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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 秋 戰 國 時 代
晉 王 朝 世 家
春秋時代(춘추시대)
晉(진) BC. 11세기∼BC. 349 위치 산서성 성 姬(희) 작위 侯爵(후작)
代數 | 在位期間 | 位 | 姓名 | 關係 | 首都 | 現地名 |
제 1대 | BC. 1042∼ | 唐叔 (당숙) | 虞(우) | 주무왕의 3남 | 唐(당) | 山西省 太原市 |
제 2대 | 晉侯(진후) | 燮(섭) | 당숙의 아들 | 산서성 태원시 | ||
제 3대 | 武侯(무후) | 寧族(영족) | 진후의 아들 | |||
제 4대 | BC. ?∼BC. 860 | 成侯(성후) | 服人(복인) | 무후의 아들 | ||
제 5대 | BC. 859∼ | 厲侯(여후) | 福(복) | 성후의 아들 | ||
제 6대 | BC. 858∼BC. 841 | 靖侯(정후) | 宜臼(의구) | 여후의 아들 | ||
제 7대 | BC. 840∼BC. 823 | 釐侯(희우) | 司徒(사도) | 정후의 아들 | ||
제 8대 | BC. 822∼BC. 812 | 獻侯(헌후) | 蘇.籍(소.적) | 희후의 아들 | ||
제 9대 | BC. 812∼BC. 785 | 穆侯(목후) | 費王(비왕) | 헌후의 아들 | ||
제 10대 | BC. ?∼BC. 780 | 찬탈 | 殤叔(상숙) | 목후의 동생 | ||
제 11대 | BC. 780∼BC. 746 | 文侯(문후) | 仇(구) | 목후의 아들 | ||
제 12대 | BC. 745∼BC. 740 | 昭侯(소후) | 伯(백) | 문후의 아들 | ||
제 13대 | BC. 739∼BC. 724 | 孝侯(효후) | 平(평) | 소후의 아들 | ||
제 14대 | BC. 723∼BC. 718 | 卾侯(악후) | 郤(극) | 효후의 아우 | ||
제 15대 | BC. 717∼BC. 709 | 哀侯(애후) | 光(광) | 악후의 아들 | ||
제 16대 | BC. 708∼BC. 705 | 小子侯(소자후) | 애후의 아들 | |||
제 17대 | BC. 704∼BC. 678 | 晉侯(진후) | 緡(민) | 애후의 아우 | ||
곡옥 | BC. 744∼BC. 731 | 桓叔(환숙) | 成師(성사) | 문후의 아우 | ||
곡옥 | BC. 730∼BC. 716 | 莊伯(장백) | 鱓(선) | 성사의 아들 | ||
곡옥 | BC. 715∼BC. 677 | 武公(무공) | 稱(칭) | 장백의 아들 | ||
제 18대 | 武公(무공) | 稱(칭) | 장백의 아들 | |||
제 19대 | BC. 676∼BC. 651 | 獻公(헌공) | 詭諸(궤제) | 무공의 아들 | ||
제 20대 | BC. 651 | 奚齊(해제) | 헌공의 아들 | |||
제 21대 | BC. 651 | 悼子(도자) | 헌공의 아들 | |||
제 22대 | BC. 650∼BC. 637 | 惠公(혜공) | 夷吾(이오) | 헌공의 아들 | ||
제 23대 | BC. 637 | 懷公(회공) | 圄(어) | 혜공의 아들 | ||
제 24대 | BC. 636∼BC. 628 | 文公(문공) | 重耳(중이) | 헌공의 아들 | ||
제 25대 | BC. 627∼BC. 621 | 襄公(양공) | 歡(환) | 문공의 아들 | ||
제 26대 | BC. 620∼BC. 607 | 靈公(영공) | 夷皐(이고) | 양공의 아들 | ||
제 27대 | BC. 606∼BC. 600 | 成公(성공) | 黑臀(흑둔) | 양공의 아우 | ||
제 28대 | BC. 599∼BC. 581 | 景公(경공) | 據(거) | 성공의 아들 | ||
제 29대 | BC. 580∼BC. 573 | 厲公(여공) | 壽曼(수만) | 경공의 아들 | ||
제 30대 | BC. 572∼BC. 558 | 悼公(도공) | 周(주) | 양공의 손자 | ||
제 31대 | BC. 557∼BC. 532 | 平公(평공) | 彪(표) | 도공의 아들 | ||
제 32대 | BC. 531∼BC. 526 | 昭公(소공) | 夷(이) | 장평공의 아들 | ||
제 33대 | BC. 525∼BC. 512 | 頃公(경공) | 棄疾(기질) | 소공의 아들 | ||
제 34대 | BC. 511∼BC. 475 | 定公(정공) | 午(오) | 경공의 아들 | ||
제 35대 | BC. 474∼BC. 452 | 出公(출공) | 鑿(착) | 정공의 아들 | ||
제 36대 | BC. 451∼BC. 434 | 哀公(애공) | 驕(교) | 소공의 종손자 | ||
제 37대 | BC. 433∼BC. 416 | 幽公(유공) | 柳(유) | 애공의 아들 | ||
제 38대 | BC. 415∼BC. 389 | 烈公(열공) | 止(지) | 유공의 아들 | ||
제 39대 | BC. 388∼BC. 357 | 孝公(효공) | 頎(기) | 열공의 아들 | ||
제 40대 | BC. 356∼BC. 349 | 靜公(정공) | 俱酒(구주) | 효공의 아들 |
제 1대 당숙 우(BC. ?∼BC. ?)
