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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해영은 고물상을 하던 아버지와 가사 일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
첫 아이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첫 아이가 딸이라고 화가 나
술에 만취해, 아이를 방바닥에 내던져 버렸다.
갓난아기는 척추를 다쳐버렸다.
갓난아기의 키는 비정상적으로 더디게 자랐다.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는 정신질환으로 운신을 못하자,
아버지는 젊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 버거워 스스로 세상을 버리고
죽음을 택해 버렸다.
그리하여 작은 거인 김 해영은 아홉 살 때부터 동생 넷을 키우며
집안 살림을 해 오는 데....................
그러는 동안 김 해영은 가난, 고생 다 견딜 수 있었지만,
엄마가 자기를 미워하는 건 이해 할 수 없었다.
‘집이 불행해진 탓은 그녀의 탓이라고 하면서 때리고, 구박해 왔다.’
소녀 김 해영은 자기를 낳은 엄마가 친 엄마 맞나 의심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훗날, 김 해영은 나이가 들어 사실을 알게 된다.
“엄마는 그녀를 핍박함으로서 장애인 딸을 구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갖다버리라는 집안의 어른들로부터 엄마는 자기의 방식으로
딸을 보호한 거였다.”
아버지의 자살, 정신질환을 앓는 엄마 대신 동생 넷을 키우고,
가정을 꾸리기 위해 소녀 김 해영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남의 집 살이를 시작한다. 그녀의 나이 겨우 열네 살!
허나 배움에 대한 욕심이 상당한 그녀는 중학교에 갓 입학 한
친구가 영어 책이라며 보여 주는 것을 보고 울컥해버린다.
그 친구는 “I am a girl. you are a boy.”라고 읽는 거라며 가르쳐 준다.
이에 배움의 자극을 받은 그녀는 두 번째 월급을 받은 날,
지체 없이 서점으로 달려가 ‘국어완전정복’과 ‘영어완전정복’을 샀다.
그러고는 틈만 나면 공부하고, 밤늦게까지 책을 보았다.
마침, 그녀가 일하던 집이 한의원이어서 곳곳에 한자가 적혀 있었다.
무슨 뜻인 지, 궁금해 했더니 주인 할머니가 천자문 책을 주었다.
그때 시작한 한자공부가 사서오경까지 이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책을 읽을 때, 그녀는 정말 행복해 했다.
책속의 세상은 바르고 아름다웠던 것이다.
거인 김 해영은 ‘잘 못한 것을 알고도 고치지 않은 것이 더 큰 잘 못’
이란 글귀가 좋더라고 한다.
그녀는 아버지와 엄마에 대한 미움과 증오, 슬픔의 감정들도
책을 읽으면서 치유했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사는 것인지.’
등을 그녀는 책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
그러 던, 어느 날 소녀는 ‘반상회보에 무료 직업학교 훈련생 모집 광고’를
보게 된다. 기술을 배우면 식모 월급 3만원 보다는 많이 벌겠다 싶어,
양재를 배우려고 하였으나, 그건 경쟁이 치열하다고 해서
기계편물로 지망해 6개월간 직업학교에 다니게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울지 않았을 만큼 소녀의 마음은 닫혀
있었으나, 부모도 걱정해 주지 않던 김 해영의 앞날을
학교 동료들이 걱정해주고, 염려해 주는 덕택으로 너무 고마워,
그녀는 그들을 따라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장애인인 소녀는 매일매일 삶을 포기하고 싶었고,
심지어 친구들 걸음속도를 못 따라가 혼자 뒤처질 때도 죽고 싶었지만,
자기가 ‘죽어 없어져도 세상은 돌아가지 않나.
자기가 죽어서도 저 별이 빛날 것 같으면 무슨 소용이냔 말이지.’라고
생각하며,....................그래서 결심한다.
“좋아, 죽을 때 죽더라도 오늘 까지만 살고 죽자!”라고 맹세하며
하느님께 기도한다.
배움에 목마른 소녀는 뭐든 악착같이 배운다.
편물 기술로 전국기능대회를 휩쓸더니..........
드디어 장애인 김 해영은 피와 땀으로 결정체를 만들어낸다.
1985년 세계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서 기계편물 부문 1위에 등극!
그러다가 편물기술자가 되어 직장생활을 하게 된 김 해영은 명절 날,
어머니가 그녀의 옆에 명절 음식을 담아 계속 옆에 갖다 놓으신다.
그녀는 먹지 않는다. 그녀에게 엄마에 대한 정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엄마는 계속 음식을 바꿔서 담아내 오신다.
그녀는 손도 안 댄다.
아침부터 밤 여덟 시까지 그 실랑이가 계속된 셈인데..............
그만, 김 해영은 어머니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눈물을 펑 터뜨린 김 해영은 2시간을 실컷 울고 나서 부침개를 먹었다.
정말로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맛이었다.
그녀는 엄마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걸 깨닫는데 24년이 걸린 것이다.
김 해영은 결심한다!
