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창
박희선
남편이 정치에 뜻을 둔 때가 있었다. 동네일이라면 발 벗고 나선 오지랖이라 부추기는 사람도 많았다. 평온했던 집안이 난장판이 되었다고 지 선생에게 하소연을 했더니 여길 가 보라며 도사 집 약도를 그려 주었다.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된다고 콕 집어 말을 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일화를 들려준다. 강 후보자는 당선될 확률이 낮은데 의회에 입성한다고 장담을 했단다. 선거운동 막판에 상대 후보가 하차한 덕에 가뿐히 되었다는 것이다. 그 말이 당의정이었다. 하룻밤이 몇 날처럼 길었다.
새벽이다. 동이 트려면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된다. 바닷가를 빙빙 돌며 시간을 끈다. ‘그 어느 지점에 도착하면 줄을 서 있는 무리들이 보일 거다.’ 약도 옆에 깨알 같은 작은 글씨가 도드라진다. 일명 멸치도사집의 약도는 정확하다. 사진을 보듯 예닐곱 사람이 줄을 서 있다. 나도 그들 뒤에 섰다.
모래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은 허튼짓한다고 모래 한 무더기를 휘이익 뿌리고 달아난다. 하늘이 점지해 준다는 뱃속 아기 성별도 미리 아는 판에 괜한 짓이다에 동요되어 잠시 흔들린다. 세상엔 전깃불도 있고 촛불도 건재한다. 필요에 따라 선택은 내가 할 뿐이다.
몇 번의 바람이 겨끔내기로 우리를 덮쳤고 그 사이 스무남은 명이 더 불어나 줄은 곡선이 되었다. 멸치도사에 대한 신뢰는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숫자에 비례한다. 사람이 늘어날수록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대열 따라 움직인다.
주변 색깔은 무채색이다. 2월이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저마다의 간절한 바람일지라도 끝없는 욕심은 어둡다. 남보다 많이 갖기 위해서, 작은 권력이라도 잡기 위한 허욕이 깔려 있다. 노력 없이 기적을 바라거나 자전과 공전의 법칙을 깨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는데 아름다운 색깔이 배경이 되어선 곤란하지, 그게 세상의 이치다. 오늘은 무지에 가려 일출도 입을 꾹 다문다.
오전 일곱 시가 되자 문이 열린다. 안내자는 줄 서 있는 사람들을 실내로 불러들인다. 대기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차례대로 의자에 나란히 앉는다. 어쩌면 신의 영역에 근접한 이 사람을 만나면 불가능한 문제도 쉽게 풀릴지 모른다. 밝은 세상에 살면서도 모두 이런 마음으로 새벽같이 달려오지 않았을까.
안내자는 이층 계단 입구에서 합장을 하고 섰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가까이 들리자 ‘도사님 내려오십니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부드러운 목소리지만 명령이다. 하나같이 일어나서 합장을 한다. 멸치도사님도 예를 갖추며 방으로 들어간다. 덩치나 생김새를 보면 멸치보다 허울 좋은 준치에 가깝다. 반어법을 통해 유명세를 날리는 것일까. 안내자도 뒤따라 들어가더니 조용하다. 무슨 의식을 치르는지 시간을 끈다. 문 하나 열고 닫는 데도 우리 집 제사 지내는 분위기다. 기이한 풍경이지만 도사님 전당만의 법이지 싶다. 첫 손님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한다.
사람마다 사연이 다르다. 무슨 절박한 일이 생겨 이곳을 찾았는지 도사를 만나고 나오는 그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다. 환하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다. 밍크코트를 질질 끌고 나온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코를 푼다. 손등까지 문신이 드러난 건장한 남자는 목까지 빳빳하다. 어떤 처방전을 받았을까. 그들은 한시도 머물지 않고 급히 빠져나간다. 의외로 사람들은 금방 줄어든다.
드디어 내 차례다. 방 안의 분위기는 엄숙하다. 이내 전염된 엄숙을 안고 조용히 앉는다. 어떻게 왔느냐고 묻는다. ‘이번 지방 선거에···’ 긴 말이 필요 없다. 뒷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알았어, 생년월일···’ 단도직입이다. 도사는 내가 딜이민 사진을 앞에 놓고 생년월일에 접신을 한다. ‘좋아, 붙는다, 딱 붙게 되어 있네’ 과연 도사는 도사다. 먹이를 향해 물살 헤집고 몰려드는 은빛멸치처럼 빠르다. 준치 실력으로는 어림없다. 이래서 멸치도사인가 싶다. 삼 분도 채 걸리지 않았는데 고객이 원하는 답을 단박에 집어내다니···.
정답인지 오답인지는 다음 일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시간을 오래 끌지 않는다. 정답이 한눈에 들어온다지 않던가. 백 문제에 한 개만 틀려도 머리를 책상에 처박는 얄미운 녀석의 얼굴이 휙 지나간다. 예비후보자의 사진에 화색이 돈다. 이미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으면 된다. 서둘러 지갑을 꺼내는데 ‘사주가 아주 좋다, 이런 사주 드물어, 그냥 가.’ 참으로 절창絶唱이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다. 돈도 받지 않겠다는데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가슴 죄며 기다렸던 청문은 삽시간에 끝이 났다.
남편의 호기 어린 봄날은 갔다. 어느 당선자처럼 상대가 중도 하차하는 변이도 일어나지 않았다. 많은 이의 도움이 있었지만 원대한 꿈은 두 번이나 꺾였고 또 한 번은 판을 펼치기도 전에 양보로 끝났다. 자그마치 열두 해를 한곳에 몰입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가고 싶은 길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제멋대로였다. 명품회사를 만들겠다던 포부도 서서히 숨이 죽었다.
기름진 밭에 씨앗을 뿌렸다고 싹이 다 트지 않는다. 사는 일도 내 뜻대로만 이루어지면 깊은 맛이 없다. 잦은 태풍에 뿌리가 흔들리고 가끔은 안개도 덮쳐야 마음 근력도 튼실해진다. 엉뚱한 길에서 허우적거려 봐야 내 자리의 소중함을 안다. 그는 세속의 직분과 몌별하고 설익은 농사꾼이 되었다. ‘내 사주 덕에 싱싱한 채소로 잘 먹고 잘 산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던지는 절창에 힘이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