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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강화 103코스 역방향 제2부
강화교산교회-다리목-교산2리경로당회관-
신포입구-샛마을체육공원-서사체험학습장-
짓절미-문응규정려문입구-매제미고개-
송산삼거리-인화리들녘수로-해안철책길-
카페오카소-무태돈대-이가랑펜션-창후항
20241023
1.코스 소개(두루누비)
1)코스개요
- 갈 수 없는 땅과 건너지 못하는 바다를 바라보며 분단의 아픔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코스
- 길이 12.6km, 소요시간 5시간, 난도 어려움
2)관광포인트
- 비무장지대인 강화 최북단의 작은 포구 '창후항'
-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강화평화전망대'
3)여행정보(주의사항)
- 민통선 지역으로 신분증 확인 및 출입신고서 작성 후 이용 가능함
- 시점 :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 산152-16 (해양경찰서 창후리출장소 옆)
대중교통)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에서 32번 버스 이용, 창후리 종점 하차
- 종점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11-40 (강화평화전망대 주차장)
대중교통)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 정류장에서 27, 28번 버스 이용 '평화전망대' 하차
- 주요 경로 : 창후항 3.4Km 송산삼거리 3.8Km 양사파출소 1.8Km 별악봉 3.6Km 강화평화전망대
2.교동대교, 무태돈대와 창후항 풍경
제2부 : 양사면 교산리 시루미(甑山) 마을 입구의 교산감리교회는 1893년에 태동한, 강화도의 첫 개신교회이다. 교회 앞쪽에는 2009년 교산교회에서 조성한 '강화복음전래기념비'와 '선상세례(船上洗禮)'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강화 교산교회 태동의 모체는 인천 내리감리교회이다. 인천 내리감리교회는 1885년 7월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인천 최초의 개신교회이다. 내리교회의 존스(G.H.Jones趙元時, 1867~1919) 선교사는 1893년 봄, 배를 타고 강화도 북쪽 해안으로 와서, 보름달이 환히 비치는 밤, 배 위에서 이승환 어머니에게 세례를 주어서 강화교산교회가 태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강화복음전래기념비와 '선상세례' 조형물이 이곳에 세워져 있다. 130년의 역사를 지닌 교산교회는 시루미 마을 입구에 우뚝하고, 시루미 마을은 증산 아래에 자리하여 남쪽에 우뚝한 별립산과 서쪽에 펼쳐진 교산리 들녘과 교산천을 바라보고 있다. 교산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 시리메 마을의 풍요가 느껴진다.
강화복음전래기념비를 살피고 서해랑길 103코스 역방향 탐방을 이어간다. 이 탐방길은 화남 선생의 여행길을 따라가는 길이다.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선생은 110여 년 전 1906년 봄, 강화를 기행한 뒤 강화 기행시집 <沁都紀行>을 남겼다. 심도(沁都)는 강화를 뜻하는 지명이며, 이 기행시집에 7언절구 한시 256수가 실려 있다. 양사면 교산리와 인화리, 하점면 창후리 창후항까지 서해랑길 103코스 역방향 탐방은 화남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가며 화남 선생이 110여 년 전 읊은 칠언절구 한시(漢詩)를 음미하는 것은 강화 탐방의 큰 즐거움이다.
서해랑길은 서사길에서 차량이 다니는 서사길 교한교로 가지 않고, 농로로 우회하여 교산천 수문교를 건넌다. 교산천은 수해상습지 개선사업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어수선하다. 수문교에서 북쪽을 살피면 북쪽 북성리 해안으로 이어진 넓은 간척농지가 펼쳐지고, 교산천은 북쪽으로 흘러서 양사면 북성리 구등곶돈대(龜登串墩臺) 옆에서 서해 바다로 유입한다. 구등곶돈대 앞쪽에 양사면 북성리 삼성동(三省洞) 생설미 마을, 그 오른쪽 뒤에 별악봉 능선의 제적봉 강화평화전망대가 어림된다. 화남 선생은 1906년 봄 북성리 생설미 마을을 들러서 이렇게 읊었다. "삼성촌 이름은 기리기 위해 붙였으니, 일찍이 업을 이은 가문 누구의 집안인가. 성씨 중에 으뜸가는 왕족 이씨 집안이니, 응골에 봄바람 불어 꽃망울을 띄우려 하네. 三省村名錫以嘉(삼성촌명석이가) 會門傳業是誰家(회문전업시수가) 萬殊一本璿源李(만수일본선원리) 鷹谷春風欲吐花(응곡춘풍욕토화)" - 화남 선생의 '삼성동(三省洞)' 그리고나서 그 뒤에 해설문을 첨부하였다. "삼성(三省)이란 일찍이 부자(夫子)의 도이기 때문에 인하여 동네 이름이 '삼성동(三省洞)'이 되었다. 이곳에는 응곡(鷹谷)이 있는데 전주 이씨(李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삼성동에는 왕족 전주 이씨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이들 가문이 공자의 道를 중시하는 것을 기려 삼성동(三省洞) 지명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교산천 서쪽 낮은 구릉 동쪽에 다리목 마을이 자리한다. 양사면 교산리는 교항동(橋項洞)과 증산동(甑山洞)을 합하여 교산리(橋山里)가 되었는데 다리목 마을이라 불리는 교항동(橋項洞)이 서해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낮은 구릉 자락에서 동쪽에 펼쳐진 넓은 간척농지를 바라보며 자리한다. "교항동 사람들은 옛 풍습을 잘 알아서, 예전의 김 선생은 깊은 충정 드러냈네. 향교의 동쪽 채 서쪽 채에서 제향을 올렸고, 병인년 난리 때엔 초가집에 봉안했네. 橋項洞人識古風(교항동인식고풍) 金生昔日著心紅(김생석일저심홍) 東西從享東西應(동서종향동서응) 內歲奉安茅屋中(내세봉안모옥중)" - 화남 선생의 '교항동(橋項洞)' 다리목 마을을 이렇게 읊은 뒤 "병인년(1866) 9월에 병인양요 때문에 성이 함락되던 날 교관(敎官) 황호덕(黃浩悳)은 대성전의 위패(聖廟)를 봉안하여 산 뒤로 옮겼고, 자(字)가 치일(致一)인 김씨가 동서무(東西廡)의 위패를 그 집으로 종향(從享)하였다."라고 해설문을 첨부하였다. 병인양요 때 강화성이 함락되었을 때 다리목 마을의 김치일(金致一)이 향교의 동서무(東西廡)의 위패를 자신의 집에 봉안하였음을 밝히고 이 마을의 아름다운 풍속을 칭송한다.
