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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방송대 국어국문학과 원문보기 글쓴이: 한미옥
박태상교수님 책을 읽어보니 근대 전통의 개념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고찰한거더군요...
그래서 빠진 부분 채워 넣었어요...책에서 조금 ...궁금해 하실까봐
맨 밑에 있습니다. 빠진 게 많지 않고 다른 내용 아닙니다.
다른 해설은
인터넷에서 이리저리 찾아서 넣었어요...
자그만치 15페이지 정도 되니 그냥 읽기만 하세요.
그냥 한 번 읽어 보세요..
학보랑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고전’은 당대에 인기를 크게 끌다가 사라지는 베스트셀러라는 개념의 대립어로서
‘모범성과 영속성’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예술작품을 지칭했다.
문학으로서 '고전'의 개념을 적용시켜 보면 '원숙한 정신적 소산의 문학작품으로서
역사적 전통성을 지니며 후세의 규범이 될 만한 문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스의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
▣중국의 <시경> 과
▣<주역> 등이 고전에 해당된다.
▣ 17세기‘고전주의’ 예술사조의 등장은
예술작품에서 조화와 균제를 생각하게 하였으며,
인간의 이성의 가치를 존중하게 되었다.
그 결과
▣ 그리스, 로마의 신화와 삼일치의 법칙과
▣진실됨과 어울림의 내적 규칙을 중시하는 프랑스의 라신, 몰리에르 등의 희곡작품 그리고
▣ 18세기 통일성을 갖춘 하이든, 모차르트 등의 오스트리아 고전주의 음악 그리고
▣ 다비드, 앵그르 등의 프랑스 고전주의 미술 등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 특히
▣ 프랑스 고전극은 전시대의 환상적인 것, 기이한 것으로부터 점차 자연적인 것, 보편적인 것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즉 양식의 세계 로 되돌아 온 것이다.
▣ 20세기에 들어서서는 흄과 엘리어트 등이
신고전주의를 내세워 낭만주의를 공격하였다.
엘리엇의 창작에 관한 입장
엘리엇의 창작에 관한 입장을 살펴보면, 그는 그의 초기 에세이 <전통과 개인의 재능>에서 작가는 ‘역사적 감각(historical sense)'-자신의 작품이 바람직한 문학의 계보 선상에 위치하는지 인지할 수 있는 감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이러한 과정은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이 몰개성을 획득하기 위한 필수적인 예술가의 탈 개성화를 강화시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시는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의 도피이다. 그것은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
라는 말을 했는데, 이는 시인은
경험의 ‘촉매’로 역할을 하여 결론적으로는 작품 내에서 시인의 정신을 느낄 수 없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한 맥락으로 엘리엇은 예술작품을 그것을 잉태한 경험에 대한 ‘객관적 상관물’ 즉, 자율적인 객체인 몰개성적인 재창조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T. S. 엘리엇(1888~1965)은
“시는 정서의 표출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이며,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하면서
반낭만주의적인 몰개성의 시론을 전개하면서
『황무지』를 써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시인이다.
또 엘리엇은
▣<전통과 개인적 재능>이란 평론을 통해
전통의 중요성을 일깨운 평론가이기도 하다.
전통과 개인의 재능(Tradition and The Individual Talent)은 1917년 영국에서 발표된 T.S. eliot 의 비평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영문학자 이창배의 번역으로 널리 소개 되었다. 시인의 개인적 재능과 전통의 상호작용을 주제로 다른 문예평론으로서, 낭만주의적 문학관을 비판하는 몰개성시론(沒個性詩論)을 제기하여 시(詩)를 '개인감정의 발로'라고 여기던 20세기 초의 영미문학계에 신선한 충격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엘리엇은
▣몰개성화를 통해 예술은 과학의 조건에 접근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몰개성화’란 주체의 상실이 아니라
전통의식과 역사의식 속에 용해되어
완전한 보편성을 획득한 개성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엘리엇은 영국에서 써진 작품들은 전통이라는 말이 고고학적 학문과 결부시키지 않으면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며, 기존의 현 작가들과 과거의 작가들을 평가 할 때조차 사용되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또 모든 국민과 모든 민족에는 그들만의 창조와 비평의 경향이 있으며, 비평적 관습과 결합의 한계에 대해서 쉽게 잊는다고 하였다. 엘리엇에 따르면 비평은 호흡 작용처럼 불가피성으로 작용하며 그에 따라 전통과 현대의 작가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나'라는 독자적인 존재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현대의 작가와 전통의 작가의 관계는 이원론적이거나 대립적 관계가 아니며, 과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현대적인 것이며 가치 있는 것이라는 평가는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엘리엇의 주장은 개인이나 개성이란 신뢰할 것도 못되고, 가치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개개인의 작가나 작품(자의적인 구조물)은 단독으로 완전한 의의를 가질수 없고, 반드시 과거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계승되어 온 문학의 전통과 결부될 때 비로써 진가를 가진다는 역사적 의식으로 지녀야 한다고 한다.
