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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수 당의 통일제국과 동아시아 세계의 성립(1)
임광자 추천 0 조회 66 08.05.08 10: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수(隋)·당(唐)의 통일제국과 동아시아 세계의 성립 (1)            이길상

 

가. 고대 동아시아 국가

 

인공위성에서 본 동아시아 세계오늘날 우리들이 공간적인 개념으로 동아시아라고 하면 중국, 한국, 일본을 가르칩니다. 이 지역이 세계화의 길목에서 문화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유사성이 많다는 것이지요.

 

고대에 있어서 이 지역은 중국을 중심으로 활발한 교류와 협력, 혹은 반목과 투쟁을 통하여 문화적으로 전수하고 수정하여 나름대로의 블록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 요체는 한자, 유학과 불교, 전제군주의 정치제도 하에서의 율령체제, 농업중심의 경제생활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역에서의 역사에서도 특이한 점이 나타나는데 위선 용어에서 연호, 성명, 책봉, 조공, 호족, 기미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연호(年號)란 중국에서 비롯되어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아시아의 군주국가에서 쓰던 기년법(紀年法)으로서, 어디(Where)라고 하는 공간 위의 모든 현상 물에 당연히 이름이 붙어 있어서 상호간의 구분을 가능케 하듯이, 언제(When)라는 눈에 보이지도 저장되지도 않는 시간도 특정한 사실을 기준으로해(年)를 정해서 이름을 붙인 것이 연호입니다.

 

즉 어떤 민족이나 국가가 건국한해를 기준으로 하면 건국(建國) 기년(紀年)이 되는데 우리의 단기(檀紀) 4333년 하는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올해가  단군이 나라를 세운해로부터 4333년 째가 된다는 것이지요.

 

중국에서는 본래 건국기년(建國紀年)으로 일관하여 그 왕조의 연도를 기록하지 않고 군주의 재위에 따라서 해를 세었는데, 처음에는 특별한 명칭의 연호는 없이, 군주가 죽고 새로운 군주가 상속하면 새 군주가 즉위한 이듬해를 그 원년(元年)으로 하여 원년, 2년, 3년 하는 식으로 기록하였고, 개국 군주의 건원이 최초의 연호가 됩니다.

 

그러다가 秦 漢대에 와서 명칭이 붙게 되는데 왕망은 신을 세우고 연호를 시건국(始建國)이라했고, 왕망의 신을 멸하고 후 한을 세운 유수는 뤄양에 도읍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고한 것 등이 이런 것입니다.

 

역대의 황제들은 연호를 사용하였고, 이름이 마음에 들지않거나 특별한 일이  있으면 바꾸기도(改元)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명, 청 시대에와서 1世 1元의 원칙이 정해져, 홍무제, 영락제, 건륭제라고 부르고 홍무 원년, 2년,3년, 이런 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지방의 제후들도 처음에는 각자의재위(在位)에 따라 연도를 기록하였으나, 중앙집권화가 이룩된 漢대 이후부터 황제만이 연호를 사용하고, 제후에 해당하는 왕은 연호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에 신속(臣屬)한 외국들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여야만 되었습니다. 이를 “정삭(正朔)을 받는다”고하여 중국의 황제로부터 연호가 붙은 달력을하사 받아 사용한다는 뜻으로,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면 중국 천자의 제후임을 인정하는것이 됩니다. 이를 책봉(冊封)이라고 하여 황제로부터 제후의 벼슬을 주고 받았다는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것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391년부터 사용한 영락(永樂)이 문헌상 최초이고, 신라에서 진흥왕·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 때까지는 신라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650년부터는 당나라의 연호 영휘(永徽)를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신라가 당나라의 제후국임을 인정했다는 것이지요.

 

태봉의 왕 궁예는 4번이나 연호를 바꾸었고,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도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거란과 여진의 침입을 받고 독자적인 연호는 사용하지 못하였으며, 특히 신하의 나라라고 믿었던 여진이 금을 세우고 군신관계로 자리가 바뀌자 묘청 등은 이를 참을 수 없다하여 황제라고 칭하고(稱帝) 연호를 사용(建元)할 것을 주장하다가 관철되지 못하자,평양에 대위국을 세우고, 천개(天開)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가 관군에 의해서 진압된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연호를 독자적으로 사용하면황제의 나라와 신속관계가 아니고, 대등한 관계이기 때문에 朝貢이나 사절을 보내지않아도 되지만, 황제(天子)의 연호를 사용하면 제후국으로서 해야 할 의무, 즉 조공을 보내고 사절을 파견하여 경조사에 임해야 하고, 새로이 왕이 즉위하거나 왕비를 세우면반드시 황제에게 알려서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절차만 복잡할 뿐 승인을 해주는것이 통상적인 예 입니다.

 

이런 것을 고명책인(誥命冊印)이라 하는데, 왕이나 왕비가된 것을 승인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서 이를 승인한다는 문서와 함께 금인(金印)을 내리는 것으로서, 고명이란 임명 사령장이고, 책인은 그 증표인 인장(圖章)을 말합니다.

 

이런 중국의 정책을 기미(羈 미)라 합니다. 羈는 말의 재갈을 의미하고 미는 소의고삐를 의미하는 것으로 요즘 말로하면 내치(內治)는 자치(自治)에  맡기고 외교나 국방 등의 중요한 일은 황제가 맡는다는 것이지요. 천자가 제후국에 대해서가지는 이러한 권리를 종주권(宗主權)이라고 합니다.

