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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가상여행기―끝없는 하늘의 나라
학번: 0110104
소속: 인문학부
이름: 진아름
과목명: 중국문화기행
담당교수: 오원경
7월 10일 울란바토르
7월 10일, 나는 마침내 울란바토르 공항에 내렸다.
이곳 울란바토르는 몽골의 수도로 그 이름의 뜻은 '붉은 영웅'. 공산주의 색채가 물씬 묻어난다. 본래 이름은 우르거라는데, 1639년부터 1778년 현재의 위치에 자리하기까지 140동안 이곳저곳으로 옮겨지며, 이름도 우르거-노밍 이흐 후레(Nomyn Ikh Khuree)-다 후레(Da Khuree)-복딘 후레(Bogdin Khuree)-니슬렐 후레(Niislel Khuree), 이렇게 여러 번에 걸쳐셔 바뀌었다고 한다. 이곳이 도시로서 자리를 잡은 것은 불과 360여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인구 60만의 대도시이다.
공항에서부터 볼 수 있는 몽골의 도시풍경은 우리 나라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었다. 몽골에도 자유화 바람이 불었기 때문일까? 아파트촌도 있고, 비록 내 눈에는 생소하기만 한 러시아제 자동차가 많다고는 하나 자동차도 적잖게 다녔다. 특히 오가는 사람들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우리와 몽골 민족은 몽골로이드(mongoloid)라는 동계 혈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틀림없는 몽골의 수도이니, 특히 눈에 띄는 것이 겔(몽골 전통의 이동식 주택)이었다. 아파트촌이 우뚝우뚝 서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울타리 친 구역 내에 하얀 겔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울란바토르는 주택사정이 좋지 않아 빈민층은 도시의 정해진 구역에 겔을 짓고 사는 수밖에 없다. 우리 나라의 판자촌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대초원에서나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겔을 이런 식으로 보게 되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 외에도 우리 나라에서는 한창 40도에 달하는 불볕더위에 시달릴 7월에 30도 부근의 비교적 시원한 날씨라든지, 시내 버스에 양과 함께 탄다든지, 도시의 길거리에서 쇠똥냄새를 맡고 길모퉁이에서 소를 발견한다든지, 몽골은 몽골이구나 하고 새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인상깊었던 것은 하늘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어딜 가든 야산이나 빌딩으로 가려져서 채 다 보지 못하는 하늘이 한없이 넓고 새파랗게 느껴졌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몽골의 진짜 하늘을 본 것이 아니었던 셈이었다.
몽골의 7월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여행의 계절이다. 봄은 모래바람이 불어닥치고 가을은 겨울 준비에 바쁘고 겨울은 영하 50도에 달하는 추위 탓에 여행하기에는 좋지 않다. 방랑벽이 있는 몽골 사람들뿐만 아니라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이 때가 성수기라 비행기 좌석도 호텔 방도 꽉꽉 찬다. 미리 머물 곳과 여행 일정을 잡아둔 나는 운이 좋은 경우였다.
7월 11, 12, 13일 울란바토르
7월 11일, 12일, 13일의 삼 일간은 몽골의 가장 큰 축제인 나담 축제이다. 7월의 외국 여행객들은 여행 이유에 나담 축제를 구경할 목적을 끼워 넣는다. 이 축제는 과거 징기스칸 시절 잔치 때의 여흥거리였던 병사들의 힘겨루기 시범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전통 축제이다. 아무리 봐도 울란바토르에 살지 않는 것 같은 시골 티 나는 사람이나, 외국인임이 분명한 사람들로 거리는 너무나 번화했다.
축제의 시작은 11일 아침의 시가행진이다. 좀 더 예전에는 군인행렬이었다던 행렬은 지금은 시민과 학생과 군인으로 다양했다. 일반인은 길가에서 구경을 하거나 제멋대로 끼여들거나 하는 모양이었다. 거리가 행진하는 사람들과 환호하는 군중들로 가득 찬 것은 꽤 괜찮은 볼거리로, 방송에서는 도시 중심에 있는 혁명 영웅의 이름을 땄다는 스흐바타르 광장에서부터 교육부 앞 광장까지 시민의 행렬로 길이 메어졌다고 난리법석이었다.
이 소란통에 뛰어들고 싶지 않아 나는 느지막히 호텔을 나섰다. 울란바토르 국립경기장에 가기 위함이었다. 힘겨루기 시합이 기원이 된 축제답게, 축제의 꽃은 축제일동안 벌어지는 세 가지 시합이라고 한다. 나름대로 여유를 두고 갔음에도 울란바토르 국립 경기장 앞은 입장객과 장삿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어서 경기장 앞은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다.