2년 7개월 전 교산천 하구에서 교동대교 동단 입구까지 해안 철책선을 따라 걸은 일이 있다. 서해랑길 103코스는 이 해안 철책길로 개통되어야 하는데 해안 철책길이 군사작전 지역이어서 철책길로 개통되지 못하고 내륙 쪽으로 개통한 것 같다. 다리목을 지나서 서해랑길은 서사길을 따라간다. 교산2리 경로당회관을 지나면 신포 입구, 해안으로 나가는 길이다. 입구에는, 신포 해안 출입을 통제한다는, '민통선 이북 지역 출입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지난 시절 멋도 모르고 걸었던 해안 철책길 추억이 그리워지며, 우리 국토 강화도의 북쪽 해안선을 따라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가슴을 찌른다.
서사길 서쪽에 샛마을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샛말은 다리목과 말모루 사이에 있는 마을로, 간촌(間村)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그런데 맞은편 버스정류소 이름은 윗말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이곳은 샛말이고, 체육공원 서북쪽의 마을은 윗말인 것 같다. 윗말 버스정류소 뒤 동쪽에 자리한 시리메(증산甑山) 마을이 보인다. 화남 선생은 시리메 마을을 이렇게 읊었다. "증산 마을 위에서 푸른 연기 일어나고, 남쪽은 솔숲이 두르고 북쪽은 시냇물이 둘렀네. 조씨 노인 고씨 노인 서로 보고 하는 말이, 파초 바위, 신발 바위 예로부터 전해 온다네. 飯山之上碧生烟(반상지상벽생연) 南繞松林北繞川(남요송림북요천) 趙老高翁相指語(조로공옹상지어) 蕉巖靴石古來傳(초암화석고래전)" - 화남의 '증산동(甑山洞)' 그리고 그 뒤에 "서사면(西寺面) 증산동(甑山洞)은 강화부 관아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조씨(趙氏)와 고씨(高氏)가 많이 살고 있는데 그 근처에는 파초암 화자석(芭蕉巖靴子石)이 있다고 한다."라는 해설문을 첨부하였다. 110여 년 전의 시리메 마을이 모습이 그려진다. 남쪽의 별립산, 북쪽의 교산천이 전체 지형을 분명히 보여준다. 파초 바위와 신발 바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샛마을 앞 윗말 버스정류소를 지나 서사길은 오른쪽으로 돌아 서사체험학습장으로 이어진다. 서사체험학습장은 폐교된 서사초등학교를 청소년수련관으로 개조한 곳으로, 평화·통일 체험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진정성 있고 실효성 있는 평화·통일 체험교육을 운영하고 있을까? 적대 관계를 더 심화하는 것은 아니겠지. 서사체험학습장을 지나면 짓절미 버스정류소가 나온다. 짓절미가 무슨 뜻일까? 짓절미는 뒷절미가 변화한 말로 별립산 자락 골짜기에 있는 마을 같다. 이 마을을 서사(西寺), 사촌(寺村)이라 하는 것으로 보아 뒷절골, 그냥 절골 마을이라 보면 될 것 같은데, 분명하지 않다. 양사면 교산리에서 서사길을 따라 인화리(寅火里)로 넘어가면 송산(松山) 마을이다.