주 무왕과 읍강의 삼남. 주 성왕의 동복아우
주 성왕 시대에 당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 주공 희단이 당나라를 멸하고 그곳을 주 성왕의 봉지로 주어 당나라의 군주가 되었다고 한다. 주 성왕이 숙우와 함께 있다가 장난삼아 오동나무 잎으로 珪(규. 옥으로 만든 임명장 같은 것)을 만들어 숙우에게 주며 말했다. “이것으로 너를 제후에 봉한다.“그런대 주 성왕은 이것이 놀이였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사일이 주 성왕에게 천자에게 농담은 없습니다. 라고 하여 그대 로 임명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진후 섭이 뒤를 이으면서 국호가 당나라에서 진나라로 바꿔었는데 그 이유는 진후 섭 대에 晉水(진수) 유역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제 2대 진후(BC. ?∼BC. ?)
제나라 군주인 제 정공과 위나라의 제 2대 군주인 위 강백과 주공 단의 아들 노공 백금. 웅역과 함께 주 강왕을 섬겼다. 이때 옛 당나라 땅에서 진수 유역으로 나라를 옮겼기에 국호가 晉(진)나라로 불리게 되었다.
제 3대 무후(BC. ?∼BC. ?)
진나라의 제 3대 군주이며, 진후 섭의 아들이며, 진 성후의 아버지다.
제 4대 성후(BC∼BC. 860)
진나라의 제 4대 군주이며 무후의 아들이며, 진 여후의 아버지다.
제 5대 여후(BC. ?∼BC. 859)
진나라의 제 5대 군주이며. 진 정후의 아버지다. 성후가 죽자 그 뒤를 이었으나 그도 그 해에 죽었다.
제 6대 정후(BC. ?∼BC. 841)
정후 17년(BC. 842년), 주 여왕이 폭정을 자행해 국인폭동이 일어나 주 정공과 소 목공이 나라를 대신 다스리는 공화시대 때 군주가 되었다. 정후 18년(BC. 841년), 정후가 사망하였고 그 아들 사도가 뒤를 이었다.
제 7대 희후(BC. 840∼BC. 823)
정후 18년(BC. 840년), 아버지인 정후가 죽고 그 뒤를 이었다. 희후 18년(BC. 823년), 희후가 죽고 그 아들인 희소가 뒤를 이었다.
제 8대 헌후(BC. ?∼BC. 812)
周 宣王(주 선왕) 13년(BC. 814)인 진 헌후 9년 주 선왕이 동쪽에 순수를 해 진나라에 이르자 진 헌후는 병사를 거느리고 주 선왕의 명을 받들어 산동 지방의 오랑케인 숙이족을 정벌하였다. 주 선왕 15년(BC. 812년)인 진 헌후 11년 헌우는 사망했다.
제 9대 목우(BC. 811∼BC. 785)
진 헌후의 아들이며, 진 상숙의 형. 진 문후. 곡옥환숙의 아버지다.
목우 4년(BC. 809년), 제나라 여자 강씨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목후 28년(BC. 785), 진 목후는 죽고 동생 인 가보가 진나라의 군주가 된다. 그의 사후 그이 아우인 가보가 진 상숙이 되어 태자 희구를 몰아내고 진 나라의 군주가 되었으나 희구가 힘을 길러 그를 군주 자리에서 몰아내고 죽여버렸다. 진 목우의 자손 인 韓萬(한만)은 진나라가 3진으로 갈라지면서 나온 한나라의 시조가 된다.