 

조공 품으로서는 진귀한 토산품을 비롯하여 소와 말 등의 가축과, 심할 때는 사람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조공의 반대급부(反對給付)로는 침략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침략을 당했을 때 구원해 주고, 약간의 물품을  회사(回賜)라는 이름으로 보내기도 하는데 이를 두고 하기 좋은말로 공무역이 행해졌다고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사절은 동지사(한해의 마무리),정조사(새해의 축하), 주청사(제후국으로서 부탁), 진하사(감사의 표시), 성절사(황제의생일축하), 천추사(황후의 생일축하) 등의 이름으로 정기적으로, 혹은 특별한 일이생겼을 때 보내게 되는데, 이를 때 마다 조공 품과 함께 황제에게 바치는 글(表文)을 올려야 합니다.

 

이 글을 작성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일은 그 왕조의 어떤 황제의 이름자가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이는 중국인들이 이름을 중시하여 신분이 낮은 사람이 신분이 높은 사람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제도고 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절대지위에 있는 황제의 이름은 누구도 부를 수도 쓸 수도 없고, 다만 죽은 사람인 경우, 꼭 써 야할 경우에는 반드시 휘(諱)자를 앞에 붙여야 합니다(避諱). 이것도 천자의 이름을 쓸때만 허용되고 일반 문서를 작성할 때는 절대로 써서는 안되고, 비슷한 글자로 대신 써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일연의삼국유사에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단군이라 했는데 요와 같은 시기다(..立都阿斯達開國號朝鮮 與高同時)에서 "여요동시"로 써야 될것을 堯자 대신에 高자를 쓴 것은 정종의 이름이 요이기 때문에 이를 피한것입니다.

 

그래서 대신부르고 쓸수 있는 이름으로 연호를 만들었다고 보여지며, 일반인들도 그 신분에 따라 이제도가 적용되는데 죽은 사람의 이름 앞에는 諱자를 붙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따로자(字), 아호(雅號)등이 있어서 그 용처에 따라 각기 사용하였고, 이러한 제도가우리나라에도 도입되어 중국보다 더 철저하게 지켜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이름은 외자가 보통이고 그것도 잘 쓰지 않는 글자를 선택하는 것이 통례입니다.일본은 지금도 세계 공통 연호인 AD(크리스트의 해)와 함께 헤이세이(平城?)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있는데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연호, 피휘와 함께 우리들을 또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시호(諡號)와 묘호(廟號)등의 다른 이름입니다. 시호(諡號)는황제나 왕을 비롯해서, 벼슬한 사람이나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 행적에따라 황제나 왕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말하는데,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시법(諡法: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는 방법)이 이루어진 것은 주 나라 주공(周公) 때부터라고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살펴보면 신라 법흥왕 1년(514)에 죽은부왕에게 지증(智證)의 증시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이나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시호도감(諡號都監)을 설치하고, 시호를 지어 올리는 것을신중하게 진행하여 시호가 정해지면, 종묘(宗廟)에 올렸기 때문에 묘호(廟號)라고도합니다. 세종이니, 선조니 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세종의 예를 들어보면 시호가世宗 莊憲 英文睿武 仁聖明孝大王으로서 세종 뒤에도 긴 글자가 나열되고, 휘는 李도 자를 元正이라고 불렀습니다. 일반 관리의 경우에는 봉상시(奉上寺)에서 주관하였습니다.시호에 사용하는 글자 수는 194자로 한정되었다가, 후에 새로 107자를 첨가하여 모두301자를 시호에 쓰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자주 사용된 글자는 문(文)·정(貞)·공(恭)·양(襄)·정(靖)·양(良)·효(孝)·충(忠)·장(莊)·안(安)·경(景)·장(章)·익(翼)·무(武)·경(敬)·화(和)·순(純)·영(英)등  120자 정도였고, 착한 행장이 없고 악하고 사나운 일만 있던 사람에게는양(煬)·황(荒)·혹(惑)·유(幽)·등의 글자를 썼다고 합니다.(한자 입력이 안된글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한글 그대로 썼으니 양해 하기 바랍니다)

중국은 인도의 카스트와 같은 절대불변의신분제도는 없었으나, 유교적인 혹은 중국적인 신분제도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했습니다.우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분이 명확하고 지배계급내에서 다시 수많은 분화가 이루어지는데 이들 지배계급을 통칭해서 당나라 때 까지는 호족이라 불렀고, 송 대부터는사대부라 하였으며, 명 청 시대에는 향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신라 말과 고려 때의 호족, 조선시대의 양반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하시면 도움이될 것입니다.

나. 수(隋 : 581∼618)의 성립과 멸망

(1) 유목민이 세운 화북왕조와 도교

6~7 세기의 중국후한의멸망 후 360 여 년 간의 분열시기였던 위진 남북조시대를 닫고 다시 중국을 하나의통치 지배구조로 바꾼 것은 수(隋)의 문제 양견(楊堅:文帝)으로서 명목상으로는 581년북주(北周)의 정제(靜帝)로부터 선양받아 나라를 개창하고(581), 건업에 도읍하고있던 남조(南朝)의 마지막 왕조 진(陳)을 멸망시켜 중국의 통일왕조를 이룩하였습니다.전국시대를 통일하였던 진(秦)이 3대 15년 만에 문을 닫은 것과 같이 혼란 기를 수습한수나라 역시 문제·양제(煬帝:廣)·공제(恭帝:侑)의 3대 38년이라는 단명 왕조였으며,천하통일을 이룬 후로 따지면 30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남북으로 갈라져있던 중국을 오래만에 하나의 판도에 넣어 진(秦)·한(漢)의 고대 통일국가를 재현하였고,뒤를 이은 당(唐)이 중국의 판도를 더욱 넓혀 대 통일을 이룩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는점에서 존립의의가 크다고 할수 있습니다.