양사면 인화리 송산마을에 있는 문응규 정려문(文應奎旌閭門) 입구를 그냥 지나친다. 문응규(文應奎)는 남평 문씨 문익점의 후손으로, 조선 인조 때 이괄의 난 등 여러 변란을 진압하여 공을 세운 무신이라고 하며, 병자호란 당시 강화성이 함락되자, 모친 대상을 지낸 뒤 1638년 1월 24일 자결하였다고 한다. 문응규 정려문 입구를 거쳐 고개를 오르면,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 송산마을 입구의 매제미고개이다. 매제미고개에서 북쪽 서사길41번길을 따라가면 송산마을과 인화보건진료소, 대한성공회 인화교회로 이어진다. 송산마을은 소나무가 울창하였으며 솔미마을이라 불렸다고 한다. 화남 선생은 송산동(松山洞)에서 이렇게 읊었다. "소나무 숲 우거진 곳이 송산 마을이거늘, 굽이굽이 용이 돌고 굽이굽이 물이 도네. 말에서 내려 숙연해져 바라보며 절을 하니, 외가 조상 무덤이 여기에 있어서라네. 松林深處是松山(송림심처시송산) 曲曲回龍曲曲灣(곡곡회룡곡곡만)下馬愁然仍瞻拜(하마수연잉첨배) 表家橄域此中間(표가감역차중간)" - 화남 선생의 '송산동(松山洞)' 그리고 이렇게 해설하였다. "송산(松山)의 땅은 형세상 굴곡이 많아 기이하며 그 중에 한 지역은 우리 표가(表家)가 사는 산기슭이다." 그러니까 화남 선생의 외가는 표(表)씨 집안이다.
서사길을 따라 매제미고개에서 내려가면 서사길은 남쪽 하점면 방향으로 이어가고, 서해랑길은 서쪽 교동대교 방향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국도제48호선 인화로(寅火路) 송산삼거리로 나가서, '저운드리' 마을, 또는 돌이 많다고 하여 '전들' 마을이라 불리는 산자락 마을을 바라보며, 국도제48호선 인화로(寅火路)와 헤어져 왼쪽 인화리 들녘으로 나간다. 인화리 들녘의 수로 옆 농로를 길게 따라가는 길, 억새풀꽃은 바람에 날리며 가을의 정감을 돋우고, 교동대교 동단 구릉의 범바위(寅火石인화석)가 있는 인화성이 손짓한다. 화남 선생이 읊은 '인화동(寅火洞)'을 음미한다. "석호의 웅장한 기운 인화리서 흘러서, 서쪽의 연안 해주와 교동까지 통하네. 물안개 낀 들판 집이 황충신의 집이니, 갑곶에서 천년토록 바다 태양처럼 붉으리. 寅火中流石虎雄(인화중류석호웅) 西通延海與喬桐(서통연해여교동) 渚雲野屋黃忠節(저운양옥황충절) 甲串千年海日紅(갑곶천년해일홍)" 이 풍경은 교동대교 동단의 범바위에 올라서 교동도 앞바다를 감상할 때 감각될 것 같으며, 충신 황대곤(黃大坤1577~1637)의 집은 인화리 송산 삼거리 서쪽 산자락 '저운드리' 마을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남 선생이 '인화동(寅火洞)' 시에 덧붙인 해설문에 인화리(寅火里) 지역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인화석진(寅火石津)은 서해 중에 범처럼 생긴 바위가 남방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인화석(寅火石)이라고 이름하였다. 수로로 10여 리에 교동·연안·해주 등을 교통하니 진실로 서해의 요충지이다. 효종 병신년(1656년)에 유수 홍중보(洪重普, 1612~1671)가 진을 설치하여 별장(別將)을 두었다. 기해년(1659년)에는 윤이제(尹以濟, 1628~1701)가 아뢰어서 만호(萬戶)로 승격시켰고 황상의 조정에서 아뢰어서 권관으로 승격시켰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그 위 저운야(渚雲野)에 평해 황씨(平海黃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정축호란(1637년) 때에 순절한 황대곤(黃大坤)의 집이 이곳에 있다. 자세한 것은 충렬사순절록(忠烈祠 殉節錄)에 보인다." 황대곤(黃大坤, 1577~1637) 조선 중기의 무인, 본관은 평해(平海), 호는 송포(松圃), 자는 자후(子厚),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파총(把摠)으로 갑곶진을 방어하다가 이삼(李參), 안몽상(安夢祥)과 함께 전사했다."(譯註沁都紀行)
인화리 해안길을 따라 남진한다. 별립산이 남쪽에 솟아 있고, 그 북쪽에 인화리 들녘이 펼쳐져 있으며, 그 서쪽에 하점면 창후리가 자리한다. 그리고 별립산 남쪽에는 하점면 이강리 지역이 펼쳐질 것이다. 2022년 3월 교동대교 동단의 인화석진(寅火石津)과 범바위(寅火石)가 있는 인화성(寅火城) 아래를 걸었을 때는 이 지역의 위치 감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지난 시절의 탐방 체험 때문인지 위치 감각이 살아난다. 해안의 넓은 습지에서는 갈대와 물억새들이 서걱이며 추억을 불러오고, 서해 바다에는 교동도의 화개산과 송가도의 상주산이 솟아 있다. 교동대교를 건너 교동 대룡리 시장을 구경하고 막걸리를 마시던 때가 추억된다. 그런데 낭만을 불러오는 추억의 그리움은 해안의 철책선에 가로막혀 위축된다. 그 위축을 강화 본토의 별립산, 교동도의 화개산, 송가도의 상주산, 석모도의 상봉산이 떨쳐내지만, 별립산 공군 레이다 기지는 숨을 가라앉친다. 화남 선생의 '별립산(別立山)'을 음미한다. "별립산 높이 솟아 돌계단도 많구나, 서린 용과 웅크린 호랑이가 뛰쳐 오르는 듯. 큰 바다 감아 돌아 서북쪽에서 흘러드니, 응당 변방 오랑캐는 오를 수가 없었네. 別立山高石萬層(별립산고석만층) 盤龍路虎勢騰騰(반룡로호세등등) 大海環從西北注(대해환종서북주) 應使遐夷不可升(응사하이부가승)" 오랑캐의 침략을 막아낸 것을 별립산에 의지해 자부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해안 철책길에서 무태돈대로 가는 길은 해안으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고 창후로 간선도로로 나갔다가 다시 해안 철책길로 이어진다. 간선도로 창후로에 별립오리주물럭집과 편의점을 지나면, 해안 철책선의 두려움에 아랑곳없이 주차장에 사랑의 역마차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두려움은 낭만적 감성이어서, 철책선 너머, 바다에 솟아 있는 교동도의 화개산과 송가도의 상주산이 품어주는 용기 때문일까? 그래서 카페 '오카소' 또한 낭만적 이름이다. '오카소'는 포루투칼어로 '저녁노을', '낙조(落照)'를 뜻한다고 한다.