1. 엘리어트의 ‘전통’의 개념
엘리엇의 ‘전통’의 개념은 19세기의 매슈 아놀드의 ‘culture(교양)'의 개념을 20세기 신비평에 접목시킨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매슈 아놀드의 교양은 생각되고 인식되어진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으로 정의되는데, 이는 인문학적 방어기제로서 문학(Literature)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오직 어떤 문학적 글만이 ’문학‘(생각되어지고 쓰여진 것 중에서 최상인 것)이고, 전통 또는 canon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엘리엇은 이러한 전통은 낭만주의를 배격하며 문명의 야만성에 대항할 수 있는 것으로서 문학으로 규정짓고 있는데 이러한 전통은 배타적이고 위계적 개념으로서 진정한, 우수한 작품의 목록- 예를 들어 <일리아드>, 단테의 <신곡>, 밀튼의 서사시, 상징주의, 17세기 형이상학시 -으로 설명 가능한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목록은 인간적인 동인(비평가)에 의해 인공적으로 선택되고 분별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Eliot은 여러 비평문에서 예술 작품을 창작하기 위한 전제 조건인 형식의 의미를 관습(convention)과 연계하여 설명하였다. "The Possibility"에서 그는 형식 혹은 관습이 일종의 구조(the framework)로서 엘리자베스 시대 극작가들이 이용한 무운시(blank verse), 5 막극, 극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기질(the temper of the age)과 특별한 자극들에 반응하는 대중의 습관을 포함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Four Elizabethan Dramatists"(1924)에서 Eliot은 예술 작품이 조리에 맞아야 하고, 예술가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넘지 못하는 경계선을 그려야 하며 현실의 삶(actual life)이 항상 예술의 소재인 한편 이 현실의 삶에서 나온 추상화(abstraction)가 예술 작품의 창작에 필요한 조건이라고 주장하였다. Eliot은 관습으로서의 형식이 현실의 삶을 추상화시키는데 필요한 도구로 보았으며, 이 관습은 주제나 기법에 있어서 아주 새로운 선택이나 구조 혹은 왜곡이며 행위의 세계에 부과된 형식이나 리듬이라고 설명하였다.
이처럼 Eliot은 작품의 소재인 작가가 활동하는 시대의 정신적 분위기와 그것에 대한 작가의 감정과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관습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과거의 가치관과 전통이 무너진 혼란한 사회적 분위기 안에서는 예술가들이 예술 창조를 위해 이용할 만한 형식을 발견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Eliot은 자신이 예술가의 모범으로 간주했던 Dante가 개별국가로 분화되기 이전 유럽의 공용어인 중세 라틴어(mediaeval Latin)에 기반을 둔 문화를 배경으로 해서 훌륭한 예술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시대와 같은 혼돈과 붕괴의 시대를 사는 예술가들은 소재를 표현하는데 필요한 형식의 부족 때문에 창작 활동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다. Eliot은 엘리자베스 시대 극작가들이 활동했던 시대가 아무런 갈등도 없는 이상적인 조화의 시대가 아니라 중세의 종교문화가 붕괴된 후 Seneca적인 스토아주의와 Montaigne적인 회의주의 그리고 Machiavelli적인 냉소주의 등이 혼재하는 혼란한 시대라고 보았다.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생산된 엘리자베스 극작가들의 작품들은 일관되지 않고 결함이 있는 작품들로 평가되었지만, Eliot은 이 작품들의 비일관성은 작가의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표현할 관습으로서의 형식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Eliot 은 엘리자베스 시대 극작가들이 이런 혼란한 시대와 형식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서 당대의 혼란 속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경험을 융합하였으며, 이것을 통합된 감수성이라고 하였다. 이 통합된 감수성은 Eliot이 감수성의 분열(dissociation of sensibility)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제시한 것으로서 단순히 감각이나 감정이 수용된 상태가 아니라 사고와 감정의 혼합을 의미하며, “사상의 직접적이고도 감각적인 파악” 또는 “사상의 감정에로의 재창조”를 의미한다.
그런데, Eliot은 동시대에 활동하는 현대의 예술가들의 상황을 엘리자베스 시대의 작가들의 상황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서구를 뒷받침하는 공통의 믿음이자 가치기반이었던 기독교에 대한 믿음의 상실, 제 1차 세계 대전의 발발, Marx, Nietzsche, Freud등과 같은 다양한 사상들의 출몰 등에 의한 20세기 초반 서구의 불안정한 시대상은 Eliot에게 중세의 종교 전통이 붕괴되고 새로운 사상이 도입되어 혼란스러운 엘리자베스 시대와 비슷하다고 간주되었다. Eliot은 다양한 글들을 통해서 전통이 부재하고 전쟁의 폭력과 개인적 사회적 혼란으로 가득한 20세기의 시대상을 표현하였으며, 그런 글들 중 하나인 "Ulysses, Order and Myth"(1923)에서 그는 Joyce가 신화적 방법(the mythical method)을 이용하여 현대의 무익하고 부적절한 상황에 질서를 부여했다는 평가를 통해서 현대 예술가들이 처한 20세기의 복잡한 상황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Eliot은 현대의 예술가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창작 활동을 하고 있지만 보편적이고 위대한 예술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서 일상 현실과 개인적인 감정들을 더 풍부하고 낯선 것으로 변형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What Dante Means to Me"(1950)에서 예술가의 임무는 탐구되지 않은 비시적인 소재들로부터 시를 창작하는 것이며 시인은 비시적인 것을 시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데 헌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극작품의 경우 일상 세계와 분리된 그 자체의 논리를 가진 새로운 세계관을, 서정시의 경우 다양한 경험들이 혼합된 새로운 관습들(new conventions)을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이 새로운 세계를 접함으로써 일상 세계의 관습적인 특징들을 인식하여 우리들이 잊었거나 상상한 적도 없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엘리엇은 스스로 ▣문학은 고전주의,
▣정치 는 왕당파,
▣종교는 앵글로 가톨릭노선의 성공회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실제로 공격하고 있는 대상은 ▣중산계급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전체 즉 자유주의,
▣낭만주의,
▣프로테스탄티즘,
▣경제적 개인주의 등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공식적인 지배적 이데올로기였 다.