제 10대 상숙(BC. ?∼BC. 780)
헌후의 아들이자, 목후의 아우. 진 목우가 죽었을 때 원래 태자인 희구가 진후가 되어야 했으나 그가 희 구를 몰아내고 진후 자리를 빼앗으니 그가 바로 진 나라의 군주인 진 상숙이다. 진 상숙 4년(BC. 780 년)상숙이 힘을 기른 조카 희구의 습격을 받아서 진 나라의 군위를 축출당하고 상숙은 바로 죽었다.
제 11대 문후(BC. 805∼BC. 746)
진 문후는 원래 진 목후의 태자였다. 그런데 진 문후의 숙부인 희가보가 진 목후가 죽자마자 정권을 탈 취했다. 그러나 훗날 진 문후가 될 희구는 쫓겨난 동안 힘을 길러서 진 상숙 4년(bc. 780년), 상숙을 기 습해 시해하고 진후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진 문후다.
진 문후는 정나라의 환공과 함께 西周(서주)가 견융족에게 망한 뒤 東周를(동주) 부흥시키는 공로를 세 우는 진 나라 군주다. 문후 10년(BC. 770년), 東周(동주)의 유왕이 죽고 평왕이 즉위한다. 진 문후는 그 를 구원하기 위해 병사를 거느리고 정 무공. 秦(진) 양공과 함께 평왕의 동천을 돕는 공로를 세웠다. 그 런데 이틈을 타서 다른 왕족인 姬余臣(희여신)이 왕을 자칭하니 그가 휴왕이다. 그리하여 주나라는 양분 된다. 곧 문후는 휴양을 죽였다. 이러하여 주 왕실는 다시 하나가 된다.
문후 25년(BC. 757년), 진 문후는 韓(한)나라를 쳐서 멸망시켰다. 진 문후 35년(BC. 746년) 진 문후는 사망하고 그 뒤를 아들 희백이 진후가 된다.
제 12대 소후(BC. ?∼BC. 739)
소후 원년(BC. 745년), 자신의 숙부인 환숙의 세력이 강력했기 때문에 그 세력이 두려워 환숙를 曲 沃(곡옥)에 봉해 진나라 내에 곡옥백이라는 “제후의 제후령“이 세워졌다. 곡옥의 성읍이 翼城(익성)보다 컸다. 진 소후 7년(BC. 745년), 진나라의 대신인 潘父(반보)가 곡옥환숙과 내통하여 진 소후를 시해하 고 곡옥의 환숙을 맞아들여 진나라의 도성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진나라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환숙을 곡옥으로 몰아냈다. 또한 진나라 백성은 소후의 아들인 평을 옹립했다. 그가 효후다. 진 효후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반보를 주살했다.
제 13대 효우(BC. ?∼BC. 724)
진 소후 6년(BC. 739), 소후가 대신 반보에게 죽고 곡옥과 내통한 반보가 곡옥환숙을 맞이했으나 진 나 라 사람들은 曲沃桓叔(곡옥환숙)을 내쫓고는 소후의 아들인 평을 진후로 모셨다. 평은 즉위 후 반보를 주살했다. 진 효우 15년(BC. 724년), 곡옥환숙의 아들인 曲沃莊伯(곡옥장백)이 진나라의 도성인 翼(익)을 쳐서 진 효후를 살해했다. 그러나 진나라 사람들은 곡옥장백에게도 반발해 곡옥장백을 내쫓고 효우의 아우인 곡을 군주로 모시니 그가 악후다.
제 14대 악후(BC. ?∼BC. 817)
진 효후 15년(BC. 724년, 진 효우가 곡옥장백에게 살해되자. 진나라 사람들이 곡옥장백을 몰아내고 효 후의 아우인 그를 즉위시키니 바로 진 악후이다. 곡옥장백이 진 악후의 상을 틈타 益(익)을 공격했으나 周(주) 환왕이 곡옥을 쳐서 장백을 내쫓고는 공자 희광을 진후로 올리니 그가 바로 진 애후다. 후에 곡 옥이 주나라에 반기를 들자 주 환왕은 虢公(괵공. 괵나라의 공작)으로 하여금 곡옥을 치게했다. 그 틈에 진나라는 여유가 생겨 진 애후가 즉위했다. 진나라 大夫 嘉父(대부 가보)는 진 악후를 鄂(악) 땅으로 맞아들였다. 진 악후가 죽자 그에게 악후라는 시호를 주었다고 한다.
