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비극을 보고 들은 영월의 관음송(觀音松)
중앙고속도로 제천IC에서 빠져나와 영월로 들어가면 남한강 상류, 유명한 동강의 서쪽에 자리 잡은 서강이 란 이름의 강이 있다. 물줄기가 자라목 마냥 한 바퀴를 제자리에서 돌아치는 곳이 영월읍으로부터 10리 남 짓한 청령포다.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가로막혔다. 배를 타지 않고는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곳,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유배지다.
1457년 6월 28일 임금 자리에서 쫓겨난 지 2년 4개월 여 만에 군사 십여 명과 시녀 몇 명에 둘러싸인 채 이 곳으로 귀양을 온다. 청령포에는 관음송이란 별명을 가진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다. 유배당한 임금과 아픔 을 함께하였다고 알려진 나무다. 관음송은 단종 유배지 복원 건물과 백여m 정도 떨어진 편평한 충적토에 자란다. 주변은 울창한 솔밭이며, 나무는 숲의 가장자리 쪽으로 조금 비켜서서 자리를 잡았다.
높이는 자그마치 30m로서 웬만한 고층아파트에 버금간다. 둘레는 거의 세 아름에 이르고 줄기가 곧아 흔 히 보는 꼬불꼬불하고 자그마한 소나무와는 사뭇 다르다.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 져 있다. 줄기 둘 다 가지를 별로 매달지 않고 거침없이 더 높은 하늘을 향하여 힘차게 솟았다. 소나무 특유 의 붉은 껍질과 함께 펼쳐진 나무의 웅장함은, 채 펴보지도 못하고 비명에 가버린 단종의 혼이 담겨있는 듯 도 하다. 여기는 수많은 관광객이 들어와도 떠들썩한 웃음은 아예 잃어버린다. 모두들 숙연해진다. 먼 허공 에 눈길을 주기도 하며, 때로는 긴 탄식을 하는 이도 있다. |
이 소나무가 비극의 현장을 지켜보았고,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하여 후세 사람들이 관음송(觀音松) 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단종은 이 나무에 기대서서 멀리 한양을 바라보며 두고 온 왕비생각에 눈물의 세 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가 이곳에 들어올 때 나이는 겨우 17살, 오늘의 우리 아이들이라면 고등학교 1학년 짜리다. 임금 노릇 두해 째인 14살의 사춘기 소년 단종은 한살 연상인 정순왕후를 맞아드린다. 어린 부부 의 애틋한 사랑으로 어려운 처지를 버티어 오다 어느 날 갑자기 청령포로 쫓겨 온 것이다.
이렇게 헤어진 왕비는 평민으로 강등되어 여든 두해를 살았다. 죽어서도 만나지 못하고,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에 사릉(思陵)이란 무덤에 묻히는 것으로 한 많은 일생이 끝나 버린다. 단종의 기막힌 사연을 고스 란히 알고 있는 관음송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붉은 소나무 껍질이 오히려 검은색으로 변하여 다가 오는 변고를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단종의 아픔일랑 600년 나이테에 묻어 버리고 찾아오 는 관광객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을 따름이다.
단종이 관음송 굵은 줄기에 기대어 왕비를 그리워하는 시간도 그렇게 길지 못했다. 그해 여름 물난리를 만 나 청령포가 휩쓸리자 2개월 남짓한 ‘육지속의 외로운 섬’생활마저 마감하고, 영월 현청이 있던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겨가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그는 예견 한 듯, 가까이 있는 자규루라는 누각에 올라 지 은 시한 수가 애절하다. ‘원통한 새 한마리가 궁궐을 나온 후/외로이 푸른 산속에 갇혀버렸네/밤이면 밤마 다 잠 못 이루고/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와도 한(恨)은 끝이 없어라/두견새 울음도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 데/피눈물 흘러서 지는 꽃은 붉게 물들었구나./하늘마저도 애절한 저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어찌하여 시 름 젖은 내 귀에만 들리는가.’
귀양 온지 4개월 남짓, 그해 9월에 일어난 금성대군의 역모사건을 핑계로 세조는 어린 조카를 아예 없애버 리기로 결심한다. 청령포 관음송 나뭇가지 너머로 애태워 그리던 왕비는 영영 만나지 못한 채 영겁의 세계 로 떠나야만 했다. 10월 24일, 관풍헌 어디에선가 살해당하는 것으로 그의 짧은 생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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