카페 오카소 앞에서 해안 철책길로 진입하여 철책긹을 따라가면 무태돈대 초소와 무태돈대가 곧바로 나온다. 무태돈대(無殆墩臺)는 조선 숙종 5년(1679년)에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가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함경·황해·강원 3도의 승군과 어영군을 동원해 80일 동안 쌓은 48개의 돈대 중 하나로 인화보(寅火堡)가 관할하였으며, 돈대 안에는 대포를 올려놓는 포좌 4문을 해안을 향해 설치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성곽이 많이 훼손된 상태라고 설명안내판에 적혀 있다. 무태돈대 북동쪽 성곽 위에 고욤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고욤나무에는 노란 고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으며, 물러 터진 것도 있다. 고욤나무는 감나무를 접목할 때 대목(臺木)으로 쓰인다. 어린 시절 배운 기억이 난다. 자잘하고 떫은 맛을 내는 고욤을 맺는 고욤나무에 감나무를 접붙여야 굵고 단 감을 결실할 수 있다고 한다.
고욤나무 추억을 떠올리며 무태돈대 성곽에서 북, 서, 남쪽을 조망한다. 교동대교 동단 범바위에 오른 기분으로 교동도, 송가도, 석모도를 조망하며, 교동대교와 해안철책선, 교동도와 송가도 사이의 장기섬, 미법도, 서검도를 가늠한다. 초지대교를 건너 강화도에 들어올 때 동검도를 살폈는데, 서해랑길 마지막 코스에서 서검도를 확인하는 기쁨에 사무친다. 그러나 그 바로 옆이 남방한계선이요, 그 뒤가 북녘 땅이다. 어느덧 매너리즘에 빠진 가슴저림 현상이 나타날 뿐, 아무렇지도 않게 풍경 감상과 위치 확인에 몰두한다. 남쪽 바로 앞에는 창후항, 맨 끝에는 석모도의 해명산, 낙가산, 상봉산 산줄기가 서쪽으로 벋으며, 상봉산이 송가도의 상주산과 마주하고 있다. 송가도는 송가평 제방에 의해 석모도와 이어져 있다. 석모도 동쪽에 내가면 황청리에 국수산, 그 왼쪽에 덕산이 분명히 확인된다. 강화 앞바다의 아름다운 섬들과 산봉과 산줄기, 아름다운 국토의 사랑은 더 넘쳐야 하는데, 분단의 비극이 솟구쳐 오른다.
무태돈대를 나와서 창후리 창후항으로 내려간다. 가을날의 쓸쓸함과 탐방길의 만족감이 뒤섞여 미묘하다. 화남 선생은 봄날 이 길을 걸었고, 길손은 110여 년이 지난 가을날 이 길을 걷는다. 화남 선생은 창후리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화남 선생은 창후리 지역인 '창교동(倉橋洞)'의 봄빛을 이렇게 읊었다. "창교동(倉橋洞)은 서쪽 편 바닷가에 있는데, 이씨 구씨 서당엔 봄빛이 가득하다. 한가로운 가운데에 소란함이 있다고 말하니, 석공과 소금장수의 왕래가 빈번하기 때문이라네. 倉橋洞在海西濱(창교동재해서빈) 李具書樓共是春(이구서루공시춘) 因說閑中還有攪(인설한중환유교) 石工鹽賈往來頻(석공염가왕래빈)" 그리고 해설문에 이렇게 적었다. "이 지역은 송계(松溪) 청해백(青海伯)의 후손인 청해 이씨, 강암공(江菴公)의 후손인 능성 구씨가 거주하고 있다. 땅의 모양이 산을 등지고 바닷가에 임하고 있어, 바다에는 소금이 생산되고 산에는 돌을 뜨는 곳이 있으니, 석수(石手)들과 소금장수들이 빈번히 왕래하고 있다." 바닷가에는 염전, 산에는 채석장이 있어서 창후리 지역에는 소금장수와 석공들의 왕래가 빈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창후항은 어떤가? 카페와 편의점, 펜션, 횟집과 어시장이 창후항 주변을 감싸고 있고, 창후항 앞바다는 가을날의 적막감이 밀려든다. 서해랑길 103코스를 마치고 횟집 앞 식탁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캔맥주를 홀짝거렸다. 가을 바람이 가을 햇빛을 이리저리 흔든다. 가을날은 흔들리며 사라지는 것인가? 푸름이 사라지고 나뭇잎이 떨어져 바람에 날려간다.