선비(鮮卑)족의 탁발(拓拔)씨가세운 후위(북위:北魏:386∼534)는 8왕의 난 때 서진(西晉)으로부터  관작을받고 대왕(代王)으로 봉해졌다가(315), 그 후 전진(前秦)의 부견(符堅)과의 싸움에패하여 정권이 와해되었지만, 부견이 비수( 水)전투(283)에서 패한 기회를 이용하여탁발 규(拓跋珪: 道武帝)는 나라를 재건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하였습니다(386). 이어 내몽골 여러 부족을 평정하고 후연(後燕)을 격파, 허베이(河北)평야에 진출하여 국도를 평성(平城)에 정하고(398). 몽골에서 데려온 여러 유목 부족을해산시켜 부민(部民)을 군현(郡縣)의 호적에 편입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훈공이있는 부족 중의 유력자에게는 관작을 수여하고 한족(漢族)의 명문(名門)과 똑같이고급관리로 채용하여 귀족제의 기초를 이룩하였습니다. 그 후 남조(南朝)의 송(宋)을공략하여 허난(河南)지방의 땅을 빼앗았고, 이어서 하(夏)·북연(北燕)·북량(北凉)을멸망시킴으로써 5호 16국(五胡十六國)시대를 종식시켜 마침내 양쯔강 이북 지역의통일을 완성하였습니다(439)

이 시기에 황제(黃帝)와노자(老子)를 교조로 삼는 중국의 고유종교인 도교(道敎)가 성립하는데 종교로서의도교를 성립시킨 것은 구겸지(寇謙之)라고 합니다. 그는 숭산의 동굴에서 신선의도를 닦고 천신(天神)의 계시(啓示)를 깨달은 후, 새로이 즉위한 후위 황제를 도와태평진군(太平眞君)으로 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따둥(大同)으로 나와최호라는 한인(漢人)관료의 주선으로 태무제를 알현하고 그의 국사(國師)가 되어천사(天師)도로 개칭 혁신하였습니다. 농경에 바탕을 둔 중국인들에게는 잦은 외적의침입과 전란, 장엄하기 까지 한 황하의 범람, 한발과 재해(災害) 등에 항상 시달려야하기 때문에 인간의 길흉을 관장하는 절대자인 천제(天帝)에 귀의하여, 현세기복(祈福)을염원할 뿐 사후의 세계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늙지 않고 오래사는 방법을 얻기 위해웃지 못할 일들도 수없이 벌어졌습니다.

불로장생(不老長生)을근본으로 하는 도교는 중국의 고유종교로서, 노·장을 중심으로 한 도가(道家)사상과는구별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나라에 와서는 두 가지가 혼동되고, 우리의토착신앙과 밀착되어 어디까지가 노장사상이고 도교이며, 민간신앙인지 구분이 매우모호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종교로서의 도교의 교단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부적(符籍)이나 비방(秘方)의 영험을 믿고 이를 따르거나, 옥황(玉皇)상제를 받드는천제(天帝) 혹은 상제(上帝)로 모시는 교단은 무수히 많습니다. 다만 현세적인 삶의방법에서 도가와 도교는 유사한 점들이 많고, 우리의 신앙 원형(原形)에도 이런 것들이포함되었다는 것이지요. 도교는 후한(後漢)시대에 장도릉(張道陵)이 세웠다고 전하며

그의 도를 오두미(五斗米)도라고했는데, 부적(符籍)과 주술(呪術)로서 병을 치료해 주고 그 대가로 다섯 말(五斗)의쌀을 받으면, 그 쌀로 다른 병자를 구휼(救恤)해서 병을 고쳐주고 쌀 다섯 말을 받고이렇게 다단계식으로 되풀이하면서 그 문하생을 늘렸고, 삼국시대의 혼란 기에 교세가더욱 늘어나 3세기 진(晉)나라에 와서는 교단이 조직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반란의선두에 자주 보였기 때문에 미적(米賊)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초기의 도교는 종교라기보다도 일종의 교비(敎匪)에 지나지 않았다가, 일반 민중에서 상류 지식층 사이에널리 전파되자 체계적인 교리와 합리적인 학설·교양의 뒷받침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이와 같은 필요에 따라 3∼4세기경 학술적인 기초가 마련되어 하나의 종교로서 이론체계를갖추기 시작하였고, 5세기에 이르러 구겸지(寇謙之)가 불교의 자극을 받아 그 의례(儀禮)의측면을 대폭 채택하고 도교를 천사도(天師道)로 개칭함으로써 종교적인 교리와 조직이비로소 정비되었습니다.

