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에 갇힌 날
손 수 자
기상관측 100년 만에 내린 강설량이 영동지방에 쌓였다고 합니다. 정말 그러한 가 봅니다.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많은 눈이 쌓일 줄은 몰랐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커텐을 제치니 발코니에 쌓인 눈이 창 너머로 집안을 들여다봅니다. 어처구니없다고 할까요.
TV를 켜니 폭설로 인한 피해 사례가 화면을 채우고 있습니다. 비닐하우스가 폭삭 내려앉고, 공장 지붕이 무너지고, 정박 중이던 어선까지도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침몰했다는 뉴스입니다. 안타까운 사연들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지만 창 밖의 설경은 나를 설국으로 안내해 줍니다. 참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티 없는 세상입니다. 나는 하얀 도화지에 찍힌 점 하나가 되어 환상적인 세상을 두리번거리고 있습니다. 현기증이 일 것 같은 그 감동을 무엇으로 표현해야 할까요.
올 겨울, 첫 눈이 살짝 내린 이후 겨우내 눈 없는 산촌, 삭막한 들미골이었습니다. 찬바람이 불때마다 낙엽 뒹구는 소리가 스산하여 어깨를 더욱 움츠리게 했지요. 40여 일간 눈 한 송이 내리지 않은 가뭄으로 인해 양양 지역에서 큰 산불이 났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일어난 산불입니다. 우리 집이 있는 들미골과 가까운 현남면 상월천리라는 곳에서 발생한 산불이 강풍을 타고 산등성이를 뛰어 넘어 올까봐 얼마나 가슴 졸였던지 잠을 설쳤습니다. 다행히 강풍이 들미골 반대쪽으로 불어 우리 마을은 마음을 놓았지만, 그 대신 다른 마을이 피해를 보았겠지요. 그들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괜히 미안해집니다. 2005년 4월에 낙산사를 태운 산불보다 피해 면적이 더 크다고 하니 놀랍습니다. 폭설일망정 눈이 조금만 일찍 내렸더라면 그런 피해는 없었겠지요.
어젯밤에 느닷없이 내린 폭설로 어성전의 들미골은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작년에도 많은 눈이 왔었지만, 닷새 동안 서서히 내렸기에 제설차가 날마다 와서 길을 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룻밤 사이에 1미터가량 폭설이 내리니 제설차도 속수무책인가 봅니다. 눈에 고립된 지 이틀이 지나고 있지만 아직 길을 뚫어 준다는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기도 하겠지요. 몇 가구 안 되는 들미골보다 더 급한 곳이 국도와 지방도일 테니 이 산간 지역까지 차례가 쉬이 오겠습니까. 마음 느긋이 기다릴 수밖에요.
40년 지기 친구에게서 안부 전화가 왔습니다. TV뉴스를 보다가 걱정이 되어서 전화를 했노라고… "쌀은 충분하냐? 식수와 난방유는? 김칫독에서 김치는 미리 꺼내 놓았느냐?"는 둥 염려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상냥하게 대하면서 심심치 않게 사이좋게 지내라더군요. 말 수 적은 내가 눈에 갇힌 남편을 갑갑하게 할 것 같은가 봅니다. 친구에게 염려 말라고 했지요. 월동 준비는 완벽하고 남편에겐 TV, 나에겐 컴퓨터가 있으니 심심할 일은 전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 왈, "얘, 산골에서 무슨 TV이고 컴퓨터냐. 둘이 오순도순 얘기하며 지내야지!"라고 하더군요. 부부가 40여 년간 함께 살아오는 동안 내가 너 같고, 네가 나처럼 되었는데 새삼 상냥하게 아양이라도 떨면 남편이 의아해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런 산골에서는 부부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지 않을까요.
아침 식사 후, 두꺼운 눈 이불을 뒤집어쓰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무쏘 엉덩이를 눈삽으로 툭툭 쳤습니다. 무쏘는 겨우 꽁무니만 내 보이며, 힘들게 깨우지 말고 한 잠 푹 자게 그냥 내버려 두라는 듯하네요. 내 이마에 송골송골 솟아난 땀방울을 본 무쏘가 오히려 나를 안쓰러워 하나봅니다. 자동차를 덮고 있는 눈을 치우기가 너무 버거워 무쏘의 마음을 읽은 척, 하던 일을 멈추었습니다.
그나저나 우리 호피가 걱정입니다. 호피 집은 감나무 옆에 있는데 그곳까지 눈을 치우고 길을 낼 일이 아득하기 때문이지요. 사냥개 호피와 함께 있던 발발이 황돌이는 대문 가까이로 옮겼기에 아침밥을 주었는데, 호피는 굶어 있는 상태입니다. 내가 길을 삼분의 일 쯤 냈으니까 나머지는 남편이 눈을 치우고 호피에게 늦은 아침밥을 줄 것입니다.
