 그냥 한복이고 먹물 들여서 때 덜 타게 하려고 입는 옷인데 저는 단언컨대 한 번도 승복센터에 가서 내 돈주고 옷 맞춰 입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옷이 추레하게 보여도 저 스님은 원래 옷을 그렇게 입으려고 원력을 세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작은 걸 허용하면 그런 데서 탐욕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서울 어느 사찰에 내가 가면 신도들이 많이 온다고 계속 법회에 초청해서 갔는데 내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나에게 밥을 따로 차려주면 안 되고 같이 있는 대중 스님과 같이 밥을 먹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잣절이라고 과도한 보시를 주는 건 나를 욕보이는 것이라고 하지 말라 했는데 시키는 대로 안 해서 결국 법회에 안 갔습니다.
노래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저절로 피는 꽃이 아닙니다. 불광법회가 잘 되려면 큰스님이 유업을 남기고 가셨으니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불광이 잘 된다고 할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잘 따르고 실천해서 스님이 계실 때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울 생각을 해야됩니다. 세상에 떠도는 말이 불광 불자들이 저러고도 불자인가, 같은 불자끼리 우리가 창피하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지난 번에 법회 왔을 때 혜담스님이 계셔서 내가 여기 법회 초청받아 올 명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처님의 제1계율이 불살생, 생명 있는 것을 죽이지 마라, 폭력을 행사하지 마라입니다. 폭력 가운데 인상 쓰면서 눈으로 노려보는 시선 폭력, 학교에서 아이들을 질투 시기하여 왕따시키는 것도 폭력입니다. 60점 받아온 아이에게 노력한 만큼 나왔다며 다음에는 더 잘하자 하는 엄마가 있는 반면 95점 받아온 아이에게 이게 점수라고 받아왔느냐고 언어폭력을 하면 그 아이는 자존감이 팍 낮아집니다. 어릴 때 부모에게 칭찬 받고 성장한 아이는 자존감이 높아서 세상에 나올 때도 떳떳해서 일생을 가는 밑천이 됩니다.
제1계율인 불살생이 대승불교에 오면 대자대비로 바뀝니다.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끝없이 사랑하는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부처님의 사상이나 철학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대자대비입니다. 끝없는 생명에 대하여 공감대를 이루고 연민을 느끼고 사랑을 하는 겁니다. 도둑질하지 마라. 남의 집 담을 넘어가서 훔치는 것민 도둑질인 줄 알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내 스스로의 생명과 삶을 유지하기 위해 수없이 도둑질을 해야 합니다. 도둑질 한 번도 않았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도둑질 하지 마라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계행이 어렵게 되어서 대승불교에 와서는 진짜 수행을 하기 위해 베풀어라, 보시하라고 합니다. 우리 생각을 번뇌로 규정하는 것은 삼독, 탐진치입니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을 끊임없이 칭찬해야 하는데 그걸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수희를 해야 합니다.
수희공덕이란 말은 법화경에는 수희공덕품이 따로 있고 화엄경에는 보현10대행원에 있습니다. 보현10대원은 보현보살의 원력으로 다 중요한데 수희공덕원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묻는다. 어떤 인생이 최고 좋은 인생이냐?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얼굴을 대면하고 웃으면서 담소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희입니다. 수희는 따를 수(隨), 기뻐할 희(喜)입니다. 아는 보살이 인사동 찻집 이름을 지어달라고 해서 수희라 하고 그 뜻을 시로 적어 줬는데 사람들은 수희가 사람 이름인 줄 알고 누구냐며 묻는다고 했습니다. 부처님 경전에 나오는 수희는 부처님 법회에 참석해서 감동을 받아 환희용약, 기뻐하는 겁니다. 정말 감동적인 법문을 하면 마음에서 우러나는 환희가 북받쳐서 박수 치며 그렇구나 하며 기뻐하는 겁니다.