도교에서 받드는신들은 매우 잡다(雜多)할 뿐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그것은 새로이 생기기도 하고없어지기도 하여 일관성이 없으나,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제사 지내는 신에는 옥황상제(玉皇上帝)가있고, 교조인 노자, 곧 노군(老君)과그 밖에도 북극성(北極星)인 현천상제(玄天上帝)를 비롯하여, 문창제군(文昌帝君)·후토(后土)·서낭신(城隍神)·조군(五祠중의 한 神)·화합신(和合神)·삼관(三官)·재신(財神)·개격신(開格神)·동악대제(東嶽大帝:泰山神)등 천상과 지상의 수많은 신들을 제사 지냈다고 합니다. 의식에 사용하는 경전을통틀어서 도장(道藏)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을 분류하면 신부(神符:부적)·옥결(玉訣:秘試)·영도(靈圖:鬼神像)·보록(譜錄:敎法의연혁)·계율(戒律:修道의 율법)·위의(威儀:齋戒 등의 의식)·방법(方法:귀신을 쫓는術策)·중술(衆術·鍊丹類)·기전(紀傳:老子 등의 전기)·찬송(讚頌:神典의 偈)·표주(表奏:귀신에게奏上하는 祈願文) 등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도교가 중국의 민족종교로자리잡는데 기여한 일등공신을 꼽는다면 명경(明鏡)이나 호부(護符)를 차고 다니면요괴(妖怪)를 피할 수 있다는 방술과, 장생불사(長生不死)에 이를 수 있다는 태식법(胎息法)과금단법, 방중술(房中術)을 꼽을 수 있습니다. 옥(玉)이나 금속으로된 팔찌, 귀걸이,목걸이나(명경), 종이에 붉은 물감으로 글씨도 그림도 아닌 것, 또는 형형색색으로된 실을 엮거나 감아서 만든 것(호부)을, 몸에 지니거나 필요한 곳에 부착함으로서질병과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방술의 믿음은 아직도 중국, 한국, 일본사람들에게그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고, 불사(不死)는 아니더라도 건강한 장수를 바라는 마음에서충화기(沖和氣)를 받아들여 호흡으로 단전(丹田)을 조절해서 장생하는 내단(內丹)수련인태식법 역시 복잡한 삶을 살아야 하는 현세 인에게도 공감을 얻어 여러 형태의 수련원이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것은 외단(外丹)이라는 금단(金丹)법과 회춘(回春)의 방도인 방중술로서,   불로장생(不老長生)을염원했던 진시황제도 방술을 믿어 엉뚱하게도 갱유(坑儒)의 화(禍)를 일으켰다는것은 전에도 이야기한 바 있었지만 그 후에도 중국 역대 제왕들이나 귀족들은 이두 가지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실천하였다가 낭패를 당한 경우가 부지기수라고합니다. 금단을 선단(仙丹)이라고도 하는데 주재료가 황화수은과 황금으로서, 문제는황화수은인 단사를 아홉 번 질(質)을 바꾸어서 얻는다고 하는데 단(丹)은 태워서오래가고, 금(金)은 뜨거운 불 속이나 더러운 흙 속에서도 없어지거나 변화되지 않음으로이 두 가지를 조제하여 금단을 만들어 복용하면 피의 원소를 변화시켜 몸이 쇠퇴하지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선약(?)을 도술(道術)로서 확립한 것이 진(晉)대의 갈홍(葛洪)이라는사람으로 그의 저서 포박자(抱朴子)에 제조방법, 종류, 효능 등에 관하여 상세히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금단도라는 이름으로 당(唐)대에 이르러서는 이를 믿은사람들이 많아졌고, 이 선약을 먹었다가 수은에 중독되어 목숨을 잃은 자가 부지기수였으며,그 가운데는 황제도 6명이나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권력과 부와 명예를지닌 남성들의 간절한 소망(?)은 미녀를 품에 안는 것인데(당시의 사정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정력(精力)이 영 말을 듣지 않으니 음기(陰氣)를 취해서 양기(養氣)를충만하게 하는 방법을 가르친 것을 방중술(房中術) 이라고 합니다. 그 과정이나 효능에대해서 여기서는 언급을 피하겠습니다.

다만 현재도 철없는남자 중에는 연령에 관계없이 정력에 좋다면 개구리 알 까지도 먹어 치운다니 고소를금할 수 없고, 비아그라(?)가 나오긴 했는데.... 그 제약의 목적이 일부 성 기능장애자를 위한 치료제라고는 하나, 피임제가 그러했듯이 그것과 관계없는 사람들이사용하여 제약회사의 돈벌이를 시키는 것 까지는 몰라도 지금 까지 지탱해온 가정,사회, 국가, 나아가서는 인류의 질서가 재편되는 고통이 따르지 않을 까 심히 걱정됩니다.도교에 관련된 이야기는 수없이 많으나, 앞으로 관련 내용이 나오면 그 이야기 사이에적도록 하고 다시 북위로 돌아 가겠습니다.