무언가 잃어 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낙과落果여,/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마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 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 오세영(吳世榮, 1942~)의 '10월' 전문
3.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4.5km
전체 소요 시간 : 3시간 42분
강화 교산교회 입구에 강화 복음전래기념비와 '선상세례(船上洗禮)' 조형물이 2009년에 조성되었다.
강화복음전래기념비 옆에서 남쪽을 조망한다. 교산천이 교산리 들녘을 가르고, 뒤에는 별립산이 솟아 있다.
서해랑길은 왼쪽 서사길을 따라 교산천의 교한교로 이어가지 않고, 오른쪽 농로로 우회하여 다시 서사길로 나온다.
서사길에서 농로로 진입하여 강화 첫 개신교회인 교산교회와 증산마을 입구를 뒤돌아보았다.
양사면 교산리 들녘이 펼쳐져 있으며, 중앙 뒤는 북성리 지역이다. 오른쪽 뒤에 성덕산 산줄기가 북쪽으로 벋어 내린다.
왼쪽에 교산천 방죽이 이어지고 오른쪽에 교산리 들녘이 펼쳐져 있다. 중앙 끝 별악봉 자락에 강화 평화전망대가 있다.
교산천 서쪽 야산 아래에 교산리 다리목마을이 자리한다. 시리메마을 서북쪽에 있으며 마을 앞에 다리가 있다.
교산천 수문교를 건너 다리목마을 입구에서 왼쪽 서사길로 나간다.
교산천 수해상습지 개선사업 공사가 진행 중이며, 뒤쪽의 구릉 옆 구등곶돈대에서 교산천은 서해 바다로 흘러든다.
교산천(橋山川)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양사면 교산리에서 발원하여 황해로 유입하는 하천이다. 주요 지류로서 짓절미천과 배우천이 있다. 교산평을 지나 북류하다가 구등곶돈대 옆의 북성배수갑문을 통해 황해로 유입한다. 남쪽으로는 별립산을 분수계로 삼고 있고 북쪽으로는 인화리 당산, 송산을 유역 경계로 한다. -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서사길의 교한교를 우회하여 서사길로 나와서 교산교회와 증산 아래 시루메마을을 바라본다. 왼쪽 뒤에 성덕산이 있다.
서해랑길은 서사길을 따라 양사면 교산리에서 인화리까지 이어간다. 왼쪽 뒤에 공군 레이다 기지가 있는 별립산이 솟아 있다.
교산2리 경로당회관 앞을 지나간다. 회관 입구에 재활용 동네마당 분리수거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오른쪽으로 나가면 새로된 포구가 있어서 신포(新浦)라 불리는 곳에 형성된 신포마을이 자리하는 것 같다.
신포(新浦) 출입로 입구에 민통선 이북 지역 출입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신포 해안 지역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1.이 지역은 군사분계선에 인접안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으로 고도의 군사활동 보장이 요구되는 군시작전 지역입니다.
2.허가된 인원 외에는 출입이 제한되는 지역으로 출입인원은 초병과 CCTV에 의해 감시 중에 있습니다.
3.무단으로 출입시에는 군사기지 못 군사시설 보호법 제24조에 의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해병대 제 3167 부대장
샛마을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샛말은 다리목과 말모루 사이에 있는 마을로, 간촌(間村)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그런데 버스정류소 이름은 윗말이다. 그렇다면 체육공원 위쪽 마을은 윗말인 듯. 중앙 뒤에 별립산이 솟아 있다.
청정, 평화, 화합의 허브랜드 양사면 샛마을 체육공원 - 위치 : 양사면 교산리 392번지, 조성일 : 2021년 8월. 1978년에 건축된 마을공동창고가 2021년 6월 3일 해체되고 아름다운 체육공원으로 다시 태어나, 이제나 저제나 꽃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시나브로 당신을 기다려요. - 안내문
샛말체육공원 맞은편에 윗말 버스정류소가 있는 것으로 보면 샛말 서쪽을 윗말이라 이르는 듯. 정류소 뒤 동쪽에 교산리 들녘이 펼쳐지고 교산천이 흐르며, 그 뒤쪽에 시루메(증산甑山)마을이 자리한다.
서사체험학습장 버스정류소를 지난다. 중앙 뒤에 전원주택 단지가 있고, 그 뒤쪽에 별립산이 솟아 있다.
서사체험학습장 담장 울타리 옆 서사길을 따라간다. 공군 레이다 기지가 있는 별립산은 우뚝하다.
폐교된 서사초등학교를 청소년수련관으로 개조하였다. 서사체험학습장은 평화공존의식 함양, 평화·통일에 대한 문제 및 대안을 체험하는 평화·통일 체험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평화통일 체험 학습장이라고 한다.