그는 전통(Tradition)을 내세웠다.
전통이란 :
자의적인 구조물(스스로 세운 구조물이라 하더라도)은
역설적으로 다시 절대적 권위를 지닌 힘을 부여받는다.
E.H. Carr는 그의 저서에서 인간과 환경의 관계는 역사가와 주체의 관계라고 말한다. 즉,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는 'Give and Take'인 것이다. 한 쪽을 다른 쪽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므로, 이 상호작용은 또한 현재와 과거의 상호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역사를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궁극적으로 역사를 정의한다. 여기서 그가 말한 역사가와 사실의 간계와 eliot이 주장하고 있는 과거와 현대의 관계를 동일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eliot이 주장하는 것에는 그 출발점이 과거의 전통과 사건들로부터 시작된다는 전제조건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주요 문학작품들은 그들 사이에 이상적인 질서를 형성하며
때때로 새로운 걸작의 편입으로 재조정된다.
‘전통’이라는 비좁은 공간에 있는 기존의 고전들은
신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그 위치들을 겸손하게 재편성하며
그 결과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한편 해석학자 가다머(Hans-Gerg Gadamer)는
텍스트의 새로운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권위와 전통의 복원을 강조했다.
그는 명저『진리와 방법』에서
▣의미는 해석자의 역사적 상황에 좌우된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의미는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완전히 논의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얻게 된다.
그 작품이 하나의 문화적 혹은 사회적 맥락에서
다른 문화적, 사회적 맥락으로 넘어감에 따라
그 작품의 작가나 그와 동시대의 독자들이
결코 예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들이 그 작품에서 채집될 수 있다.
가다머는 이해의 전제조건으로써 선입관을 설명하기 위해
권위와 전통의 복원을 주장한다.
그는
▣권위의 본질은 계몽주의의 극단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선입관 이론의 맥락에서 파악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계몽주의에 대한 낭만적 비평에 도움을 받게 됨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권위의 한 형태가 특히 ‘전통(tradition)’이라고 이름 지어진,
낭만주의에 의해 수호된 것에 의해 얻어지기 때문이다.
▣전통과 관습에 의해 인정된 것은 익명의 권위를 갖게 된다.
가다머는
▣역사란 우리의 본질을 이루는 대화라고 말하였다. 그는
▣역사를 과거, 현재, 미래 간의 살아있는 대화로 보며,
이 끝없는 상호의사소통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끈질기게 제거하려고 한다.
그는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감정 이입적으로 자신을 과거에로 투입함으로써
▣시간적 거리를 극복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이 거리는 관습과 선입관과 전통에 의해 메워져 있기 때문이다.
권위와 전통의 논의에 앞서 가다머는 개별적인 인간의 선입견들은 그 판단들을 넘어서는 인간 존재의 역사적인 사실들이다라는 말로 마무리를 했었다. 아마 여기서 가다머는 개별적인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나 속단에 대한 선입견들은 그러한 권위나 속단을 판단하기에 앞서서 인간 존재가 가지는 역사적인 사실들로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다머는 권위와 전통의 복권이라는 것으로 다음 논의를 이어간다.
권위와 전통은 and 라는 접속사로 병치될 수 있는 개념들은 아니다. 오히려 전통의 권위가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는 선입견을 귄위에 의한 선입견과 속단에 의한 선입견으로 구분 지었다. 속단이란 이성이 잘못 사용된 경우이고 권위는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이렇게 계몽주의는 이성과 권위를 배타적으로 위치시킨다.
슐라이어마허도 계몽주의를 좇아 선입견을
지속적인 선입견과 일시적인 선입견으로 구분하여,
참일 수도 있는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나 권위는 중성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타파하거나 복권할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무엇의 권위인가라고 할 수 있다.
가다머가 전통과 권위라고 할 때, 이 두 개념은 동렬의 개념이 아니라, 실은 전통의 권위를 말한 점을 앞서 밝혔다. 가다머가 복권하고자 하는 권위는 전통의 권위, 존재의 권위, 정확히 말하자면 역사의 경험에서 우리에게 이해되어지는 존재로서의 전통의 권위이다.
전통에게는 그 타당성을 위해 전통을 긍정하고, 채택하고 손질하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전통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유지이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역사적인 변화 속에 작용하는 유지라는 점이다. 즉, 변화에 대한 단적인 거부가 아니라, 변화를 통한 그리고 변화에도 불구하고 발견되는 유지이다. 따라서 이 전통의 연속성이 단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타자를 매개로한 반성된 동일성이자 변증법적 동일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전통 안에 서 있다. 이것은 공간적인 ‘안’이 아니라 ‘거주’의 의미를 갖기 때문에 대상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전통은 이론적 관찰과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마치 하이데거의 현존재가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안에 있음이다. 따라서 권위 있는 전통과 우리의 만남은 외적 반성이 아니다. 그리고 이 결과는 하나의 자기 재인식이다. 여기서 자기 인식은 하나의 인식이 아니라, 자기화 하는 동화이다. 가다머에게 자기인식의 의미는 항상 타자를 통한 자기 발견이므로, 정리해보자면 권위 있는 전통과의 만남은 자기화하는 동화로서의 자기재인식이다.
