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례행사처럼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어머니는 꼭 내게 시켰다 싫은 내색 감추며 산에 오른다 이른 봄의 매서운 바람이 잠복해 있다 나를 향해 달려든다 커다란 나뭇가지 몇 개를 골라 새끼줄로 묶는다 어른 키 두 배가 넘는 나뭇가지를 끌고 오려면 아침을 든든히 먹었어도 꼬르르륵 소리 요동친다 등에 땀이 흐르고 목에 두른 수건이 젖는다 그 사이로 바람이 파고들면 오싹했다 담장에 고정시키고 새끼줄에 돌멩이를 묶어 걸쳐 놓았다 한나절 걸린 내 임무는 끝이 났다 하늘만 보였던 내서면 서원 1리 작은 마을 밤원 며칠 전부터 어머니는 담 밑에 구덩이를 파 거름을 주고 기다리고 있었다 구덩이에 호박씨를 심고 작은 비닐로 하우스를 만들었다 여름에서 가을까지 진노랑 호박꽃이 나팔을 불었고 벌들이 드나들며 윙윙거리는 소리가 흰구름과 함께 출렁였다 연두색 애호박이 나무를 타고 앉았다 어머니는 호박 된장찌개와 볶음을 해 드셨고 여기저기 나누며 행복해했다 가끔 나를 오라 해서 몇 개 따 주었다 집에도 있다는 말 못하고 가지고 와 먹으면 달고 맛났다 늦가을이 되면 늙은 호박이 금덩이인 양 여기저기 달렸다 가을걷이 또한 나의 몫 말라비틀어진 호박 덩굴과 나뭇가지를 한쪽에 치웠다 나뭇가지는 겨우내 땔감으로 쓰였다 봉당 가득 가지런히 놓인 늙은 호박을 보면 그나마 뿌듯했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겨울이 왔다 올봄에는 어머니가 나뭇가지 주워 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십여 년간 해오던 일에서 놓여나니 홀가분했다 뭔지 모를 찜찜함의 정체는 나중에 알았다 늦은 봄날 어머니는 하늘나라에 가셨다. 강은택 독도서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