짓절미 버스정류소를 지난다. 뒷절미가 변화한 짓절미는, 별립산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서사, 사촌이라 불린다고도 한다.
양사면 교산리에서 서사길을 따라 인화리(寅火里)로 넘어가 송산(松山)마을 방향으로 올라간다.
양사면 인화리 송산마을에 있는 문응규 정려문을 들르지 않고 그냥 통과한다. 정려문(旌閭門)은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집의 문 앞이나 마을 입구에 세우는 문을 말한다.
문응규(文應奎)는 남평 문씨 문익점의 후손이다. 조선 인조 때 이괄의 난 등 여러 변란을 진압하여 공을 세운 무신으로, 병자호란 당시 강화성이 함락되자, 모친 대상을 지낸 뒤 1638년 1월 24일 자결하였다. 1885년(고종22) 정문이 내려졌으며, 본래 충남 홍성군 운산에 세워졌다가 1895년 양사면 인화리 송산 묘 아래에 옮겨 세웠다고 한다. "忠臣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使行通政大夫竹山府使兼營長一等寧社員原從功臣文應奎之門 上之十二年 乙酉 五月日" - 강화로닷컴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 송산마을 입구의 매제미고개를 넘어간다.
매제미고개에서 뒤돌아본다. 왼쪽 서사길41번길을 따라가면 송산마을과 인화보건진료소, 대한성공회 인화교회로 이어진다. 송산마을은 소나무가 울창하였으며 솔미마을이라 불렸다고 한다.
매제미고개를 넘어 서사길을 따라가며 별립산을 올려본다.
왼쪽은 하점면과 강화읍 방향이며, 서해랑길은 오른쪽 교동대교 방향으로 내려가 송산삼거리로 나간다.
국도제48호선 인화로의 송산삼거리에서 인화로 교동대교 방향으로 이어간다.
국도제48호선 인화로에서 송산삼거리를 뒤돌아본다. 왼쪽 송산마을 방향의 길을 따라 인화로로 내려왔다.
국도제48호선 인화로(寅火路)에서 왼쪽 인화리 들녘으로 나간다. 오른쪽 산자락의 마을은, 인화성 동남쪽에 있는 '저운드리' 마을로 돌이 많다고 하여 '전들' 마을이라고도 하며, 병자호란 때의 충신 황대곤(黃大坤1577~1637)의 집이 있다고 한다.
국도제48호선은 강화∼서울선이라고도 한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에서 강화군과 김포시 북부를 관통하여 김포공항, 성산대교, 마포 및 신촌을 거쳐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동 광화문까지 동서 방향으로 뻗은 도로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도제48호선 인화로에서 인화리 들녘으로 내려간다. 창후항 3.6km 지점이다.
송산삼거리에서 국도제48호선 인화로로 나온 뒤 들녘길로 진입하여 들길을 따라왔다.
인화리 들녘의 수로 옆 농로를 따라 해안 방향으로 이어간다. 중앙 뒤에 교동도의 화개산이 보인다.
인화리 수로 옆 농로가 길게 이어져 있으며, 중앙 뒤에 교동도의 화개산이 솟아 있다. 교동대교 동단 아래에 있는 인화석진(寅火石津)과 그 위쪽 구릉의 범바위(寅火石)가 있는 인화성(寅火城), 인화 마을을 가늠한다.
인화리(寅火里)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에 있는 리(里)이다. 서해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섬마을이다. 어업이 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육지와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자연마을은 인화, 경젓말, 닥바우 마을이 있다. 인화 마을은 인화석이 있어 인화 마을이라 불리며, 경젓말 마을은 큰말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닥바우 마을은 닥바우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두산백과
수로 옆 농로변에 억새풀꽃이 피어 바람에 나풀거린다. 남쪽에는 별립산이 솟아 있다.
수로 옆 길가에 억새풀꽃이 즐비하다. 억새풀꽃이 나풀거리는 농로를 따라왔다.
인화리 들녘의 억새풀꽃 즐비한 농로가 길다. 오른쪽에 교동대교 동단, 중앙 뒤에 교동도의 화개산이 보인다.
길게 이어온 농로에서 수로의 다리를 건너 맞은편 농로로 넘어가 해안 방향으로 이어간다.
수로의 다리에서 걸어온 농로 옆 수로를 올려본다.
수로의 다리를 건너 맞은편 농로를 따라 해안 방향으로 이어간다. 오른쪽 뒤에 송가도의 상주산이 보인다.
인화리 수로 남쪽 농로를 따라간다. 맨 오른쪽에 교동대교 동단의 검문소, 왼쪽 뒤에 교동도의 화개산이 보인다.
수로 남쪽 농로를 따라 해안 방향으로 나가서 왼쪽으로 꺾어 제방 안쪽 인화리 들녘의 농로를 따라 남진한다. 오른쪽 뒤에 교동도의 화개산, 왼쪽 뒤에 송가도의 상주산이 보인다.
인화리 들녘 남쪽 수로에서, 송가도의 상주산(중앙), 왼쪽 뒤 석모도의 해명산, 낙가산, 상봉산 산줄기를 조망한다.
해안의 제방과 습지 안쪽의 인화리 들녘의 농로를 따라 남진한다. 왼쪽 뒤에 별립산이 솟아 있다.