제 15대 애후(BC. ?∼BC. 710)
진 애후 8년(BC. 710), 곡옥의 백작이자 진나라 통일의 주인공인 곡옥무공(진 무공)에게 분수유역에서 패해 사로잡힌 뒤에 진나라 수도 翼(익)에서 애후의 아들인 소자후를 옹립하자 진 무공에게 살해당했다.
제 16대 소자후(BC. ?∼705)
진 소자후 4년(BC. 705년), 사기에 의하면 진 무공 즉 곡옥무공은 평화 협정을 하자는 핑계로 소자후를 유인했고, 끝내는 소자후를 살해 해버렸다. 주 환왕은 군사를 풀어서 곡옥무공을 치니 곡옥무공은 곡옥 으로 퇴각했다. 주 나라 측에서 진 애후의 아우인 희민을 진후로 임명하니 그가 바로 진후민이다.
제 17대 진후(BC. ?∼BC. 679)
진 문후의 후손의 봉토인 익의 마지막 군주. 진 악후의 아들, 진 애후의 아우. 시호가 없어서 晉侯 緡 (진후 민)이라 불린다. 곡옥대진 사건에서 죽었다는 설과 폐위만 되고 생존했다는 설도 있다.
진후 민 원년(BC. 704년), 周 桓王(주 환왕)은 진 무공 즉 곡옥무공을 翼(익)에서 몰아낸 뒤 민을 제후 로 세웠다. 그는 주나라와 괵나라의 원조를 받으며 나름대로 선전했다. 진후 민28년(BC. 679년), 결국 익이 함락되어서 진은 멸망되었다. 곡옥무공은 주 희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진후가 되어서 진 무공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로써 곡옥대진은 종결되었다.
곡옥환숙(BC. 802∼BC. 731)
곡옥의 초대 백작이며, 본명은 姬成師(희성사)며. 晉 穆侯(진 목후) 비왕의 아들이며 晉 文侯(진 문후) 의 동생이며. 그 뒤를 이은 晉 昭侯(진 소후)의 숙부이기 때문에 곡옥환숙이라 불린다.
진 소후 원년(BC. 745년), 진 소후는 문후가 죽고 진후가 되었는데 희성사의 세력이 강성했기 때문에 그를 두려워한 진 소후는 희성사를 曲沃(곡옥)의 백작에 봉했다. 그 때 희성사의 나이는 58세였다.
곡옥환숙 5년(BC. 739), 희성사가 곡옥의 백작이 된지 약 5년째 되는 해였다. 진의 대신 반보가 진 소 후를 시해하고 곡옥환숙을 맞아들이려고 했다. 곡옥환숙 또한 진 소후가 죽은 틈을 타서 진을 먹으려 고 했다. 그러나 진나라 사람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내쫓아버렸다. 그리고 진나라 사람들이 진 소후의 아들인 평을 진후로 모시니 그가 바로 진효후다. 이것이 곡옥대진 사건의 시작이다.
곡옥환숙 14년(BC. 731년) 곡옥환숙이 죽은 뒤 그 아들 선이 곡옥의 백작이 되니 그가 곡옥 장백이다. 그리고 곡옥장백도 진나라를 먹으려고 했으나 번번히 실패했고. 선의 아들 희칭, 즉 곡옥무 공이 진 후민을 죽이고 주나라의 재가를 청했다. 그리고 韓나(한)라의 시조로 알려진 한 무자는 이 곡 옥환숙의 아들이다
곡옥장백(BC. ?∼BC. 716)
곡옥의 제 2대 백작. 본명은 선. 곡옥환숙의 아들이며, 진 무공 즉 곡옥무공의 아버지이다.
곡옥장백 7년(BC. 724년), 곡옥장백은 국력을 키워 진의 수도인 익을 쳐서 진 효우를 살해했다. 그리고 아버지 곡옥환숙처럼 진을 먹을려고 했으나 진나라 사람들의 반발로 인해 곡옥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진 악후가 옹립되었다. 곡옥자백 13년(BC. 718년) 진 악후가 죽은 상중을 틈타 익을 다시 쳤으나 주 환왕이 곡옥장백의 곡옥 땅을 쳐서 곡옥장백은 수비에 급급했다. 그리고 진나라 사람들은 그 아들인 광을 진후로 옹립했으니 그가 바로 진 애후다. 곡옥장백 15년(BC. 716년), 곡옥장백이 사망했다.