효문제(孝文帝:471-499)가즉위하자 국도를 뤄양(洛陽)으로 옮기고(494), 본격적으로 중국화를 추진하여 그들의복장과 말을 (胡服 胡語) 금하고 그들의 성(胡姓)을 한인(漢人)처럼 단성(單姓)으로고치게 하였으며, 황족인 탁발씨도 원씨(元氏)로 성(姓)을 고쳤습니다. 북방의 유목민들이스스로 중국의 농경민이 되겠다는 것이지요. 말과 풍속이 없어지면 민족도 사라진다는것을 몰랐을까요? 아니면 알고도 다른 선택의 방법이 없어서 일까요? 분명한 것은이후 세월이 지나 선비족은 중국에 동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효문제 자신은 영명한군주로서, 태후의 섭정기간을 빼고 친정(親政)시기는 10 여 년에 불과하나 그 짧은시기에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즉 호족의 세력을 누르고 농민을 왕실 지배하에두기 위해서 봉록제(俸祿制)·삼장제(三長制)·균전법(均田法) 등을 창시하여 북위의국력과 문화가 크게 발전시켰고, 특히 균전제는 수를 지나 당대에 와서 제도화되면서중국뿐만 아니라 주변국가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북방민족 고유의 소박상무(素朴尙武)의 기풍이 쇠퇴하고, 사치스럽고 문약(文弱)한경향이 일어나, 결국 서위(西魏)와 동위(東魏)로 분열되고, 동위는 550년 고환의아들 양(洋)에게 빼앗겨 북제(北齊)가 되었으며, 서위는 556년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宇文覺)에게빼앗겨 북주(北周)가 되었습니다.

북주(北周 : 557∼581)는서위의 공제(恭帝)를 제위에서 밀어내고 고대의 주(周)를 본받았다 해서 국호를 북주라하였는데,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이래로 한화(漢化)주의·문벌(文閥)주의를배척하고 질박강건한 유목민의 전통을 부활시켜 그들만으로 8주국(柱國) 12장군(將軍)이라는신흥 지배 귀족을 만들었으며, 제3대 무제(武帝) 때는 북제(北齊)를 평정하여 화북(華北)통일을 실현하고, 불교를 폐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등 국력을 길렀으나, 그러나 무제의아들 선제(宣帝)는 도락(道樂)에 빠져 재위 1년 만에 아들 정제에게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물어 앉게 되자 외척 양견은 전권을 전단하여, 수상인 상국(相國)이 되었다가 다시수왕(隋王)이 되고, 이에 북주의 일부 무인들 사이에는 반 양견운동도 일어났으나이를 진압하고, 상황으로 있던 선제가 죽자 아홉 살의 어린 정제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제위를 빼앗아 수(隋)를 세우고, 연호를 개황(開皇)으로 고쳤습니다(581) 이 때 그의나이 41세, 그 본거가 관중(關中)이 였기 때문에 수·당의 직접적인 모체(母體)가서위(西魏) 및 북주였다는 점에서 이들 왕조의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건국이듬해(582) 북주의 도읍지인 장안한성(長安漢城)의 남동쪽 용수원에 동서 18리,남북 15리의 계획적인 대흥성을 건립하였습니다.

양견이 북주의외척이라는 것은  양견의 처가 북주에서 왕실 다음 가는 주국(柱國)의 반열에있던 선비족 독고 신(獨孤信)의 딸이었고, 그의 처형(妻兄)은 북주 명제(明帝)의황후였으며, 양견 자신의 딸 여화는 북주 선제(宣帝)의 황후임과 동시에 정제(靜帝)의어머니였습니다. 양견의 아버지 양충은 북주 무제의 아버지 우문태를 보좌하여 그공으로 보륙여(普六茹)라는 성을 받았는데 성으로 보아서는 우문태와 같은 선비 족이라고합니다. 양견이 황제가 되고 나서는 한(漢)의 재상 양진의 후손이라고 칭하였으나,양충이 북주의 12대장군 출신으로서 수국공이되었고, 그의 일족이 선비족의 명문과혼인하여 북주의 호족이 된 것을 보면 그도 선비족 출신이라 설이 설득력을 가지고있습니다.

(2) 수의 문제(文帝) 고조(高祖) 양견(楊堅)

양견을 수나라의 고조(高祖)라고도하는데, ‘隋’란, 원래 양견이 수왕(隨王)이 되었던 데서 연유한 것으로서 隨자에책받침 변(착)이 있으면 뛴다는 뜻으로 왕조가 안정되지 않는다 해서 책받침을 떼고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隋로 하였다고 합니다. 문제는 587년 그의 보호국으로 있던후베이성의 강릉(江陵)에 도읍을 정하고, 남조(南朝) 양(梁)의 황실 자손이 다스리던후량(後梁)을 멸망시켰으며, 그의 차남인 진왕(晉王) 광(廣:煬帝)을 행군원수(行軍元帥)로삼아 남조의 진(陳)을 멸망시켜 통합함으로써, 삼국시대에서 다시 동진(東晉)의 남천(南遷)으로이어지는 370 여 년에 걸쳤던 분열의 종지부를 찍고 중국을 재통일 하였습니다(589).이때 한반도에서는 삼국의 정립, 항쟁의 시기로 고구려 평원왕 31년, 신라 진평왕 11년,백제 위덕왕 36년에 해당하는 해입니다. 문제(文帝)는 내정에 힘을 쏟아 재정적으로는긴축정책(緊縮政策)을 취하였으며, 오랫동안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문물의 통일을추진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장성(長城)을 축조하여 터키계(系) 돌궐(突厥)의 침입에대비하였으며, 598년(고구려 영양왕 9)에는 요서(遼西)를 침범한 고구려를 정벌하려하였으나 실패하였고, 황실에서는 문제의 장남 용(勇)이 황태자가 되었으나, 남조의진(陳)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둘째 아들 광이 형인 용을 대신해 즉위하여양제(煬帝)가 되었는데, 문제는 아들 양제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문제(文帝)는 비록 외손자로부터제위를 빼앗기는 했으나, 그의 치세는 창업의 군주로서 훌륭한 업적도 많이 남겼다고합니다. 먼저 그 자신이 북주의 12 장령(將領) 출신으로 선양(禪讓)의 형식은 취하였으나북주의 부흥을 두려워한 나머지 황족인 우문씨를 닥치는대로 살해하고, 그 비난을막고, 강력한 왕권을 뒤 받침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 군제를 개혁하여 이른바부병(府兵)제를 채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능한 관리를 채용하여 자기의 수족을 만들어야하는 필요에서 9품중정법(관인법)을 폐지하고 문벌 보다는 개인의 재능과 실력을중시한 선거(選擧)제를 채택하여, 시험을 치러 합격자에게 수재(秀才), 명경(明經),진사(進士) 등의 명칭을 허용하고 고급관리로 임명될 자격을 부여하였습니다. 이제도는 당을 거쳐 송대에 이르러 과거(科擧)제도로서 자리를 굳히고, 우리나라에도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리임용법은 일반민중과는거리가 멀었고, 민중과 황제 사이에 있는 권력층들 이를테면, 호족이라고 불리던귀족층의 지배에 있던 농민을 황제의 직속으로 끌여들이고 세수(稅收)를 늘리기 위해서북위에서 시작된 균전법(均田法)을 확대하여 관전을 농민에게 할당(割當)하였으며,염세와 주세를 폐지하고 화폐제도를 통일하였으며, 각처에 의창(義倉)을 설립하여재앙과 전쟁으로부터 농민들의 몰락을 방지한 것도 이 때 처음 시작한 것입니다.북주의법률을 참작하여 개황 원년에 개황률을, 다음해(582)에 개황령을 반포하여 전국에획일적으로 준수토록 하였습니다.