지난 이른 봄, 계곡물이 넘쳐흐르는 임도에 눈 속에서 몸을 반쯤 드러낸 채 숨져 있는 고라니를 발견하고 마음 아팠던 일이 생각납니다. 아마 산에 눈이 쌓이자 먹이를 구하러 마을 쪽으로 내려오다가 기진맥진하여 쓰러진 그 위에 폭설이 내렸나 봅니다. 이번 눈 폭탄으로 인해 또 그러한 일이 발생될까 걱정스럽습니다. 우리 호피는 늦은 아침밥이라도 먹을 수 있으니 행복한 줄 알아야 하겠지요.
오늘 밤부터 내일까지 영동 지방에 50cm 가량의 눈이 더 내린다고 합니다. 쌓인 눈 위에 50cm정도의 눈이 더 쌓인다면……. 어휴~, 생각만 해도 막막해 집니다. 허나 작년에는 폭설을 피해 이틀 밤을 양양 읍내와 강릉에서 지내다 왔는데, 이젠 눈길이 열려도 읍내로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눈에 갇혔다는 절망스런 말을 할 것이 아니라, 하얀 세상을 바라보며 때가 낀 마음속을 하얗게 빨래라도 할까 봅니다. 비누로 지지 않던 때가 눈에 비벼 빨면 깨끗하게 없어질 지는 두고 볼 일이고요. 그렇게 이곳에 조금씩 순응하며 살다보면 우리도 참 자연인이 될 수 있겠지요.
폭설이 결코 해롭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가냘픈 숨을 몰아쉬던 계곡물이 활기찬 소리로 봄을 불러들일 것이고, 산불지기님들의 수고도 덜게 되었습니다. 그 뿐인가요? 산은 많은 생명수를 품게 되었으니 잉태하고 있는 갖가지 생명체를 건강하게 탄생 시킬 것입니다. 이렇게 긍정의 눈으로 허리춤까지 쌓인 눈을 바라보니 폭설에 갇혀 있어도 희망의 봄이 성큼 다가온 듯합니다. 그 봄이 있기에 폭설에 고립되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나를 아끼는 여러분들이 있기에 외롭지도 않습니다. 모든 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기에 폭설에 갇힌 2011년 2월 13일은 나에게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날로 기록될 것입니다.
첫댓글 불 걱정을 너무 많이 하셨나 봅니다. 눈이 저리 많이 내린 것을보니. 사진 올리시고 글을 쓰신 것을 보고 큰일은 없으시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런 눈 속에서 한달만 세상과 소통을 끊고 살아보고 싶습니다. 창작수필 다음호에 실릴 눈이야기가 기다려 집니다.
봄비님의 소망이 어성전에 와서 눈에 갇히는 것이라 했는데 찬웅님도 같은 마음이네요. 오늘 또 눈이 내리고 있는데 얼마나 예쁘게 내리는지요! 창수 연재는 지난 겨울호로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눈 소식은 전해 드리겠습니다.
문정희님의 '한계령' 시가 생각나는군요. 봄을 기다려 봅니다!! 건강하세요^^
고마워요. 마야님! 마야님도 건강하세요.
이례적인 폭설에,,염려가 되는 군요 들미소님. 건재 하시니 다행입니다......눈 핑계로 멋진 글이나 많이 보여 주세요~~ ^&^
시그마님이 이곳에 계신다면 저처럼 집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 같으네요. 아마 설피라도 신고 눈을 헤치며 이산 저산 오르락 내리락 하실 듯...ㅎㅎ. 그토록 눈 위를 쏘다니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설경입니다. 고맙습니다. 시그마님!
들미소님은 마당부터 눈을 뚫으세요. 저는 양양입구부터 뚫고 들어 갈께요. 그래서 멋진 눈터널을 만드는 거얘요.^^ 어릴 때 제 고향 봉평에도 그리 많은 눈이 내린 적이 있었지요. 밤이면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소나무가지들이 부러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지요. 언니와 저는 이글루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 한살림(?) 차린 적도 있었습니다.^^
나도 어렸을 적에 고양이님처럼 눈에서 놀던 추억이 있답니다. 옛날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으니 들미골에서, 양양입구에서 마주 터널을 뚫지 않아도 이미 소통의 터널은 뚫린 듯하네요.ㅎㅎ. 이 시각에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네요.