역사적 경험은 전승(Überlieferung)과 나의 상호적 매개의 경험이다. 연속성을 주장하는 전승과 그때그때마다 전승을 나의 시각에서 달리 이해하는(anders verstehendes) 나의 대화이고, 이 대화를 통해 전승도 달라지고, 나도 달라진다. 여기에서 다름(Differenz)는 동일성에 대한 다름이 아니라, 동일하지 않은 것과 동일한 것의 동일성으로서 동일성 안에서 다름이다.
가다머에게 역사의 연속성은 분명히 변증법적인 개념이기에 그가 ‘역사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역사에 속한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이 문장을 역사와 우리 존재자의 상호귀속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변증법의 미시적 차원에서 보면 역사와 우리는 테제와 안티테제로 서로에게 귀속하며, 이 차원에서 옛 것에 대한 새로운 것의 지위는 항상 보장된다. 가다머는 이를 '적용(application)'이라고 하기도 하고 다른 이해(Andersverstehen)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변증법의 거시적 차원에서는 분명히 우리가 역사에 속한다. 가다머가 말하는 전통의 지배, 옛 것의 우위, 또는 역사의 연속성이란 바로 이 거시적 차원의 서술을 말한다. 즉 상호 귀속하는 전승과 우리가 함께 유입되는 하나의 고유한 그리고 공통의 세계이다. 이 세계 그리고 거대한 변증법의 자기 동일성은 동일성과 차이의 매개의 산물이다.
이와 같은 진정한 전통의 권위를 복권할 때, 해석학적 문제의 출발점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다머 - 권위와 전통의 복권
권위와 전통의 복권*의 논의에 앞서 가다머는 '개별적인 인간의 선입견들은 그 판단들을 넘어서는 인간 존재의 역사적인 사실들이다'라는 말로 마무리를 했었다. 아마도 여기서 가다머는 개별적인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나 속단에 대한 선입견들은 그러한 권위나 속단을 판단하기에 앞서서 인간 존재가 가지는 역사적인 사실이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권위나 속단이라는 것은 단지 선입견이라고 배제할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역사적인 사실들로써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다머는 권위와 전통의 복권이라는 것으로 다음 논의를 이어간다.
여기서 가다머는 이성의 절대적 자기 구성이라는 이념 아래에서는 제한된 선입견으로 나타나는 것이 실제로는 바로 역사적인 실재 자체에 속한다 라고 한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있어서 선입견이란 필요한 것이고 가다머는 더 나아가서 정당한 선입견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고 한다. 따라서 가다머의 해석학의 인식론적인 근본 질문은 선입견의 정당성의 근거를 찾는 것이고 정당한 선입견을 여타의 선입견과 구별하게 하는 것을 찾는 것이다.
선입견은 앞에서도 봤듯이 속단에 의한 것과 권위에 의한 것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 구분의 토대에는 이성이라는 계몽주의의 전제가 놓여있다. 속단에 의한 선입견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성을 단계에 거쳐서 잘 사용하지 못한 실수에 의한 것이고, 권위에 의한 것은 우리가 이성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오류이다. 계몽주의는 이러한 선입견들을 철저한 이성아래 두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가 이러한 선입견을 비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속단이나 권위는 이성의 태도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가다머는 권위의 본질을 다시 살펴 본다 . 권위라는 것은 사람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권위를 허락하는 이유가 우리가 이성적으로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바른 이성적 태도로부터 나오는 올바른 판단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더 나은 이성적 판단을 가진 사람에게 권위를 허락하고 그 사람의 의견을 우리의 의견보다 더 옳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함이지 이성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권위 앞에 복종한다. 그리고 이러한 복종은 맹목적인 명령 복종과는 상관이 없다. 확인할 수 있듯이 그 권위의 진정한 근거는 자유와 이성의 작용에 있고, 우리가 상급자에게 권위를 인정하는 것도 그가 더 깊이 사물을 통찰하고 사물에 정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우월한 이성적 능력을 인정함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권위에 대한 인정은 비이성적인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권위의 원리가 통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에 교육자, 상급자, 전문가들이 요구하는 권위의 본질이 있다. 그들이 심어주는 권위라는 선입견들마저도 분명히 그들의 인격을 통해 정당화된다. 이러한 선입견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선입견을 주장하는 인물에 대한 어떤 편견이 요구된다. 그러니까 선입견을 타당하게 하는 권위의 조건들에 대한 편견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럴 때의 편견은 사실의 선입견이 된다. 이러한 사실의 선입견은 권위에 대해 인정할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한 편견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권위의 본질은 선입견 이론의 연관에 속한다.
이것으로써 계몽주의는 낭만주의의 비판을 지지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낭만주의는 특별한 권위의 형식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전통인데, 이러한 전통은 어떤 익명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전통이 단지 흘러가버린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유한한 인간 존재에 전승의 권위가 우리의 행동과 태도를 통제한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새로운 것을 제시할 때조차도 원래의 전통에서 벗어나서 이것을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 인정되었던 혹은 통용되었던 전통은 현재의 우리의 행동의 바탕이 됨으로 그것의 정당성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고전과 전통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다. 그 이유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고 민중이 수탈당하는 현실에서 지식인들은 민족적인 관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26년 5월 육당 최남선의「조선 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라는 글을 통해 시작된다.
최남선은 이 글에서
프로문학운동에 대항할 수 있는 국민문학운동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의 하나로 시조부흥론을 전개한다.