(3) 수의 양제(煬帝)

문제(文帝)는 독고황후와의사이에 북주의 선제에게 출가한 딸 외에 다섯 아들을 두었다고 합니다. 장자 용(勇)을황태자로 책봉하고 차남 광(廣)을 진(秦)왕으로, 그 아래 세아들도 왕으로 봉하였습니다.그런데 진왕 양광은 두뇌가 명석하고, 학문과 재능에도 뛰어 났으며, 풍채 또한 당당하였다고합니다. 태자 용이 놀기와 여색을 좋아하여 모후로부터 미움을 사고 있는 것을 안광은 더욱 근신하면서 모후의 신임을 얻고자 노력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측근을동원하여 황태자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거짓 밀고케 하여, 태자 용은 서인으로강등되어 쫓겨나고 그 자리에 광이 차지하여 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태자가된 광의 심정이 불안한 것도 마찬가지여서 언제 부황의 마음이 바뀔지 모르고, 쫓겨난태자가 다시 부황의 신임을 회복하지나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황제의 위에 오르기전 까지는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인수 4년(604) 문제가 원인불명으로 갑자기 사망하고 태자 광이 즉위하니 이가 수의 양제 였고, 이 과정에서형제 4명 모두가 죽거나, 서인으로 강등시켰다고 합니다.

토용(춤추는 무희)그의시호(諡號) 양제(煬帝)란 음학(淫虐)한 황제라는 뜻으로 형제를 핍박하고 백성을혹사하였으며, 사치와 낭비를 좋아했다 해서 역사시대의 중국황제에게는 전무 후무한시호가 그에게 붙여진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실행하는데 박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부황 못지 않게 창의력도 있었으며, 실천가로서의 열의와 힘도 아울러 가졌던 것으로전해지고 있습니다. 대운하(大運河)의 개착은 진시황제의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 역사상가장 규모가 큰 토목공사였습니다. 중국의 지형은 서고동저의 형으로 강이 서쪽에서동으로 흘러 예로부터 동서를 연결하는 수운이 발달한 반면, 남북방향으로는 회하(淮河)수계의 위하(衛河) 등이 국지적으로 남서∼북동 또는 북서∼남동 방향의 수로로 이용되었을뿐이 였습니다.