농로에서 공군 레이다 기지가 있는 별립산을 올려본다.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하점면과 양사면 사이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산이다(고도:416m). 강화 6대 산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강도지』에 "강화부 서쪽 2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 『조선지지자료』에서 별립산(別立山)이라는 지명이 확인된다. 산 사면이 하점면 창후리 · 이강리 · 양사면 인하리에 걸쳐 있다. 강화도의 다른 산들과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지 않고 외따로 떨어져 있다고 해서 별립산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고 전한다. 산 전체적으로 바위가 많고 '호랑이가 앉아 있는 모양'이라고 해서 준호산이라는 별칭도 있다. 산의 북쪽으로 48번국도가 동서 방향으로 지나고 있다. -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해안 제방과 간척농지 사이에 넓은 습지가 형성되어 있다. 중앙에 송가도의 상주산과 그 왼쪽에 석모도의 상봉산이 보인다.
농로를 따라 해안 철책 수문 앞으로 이어왔다. 오른쪽 뒤에 인화리 범바위(寅火石)를 가늠한다.
수문 옆에 북괴공작 안내원 서영철 구출 지점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1989년 9월 17일 새벽 03시 07분, 당시 2중대 4소대 203초소, 상병 최동근, 이병 이정호 병사가 구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양사면 인화리 해안의 철책선 옆 해안길을 따라 내가면 창후리 지역으로 넘어간다.
해안길에서 뒤돌아서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교동대교를 바라본다.
교동대교(喬桐大橋)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교동면 봉소리)와 강화도(양사면 인화리)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강화-교동 연결도로는 길이 2.11 km의 교동대교와 다리 양쪽의 접속도로 1.33 km를 합쳐 총 3.44 km이고, 900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되어 2014년 7월 1일에 정식 개통하였다. 교동도는 민간인출입통제구역이기 때문에, 교동도 주민이 아닌 외지인은 해병대 검문소에서 출입증을 교부받은 후 교동대교 입구의 검문소에 그 출입증을 제시해야만 다리를 건널 수 있다. - 위키백과
해안의 철책선 너머에 교동도의 화개산이 교동도 전체를 거느린 듯. 오른쪽에 교동대교가 보인다.
해안에 철책선, 바다에 송가도의 상주산, 맨 왼쪽 뒤에 석모도의 상봉산, 중앙 앞 기장섬 뒤의 섬은 서검도인 듯.
서검도(西檢島)는 석모도에서 서쪽으로 2㎞, 강화에서 서쪽으로 10.2㎞ 지점에 있다. 북방한계선이 지나고 황해남도 연안군과 마주한다. 면적은 2.19㎢이고, 해안선 길이는 6.0㎞이다. 옛날 중국에서 사신이나 상인들이 황해로부터 한강 입구로 진입할 때 선박을 검문하던 검문소가 있는 섬이라는 데에서 지명이 유래하였다. 특히 강화도의 서쪽에 있어 서검도라 하였고, 이는 강화도 남동쪽에 위치한 동검도와 대비를 이루는 지명이다. 섬은 대체로 삼각형 모양이며 대부분 저평(최고 높이 56m)하다. 주변에 있는 섬을 연결하여 간척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대부분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해안길에서 창후로로 나가 별립오리주물럭과 편의점 앞을 지나간다. 오른쪽 맨 뒤에 석모도의 상봉산이 보인다.
내가면 창후리 해안 철책길에서 창후로로 나와 창후로를 따라 창후항 방향으로 이어간다.
창후로 왼쪽에 카페 오카소, 오른쪽에 카페 오카소 주차장이 있으며, 바다에는 송가도의 상주산이 우뚝하다.
카페 오카소 주차장에 사랑의 역마차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고, 바다에는 교동도의 화개산과 송가도의 상주산이 솟아 있다.
카페 오카소의 '오카소'는 무슨 뜻일까? '오카소'는 포루투칼어로 '저녁노을', '낙조(落照)'를 뜻한다고 한다.
서해랑길은 창후로의 카페 오카소 맞은편 주차장 옆 해안길로 들어가 무태돈대로 이어간다.
해안의 카페 오카소 전용 주차장에 사랑의 역마차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고, 뒤쪽에 교동대교가 바다 위를 가른다.
오른쪽에 교동대교, 건너편에 교동도가 길게 이어져 있으며, 남쪽에 화개산이 솟아 있고 해안에 포구들이 보인다.
중앙 뒤에 상주산이 나무에 가려 있고, 그 오른쪽 앞 기장섬과 그 뒤 미법도와 서검도를 가늠한다.
미법도(彌法島)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미법도리에 위치한 인천광역시의 섬이다. 서검도와 석모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여 있다. 이 섬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가깝기 때문에 강화군에서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 섬은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주민들이 총 다섯차례나 간첩으로 몰렸던 아픔을 간직한 섬이기도 하다. 미법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9km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서해 5도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더 가까운 섬이다. - 위키백과
내가면 창후리 해안 철책길을 따라 무태돈대로 이어간다.
해안의 철책선이 무태돈대 초소로 이어진다. 오른쪽에 송가도의 상주산, 그 왼쪽 뒤에 석모도의 상봉산과 산줄기가 이어진다.