아참, 오늘 들미골 눈길이 뚫렸습니다. 지난 밤에 1차 눈을 치고, 오늘 아침 포크레인이 다시 와서 길을 냈는데 또 쌓이고 있네요.
들미소님 그 많은 눈 폭탄 속에서도 피해가 없으니 다행이네요. 불편한 중에도 느긋하게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저도 오늘 동해에 사는 친구와 만나서 겨울 산을 가기로 했는데 눈이 무서워서 취소했답니다.
속히 들미골에 자동차가 드나드는 날이 오기를 빌어봅니다.
선생님! 동해 가실 때 저랑 같이 가세요. 강릉바우길에서 얼굴 잊어버리겠다고 성화여서 한번 다녀올까 합니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영동지방 어디쯤에서 만나서 어성전도 가구요. 그나저나 아무래도 봄이 되어야겠지요?
어머나~, 한별님! 귀한 걸음 하셨습니다. 저, 두 팔 벌리고 한별님을 맞고 있답니다.ㅎㅎ.
동해 친구가 이사 가면 동해에 오실 기회가 적어질텐데 이번 폭설이 좋은 기회를 가로막았네요.
그대신 어성전에 오시면 되겠지요?
눈이 녹으면 부부 소나무에게 한별님 안부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아마 잘 있으리라 여겨지니까요.
강원도에 눈이 많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저도 들미소님이 먼저 떠올랐어요.
이렇게 건재하시다는 소식을 보내주셔서 참 다행이고. 더구나 편안하게 받아들이시는 모습이 정말 감동입니다.
눈 치우시다가 몸살 앓으실까봐 걱정되네요. 쉬엄쉬엄 하셔요^^^^
강원도 폭설 소식에 두레박님께서도 제 염려를 해 주셨네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지나다보면 폭설에 고립되었다고 겁먹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제, 오늘 도로의 눈을 치웠기에 이젠 나들이를 해도 되지만, 눈 덮인 길에서 운전하는 것을 자제하고 있습니다.
눈이 크기때문인지 겁이 많거든요.ㅎㅎ.
멀리에서도 걱정을 했지만 이런 때 부부의 정을 더 돈독히 한다고 말하면 어느 쪽에 손을 들어 줄까요? 눈을 구경하지 못하고 지내는 파리에 생활이 그렇습니다. 좋은 눈 경치 사진 좀 올려 주십시오. 바빠서 카페에 전혀 들어오질 못하다가 오늘 무슨 마음이 내켰는지 들어왔네요, 눈이 많이 오면 풍년이 든다고 했는데. 좋은 일만 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파리에서 명천 드림
어머나!! 명천님이 다녀가셨네요.
이런 저런 바쁜 일로 카페에 들어와 느긋하게 있지 못했기에 이제야 여기에서 뵙게 되었습니다.
건강하시지요? 새해 인사드린다고 벼르는 사이 어언 봄을 맞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곧 어성전 설경과 함께 이곳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한주일이나 지났는데 오늘 처음 보다니------. 아마 내 컴퓨터에 새글이 떴다는 표시가 안된 것 같습니다.
건재하시다는 소식과 함께 좋은 글을 보게되어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장노님, 안녕하세요?
문우의 밤 이후에 이곳에서라도 뵐 기회가 적었나 봅니다.
여러분들께 폭설 소식을 전해야 하겠는데 어찌할까 하다가 편지 형식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그 소식을 접하고 이렇게 안도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니 참 행복합니다. 그 고마움에 답할 날이 언젠가는 있겠지요?
들미소님, 눈이 와도 와도 너무 했지요. 눈 속에 갇혀서도 결코 해롭지 않다는 말씀이 감동적입니다. ,눈.을 뒤집으면 '곡'이 됩니다. 곡은 곡조(曲調)의 준말로 멜로디가 되겠죠. 들미소님이 부르는 눈 속에서 부르는 긍정의 노래가 들립니다 . 눈은 노래로 통하는가 봅니다. 그래서 노래를 하나 불러드립니다.
<토끼야 토기야 산 속의 토기야/ 흰 눈이 오면은 무얼 먹고 사느냐? ....중략....흰눈이 내려도 걱정이 없단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눈'을 뒤집어 예쁜 曲調, 제가 좋아하는 동요를 불러주시는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겨울이 되어도 걱정이 없단다/ 엄마가 아빠가 여름동안 모아논/ 맛있는 먹이가 얼마든지 있단다>
ㅎㅎ 저는 노래 2절을 불러드립니다. 눈이 너무 쌓여 오시고 싶은 분들의 길을 막은 것이 안타깝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