화북이 중국의 정치중심지라면 강남은 기후가 온난하고 산물이 풍부한 경제의 중심지였는데, 특히 남북조시대남조의 중심지가 되면서 개발이 촉진되어 생산과 인구가 비약적으로 늘어나 중국의곡창 구실을 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을 재통일한 문제(文帝)로서도 이 강남에 눈을돌리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래서 뤄양을 제2의 국도(陪都)로 삼고 남북을 연결하는운하 개착에 착수하여 개황4년(584)에 광통거를 만들어 위수에서 산서성의 동부에있는 동관(潼關)까지 연결하고, 다시 동관에서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 장안까지 연결하도록하였습니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는 다시 뤄양의 서원에서 황하로 들어간 다음회수로 통하는 통제거(通濟渠)를 만들기 위해 즉위 다음해인 대업 원년(605)에 화남과화북의 백성 백만 명을 동원하여 운하를 파게 하였습니다. 같은 해에 다시 회남의백성 십여만 명을 동원하여 산양에서 장수성의 양쯔까지 운하를 파게 하였습니다.통제거는 너비 40보 양쪽 언덕에는 어도라 하여 황제의 행차 전용도로를 만들고 언덕을보호하기 위하여 버들을 심었다고 합니다.  다시 대업 4년(608)에는 하북 지방의주민 백여만 명을 동원하여 황하에서 북방의 탁군(현 北京)까지 연결하는 영제거(永濟渠)를파게 하였을 때에는 남자만으로는 인력이 부족해 여자까지 동원시켰다고 합니다.양제가 이렇게 영제거를 급하게 판 이유는 고구려를 원정하기 위해서 였다고 하며,그의 재세기간 3차례나 고구려를 침범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이로 인해서 수가 망하는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운하의 개통으로강남의 미곡이 능률적이고도 확실하게 장안과 뤼양까지 운반되었으며, 이를 통하여남북간에 문물의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명실상부한 통일제국의 꿈을 실현시키게되었습니다. 당(唐)대에 기록된 史書에는 운하의 개착 목적이 양제의 호유(豪遊)를위한 것이라 비난했지만 중국의 역대 왕조가 이 운하를 통하여 발전하였으며, 지금도베이징[北京]에서 항저우[杭州]에 이르는 허베이[河北]·산둥[山東]·장쑤[江蘇]·저장[浙江]등 4개 성(省)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원래의 길이가 1,782km였으나 1958년 대규모의 복구·확장 공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1,515 km로 단축되었고,베이징에서 항저우까지 2,000∼4,000 t급의 선박이 취항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양제는 자기의 위용을과시하기 위해서 진시황처럼 순행을 자주 했다고 하는데 첫 번째 순행은 통제거와회수에서 장강에 이르는 두 운하가 개통된 605년 가을, 이 운하로 양주까지 갔다고합니다. 이 때, 그의 배는 용주(龍舟)라 하여 높이 45척의 4층으로 되었고, 길이가2천 척에 달하였으며, 황후를 비롯하여 따르는 배가 수천척. 배를 끄는 사람이 8만명,그 선열(船列)의 길이가 90킬로 미터에 달하였다고 하는데, 과장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의기록이라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어도 초 호화판이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같습니다.

다시 대업 3년(607)에는북변(北邊)을 순행하여 중화 천자의 위세를 과시하였는데, 먼저 하북의 정남(丁男)을동원하여 태행산을 뚫어 병주로 가는 치도를 만들고, 그 치도를 따라 위린에 머물면서탁군(北京)으로 가기 위해서 먼저 돌궐의 추장 계민가한에게 통보하여 위린으로 오게하였으며, 이들에게 연회를 배풀고 많은 비단을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8월에 위린을떠나 새외(塞外)로 나갔을 때 따르는 병사가 50 만, 말이 십만 필, 양제가 계민가한의파오(包)에 이르자, 토곡혼(吐谷渾)을 비롯한 다른 서역 27개국의 왕 또는 사신이와서 양제에게 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양제는 토곡혼 등에 군을 설치하고, 서역을평정함에 따라 이제는 발길을 동쪽으로 돌려 고구려 원정을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의 사정을 삼국사기에는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양왕 18년(607)에 "수양제는 처음으로 계민의장막에 행차하였다(初煬帝之啓民帳也) (이 때)우리의 사자가 계민의 처소에 있었는데(我使者在啓民所)계민은 숨기지 못하여(사신을) 양제가 그를 보게 되었다(啓民不敢隱與之見帝), 황문시랑배구는 양제에게 말하기를(黃門侍郞裴矩說帝曰), 고구려는 본래 기자가 봉한 땅으로(高句麗本箕子所封之地), 한나라와 진나라가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漢晉皆爲郡縣).오늘에 와서는 신(신하의 나라)이 아니고(今乃不臣), 다른 땅이 되어 떨어졌습니다(別爲異域).선제(문제)는 이를 정벌코자한지 오래되었고(先帝欲征之久矣), 양양(한왕:문제의4자)이 군사를 내었으나 못나서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但揚諒不肖師出無功), 페하의시기를 당하여 어찌 이를 취하여 관대(황제의 상징)의 지경으로 취하여 쓰지 않고(當陛下之時安可不取使冠帶之境), 만맥(오랑캐)의 향(땅)으로 삼고 따르는 것이 옳겠습니까?(遂爲蠻貊之鄕乎).지금 그 사자(고구려사자)는 계민이 나라를 들어 (수나라에)따르는 것을 보고(今其使者親見啓民擧國從化),두려워 하고 있으니(可因其恐懼), 이를 위협하여 입조케 해야합니다. (脅使入朝).제(양제)가 이를 따라(帝從之), 우홍에게 칙(조칙:왕제의 명)을 펴 令을 내려 말하기를(勅牛弘宣旨曰), 짐은 계민이 성심으로 나라를 받들어(朕以啓民誠心奉國), 그래서친히 그의 장막에 이르렀다(왔다) (故親至其帳), 명년에는 반드시 (내가)탁군으로가니(明年當往 郡), 너는(고구려사신) 돌아가서 너의 왕에게 말하여(爾還日語爾王),마땅히 일찍 (찾아)와서 조알(入朝) 하여 의심이 없도록 하라(宜早來朝勿自疑懼).존육지례를 계민과 같이 한다(할 것이다) (存育之禮當如啓民). 만약 입조치 않으면(苟或不朝),장차 계민을 거느리고 가서 (너의)국토를 칠 것이다 (將帥啓民往巡彼土). 왕(영양왕)은번례파궐을 두려워 했다((王懼藩禮頗闕). 제(양제)는 그를(고구려)를 토벌하려 하였다.(帝將討之).계민은 돌궐의 가한(추장)이다(啓民突厥可汗也). (夏五月遣師百濟...)"