간신히 경기장에 들어서자 마침 대통령의 개막사가 끝나려는 참이었다(다행이다!). 식전 행사로 낙하산 부대의 강하시범이 있었다. 그 후 선수들이 입장하고 선서를 하는 모습은 올림픽 따위의 종합경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근대화 전의 몽골 나담 축제도 이랬을까? 좀 더 오래 전의 나담 축제는 어떻게 시작했을까?
좀 더 나담 축제의 참모습을 보고 싶다는 내 소망대로, 금방 시합이 벌어졌다. 나담 축제의 세 가지 시합은 씨름, 활쏘기, 승마이다. 첫번째로 경기장의 환호를 불러온 시합은 부흐라고 불리는 씨름이었다. 몽골 옛 병사들과 다를 바 없이 짧은 윗옷, 바지, 목 긴 장화를 입은 선수들이 기량을 겨루었다. 과연 기대는 어긋나지 않아, 나는 선수들이 시합 전에 춤을 추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팔을 퍼덕거리면서 뛰어다니는 이 춤은 불교 전설 속의 금시조(金翅鳥) 가루라를 흉내낸 것이라고 하는데, 시합 전과 끝에 추는 것이었다.
몽골의 씨름은 우리 나라와 달라서 샅바 같은 것이 없다. 시작할 때에도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가 최선을 다해서 상대를 넘어뜨리면 된다. 또 선수들에게는 코치나 응원단으로 보이는 사람이 각각 한 사람 있어서 노래를 불러 상대를 도발하거나 선수를 격려하거나 하면서 얼굴이 시뻘개져서 고함치고 있었다. 거기에 선수들의 시합 소리, 관중들의 응원 소리 같은 것이 섞여서 주위는 엉망 난장판이었다. 여느 때는 아직 어떤지 모르지만 어쨌든 몽골 사람들은 시합 때에는 무진장 흥분한다.
곧 다른 쪽에서 활쏘기 시합이 시작되었다. 이것도 완전히 몽골 풍으로 활은 양궁이 아니라 재래의 활이고, 과녁도 펠트로 만든 공을 벽처럼 쌓아올린 것인데 그 중심에 하나만 붉은 공이 있어서 과녁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통 의상인 델과 술 달린 모자를 쓴 사수들이 활을 힘껏 당겨서 공의 과녁을 맞힌다. 붉은 공에 맞으니 심판이 "오훼!"하고 소리를 빽 질러서 깜짝 놀랐다.
둘째 날도 첫 날과 마찬가지로 씨름과 활쏘기라고 하는지라, 나는 둘째 날은 경기장에 가지 않고 호텔에서 뒹굴었다. 셋째 날은 시 외곽의 경기장에서 승마 시합이 있어서 그것을 보러 갔다. 이 날은 아침 일찍 경기장에 갔더니 주위에 천막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이 천막촌은 다름이 아니라 출전하는 기수들의 가족들과 그들의 가축. 사람과 말과 천막이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더우기 그 사이를 지나가자니 천막 주인들이 붙잡고 고기랑 아이락을 먹이려고 들어서 점잖게 사양하느라 혼이 났다. 듣기에 승마 시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는 것은 기수의 문제가 아니라 말의 문제고, 그만큼 좋은 말을 배출했다는 집안의 명예이기 때문에 일가족 전체가 이렇게 몰려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면서 선심을 써야 그 집안의 기수와 말이 시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또 놀란 것은 기수를 보았을 때인데, 네댓 살밖에 먹지 않았을 것 같은 조그마한 어린애들이 우람한 말들의 기수였다.
승마 시합이 끝나면 비로소 시상식이다. 씨름 우승자에게는 사자라느니 거인이라느니 활쏘기 우승자에게는 명사수라느니 승마 우승마(!)에게는 만 마리 중 으뜸이라느니 하는 호칭을 붙여서 재미있었다. 특히 말들에게는 아이락을 뿌리면서 노래를 불러주어 그 기량을 칭찬했다. 몽공에서는 꽤 인기있을 듯한 전통의상 델을 차려입은 여가수가 노래를 불러주었다. 사람들은 기분이 좋았겠지만 말은 어떨는지.
7월 14일 우브르항가이 아이막
'몽골 관광'의 주요 코스는 주로 울란바토르 근교의 테렐지, 만지르, 칭기스 후레, 한드가이 등이 꼽힌다. 하지만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은 몽골 그 자체이다. 관광지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몽골 전통 의상 델을 입고 렌트카를 빌어서 현지 사람인 아스크르 씨와 다른 동행과 함께 하라호름으로 향했다.