제 18대 무공(BC. ?∼677)
곡옥장백의 아들이며, 헌공의 아버지며 진혜공과 춘추오패로 이름난 진 무공의 할아버지이며. 진 회공의 증조 할아버지다. 곡옥의 3대 백작으로 진나라의 후작이 되기 위해 싸워 끝내 진나라를 차지하여 곡옥 대진 사건을 종결 하고 주나라의 왕인 희왕에게 뇌물을 바쳐 곡옥백작에서 진나라 후작이 된 인물이다.
진 애후 8년(BC. 710년), 진 애후가 형정 땅을 점령하자 곡옥무공은 형정사람과 힘을 합치고 이듬해 봄 에 익을 치기 위해 형정에 주둔해 한만을 여융. 양홍을 거우로 삼아 애후를 汾水(분수)가에서 사로잡았 다. 하지만 진나라에서 소자후를 세우자 곡옥무공은 인질의 가치가 없다고 여겨 진 애후를 살해했다.
진 소자후 3년(BC. 706년), 소자후를 유인해서 살해했으나 그 대가로 주 환왕이 괵중을 보내 곡옥을 치 자 수도를 지키기 위해 회군했다. 그리하여 주 환왕은 진후 민을 옹립한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
진후 민 2년(BC. 703년),, 진 무공 인생 최대의 위기가 닥쳤으니 괵중. 예백. 양백. 순후. 가백이 연합하 여 진 무공을 쳤다. 진후 민 28년(BC. 679년)., 수십년의 어려운 싸움 끝에 진을 쳐서 멸하고 진후 민을 몰아냈다. 진나라의 병력을 주 희왕에게 뇌물로 바치고 1군만 두는 조건으로 곡옥백에서 진후로 승진한 다. 진 무공 2년(BC. 677년), 무공은 진후가 된지 겨우 2년 만에 사망했다.
제 19대 헌공(BC. ?∼BC. 651)
진 무공의 아들, 신생. 진 문공. 해제. 탁자(도자)의 아버지
군주권을 위협하는 곡옥백의 자손들을 숙청하여, 진후의 위력을 확립하였다. 霍(곽). 虞(우)나라. 虢 (괵)나라를 멸하여 진의 세력을 크게 떨쳤으나 말년에 여희의 아름다움에 빠져 그 아들인 해제를 총애하 고 태자 신생을 죽이는 등 아들인 진 문공이 즉위할 때 까지 나라를 망치는 원인을 만들었다.
제 20대 해제(BC. ?∼BC. 651)
진 헌공과 여희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진 문공. 진 혜공의 이복아우. 희도자(희탁자)의 이복 형제.
여희기 낳은 소생은 적자가 아니었으므로 헌공의 다른 아들을 죽이거나 몰아내는 흉계를 꾸며 신생은 여희의 계략에 걸려 자결하고 진 문공과 진 혜공은 각기 적나라와 梁(양)나라로 달아났다. 그 후 진 헌 공이 병사하자 여희는 진 헌공의 뜻대로 해제를 진나라 군주로 삼았다. 그리고 대부 순식이 그녀와 해 제를 보좌했다. 그러나 그 뒤 대부 이극에 의해 살해되었다.
제 21대 도자, 또는 탁자(BC. ?∼BC. 651)
진 헌공과 여희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났다. 진 헌공 26년 진 헌공이 죽고 대부 순식은 여희와 함께 해제를 진나라 군주로 옹립했다. 같은 해 10월 대부 이극이 해제를 살해하였다. 그리하여 이모인 여희 가 도자를 군주로 옹립했다. 같은해 이극은 또 탁자와 순식을 살해했다. 그리고 이극은 여희를 채찍질한 뒤 처형하고 희이호를 진나라 군주로 세우니 그가 진 혜공이다.
제 22대 혜공(BC. 697∼BC. 637)
헌공의 미움으로 양나라로 달아나 양나라 군주의 딸과 결혼해 훗날 진 회공이 되는 희어와 딸 하나를 낳았다. 이극과 진 목공은 혼란에 빠진 진나라를 회복시키기 위해 이오를 군주로 옹립했다.
진 혜공 4년(BC. 647년), 진 혜공은 秦(진) 목공에게 곡식을 팔라고 부탁해 진 목공이 승낙했다. 진 혜 공 5년(BC. 646년), 진나라에 흉년이 들어 진 목공의 식량부탁을 거절했다. 진 혜공 14년(BC. 637년) 혜공이 사망했다. 진 목공의 원조을 받아 즉위해 5개의 성을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서도 주지 않았으며, 자신이 흉년이 들때는 구걸하여 놓고 진나라에 흉년이 들때는 거절하는 배은망덕한 군주였다.