“나를 낳아준 엄마의 마음을 아는 데 20년이 걸렸다면,
앞으로 내가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해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자는 거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김 해영은 한 선교단체의 회보에 실린 광고를 보게 된다.
‘아프리카 남부의 작은 나라 보츠와나에서 편물교사 단기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기계편물의 장인으로 마음만 먹으면
월급 많이 주는 직장에 취직 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프리카로 가기로 한다.
사실, 그녀는 대학에 가고 싶어 학력고사를 봤다.
그러나 연거푸 떨어진다.
실의에 빠져 있던 차에 우연히 거창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쓰신 글을
읽게 된다. ‘직업선택 십계명이란 제목인데
아무도 가지 않는 쪽으로 가라’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는
구절이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황무지 보츠와나가 그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고는 ‘그곳에는 자기처럼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고, 약간의 기회와 교육과 격려가 있다면
얼마든지 훌륭하게 성장할 청소년들이 있었든 것 이다.’
1990년 김 해영은 스무 여섯 살, 아프리카 남부 작은 나라
극빈 국 중 하나인 보츠와나로 떠난다.
장애인 김 해영은 우리나라 50~60년대 풍경인,
전기도, 전화도 없고 도로포장도 안 된 오지이고,
사막 한복판엔 흰색의 일자건물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암담한 곳,
오전에는 수업하고 오후에는 교사와 학생 모두 삽과 곡괭이를 들고
일을 하는 칼라하리 사막의 ‘굿 호프(Good Hope)’라는 곳에 정착한다.
그녀는 처음에 후회 막심해 했다.
먹을 게 없어서 배고플 때 제일 힘들어 했다.
하지만 그녀는 굿 호프에서 행복했다.
‘You are so beautiful’이란 말을 거기서 처음 듣는다.
키 작고 볼품없는 그녀를 그들은 예쁘게 봐주고
오히려 도와주고 싶어 했다.
세면장, 싱크대 밑, 교실 칠판 아래에다 아이들은 그녀만을 위한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기적적으로 허리의 통증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장애인 김 해영이 그들을 매료시킨 원인은 이랬다.
많은 이가 선교를 명분으로 들어와, 원주민들에 대한 고압적인 자세,
가르치려는 태도로 수많은 오해와 갈등을 낳았다.
그녀는 학교의 주인공은 원주민 학생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림자처럼 그들 뒤에 서 있었다.
그녀 자신이 옳고, 뛰어나다는 생각을 버렸다.
오히려 이러한 점이 한국의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은 게
큰 장점이 됐던 것이다.그러다가 4년 만에 굿호프 직업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해 버렸다.
그녀는 떠나려고, 마지막 짐을 싸고 있는데...................,
편물과 여학생 다섯 명이 찾아와 계속 공부하고 싶다고,
떠나지 말고 계속 가르쳐달라고 매달려 버린다.
꿈을 심어준 사람들은 떠났지만,
뿌려진 꿈의 씨앗은 자라고 있다는 걸 보고
김 해영의 가슴은 뛰기 시작한다.
그녀를 선생님이라고 믿고 찾아와서 가르쳐달라고 하는 아이들이 있으니
그녀는 이 텅빈 사막에서 계속해서 살아야 할 의미가 있었다.
다시 운영진과 이사진을 꾸렸고 그녀가 교장을 맡았다.
10년간 교장으로 일하는 동안 학생 15명이 80명으로 늘었다.
그곳은 의,식,주가 열악한 것은 물론, 권총강도가 성행할 만큼
위험한 지역이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온갖 험한 일을 겪으며
살아온 게 서바이벌 할 수 있는 힘이 돼주어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사막이 왜 좋은가 하면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죽음 같은 고독, 텅 빈 땅에서 얻는 영성이 있기 때문이며,
도덕, 신앙을 떠나 생명 그대로를 경외하고 존중하는 법을
그녀는 그 거대한 칼라하리 사막에서 배웠다고 한다.
비를 피할 지붕만 있으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살아있음만으로 그녀는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사막에서 깨달았다.
학교는 그녀가 쿨쿨 잠만 자도 저절로 굴러갈 만큼 자리를 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생활이 그녀에게는 마음이 안 들었다.
뭔가를 간절히 소원하는 인생이어야 하는데 그게 아닌 거다.
잔잔한 호수처럼 열정과 재미가 없었다.
고생하며 살 운명이라 그런지, 어렵고 복잡한 일이 앞에 떨어지면
그걸 즐기며 도전하는 심리가 강한 편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어서 김 해영은 미국으로 간다.
그녀의 나이 서른아홉 살!
뉴욕선교부에 계신 한 목사의 추천으로
나약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녀는 대학에 들어간 것이 꿈만 같게 느껴졌다.
무일푼이었지만, 맨해튼 한가운데 서 있어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그녀는 아프리카 그 거대한 사막에서 살아나온 것에 자신이 있어서,
무서울 게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4년 내내 4.0만점에 3.8점을 유지했다.