최남선이 보기에는 시조만큼‘조선스러움’을 잘 나타내는 문학 장르는 없었다. 따라서 그는 ▣시조를 부활시키고 보급시키는 일이야말로
▣우리 문학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며,
▣망각되어 가는 조선아(朝鮮我)를 바로 찾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최남선은 시조 부흥에 관한 논의가
자신의 개인적 취향에 의한 논의가 아님을 보이기 위해
▣「시조태반으로의 조선 민성(民性)과 민속」에서
▣시조와 우리 민족성과의 연계에 관한 이론을 전개시킨다.
그는 조선인은 회화적이기보다는 음악적이고,
속으로 마음을 파고 들어가는 종인이 아니라
겉으로 마음을 소리 지르는 종인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조선인의 생활 중 곡조에 의존하는 의사발표의 방법은
극히 오랜 옛날부터 존재하였던 것이며,
조선인이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민족임을 더 거론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 되고,
따라서 조선인의 시가는 의미 중심이 아니라
곡조 중심의 발전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六堂 崔南善(1890:고종27∼1957)은 1900~1910년대 벌였던 동서양의 고전/텍스트를 수집, 소개, 번역하는 활동을 중심으로 그의 고전과 전통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자기 내적 인식의 길로서 전통의 재발견과 복원이 이루어지는 지점과 방식, 그리고 그 안의 논리가 이 글이 관심을 갖고 살펴보고자 하는 점이다. 최남선은 이이의 [격몽요결]을 1910년대 조선의 맥락으로 다시 불러 오되, 특정한 산정 과정을 통해 시대적 맥락에 맞도록 내용을 변화시키고자 했고, 서양의 교훈, 그리고 일본의 수신서와 혼합된 텍스트로 구성하였다. I이 글은 六堂 崔南善(1890:고종27∼1957)이 1900~1910년대 벌였던 동서양의 고전/텍스트를 수집, 소개, 번역하는 활동을 중심으로 그의 고전과 전통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자기 내적 인식의 길로서 전통의 재발견과 복원이 이루어지는 지점과 방식, 그리고 그 안의 논리가 이 글이 관심을 갖고 살펴보고자 하는 점이다. 최남선은 이이의 [격몽요결]을 1910년대 조선의 맥락으로 다시 불러 오되, 특정한 산정 과정을 통해 시대적 맥락에 맞도록 내용을 변화시키고자 했고, 서양의 교훈, 그리고 일본의 수신서와 혼합된 텍스트로 구성하였다. [논어]는 <소년논어>으로 잡지에 연재되면서 한문 원문이 없는 국한문혼용체의 언해 텍스트로 제시되었다. 원문을 직역하지 않았고, 언해된 본문만 보고서는 그에 상응하는 원문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은 곳도 있다. 이러한 ‘고전’의 ‘번역’ 양상은 일차적으로 옛 텍스트가 근대적 교양인을 위한 독서물로 변환되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최남선이 조선광문회를 출범하며 했던 ‘眞朝鮮’이라는 말이 시사해주듯이, ‘조선’을 향한 것이었다. 조선과 신문명과의 만남은 서구의 유형적 부와 공간적 팽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여기서 최남선은 서구/혹은 외부(일본)와 동일한 방식의 팽창을 시도하기 보다는 조선의 ‘부유한 시간’과 그로부터 축적되어 온 무형의 자산들을 당대의 지점으로 소환하는 방식을 취했다. 1900~1910년대 최남선의 고서 수집과 고전의 번역 활동은 이러한 생각과 판단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방식은 ‘현실중심적인 시각에서 과거를 재배치하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그 현실에는 근대라는 지표, 그리고 眞朝鮮을 구성해야 한다는 목표가 작동하고 있었다.
<정지용의 삶과 문학>p85
1930년대의 고전 부흐론은 조선일보 등의 저널리즘에 힘입은 바 크다.
▣『조선일보』는 1935년 1월 학예면 특집
▣“조선고전문학의 검토”(1. 1~1. 13, 권덕규, 김윤경, 이병기, 김태준, 이희승 등의 필진) ▣“조선문학상의 복고사상 검토”(1. 22~1. 31, 김진섭, 최재서, 김태준 등의 필진)를 통해
▣고전문학 유산의 탐구와 계승이라는 테마에 집중하였다.
(당시에 학예부장으로 홍기문 / 학예부 기자로 이원조가 있었음)
p86
1930년대 중반 이후에 확산된 고전부흥론은
▣국수적 민족주의에 근간한 군국주의의 물결에 위기를 느끼고
▣한국 민족의 전통성과 특수성을 찾아내어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가자는 목적이 최우선적으로 모색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고전 부흥론의 실체는
자칫 1920년대 최남선 등의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시도되었던
복고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복고주의에 대한 경계를 하면서
고전부흥론에 힘을 실어준 논객이 바로 김태준과 이원조였다.
빠진 부분
물론 복고주의에 대한 경계의 글을 쓴 중요한 이로는 임화와 철학자 박치우도 있다. 임화는 카프 해체를 전후한 시기에 고전부흥론의 출현을 가장 노골적인 현실도피의 선동으로 파악하고 “ 현대 대신에 중세로! 문명 대신에 야만에로!”를 외치는 반동적 현상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박치우는 우리들이 응당 가져야 할 보물의 상속권을 포기해서는 안 되지만 과거에 대한 자랑에 수반되는 회고주의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미련의 발로인 골동취미, 그리고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선양주의적 복고운동 상고운동에 귀착 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까지-
김태준은
당시의 중국은 역사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나
민족해방운동에까지 기여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조선적’이라고 해서 구박할 아무런 이유도 없고
그와 같은 편견이 가져온 것은
우리 역사에 대한 무지와 왜곡밖에 없으며
가르칠만한 단 한 권의 조선역사서도 갖고 있지 못한
참담한 학문적 후진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과거에 대한 정당한 인식 없이
미래에의 의지만으로 달려온 문화운동이
정체의 국면을 맞이한 당시로서는
역사적 회고와 반성이 필수적이라는 이유에서
고전부흥의 취지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Ⅲ.
