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6일
『킨』 (옥타비아 버틀러 씀 / 이수현 옮김, 비채)
원치 않은 곳에서, 원치 않은 시간을 살지만.
한 여자를 만났다. 스물여섯 살의 흑인이다. 직접 만난 것은 아니다. 오래 본 것도 아니다. 그저 그녀의 이야기를 보았을 뿐이다. 단숨에 그녀의 이야기를 읽었고 한동안 생각했다. 원치 않은 곳에서, 원치 않은 시간을 살아야 했던 그녀를. 그리고 우리를.
다나의 이야기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8쪽)로 시작된다. 1976년 6월 9일,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새로운 보금자리에 이제 막 이삿짐을 풀고 있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면서 속이 울렁거린다. 주변이 흐릿해지고 이내 낯선 장소에 덩그러니 있다. 타임슬립이다. 1810년대 메릴랜드주,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 동물을 길들이는 채찍으로 ‘검둥이’를 벌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곳, 흑인 여성을 ‘옥수수 껍질을 벗기면서 돌려 마시는 위스키병 같은, 그런 존재’(507쪽)로 여기는 와일린가(家)에서 그녀는 살아가야만 했다. 1976년의 현실과 과거를 오가는 여정은 몇 번이나 되풀이된다. 그녀의 조상 루퍼스 와일린을 구하기 위해서. 다나는 강에 빠진 어린아이 루퍼스를 살렸다. 그 일을 시작으로 두려움과 공포, 위험에 휩싸인 루퍼스가 그녀를 원할 때마다 다나는 그 시대,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몇 년을 살아야만 했다. 돌아올 집이 있었고, 그녀를 기다리는 케빈이 있었지만 돌아오고 싶을 때 그에게로 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다나가 느꼈을 불안과 긴장, 공포는 이야기의 곳곳에서 전해진다.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그녀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의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과거에 머물렀던 시간이 길면 길수록 돌아와서 마주하는 전혀 달라진 것 없는 현실은 그녀에게 한동안 또 다른 고통이었고 괴로움이었다.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과거에 있는 듯한 느낌.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왔던 현실이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지는 일상. 그렇게 다나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살아내야만 했다.
무엇을 하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다. 시키는 대로 해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그녀를 무기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다나는 원치 않은 현실에 익숙해지는 자신을 경계한다. “잠시만이라도 내가 나의 주인으로 있고 싶었다. 그게 어떤 느낌이었는지 잊어버리기 전에.”(430쪽) 노예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친다. “두 아이를 외면하고, 양심을 저버린 안전하고 편안한 겁쟁이가”(200쪽) 되지 않기를 선택한다. “루퍼스가 자기 아버지의 복사본으로 자라지 않게”(150쪽), 다나 자신에게나 “앞으로 그의 노예가 될 사람에게나 도움이 될 생각을 심어주려”(124쪽) 최대한 루퍼스를 돕는다. 자기 몸 하나 지키기도 벅찬 곳에서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를 안다고 그것이 쉬울까.
나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지금, 이곳에서 살고 있다. 이곳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지고 산다. 전쟁도 가난도 혐오도 차별도 없는 곳,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곳이 내가 살 미래라 여긴다. 그런데 내가 그 미래를 확신한다고 해서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쉬운 것은 아니다. 내가 믿는 미래, 내가 소망하는 미래는 자꾸 잊어버리고 보이는 현실, 내 몸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현실이 힘겨울 때가 많다. 때로는 무기력하기도 하다. 그래서 다나가 미래를 알았다고 해서, 돌아갈 더 나은 미래가 분명히 있다고 해서 노예로, 검둥이로 살아야 했던 삶이 견딜만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루퍼스는 끝내 변하지 않았다. 루퍼스가 죽고 난 후, 그의 소유였던 노예들은 대부분 팔려 갔다. 다나의 바람과는 달랐다. 그녀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결과만 보면 그녀가 바꿀 수 있는 일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보이는 현실 너머를 바라보며, 두려움을 밀어내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그런 그녀의 삶 자체가 울림이 된다. 당장 변화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상황은 더 나빠진 듯 보이기도 하지만 울림은 전해지고 이어졌을 것이다. 기어이 변화를 이룰 때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는 우리가 선택한 곳도, 원한 곳도 아닐지 모른다. 살아갈수록 삶은 더욱 힘들게 느껴지고,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나아질 것이라곤 없을 것만 같다. 이대로라면 그리 머지않은 미래 지구에는 나뿐 아닌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게 된다는 요즘. 우리에게는 다나와는 다른 절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 그 절망은 끝도 없이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불안하게 한다. 나 하나 지키며 사는 것도 힘든데 뭘 더 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절망과 포기가 만연한 지금, 여기에서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바로 내 곁에. 우리 가까이에.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 또한, 절망에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리라. 우리가 원하는 변화는 더디기만 하고, 어쩌면 우리는 끝내 확인할 수 없을지라도 절망은 아니다. 변화를 믿고 살아내는 삶은 이어질 것이기에.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