결석 한 번 하지 않았고 리포트를 날짜 넘겨서 내본 적도 없었다.
성적 우수한 학생 명단에 늘 그녀의 이름이 있었으니까.
그녀의 가장 큰 걱정은 학비였다. 첫 학기 학비만 4950달러였다.
월급 없이 14년을 보츠와나에서 살았으니 그녀에게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사정을 전해들은 교포들이 장학금을 대주고,
휴스턴에 있는 한인교회 청년들은 500불씩 모아 생활비로 보내주었다.
미국에서 공부한 7년 동안 등록금이 없어 중도 포기할 위기가 많았지만,
그때마다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내 공부는 나를 위한 공부가 아니다.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 청소년들에게 나를 선물로 보내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나약대학교를 졸업한 장애인 김 해영은 ‘다들 불가능하다고 말린’
세계적인 명문, 콜롬비아 대학원에 과감히 도전한다.
그녀는 합격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합격을 해서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추측으로는 “1994년 5월 모든 사람이 보츠와나의 굿 호프
직업학교를 떠난 뒤, 나 혼자 남았을 때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에세이로
입학의 높은 점수를 받은 것 같고,” 그리고 학교 측에서
“동양에서 온 장애인 여성이 아프리카에서 14년 살다가 온 것만으로
컬럼비아대학에서 수학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준 것 같다.”라고 했다.
그녀는 ‘저개발국가일수록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일하는 것이
굉장히 효율적이라는 것을 이미 아프리카 생활에서 경험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장애인인 데다 내세울 만한 가족적,
사회적 배경이 없는 데 다.
컬럼비아 대학만큼 확실한 배경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인턴활동 600시간을 채워야 하고, 33학점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는
석사 향상반 과정이라 하루 세 시간밖에 못 잤지만 원 없이 공부를 했다.
이로써 세계적 명문, 콜롬비아대학 국제사회복지 대학원을 졸업한다.
그리하여 주인집 창문 너머 교복 입고 지나가는 아이들만 보면
눈물이 솟았던 ‘열네 살 식모’는 이제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국제사회복지사가 됐다. 한국의 작은 거인이 탄생한 것이다!
‘작은 거인’은 ‘부탄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르면 올가을부터 부탄 여성들에게 체계화된 편물기술을 교육하게 된다.
보츠와나에도 1년에 한 번은 들어가서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살핀다.
한국에 들어오면 제천에 있는 아동보호시설에 간다.
소년범죄에 연루된 아이들을 보호하는 곳인데 상담해주고
검정고시 특강을 해준다.
열두 살부터 스무 살 아이들에게 자기 얘기를 들려준다.
아프리카의 이야기에 아이들은 귀를 쫑긋 세운다.’
‘작은 거인’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도 그걸 희망적으로 해석하면,
살아나올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려고 노력한다.’
그러고는 “긍정하라?” 너무 막연한 충고 아닐까.
사람들은 그녀의 작은 키를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하지만, ‘작은 거인’은 작은 키가 자신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녀가 못나고 작아서 더 쉽게 마음 문을 열었다.
특히 아이들은 자기키와 비슷한 그녀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자기를 내려다보거나 위협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작은 거인’ 김 해영은 “부탄이든, 아프리카든, 한국이든
아이들이 자기를 필요로 하면 언제든 달려갈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면, 그녀에게 “움직이는 초인적인 힘은 무엇일까?”라고 하니
“엄마에게 매 맞고 자란 기억, 아버지의 죽음이 나에겐 다이아몬드다.
거기에 빚을 지고 살고 있다. 행복한 것은 그냥 지나가지 만,
아픔과 상처는 지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반짝반짝 빛을 내며,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그 상처와 아픔의 힘으로
자기는 계속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아프리카에서 생사를 넘나든 경험은 다시 미국 유학을 가능하게 한
다이아몬드가 되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다시 태어난다면 곧은 등, 긴 다리를 갖고 싶겠지?”라고 묻자.
‘작은 거인’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래서 또 놓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견뎌낼 만한 고통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라고 했다.
‘도서출판 행복에너지 대표이사 권 선복’씨는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김 해영씨의 행복에너지가 팡! 팡!
전파되기를 기원 드린다.” 라고 했다.
〈 이 글은 올해 조선일보 신문에 게재된 글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좀 더 이해를 돕고, 지루함이 없이, 감동을 느끼기 위해
김 해영씨가 걸어 온 길, 그대로 구성하여 다시 꾸며봤습니다.
내용은 같게 정리하였습니다. 〉
2012. 10. 8.
오 일 육
첫댓글 언제나 건강하시지요? 좋은글 감사드리며 언제나 우리연화마을에 사랑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르신과 함께 건강하게 보낼수 있기를 오늘도 기원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세요...^^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환절기 건강유의 하시고 즐거운 일들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구절초"님, "쥔장"님, 글을 읽어 보시고 댓글을 달아 주셔서 감사. 두 분 건강하시고, 연화마을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