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동학을 둘러싼 담론의 지평-역사적 철학연구와 철학적 역사연구 필요
2004년 09월 22일 하승우 / 경희대 정치 2004년 2월 9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됨으로써 농민군과 그 유족들은 110년 만에 명예를 회복하게 됐다. 이로써 농민군은 1894년 이후 東匪나 匪徒로 비난받던 오명을 공식적으로 지운 셈이다. 하지만 동학을 둘러싼 입장차이는 해소되지 않았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10주년이자 수운 최제우가 태어난 지 180주년 되는 해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동학1’(표영삼 지음, 통나무)과 ‘東經大全1’(최제우 지음, 김용옥 역주, 통나무)이 발간됐다. ‘동학1’이 수운의 삶을 되밟아가며 ‘교주’로 신비화된 이미지를 벗기고 사상을 올바로 세우려 한다면, ‘동경대전1’은 수운의 사상을 서구 근대를 뛰어넘는 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재해석한다. 먼저 ‘동학1’은 종교가 아니라 실천철학으로 동학을 해석한다. 後天開闢은 현세와 분리된 저 세상을 기다리는 믿음이 아니라 이원론적 세계관에 대한 부정이자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만이 진실이라는 신념이고, 한울님 역시 인간세상과 분리된 초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생성변화해 가는 과정에 있는 신”을 의미한다. 그래서 동학은 종말이나 완성을 예정한 결정론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성론이고, 생각을 바로 세우고 한결같이 수행하며 실천하는 信敬誠의 수행자세를 강조한다. ‘동학1’은 동학이 儒佛仙의 장점을 종합했다는 설을 거부하고 동학의 내용보다 儀禮와 儀式에 유불선의 형식이 들어있을 뿐이라며 수운의 독창적인 사유를 강조한다. ‘동경대전1’의 논조는 사뭇 도전적이다. 책은 서두에서 “우리는 지금 한국사에 있어서 서양사의 종결을 선언해야 하며, 조선사상사에 있어서 서양철학사의 종언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경대전1’에 따르면, 동학은 신라의 화백제도로부터 군주의 권력을 德政이라는 자연법으로 제약했던 조선 초기의 ‘신유학(neo-confucianism)’으로 이어져 내려온 “기나긴 조선역사의 연속적 토양에서 피어난 정화”이기에 근대라는 서구 개념으로 정리될 수 없다. ‘동학1’이나 ‘동경대전1’이 어떤 새로운 내용을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동안 수운과 해월 최시형을 중심으로 동학의 사상이 많이 다뤄져 왔고, ‘동학의 정치철학’(오문환 지음, 모시는사람들 刊)과 ‘동학과 전통사상’(동학학회 편저, 모시는사람들 刊)은 유학이나 불교, 도학과의 연관성을 지적했다. 그리고 ‘동학과 신서학’(김상일 지음, 지식산업사 刊)은 무와 선의 요소를 유지하는 ‘신서학’이 동학, 풍류도와 동일한 존재구조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동학1’의 특징은 새로운 사료의 발굴보다 수운의 삶과 사상을 세심하게 엮는 꼼꼼함에서, ‘동경대전1’의 특징은 플레타르키아라는 신조어가 의미하듯 동학과 조선 초기 신유학을 접목해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으로 정립하려는 노력에서 찾아진다. 사실 동학을 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정립하려는 노력으로만 따지면 김용옥보다 김지하가 앞섰다. 김용옥과 김지하의 입장은 동서문명의 만남과 융합을 가져올 패러다임이자 수행과 실천의 철학으로 동학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몇 가지 차이점도 보인다. 가장 큰 차이는 民에 대한 관점이다. 김용옥이 民本을 중심으로 권력의 정당성에 관심을 둔다면, 김지하는 民主를 포기하지 않고 民衆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민중적인 생명 사상, 민중적인 유교, 민중적 불교, 민중적 도교와 민중적 차원에서 새로 조명된 노장 사상과 선 사상, 민중적 기독교 사상 등의 핵심적인 생명 원리”(‘동학이야기’)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김지하는 동학의 민중성과 생명, 영성을 강조한다. 또 기본원리에서도 김용옥이 理氣論의 입장에서 理의 틀 속에서 氣를 해석한다면, 김지하는 氣를 중심으로 사상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인식론적 차이는 德政을 강조하는 플레타르키아와 “우주 사회적 공공성을 실천하는 생명 자치로서의 ‘주민자치’”(‘생명학1’)라는 정치적 차이로 구체화된다. 