문장파 예술가란 1939년 문학 종합지인 『문장(文章)』과 관련한 인물들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정지용, 이병기, 이태준, 박목월, 박두진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문장』의 발행과 운영 등과 관련하여 각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문장파 예술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문장』의 창간 및 성격을 살펴봐야 하는데, 『문장』은 일제강점기 말 일제의 계획적인 민족문화 말상정책 속에서 만들어졌으며, 우리 민족고전의 발굴하여 주석에 힘쓰는 등 민족문학의 계승 및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 문학지이다. 이를 위해 유능한 신인을 발굴 배출한 것은 물론, 『한중록』, 『인현왕후전』, 『도강록』 등 민족고전을 발굴하는 한편, 시에는 정지용, 소설에는 이태준에 의해 박두진, 박목월, 곽하신, 임옥인, 조남령 등의 신인들이 『문장』을 통해 등장하게 된다.
특히 이태준은 제2권, 제6호부터 1941년 4월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되기까지, 편집과 운영을 전담하였으며, 일제의 강합속에서도 국문학 분야의 무게 있는 자료와 논문 등을 계속 발표했다. 이때 발표된 대표적인 것으로는 조선문학연구초, 한글의 비교 연구, 조선소설사 개요 등이 있다.
p113
잡지 『문장』의 위상은 한국문학사에서 매우 높다.
그 이유는 1940년대 초 일본 군국주의의 물결이
한반도의 파고를 넘어 아시아와 세계로 넘실거릴 때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도 꺼져가는 한국적 촛불을 지키려고 매달렸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잊혀져가는 고전을 발굴하고 계승하기 위해 노력했던 『문장』의 작가들인 문장파 예술가들을 우리의 고전을 말할 때 떼 놓을 수 없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문장파 예술가들을 비롯한 사람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알고 많은 고전들의 존재를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즉 문장파 예술가들은 일찍이 우리 고전의 가치를 인식하고 발굴, 계승하기 위한 노력을 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어 교육을 봉쇄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할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마저도 폐간된 현실 속에서도
『문장』편집진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한글 잡지간행을 시도했었다는 점은
대단한 용기라고 아니할 수 없다.
빠진 부분
당시 문장에 대한 가치평가는 모든 평론가들이나 문학사가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카프진영에 속했던 문인들로부터는 혹평을 받고 반민족적 행위라고까지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것은 문장의 편집진들이 조선적인 정조를 추구하면서 조선조의 유교적 선비 정신을 계승하려는 의고적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에 현실도피적 행위라고도 비판을 받았으며 과거의 향수에 젖어 tleoo역행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공격을 받기도 했다. 물론 오해에 따른 비판이 많았다. 어찌 되었든지 문장 편집진들이 추구하는 전통주의 내지 상고주의 취향이 1930년대 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강요했던 시국예술의 향토성을 표출하라는 것과 표피적으로는 상통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기까지-
잡지『문장』은 ▣독특한 편집상의 특성과
▣ 미학적 취향 그리고
▣ 정신적인 지향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편집의 경우)->, ▣소설은 이태준,
▣시는 정지용,
▣시조와 고전 발굴소개는 이병기,
▣장정 및 표지화는 김용준과 길진섭).
▣김윤식은 그것을 尙古主義로 파악하고 그 문학사적 위치를
고전부흥운동의 맥락 속에 두었으며
선비다운 맛과 고전에의 후퇴라고 정리하였다. 그에 비해
▣김용직은 전통지향 또는 전통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황종연은 30년대 후반기 문학의 전통주의는
한국학의 성장을 통해 강화된 전통의식과
서양 추수주의적( 아무런 비판 없이 맹목적으로 남의 뒤만 따르는 태도나 경향)
근대주의에 대한 회의의 결합형태라고
정신사적인 측면에서 해석하였다.
사실 잡지『문장』의 편집진들이 추구한 지향점은
▣광포한 군국주의와
▣포악한 민족정신의 말살정책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적 정치색에 맞선‘전통주의적 정신주의’와
▣‘문화적 민족주의’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과거로의 회귀나 퇴영으로 몰고 가지 않기 위하여
▣실학파의‘법고창신’과‘탁고개제’의 정신을 계승하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즉 자신들의 전통지향이 도피적인 안주와 문화적 퇴행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추진동력을 얻기 위한
전통의 본질과 의미를 찾는 이념운동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한편으로 난세극복의 혜안일 수도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민족문화사의 단절을 막아보려는 고육지책일 수도 있다.
『문장』의 전통주의적 입장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전의 발굴과 복원작업이었다.
『문장』은 순수문예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전과 학술분야에 상당한 지면을 배정하였다.
우선 창간호부터
▣ 이병기 주해로『한중록』을 연재한다. 이러한 고전소개는『한중록』(제 6집 ~13집),
▣「도강록」(이윤재 역주, 제 11집~22집),
▣「호질」(양주동 번역, 제 12집),
▣「인현왕후전」(이병기 주해, 제 14집~제 19집),
▣「고시조선」(이병기 편, 제 15집),
▣「서대주전」(제 16집),
▣「토별가」(이병기 해설, 제 17집),
▣「고가사 이편」(이병기 주해, 제 20집),
▣「요로원야화기」(이병기 주해, 제 21집), 「춘향전이본집」(제 22집~26 집) 등으로 이어진다. 순수문예지에 이렇게 많은 양의 고전문학작품을 실은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다.