불광법회 가니까 사측에서 시위하는데도 신도들이 염불하면서 대응하고, 욕하거나 싸우지는 않고 극복해서 참 감동적이더라 하면 그 소리를 듣고난 사람들은 신도들이 참 훌륭하다며 박수 치고 함께 기뻐하는데 그것이 50번째 까지 전해져서 기뻐하는 공덕도 이 세상의 어떤 공덕과 비교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울증에 빠진 아내가 스스로 기뻐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기쁘게 해주고 기뻐하는 아내를 따라 함께 기뻐하는 것이 더 높은 수희라고 어느 스님은 주석을 달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따라 기뻐하는 것이 공덕을 닦는 것이고 수행이라는 겁니다. 언어가 갖고 있는 귀중함과 힘을 우리는 놓치고 잘 모르는데 불교에서 언어가 가진 힘을 잘 활용하는 것이 진언을 외고 염불하는 겁니다. 우리가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을 할 때 반야와 바라밀의 뜻을 아는 사람이 열심히 염송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언어가 가진 힘에 의해 삼매를 이룹니다.
자식이 잘 되라고 하는 말이지만 하는 것마다 되는 게 없다며 부정적으로 말하면 자식은 위축되어서 쪼그라듭니다. 엄마가 절에 가서 여래칭찬원과 수희공덕원을 들어서 배운 뒤에 자식에게 얼마나 가슴이 아프냐며 위로하고 이해해주면 자식은 집에 와서는 힘을 받게 됩니다. 무시하고 깔보는 말을 자꾸 하면 그 사람은 그렇게 되지만 엄마가 끊임없이 칭찬을 해주면 그 사람은 용기를 내고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칭찬하고 기뻐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뛰어난 수행 방법입니다.
성남 모란 터미널에서 어떤 스님이 길에서 절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보통 가짜 스님이라고 보는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저 스님이 승적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냥 구걸하는 것이 아니고 길 가는 사람에게 절하는 것, 부처님이 아니라 길 가는 사람에게 절하고 있어서 땀 흘리며 꾀죄죄한 스님에게 가서 음료수를 사다 주며 좀 쉬시면 스님 대신 내가 절을 하겠다고 해서 대신 절을 3~40분 했습니다. 비구라는 말은 걸사, 거지라는 뜻입니다. 법정스님을 우리가 존경하는 것은 전깃불도 없는 산중에 들어가서 청빈하고 깨끗하게 살았기 때문이죠. 누구보다 돈을 챙길 수 있는 처지에 있었지만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존경하는 겁니다. 우리는 가난하게 사는 사람, 거리의 성자인 거지를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반성해야 합니다. 좋은 승용차 타고 으리으리하게 살면 큰스님인 줄 알고 고개가 팍 꺾이고 초라하고 꾀죄죄하게 살면 불쌍한 중이라며 제대로 수행도 못한다고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정말 존경해야 될 사람은 가난하게 살 줄 아는 스님이고 여러분은 그런 사람을 존경할 줄 알아야 됩니다. 거리의 성자 노래를 들으며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각 구법회 모임과 합창단 연습을 해야 하는 까닭으로 보광당에서 금강경 독송을 하지 못해서 사진이 없습니다
불광법회 선서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우리는 불광법등입니다. 전법으로 정정진을 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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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하반야바라밀 정근으로~
종무실장의 법회방해 교란행위를 막아내는 우리 불광 신도님들의 지혜로움에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바라밀님의 신속한 법회소식 요약 정리 해주신 노고 또한 감사와 찬탄드리옵니다
종무실장 확성기에 울려 퍼진 효림스님에 대한 인격을 무시하는 망언은 자살꼴이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싶습니다
효림스님~
추운날씨 건강 유의 하시고 저희곁에 오래 오래 계셔주시길 간청드리옵니다
내생명 부처님 용맹 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하자~()()()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불광이 잘 된다고 할 것이 아니라, 불광 법회가 잘 되려면 큰스님께서 남기신 유업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실천해서 스님이 계실 때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울 생각을 해야 된다는, 효림 스님의 말씀에서 정상화를 향한 우리의 행동들이 바른 길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껴봅니다.
바라밀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것 또한 큰스님의 가르침을 보전하기 위한 노력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효림스님 법문 隨喜공덕 감명깊에가슴속에 묻어두겠습니다.
바라밀님 내공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