제 23대 회공(BC. ?∼BC. 636)
진 혜공과 양나라 공녀의 아들이자 懷嬴(회영)의 첫 남편이다. 진 혜공 8년 (BC. 643년) 한원전투에서 혜공이 秦(진)의 군주인 진 목공의 포로가 되자 그 석방을 요구하는 조건으로 희어가 볼모로 가게 되었 고 진 목공은 진 혜공을 도운 양나라를 멸했다. 진 혜공 13년(BC. 638년), 진 혜공이 병이 들자 아내 인 회영에게 외가가 멸망당할 정도로 업신여김을 당하고 또 본국에 도울 사람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秦(진)나라를 빠져나가면서 아내인 회영을 두고 갔다. 진 회공 2년(BC. 636년), 진 회공을 따르면서 악 행을 저지른 난씨와 극씨 일당은 함께 살해되었고 큰 아버지인 진 문공이 진나라의 군주가 되면서 진 회공을 놔두면 재앙이 될것이라고 하여 진 회공을 죽여버렸다.
제 24대 문공(BC. 697∼BC. 628)
헌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헌공의 아버지인 무공은 제 환공의 딸과 결혼했는데, 나이 차가 매우났 다. 그래서 무공이 죽자 헌공은 계모를 자신의 비로 삼고 申生(신생)을 낳았다. 이후 제강이 죽자 헌공 은 다시 포로로 잡은 狄(적) 여인으로부터 딸 한명과 아들 두명, 즉 중이와 夷吾(이오)를 낳았다. 딸은 진 목공에 시집보냈다. 또한 헌공은 여융을 공격하여 그들을 멸망시키고 두 공주를 취해 언니 여희에게 서 奚齊(해제)를. 동생 소희에게서 卓子(탁자)를 낳았다. 여희는 자신의 니라를 멸망시킨 진 헌공에 한을 품고 헌공과 태자 신생사이를 이간질 했는데 여기에 말린 헌공이 태자에게 자살을 명하였다. 태자는 자 살했고 불똥이 중이와 이오에게 튀어서 중이는 翟(적)나라로. 이오는 梁(양)나라로 망명했다. 이때부터 중이는 1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방랑를 하게 된다. 한편 진나라에서는 헌공이 여희의 아들인 해제를 태자로 책봉한 뒤 곧 사망한다. 그러나 해제는 곧 암살되었고. 이어 중이는 진나라 유신들로부터 보위에 오르라는 청을 받지만 아버지의 상중임을 빌미로 군위에 오르는 것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동복동생인 이오는 누님의 남편인 秦(진) 목공의 도움으로 군위에 올랐다. 그가 혜공이다. 혜공은 군위에 오르는데 도움을 주면 5개의 성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이를 배신하였다. 이후 晉(진)나라에 흉년이 들어 秦 (진)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진에서는 엄청난 원조를 주었는데 다음해에 반대로 되었지만 혜공을 이를 기 회로 진나라의 영토를 빼앗으로 침공했다가 한원대전에서 대패를 하고 포로가 되었다. 진 목공은 배은 망덕한 혜공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혜공의 누님인 비의 간곡한 요청으로 5개 성을 받고 세자 어를 인질 로 받는 조건으로 석방했다.
중이는 동생인 혜공이 보낸 자객들을 피하여 계속 방랑하였다. 진 혜공 14년(BC. 637년), 혜공은 병들 아 사망하고 세자 어가 돌아와 군위을 이었는데 그가 회공이다. 한편 진 목공은 어가 자신의 허락을 받 지 않고 귀국한 것에 분노했고, 중이를 끌어들였다. 진 목공의 도움을 받아 회공을 치자 조카인 회공은 도망가고 중이가 재위에 오르니 바로 진 문공이다. 즉위 후 논공행상을 하며, 대사면령을 발표하여 혜공 이나 회공을 따르던 이들에게도 기회를 주었다. 또한 각종 개혁 정책과 군사 활동으로 인해 춘추오패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문공 8년(BC. 628년), 문공은 패업을 이룬지 4년 만에 사망하였다.