최일수는 진정한 민족문학의 성취를 위해서는 올바른 전통의 계승과 서구적 현대성의 비판적 섭취라는 2대 명제가 함께 구현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서구의 현대문학에 대한 수용이 우리 민족 문학을 풍요롭게 할 것이지만 그것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통에 대한 올바른 계승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문장』편집진들이 얼마나
▣고전문화 유산 발굴과
▣민족적인 특성 부각에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또 잡지『문장』은 국학이라고 할 수 있는
▣고전문학(민속학 포함)과
저자는 백철씨가 국문학이란 반드시 국민어로 형성이 되어야 한다는 관점에 대해 자국어 사국사가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전통을 연결하여 하나가 되게 하는 작업을 위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국어학 그리고
▣고미술분야의 논문과 평론을 대대적으로 실었다.
창간호부터 ▣이희승의 「조선문학연구초」(제 1집~10집 매화가해설),
▣양주동의「근고동서기문선」(제 2집~22집 사뇌가 역주서설),
근원 김용준(1904-1967)
-1931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학과 졸업을 전후로 1930년 동미전과 백만회, 1934년 목일회 등의 서양화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귀국 후 한국화로 전향하여 미술사와 미술비평 연구에 주력하였다. 저서로는 <근원수필近園隨筆>(1948), <조선미술대요朝鮮美術大要>(1949) 등을 남겼다.
-동양화가이자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였던 김용준은 <문장>과 <학풍>, <춘추> 등의 문학잡지에 표지화와 삽화 작업을 하였다. 그의 표지화는 전통 문인화풍의 성향이 강하면서도 전통적 소재를 현대적으로 변형하여 제작하기도 하였다. 김용준이 장정한 대표적인 단행본 <지용시선>(정지용 著, 1946)은 화폭에 난을 쳐 놓은 수묵화풍으로, 한국적인 소재와 기법으로 책의 앞, 뒤 공간을 활용해 대담하게 구성하였다.
▣김용준의「이조시대의 인물화, 신윤복과 김홍도」(제 1집),
▣김용준의「최북과 임희지」(제 5집),
▣김용준의「회화적 고민과 예술적 양심」(제 10집),
한국미술사는 개화기부터 식민주의사관을 조성하려는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근대학문으로 개발되었다. 1920년대에 한국인들도 자국 미술을 근대적 지식체계에 의해 역사상으로 인식하고 기술하기 시작했으나 전문화된 학술적 연구는 경성제국대학에서 미학 미술사를 전공하고 1930년 졸업한 고유섭에 의해 이루어졌다.
고유섭의 연구가 동양과 한국의 고전과 전통에 대한 진흥 및 재인식과 더불어 일어난 1930년대의 조선학 수립운동을 배경으로 천착되었다면 전형필의 수집은 이 시기의 고전열 골동품 붐과 함께 동양문화 수호를 표방한 식민정책이기도 했던 조선고전 애호 및 보존 조류와 결부되어 본격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용준의「翰墨餘談」(한묵여담)(제 11집),
▣김용준의 「吾園張承業」(오원 장승업)(제 12집),
장승업의 분방한 열정과 탁월한 기량을 통해 형성된 오원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장승업이 환쟁이로 불리던 지전배 출신이던 장승업의 그림이 한 세상을 진동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서화 후원층으로 성장한 중국어 역관들의 후견에 힘입은 바 크다.
현대적인 세계미술과 동양미술 조선미술을 집단적으로 창조해내기 위해 결집된 전통계승과 고전부흥의 맥락에서 개진되었던 것이다.
한국미술의 정신이며 본질이고 미적 결정체인 고전적 전통적 특질에 대한 관심과 언술은 근대적으로 중시된 독창성과 개성을 지양하고 중세유럽의 보편적 질서로의 회귀를 주장하며 전통 및 고전과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한 T.S 엘리엇 전통론의 영향과 함께 서구적근대의 대안 또는 대항의식에서 상상된 대동아의 욕망과 결부되어 전개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동양의 우월한 고전적 전통적 정신과 혼으로 서구 근대를 초극박멸하고 대동아 중심의 새로운 세계로 재편해야 한다는 파시즘 논리는 일본 낭만파와 경도학파 등에 의해 언설된 것으로 대동아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당위성과 성전 승리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했으며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역사발전에 대한 사회진화론적 시각에서 두 문화권의 문화유형적인 존재론적 차이로 보는 새로운 세계사 구상의 논리와도 결부되어있다.
다시 말해 전통과 고전을 낭만적으로 이상화 하고 탈역사적으로 심미화하여 동양과 민족의 정체성과 정체성에 의해 일원론적으로 규정된 특질론은 서구 문명의 위기론과 비판론에 의한 근대 초극적 자기 갱생의 욕구와 더불어 파시즘적 민족주의와 전통주의의 원형을 이루면서 동아 신질서 문화공동체의 재구축을 위한 집단적이며 결집적인 자아로서 광대한 문화적 비전의 건설 기제로 언술되고 국체주의의 척어처럼 기능하려는 성향을 지녔다고 하겠다.
▣조선어학회의 「외래어표기법」(제 18집),
▣「봉산가면극 각본」(송석하 편, 제 18집),
▣손진태의「무격의 신화」(제 19집),
▣조윤제의「조선소설사 개요」(제 19집),
▣조윤제의「설화문학고」(제 20집) 등을 실었다.