그런데 동학에 대한 입장차이는 철학계 내로 그치지 않고, 사실 그보다 더 깊은 단절의 골이 철학계와 사학계 사이에 패여 있다. 왜냐하면 그동안 사학계는 民을 농민 ‘계급’으로 제한하고 “1894년 농민전쟁은 봉건모순과 민족모순을 극복하여 근대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반봉건반제운동”(‘1894년 농민전쟁연구1’)이라고만 해석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학계는 민란의 국지성과 고립성을 뛰어넘을 조직적 기반이라는 차원에서만 동학의 가치를 인정해왔을 뿐 그 사상에 관해서는 침묵했다. 그리고 이런 골은 갈수록 깊어져 사학계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이 활약했던 남접을 중심으로, 철학계는 수운과 해월로 이어지는 북접을 중심으로 동학에 접근하는 단절을 보여왔다. 2004년 ‘당대비평’ 봄호의 ‘내가 동학을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글에서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는 민중파 사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유교적 이상주의 정신 등의 그들의 변혁적 에너지 여러 측면들을, 우리의 (서구적인) ‘근대지향’, ‘반봉건’ 같은 척도로 재단하지 말고 있었던 그대로 존중하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비판 역시 농민의 보수성을 강조하는 서구 근대론의 또 다른 모습을 드러냈을 뿐 동학의 사상적 측면에 접근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실 그의 비판은 그동안 철학계가 꾸준히 제기해 온 내용이다. 예를 들어,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동학학회 편저, 신서원 刊)는 농민전쟁에서 동학혁명으로 접근할 필요성을, 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사학계의 실증주의, 사회과학적 연구방법들이 새로 도래하는 문명전망과 연결돼야함을 주장했다. 그리고 사학계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의 동아시아사적 의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편, 서경 刊)는 동학이 근대지향성과 동시에 근대극복의 계기를 담고 있고 남접과 북접의 분리에 관한 문제제기를 수용해야 한다는 고민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처럼 새로운 문제의식은 엿볼 수 있지만 아쉽게도 그것이 구체적인 결과물로 이어지지는 않는 듯하다. 최근에 발간된 ‘대접주 김인배, 동학농민혁명의 선두에 서다’(이이화, 우윤 지음, 푸른역사 刊)는 여전히 남접과 북접의 대립이라는 관점을 고수하고 사상과 주체를 잘 버무려내지 못한 듯하다. 철학이 그 사상을 준비하고 실현할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조건을 다루지 않는다면 그 논의는 공허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학계도 운동을 이끄는 이념의 역할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농민들의 의식이 동학과 무관했다는 판단을 유보할 필요가 있다. 특히나 동학은 13자의 주문(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과 歌詞를 통해 동학도들에게 깨달음을 전하는 실천철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남접과 북접의 대립과 갈등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사학계의 연구가 ‘과거’를 복원하려 한다면, 철학계의 연구는 ‘미래’를 위한 대안으로 동학에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한 쪽의 ‘독백’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사이의 ‘대화’가 이루어질 때에만 동학의 ‘현재’가 드러날 것이다. ⓒ2004 Kyosu.net Updated: 2004-09-22 22:58 :: 관련기사 유학과 동학의 억지 만남…시대정신 잘못 읽었다 『도올심득 동경대전1』(김용옥 지음, 통나무 刊, 2004, 286쪽) 09월 22일 2004년 09월 22일 김상일 / 한신대 철학 지난 외환 위기 때에 아시아 국가들이 줄줄이 환란을 당하는 이유를 두고 서방 언론들은 ‘아시아적 가치’ 특히 유교적 가치 때문이라고 대서특필한 적 있다. 