제 25대 양공(BC. ?∼BC. 621)
진 문공의 아들로 핍길의 소생이다. 문공 사망후 즉위한다. 양공 2년(BC. 627년), 겨울에 秦(진)나라. 정 나라와 함께 허나라를 쳤다. 양공 7년(BC. 622년), 趙衰(조쇠). 欒枝(란지). 狐偃(호언). 선차거가 죽었다. 조쇠의 자리는 그의 아들인 趙盾(조돈)이 잇는다. 이 해 양공이 사망하고 희이고가 뒤를 이었지만 나이 기 어려 조돈이 섭정을 한다. 양공은 온갖 비행을 저질러 조돈이 이를 간하자 양공은 조돈을 죽이려 하자 오히려 조돈의 從第(종제)인 조천에게 죽임을 당한다. 양공의 아들인 희이고가 선친의 뒤를 이어 영공으로 즉위한다.
제 26대 영공(BC. ?∼BC. 607)
휘는 夷皐(이고)이며, 문공의 손자고 아버지는 양공이며. 어머니는 秦(진)나라 공주인 穆嬴(목영)이다.
양공이 그가 어린 시절 죽었기 때문에 정사는 대신 조돈이 담당했다. 그러나 그가 자라면서 군주의 도 리를 다하지 않고 황음무도하게 굴었으며, 사치스럽게 놀아났다. 또 한번은 요리사가 웅장을 덜 익혔다 는 이유로 죽여버렸는데 그 시신을 궁여로 하여금 광주리에 넣어버리게 했다. 조돈이 그것을 두고 간했 으나 진 영공은 그에게 반감을 품었다. 그래서 서예에게 조돈을 척살하라고 명했으나 서예는 조돈을 보 고 충정이 뛰어나고 백성을 아끼기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머리를 들이받아 자결했다. 영공은 조돈을 잔 치에 불러 조돈을 척살하려 했다. 제이명의 도움으로 도망가 자신의 사촌인 조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영공 14년(BC. 607년), 조천은 영공을 시해했다. 趙盾(조돈. 조순)은 趙穿(조천)을 보내 주나라에서 문 공의 아들이며. 양공의 아우인 공자 흑둔을 모셔오니 그가 성공이다.
제 27대 성공(BC. ?∼BC. 600)
진 영공 14년(BC. 607년), 趙盾(조돈)의 아우인 趙穿(조천)이 진 영공을 시해한 뒤 조돈이 그를 진나라 의 군주로 모시면서 그 시기에 정치가 바르게 되었다. 공자가 이르기를 조선자인 조돈을 훌륭한 대부라 했다. 성공 원년(BC. 606년), 조씨들을 대부에 봉했다. 성공 6년(BC. 601년), 성공은 秦(진)나라를 쳐서 그 장수 공자 적을 사로잡았다. 그 해에 조돈이 죽었다. 성공 7년(BC. 600년), 성공이 사망했고 그 아들 희거가 뒤를 이어 경공으로 즉위했다.
제 28대 경공(BC. ?∼BC. 581)
경공 3년(BC. 597년), 초 장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쳐 수도인 신정을 3개월간 포위하였다. 정 나라가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해 경공은 중군장 荀林父(순임보)를 파견해 정나라를 구하게 했다. 경공 13 년(BC. 587년), 조동. 조괄이 모반을 도모하다가 실패해 제나라로 달아났다. 경공 15년(BC. 585년), 수 도를 絳(강)에서 新田(신정) 땅으로 천도했는데 경공은 이곳을 신강이라고 칭했다. 경공 19년(BC. 581 년), 점쟁이가 햇보리밥을 먹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했으나 자연적으로 병이 치유되어 그 점쟁이를 참 수했으나 화장실에 갔다가 화장실 바닥이 무너져 죽었다. 그 뒤를 이어 아들인 수만이 군주가 되니 그 가 진 여공이다.
제 29대 여공(BC. ?∼BC. 573)
여공이 匠驢氏(장려씨)집으로 가서 놀았다. 난서와 중앙언이 이들의 무리를 보내 여공을 습격, 체포했다. 그를 구금시키고 권세를 휘두러던 여공의 여러 첩중의 하나인 첩의 오빠 胥童(서동)을 죽이고 주나라 도 성에 있는 공주 주를 보위에 올렸다. 그가 도공이다.
제 30대 도공(BC. 587∼BC. 5580
기원전 573년, 진나라의 대신인 난서와 중앙헌이 군주 여공을 시해하고 그를 옹립했다. 즉위 후 백성들 의 노역을 면제하고 세금을 감면하며, 고아와 과부 등을 구휼했다. 그 후 도공은 정나라를 복종시키고 패자가 되었으나 그로부터 4년 후인 도공 16년(BC. 558년), 불과 29세 나이로 요절했다.