오른쪽에 무태돈대 초소, 중앙 앞에 무태돈대, 오른쪽 맨 뒤에 석모도 상봉산과 산줄기가 보인다.
무태돈대 성벽이 사각형으로 이루어져 있고, 성곽에 고용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무태돈대 내부로 들어간다.
무태돈대 내부로 들어와 북쪽 성곽에서 자라는 고욤나무를 살폈다. 고욤나무 앞으로 가 보았다.
고욤나무에 노란 고용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고욤·고양나무·소시(小枾)라고도 한다. 마을 부근에 많이 자란다. 높이 약 10m이다. 껍질은 회갈색이고 잔가지에 회색 털이 있으나 차차 없어진다. 잎은 어긋나고 타원형 또는 긴 타원형으로 끝이 급하게 좁아져 뾰족하고, 길이 6∼12cm, 나비 5∼7cm로 톱니는 없다. 꽃은 암수딴그루이며 항아리 모양이다. 열매는 둥근 장과(漿果)로 지름 1.5cm 정도이며 10월에 익는다. 열매에는 타닌이 들어 있으며 빛깔은 노란색 또는 어두운 자줏빛이다. 덜익은 것을 따서 저장하였다가 먹기도 한다. 씨를 뿌려서 자란 고욤나무는 흔히 감나무를 접목할 때 대목용으로 쓰며, 목재는 여러 가지 도구의 재료로 쓴다. - 두산백과
무태돈대 북쪽 고욤나무 옆에서 돈대 내부와 남서쪽을 조망한다. 석모도의 해명산, 낙가산, 상봉산 산줄기가 벋어 있다.
북쪽 성곽 고욤나무 옆에서 걸어온 해안 철책길을 조망한다. 왼쪽에 무태돈대 초소, 중앙 뒤에 교동대교가 보인다.
서쪽 성곽에서 북서쪽을 조망한다. 무태돈대 초소가 앞에 있고, 오른쪽 뒤에 교동대교, 왼쪽 뒤에 교동도의 화개산이 솟아 있다.
맨 오른쪽에 교동도의 포구들, 중앙에 장기섬과 그 뒤 미법도와 서검도, 왼쪽 뒤에 송가도의 상주산이 솟아 있다.
앞에는 창후항, 오른쪽에 송가도의 상주산, 중앙 뒤에 석모도의 상봉산, 그 왼쪽으로 낙가산, 해명산 산줄기가 이어진다.
무태돈대 서쪽 성곽 남쪽에 창후항, 성곽 뒤에 내가면 덕산, 그 오른쪽에 국수산, 그 오른쪽 뒤에 석모도의 해명산 산줄기가 오른쪽 낙가산, 상봉산으로 길게 이어진다.
무태돈대 출입구 앞에 무태돈대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무태돈대(無殆墩臺)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8호.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내 접경지역이나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설치하는 초소로,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하고, 안은 낮게하여 포를 설치해두는 시설물이다. 이 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년)에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가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함경·황해·강원 3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여 명을 동원해 80일 동안 쌓은 48개의 돈대 중 하나로 인화보(寅火堡)가 관할하였다. 규모는 해안 쪽으로 긴 면이 44m, 짧은 면이 20m인 직사각형이다. 돈대 안에는 원래 대포를 올려놓는 포좌 4문을 해안을 향해 설치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성곽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무태돈대에서 해안길을 따라 창후항으로 이어간다. 앞에 카페와 펜션, 편의점이 보인다.
창후로 동쪽에 이가랑 카펜&펜션, 그 오른쪽에 편의점이 있다.
해안철책길에서 창후로로 나가 편의점과 해동식당 앞을 통과한다.
창후로를 따라 해동식당 앞을 지나 창후항 입구로 이어간다.
창후항 입구에 서해랑길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오른쪽 뒤에 송가도의 상주산, 중앙 뒤에 석모도의 상봉산이 보인다.
창후항 입구 인천해양경찰서 창후리출장소 옆에 서해랑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서해랑길 102코스는 왼쪽 방향이다.
서해랑길 102·103코스 안내도 오른쪽에 인천해양경찰서 창후리출장소가 있다.
강화군 내가면 창후리 창후항 입구에 인천해양경찰서 창후리출장소가 있으며, 건너편에 상주산과 중앙 뒤에 상봉산이 보인다.
서해랑길 102·103코스 안내도 왼쪽 기둥에 서해랑길 103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서해랑길 103코스는 거리 13.1km, 소요시간 5시간, 난도 어려움이다. 탐방한 결과, 14.5km 거리, 3시간 42분이 걸렸다.
서해랑길 102·103코스 안내도와 함께 서해랑길 103코스 역방향 탐방 완주를 기념한다.
서해랑길 안내도 맞은편 창후항 주차장 북쪽에 바다횟집과 창후마트가 있다. 횟집 앞 식탁에서 캔맥주를 마셨다.
바다횟집 앞쪽에서 서해랑길 103코스 시작지점, 인천해양경찰서 창후리출장소, 창후항을 바라본다. 중앙 뒤에 석모도의 상봉산, 오른쪽에 송가도의 상주산이 보인다.
점심을 먹고 서해랑길 103코스 시작지점에서 왼쪽 창후로를 따라 서해랑길 102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