북한은 1980년대 후반부터 갑자기 ‘조선민족제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들고 나
왔다. 그 이유는 구소련연방의 해체 등 국제정세의 급변으로 북한 체제 자체가 뒤
흔들리고 국가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특히 김정일 후계구도의 확립
과 더불어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서 대안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제기된 것이 조
선민족제일주의라는 기치이다. 북한의 사회주의는 우월한 민족적 전통성을 바탕으
로 하고 있어 여타 사회주의 국가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선전, 홍보하기 위해 각 예술분야에서 민족적인 요소를 도입한 민족예술을 강
화했다. 아울러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지는 권력승계를 민족적 차원의 문제로
확대함으로써 전통적 왕도정치 구현의 방편으로 활용했다.
또 전통문화 발굴과 보존정책을 도입했다. 1985년 7월 주석명령 제35호로 ‘문화
유적 보존관련사업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하여’를 공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왕건왕릉
복원, 동명왕릉 개건, 단군 유적 발굴과 복원 사업 등이 강력하게 추진되었고 1992
년부터는 발해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업도 병행되었다. 1988년에는 추석, 음력설, 한
식, 단오 등 민속명절을 부활시켜 휴무일로 지정하였다. 그 외에도 미술분야에서 조
선화의 개척, 무용과 민족가극 분야에서 <춘향전>, <박씨부인전> 등 고전을 발굴하
여 전통을 되살리는 현대적 창작극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북한의 조선민족제일주의는 권력세습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마련된 이
데올로기였지만, 고전의 발굴과 복원 및 현대적 전승 그리고 남북 문화교류의 기회
와 가능성을 높이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조선민족제일주의
주민들의 사상무장을 강화하기 위해 민족적 우월성을 강조한 논리, 「조선민족 제일주의」는 1986년 7월 김정일이 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행한 담화 「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1989년 9월 북한의 어용학자들에 의해 수정·보완되어 <우리 민족 제일주의론>이라는 단행본으로 발행되었다. 북한은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내세운 목적과 관련하여 민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것과 함께 『자체의 힘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더 잘해서 민족의 존엄과 영예를 더 높이 떨치도록 하는데 있다』(1993. 3. 4 평양방송 보도)고 주장, 이 이론이 체제건설을 도모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이 이론은 모든 주민들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을 다그쳐 나가도록 하기 위해 민족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려는 의도에서 제기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민족 제일주의의 내용도 본질적으로 북한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데 역점이 두어져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1993년 5월 11일 「전승」 40주에 즈음해 발표한 「로동당 중앙위원회 구호」에서 『우리 수령, 우리 당이 제일이고 주체사상과 우리식 사회주의가 제일이라는 조선민족 제일주의 정신을 높이 발양하자』는 구호를 제시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즉, 조선민족 제일주의 정신은 『수령을 모시고 위대한 당의 영도를 받드는 긍지와 자부심이고 주체사상을 가지고 있는 자부심이며 또한 가장 우월한 사회주의 제도에서 사는 긍지와 자부심』(1993. 3. 3 평양방송 보도)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단행본 <우리 민족 제일주의론>에서는 이 이론의 원천을 ①김일성과 김정일이라는 지도자 ②주체사상③노동당의 혁명전통 ④북한식 사회주의 제도 ⑤우리 민족의 유구한 투쟁의 역사를 들고 있다. 특히 북한은 주체사상이 조선민족 제일주의의 사상적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선민족 제일주의는 1980년대말 이후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주민들의 사상적 동요가 확산되자 내부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제기된 체제수호 논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북한은 이를 「우리식 사회주의론」과 함께 민족적 우월성을 강조하는데 적극 이용함으로써 여타 사회주의 국가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한편 각급 학교에서는 물론 각 인민반장과 정치지도원을 통해 일반 주민들에 대해서도 이에 대해 집중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특히 북한은 이를 김정일이 제의했다 하여 각 방송을 통해 「김정일 특강」 제목으로 이에 대한 연속강의를 하는 등 對주민 교양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1986년 7월 김정일의 담화 '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에서 처음 제시된 조선 민족 우월론.
조선민족제일주의는 1986년 7월 김정일의 담화 '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에서 처음 제시된 이후, 오늘날 북한 사회에서 지배적인 담화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조선민족제일주의는 '민족자주의식의 높은 표현'으로서 "조선 민족의 위대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조선 민족의 위대성을 더욱 빛내여 나가려는 높은 자각과 의지로 발현되는 숭고한 사상 감정"으로 규정된다 (철학연구 : 사회과학출판사, 1990년 4호). 조선 민족이 위대하다는 근거로는 김일성과 김정일이라는 지도자, 주체사상, 노동당의 혁명전통, 북한의 독자적 사회주의, 우리 민족의 유구한 투쟁의 역사를 들고 있다.
북한이 주창하는 조선민족제일주의에는 유일 초강대국 미국과의 적대관계 속에서도 자신의 체제를 계속 지켜왔다는 자부심이 배어 있다. 특히 1980년대 말에서 1990년초에 이르는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의 체제 붕괴와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연이은 자연재해, 미국과의 전쟁 위기설 등 체제가 흔들릴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면서 북한 주민들의 긍지는 더욱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첫댓글 오늘에서야 책이 도착해서 읽는 중이 였는데 벌써 다 정리를... 와! 대단하십니다.
감사히 담아 갑니다.
에구 한 고개 넘으면 또 한 고개 스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