제 31대 장평공(BC. ?∼BC. 532)
평공 14년 오나라의 연릉계자가 사자로 와서 조무자. 한선자. 위헌자와 이야기를 나눈 뒤 이같이 말했 다, “진나라 의 정권은 마침내 이 세 명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평공 26년(532년), 평공이 사망하고 아 글 희이가 즉위했다. 그가 소공이다.
제 34대 정공(BC. ?∼BC. 475)
경공 14년(BC. 512년). 정공은 아버지 경공이 죽자 진나라의 군주 자리를 이었다. 정공 12년(BC. 500 년), 趙簡子 趙鞅(조간자 조앙)은 가신 董安(동안)으로 하여금 太原(태원) 땅에 성을 쌓게 하고 완성되자 진양이라 이름을 정했는데 대단히 견고하였다. 이후 진양성은 조씨 일가의 근거지가 되었다.
정공 30년(BC. 482년), 정공은 吳王 夫差(오왕 부차)와 衛(위)나라 황지에서 회맹하며 패자 자리를 다투 었다. 결과적으로 부차가 회맹의 맹주로 추대되지만 월나라 군주 구천이 오나라를 쳐들어오는 바람에 급히 귀환했다. 월군에게 연전연패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부차가 궁지에 몰려 자결했다. 정공 37년 (BC. 475년), 정공이 사망하였다.
제 35대 출공(BC. ?∼BC. 452)
정공의 아들이며, 애공의 먼 친척이다. 출공 원년(BC. 474년),이 당시 진나라는 조씨. 한씨. 위씨. 지 씨. 중앙씨. 범씨 육경이 나라를 6분할 해서 다스리고 있는 실정이다. 출공 22년(BC. 453년), 조씨. 한 씨. 위씨들이 힘을 합쳐 지백을 공격해 지씨들을 멸하자 진 출공은 대로해 계책을 짜서 조씨. 한씨. 위 씨 3경을 멸하려고 했다. 이 일을 제나라 의 권신 전씨와 노나라의 권신 계손씨에게 힘을 빌려 이들을 몰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조씨. 한씨. 위씨 가문은 그것을 알아채고 진 출공을 공격했다. 결국 진 출공 은 제나라로 도주했다. 그래서 소공의 증손자인 희교를 군주로 올리니 그가 바로 애공이다.
제 36대 애공(BC. ?∼BC. 434)
애공 원년(BC. 451년), 출공이 쫓겨나고 3경인 위씨. 한씨. 조씨가 옹립했기에 실권이 없었다. 애공 14 년(BC. 434년), 애공이 죽었다.
제 37대 유공(BC. ?∼ BC. 416)
진 유공 원년(BC. 433년), 진 애공이 죽자 즉위했다. 3경은 진 유공 대에 영지를 곡옥과 수도인 강만 남기고 몽땅 빼앗았다. 이때부터 삼진이 들어섰지만 이들은 아직 제후를 칭하지 않았다.
진 유공 14년(BC. 416년), 위 문후는 자객을 보내 진 유공을 살해한다.
제 38대 열공(BC. ?∼BC. 389)
열공 13년(BC. 403년), 3경인 위. 조. 한씨가 제후가 되어서 공식적으로 진나라 영토를 나눠가졌다. 열 공 23년(BC. 393년), 태자 희희가 가출했다. 열공 27년(BC. 389년). 열공이 사망했다.
제 40대 정공
趙 敬侯(조 경후). 魏 武侯(위 무후). 韓 哀侯(한 애후)가 진나라를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가지면서 정 공은 純(순)땅으로 폐출되면서 나라는 멸망한다.
진나라의 수도 변천
진후 섭 益(익)으로 천도
絳(강. 山西省 後馬市 산서성 후마시. 후에 益(익)으로 개명
경공 13년(BC. 585년), 강에서 新田(신전 山西省 後馬市 산서성 후마시) 땅으로 천도했는 데 이곳을 신강이라 했다
곡옥 무공(BC. 679년)희칭이 익을 차지한 뒤 곡옥을 수도로 삼다.
(曲沃곡옥. 山西省 臨汾市 曲沃縣 산서성 임분시 곡옥현)
사료 출처
司馬遷(사마천)의 史記世家(사기세가)와 曾先之(증선지)의 十八史略(십팔사략). 그리고 馮夢龍(풍몽룡)의 東周列國志(동주열국지)와 左丘明의 春秋左傳(춘추좌전)과 司馬光(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