가족주의, 정실주의, 패거리주의 같은 유교적 가치관이 환란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 때에 싱가포르의 전 수상 이광요는 아시아적 가치 잘 못 없으며, 서양의 자유 민주주의 그 이상의 가치가 동양에도 있으며, 문제가 되는 것은 도리어 서양적 가치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양의 시장 경제와 자유 민주주의 시급한 도입과 동양 근대화에 이들 서양적 가치의 공헌을 인정하는 터였다. 그리고 이들 서양적 가치와 동양적 가치는 서로 양립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도올 김용옥은 김대중보다는 이광요의 입장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도올은 아마도 김대중의 입장을 두고 舍本逐末이라고 일축하면서 “서양의 근대성을 우리 역사의 내재적 논리로서 이식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32쪽)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서 서양의 ‘민주’라는 개념은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극히 일부 계층에만 해당하는 것이었고, 지금 까지도 그 의미 자체가 변한 게 없다고 한다. 서양의 ‘민주’는 한 번도 “민전체가 민전체를 지배한다는 개념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많은 다수의 합의(consent)가 지배하는 개념은 동양의 ‘民本’이라고 결론한다.(42쪽) 그러면서 도올은 이 책의 핵심 주제가 되는 이런 민본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리스어에서 하나의 신조어를 만들어 내 그것을 ‘플레타르키아 pletharchia'라 한다. 계층적 제약이 없는 다중들의 근본이라는 뜻이며 이것이 바로 동양의 민본인 동시에 수운이 그리던 이상 통치 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도올은 이 신조어로 수운의 생애와 사상을 풀어나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도올이 “우리 역사가 추구한 민본성, 플레타르키아는 그 문헌적 연원을 유교적 전통에서부터 찾을 수 있을 것이다”(47쪽)라고 하는 데 있다. 그의 전공이 갖는 한계 때문일까. 아무튼 플레타르키아의 유래를 맹자에서 찾아 중국과 한국의 기철학과 불교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플레타르키아를 문헌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동북아 전통이라는 거대한 사상적 대해에 플레타르키아라는 배를 띄워 놓고 도올은 노를 젓고 있다. 한국 역사를 시대별로 나누어 유교와 불교 그리고 샤머니즘이 서로 습합되면서 플레타르키아가 어떻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는가를 일별하고 있다. 이런 도올의 노 젓는 모습은 시원시원하고 호연지기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가 내려놓은 플레타르키아의 다음과 같은 정의와 그것의 근원을 유교에서부터 찾는 것 하고는 알맞지 않는다. 수운의 플레타르키아를 두고 “초월과 내재, 미신과 상식, 비합리와 합리, 유신과 무신, 인격과 비인격의 세계가 항상 혼재되어 있다”(184쪽)라고 했다. 도올이 내린 플레타르키아는 비이원론적 세계관을 총칭해 하는 말이라 해도 좋다. 그는 이러한 수운의 플레타르키아를 수운의 천주관(2장), 수운의 생애(3장)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pleth(다중)와 arche(본원)의 합성어로서 플레타키아를 ‘민본’과 일치시키는 것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arche'는 도올이 그렇게 첨예하게 반대하는 서양의 개체적 자아 그리고 거기서 서양의 근대화와 시민의식을 만든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arche에서 모든 이원론이 유래한다. 만약에 플레타르키아가 이러한 내용이라면 도올이 맹자에서부터 그 연원을 찾는 책 기술 방법론은 잘못된 것이다. 도올, 문명사에 대한 정립 다시 해야 이러한 오류는 도올이 문명사에 대한 정립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19세기는 동서양을 망라한 대반역의 세기였다. 소위 야스퍼스가 정의한 차축시대(주로 기원전 4~6세기)에 등장한 모든 가치들을 전면적으로 거역하는 반역의 세기였다. 차축시대의 축이 되는 인물들은 그리스의 플래토와 아리스토텔레스, 인도의 붓다, 동북아의 공자, 맹자, 노자 등이다. 