하라호름은 1235년 몽골의 태종 오고타이 칸에 의해서 건설된 도시이다. 이 도시가 방대한 몽골 제국의 수도가 되었던 것은 불과 정종 헌종을 이은 20여 년이 전부로, 원(元)이 멸망하고 북원(北元)이 일어났을 때에 잠시간 수도의 이름을 되찾았으나 그 역시 오래가진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비운의 수도이다.
출발한 아침의 날씨는 한없이 맑았다. 울란바토르 시내를 빠져나오자, 그야말로 한없는 초원… 초해(草海)가 펼쳐졌다.
몽골에서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빨려 들어갈 듯 짙푸르고 드넓은 하늘……. 그야말로 이 대초원과 그 위의 사람 그 모두를 내리누르는 하늘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새파랄까. 어쩌면 저렇게 끝이 없을까. 산과 건물로 가려진 곳에서만 살아왔던 나는 난생 처음 보는 하늘이 사방에 끝없이 뻗어있었다. 몽골어로는 뭉그 텡그린(끝없는 하늘), 부크야트 족의 말로는 ?게 텡게리라는 이 말은 몽골의 토속신앙에서 최고신의 이름이다. 그 초원의 하늘을 바라보노라니 어째서 저 하늘을 신으로 섬기는지 절감할 수 있었다…….
출발할 때 오보의 주위를
시계방향으로 세 번 돌았다. 이 오보란 것은 우리나라의 성황당 같은 것으로, 여행의 안전과 소망을 기원하는 곳이라고 한다.
땅에 시선을 돌리자면, 인생은 로망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또한 절감하고 만다.
하라호름까지 420km. 차로 가도 8시간은 너끈히 걸린다. 게다가 포장도로보다는 비포장도로가 많아서 차멀미를 하는 나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종종 차창 밖으로 보이는 말 타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물론 나는 말을 타본 적이 없지만 이 덜컹거리는 길에서 벗어난다면야 무엇이 대수랴.
길만 해도 이런 상황이니 우리나라처럼 휴게소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셀프서비스인 주유소조차도 지나치는 것이 행운일 지경이다. 화장실은 '원래 없다'. 몽골 사람들은 몽골의 초원은 어디나 다 화장실이다- 라고 말하지만 외국인은 무진장 곤란하다. 이런 망망대해 대초원에서는 엄폐물이 없으니, 정 수치심을 참지 못하겠다면 가까운 양떼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다. 뉴질랜드의 지인이 '양은 사실 난폭해서 머리로 박치기를 한다'라고 했지만 다행히 몽골의 양은 얌전해서 태연 뻔뻔하게 나를 쳐다보았을 뿐 머리로 박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냄새가 지독했을 따름이다.
어쨌든, 이런 환경에서 하루만에 하라호름에 닿을 수는 없었다. 간신히 하라호름이 있는 우브르항가이 아이막(우리나라의 경기도 강원도 식의 도(道)이다)에 진입하자 날이 저물고 말았다. 새벽에 출발했는데도 말이다. 몽골 현지인 가이드는 달과 별의 빛만으로도 길을 갈 수 있다고 말했지만, 결정적으로 가이드가 차를 운전하지 못했다. 그는 토박이 유목민이라 오로지 말만 탈 줄 알았던 것이다.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은 모두 눈 나쁜 한국인이어서 우리는 결국 하룻밤을 야숙하기로 했다.
몽골 민족은 유목민족이다. 양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사흘 나흘, 심하면 몇 주 이상을 집을 떠나 대초원을 누빈다. 이 때 식사와 잠은 지나가다가 들리는 아무 겔에서나 해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청객을 맞이하는 집은 그럼에도 모두 환대한다. 그들 역시 언제 집에서 떠나 멀리에서 방랑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해서라도 손을 후히 대접하는 전통이 생긴 것이다.
오로지 그것을 믿고 우리 일행은 석양빛 속에서 하얗게 드러난 겔을 찾아들었다.