차축시대란 동북아의 천추전국시대가 아니던가. 서양에서 19세기의 대표적인 반역아들은 마르크스, 다윈, 프로이트이다. 이들은 차축시대의 유산을 ‘관념론’이란 이름으로 전면 부정한다. 수운도 “유도불도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교훈가)라고 했다. 그리고 동학에서는 차축시대를 先天時代라고 나름대로 정의하고 있다. 선천시대는 가고 후천시대가 온다는 것이 동학의 역사관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맹자는 누구이고 공자는 누구인가? 그들은 춘추전국시대라는 동양의 차축시대의 인물들이 아니던가. 그 운이 다했다고 한 유불에서 플레타르키아를 찾아내 그렇게 말한 수운에게 적용한 것은 언어의 도착 현상이 아닐까. 도올은 홍수전과 수운을 비교하면서 두 사람에게 적용된 샤머니즘의 질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올은 책에서 샤머니즘에서 문명의 근원을 찾아 그것이 차축시대에 들어와 어떤 대접을 받다가 동학에서 어떻게 유불도와 습합이 돼 나타났는지를 설명해 놓았어야 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만약에 도올이 이런 시각에서 책을 다시 쓴다면 그는 그의 전공의 한계를 넘어서(맹자가 아닌) 한국 샤머니즘적 전통에서부터 화두를 꺼냈어야 할 것이다. 우리 문화 전통에는 우리만의 고유한 것이라 할 수 있는 무속과 차축시대 사이에 끼어 있는 층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仙層’이다. 이를 최치원은 ‘풍류도’라 했으며 신채호는 ‘신교’라고도 했다. 도올이 동학에서 정의한 플레타르키아의 비이원론적 요소가 모두 이 선층에 축적돼 있었던 것이다. 백두산 일대에 근원지를 두고 있었던 선풍 운동을 우리는 새삼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에 맹자의 '민본'은 서양의 '민주' 만큼이나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수운의 플레타르키아는 무의식의 막창까지 내려가 신들려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퇴계 학풍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신들린 공자’였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사는 것이 아니라 공자가 신들려야 유교도 살고 나라도 산다. 수운은 19세기의 반역 아였다. 그러나 그는 플레타르키아적 반역아였지 플로레타리아적 반역아는 결코 아니었다. 이 점이 서양의 다른 반역자들과 수운은 달랐던 것이다. 세간에서 도올을 두고 신들린 무당 같다는 말을 하는데 필자는 개인적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버드 박사가 신들린 것, 이것이 우리의 가능성이 아닐까. 도올의 책에는 기상천외의 놀라움을 주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수운이 을묘년에 신비 체험 속에서 받았다는 ‘을묘천서’를 두고 도올은 그것이 “‘천주실의’이다”라고 단정하고 있다는 점이다.(211쪽) 이런 도올의 주장에 대해 필자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려 한다. 매우 흥미 있는 주장이라고 본다. 신의 이름에 관해서 지금의 천도교에서 사용하는 ‘한울님’에 대해 필생의 과업으로 비판하고 ‘하날님을 고집해온 故 이세권 선생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너무 표영삼 선생의 주장에 일변도적으로 기운 것도 지적해 둘 점이라고 본다. 필자는 Claremont Graduate School에서 종교철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수운교의 불천신사상과 화이트헤드의 신관 비교', '동학의 신관', '동학의 철학적 원리' 등의 논문이, '원효의 판비량론', '수운과 화이트헤드' 등의 저서가 있다. ⓒ2004 Kyosu.net Updated: 2004-09-22 22:56 Copyrightⓒ 2003 교수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 신문에 게재된 기사, 링크에 대한 모든 법적권리와 책임은 기사작성자 교수신문 에게 있습니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395-184 대표전화 02-3142-4111, 편집국 02-3142-4112) 대표자 이영수 / 사업자등록번호 102-18-62781 |
다음검색
출처: 목단설 원문보기 글쓴이: 연사백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