전통적으로 손님들은 멀리서부터 자신의 기척을 알려야 한다. "개를 불러들이시오."라고 크게
소리치고 인기척을 내면서 다가간다. 겔의 주인은 깨끗한 옷을 내어 입고 모자를 고쳐 쓰고 나와서 손님을 맞는다. 몽골은 모자를 쓰는 것이 경의를 표하는 풍습이 있다. 또 손님이 집을 방문할 때에는 선물을 준다고 한다. 우리도 시골에서는 구하기 힘든 신문과 초콜릿 따위를 선물했더니 과묵해서 무서운 인상을 주었던 주인아저씨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겔은 몽골의 전통가옥으로 나무를 엮은 벽에 펠트를 씌운 둥근 집이다. 우리가 방문한 집처럼 할아버지와 아저씨와 아주머니와 세 명의 어린애가 살기에는 좁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와중에서도 문에서 왼쪽은 남자들이 살고 오른쪽은 여자들이 살고 문에서 맞은편은 귀중품 상자와 부처님 화상과 훈장 같은 것을 모시면서 모두 불편하지 않게 사는 것 같았다. 워낙에 열악한 환경이라 겔 안은 흡사 곰 굴 같으리라 상상했지만, 사실 겔의 안은 얼마 안 되나마 오색으로 치장된 가구와 붉은 단청으로 무척이나 화려했다.
몽골의 여름은 고기보다는 유제품을 많이 먹는 계절이다. 풀이 풍성하여 가축의 젖이 많이 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겔에 들어서서 인사치레를 하고 남자들이 코담배를 맡고 난 뒤, 우리는 아이락을 대접받았다. 이것이 소위 마유주(馬乳酒)라는 것인데, 사실은 젖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휘저어서 발효시킨 젖으로 몽골에서는 이것을 술이라기보다는 식품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분명히 알코올도 있고 비릿하고 시금털털한 것이 막걸리 같은 느낌도 들었다. 입맛에 맞을 리는 없지만 이것을 맛있게 마셔야 예의라니, 죽을 각오로 대접을 비우는 수밖에.
7월 15일 하라호름
좌우에 이 집 여자아이들을 끼고 새우잠을 청한 밤은 힘겹게 밝았다. 다시 제국의 수도를 방문하러 떠난 길은 순조로웠다. 하라호름에 도착하자 본 하라호름의 유물은-
돌거북 한 마리뿐이었다.(좌측)
음기계곡에 남근석도 있다지만 그런 것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아서 가지 않았다. 그저 맑은 물이 콸콸 흘러내리는 엘데니 조 사원으로 갔다. 불교의 백팔 번뇌를 상징하는 108개의 흰 기둥으로 들러싸여 넓은 광야에 솟은 엘데니 조 사원은 몽골 제국의 멸망과 함께 하라호름 또한 붕괴된 후에 16세기 몽골의 통치자인 아브라이잔칸에 의해 역사상 처음으로 세워진 거대한 불교 사원이다. 듣기에 사람들은 정작 이 사원이 하라호름의 유적인 줄 안다고 한다. 과연 위용이 웅장했지만, 그보다는 변변찮은 흔적조차 없는 몽골 제국의 옛 수도의 모습에 어쩐지 가슴이 아팠다.
7월 20일 울란바토르
몽골을 뼛속까지 느껴보겠다는 방침에 따라, 나는 나와 가이드와 일행 모두를 고생시키면서 예정을 훨씬 초과하여 털털거리는 대여 지프를 타고 울란바토르로 되돌아왔다. 그 동안 피가 한 방울도 안 난다는 양 도살도 구경했고 말 타는 법도 배웠고 전통 음식 차강이데(좋은 음식. 몽골 전통의 유제품을 가리키는 말이다)도 배부르게 먹었다. 그리고 땔감이 되는 마른 쇠똥도 맨손으로 만져보았다.
소위 문명인을 완전히 탈피한 반 유목민으로 살았지만, 내가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좋은 추억임을 주장하는 이유는, 그런 시간들 위에 언제나 '영원한 몽골의 하늘'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몽골의 샤먼신앙에서 접신이란 '꿈에서 혼이 빠져나가 신과 맞닿는다'라고 말한다. 과연 유목민족이다. '신이 내린다'라는 농경민족다운 샤먼문화를 가진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내게 그 바람의 혼이 허락된다면, 나는 꿈속에서라도 다시 그곳으로 가고 싶다.
끝없는 하늘의 나라로.
참고문헌
<신현덕의 몽골풍속기> 신현덕 著, 도서출판 혜안 1999
<신현덕의 몽골 리포트 아내를 빌려주는 나라> 신현덕 著, 도서출판 강 1996
<몽골의 문화와 자연지리> 박원길 著, 도서출판 두솔 1996
<몽골리아에 대하여> http://myhome.thrunet.com/~dominatecho/
<몽골리아 월드> http://www.mongolia.pe.kr/
<JR 기자의 유목민 이야기> http://mongol.chosun.com/
<몽골스쿨> http://www.mongolschool.com/
첫댓글 여행은 고생을 동반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