이것은 고구려와수가 전쟁을 하게 된 동기와 원인을 기록한 것으로, 양제가 돌궐추장 계민의 장막에갔을 때, 거기서 고구려의 사신이 있는 것을 보았고, 양제가 생각하기에는 고구려와돌궐이 동맹을 하여 수에 대항하면, 통일천자의 위엄은 물론이거니와 수의 존립조차위험하다고 판단하여 고구려가 스스로 항복해 오도록 협박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구려가이에 응하지 않자 드디어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미그 전에 양국간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문제 때부터 두 나라는 충돌하고있었습니다.

 다. 수와 고구려 싸움

(1) 유목민 돌궐

이야기를 거슬러올라가 보면, 중국을 통일한 양광(문제)에게는 아직도 풀어야 할 두 가지 숙제가남아 있었습니다. 그 첫 째는 수 백년간 분열로 이어온 중국을 새로운 통일제국으로서내치를 다지는 일이고, 둘째는 북변을 튼튼히 하여 유목민의 침입으로부터 중원을지키는 일입니다. 내치를 다지기 위해서 건국 초부터 잇달은 개혁을 서둘러, 화폐를통일하고 균전제와 부병제, 선거제(과거제)를 실시하여 황제권에 도전할 수 있는유력한 세력인 호족을 압박하여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였고, 북주의 황족이었던 우문씨일가를 닥치는대로 살육하여 부흥의 씨앗을 송두리째 잘라버렸습니다. 이런 것들은그의 통치권 내에 있기 때문에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가진 황제가 의도적으로 추진한다면일시적으로는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長城 밖에서 활동하는 유목민에 대해서는 그명령이 미치지를 못하니 시시로 변화는 상황에 대처하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중국의 史書에 등장하는유목민을 살펴보면, 진 한 시대의 匈奴를 비롯해서, 월지, 선비, 갈, 강, 저, 동호,숙신, 읍루, 말갈, 물길, 돌궐, 유연, 위구르, 거란, 몽골, 탕구트, 여진(만주) 등무수히 많습니다. 이 가운데 월지는 스키타이계로서 아리아족으로 보고 있으며, 강과저, 탕구트는 티베트계, 숙신, 읍루, 말갈, 물길, 여진은 퉁구스계, 흉노, 갈, 강,선비, 유연, 거란은 몽골계, 돌궐, 위구르는 투르크계로 보고 있지만 어떤것도 확실한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들의 공통점은 유목이 주업이고, 부족단위로 생활하며, 일정한거처가 없고, 흉급하고 난폭하며, 약탈도 생존의 방법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정착과농경이 기본인 중국인 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중국의 역대왕조는 이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항상 화전(和戰) 양면술을 써게 되는데, 회유책으로생필품을 공급해주고, 귀화를 권유하거나, 책봉(冊封)의 형식을 취하여 동맹을 맺기도하고, 황녀를 보내어 그들의 추장과 혼인시키고 인척을 만들기도 했는데 전한 원제때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간 왕소군의 이야기가 이런 류에 속합니다. 강경책으로는장성을 쌓아 이들의 침입을 막았는데 만리장성도 이래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다만이들을 힘으로 정복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으니 그들의 주거지가 일정치 않아원정군을 보내면 멀리 도망 갔다가 돌아서면 다시 나타나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그러나 유목민이란 그들의 관습에 따라 상속의 원칙이 없이, 추장이 죽고 나면 세력이강한 자가 추장이 되므로 그들간에 끊임없는 투쟁과 분열을 자초합니다. 그래서 세력이약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정복하기도 하는데 유목민이 정복에 의해서 멸망한 예는 그의없고 대부분 자체 분열로 인해서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수나라 때 북변에서활약한 것이 투르크계의 돌궐이 였는데 한 때는 그 세력이 매우 강성해서 서로는카스피해에서 동으로는 만주에 이르기 까지 강대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수 문제가 즉위  했을 때는 이들이 4국으로 분열하여 서로 다투고 있었고이를 이간과 회유로 교묘히 이용하여 중국의 세력권으로 편입한 것이 계민가한이라는돌궐의 추장이 였습니다. 그 계민가한과 고구려가 연맹한다면 수로서는 큰 위협이되겠지요. 여기에서 수는 고구려 원정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서게 됩니다.

 (2) 살수 대첩

백두산(장백산) 천지살수대첩(薩水大捷)이라고국사교과서에 기록된 내용은, 당나라 태종 때 장손무기 위징 등에 의해서 편찬된수서(隋의 歷史)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자료를 인용한 것인데 그 요지는 대략다음과 같습니다. 수(隋)나라가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여 중국을 통일하고있을 때,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의 북부에 거대한 왕국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수가중국을 통일하고, 북변을 위협하던 유목민 돌궐이 유목민 특유의 자체 분열하는 기회를잘 이용하여 힘을 잃자 고구려로서는 중국의 세력이 반드시 동쪽으로 신장(伸長)해올 것을 예견하여 그에 대비하고 있다가, 영양왕은  말갈족(靺鞨族)을 거느리고수나라의 요서(遼西)지방을 공격하였는데(598), 이것은 수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전략상의 요지를 선점(先占)하기 위한 작전이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에 당시 수나라의문제(文帝)는 아들인 한왕 양(諒)을 행군원수로 삼아 수륙 30만을 보내어 고구려를치게하였습니다. 육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요하까지 왔으나 식량의 보급이 여의치못하였고, 역병이 속출하여 사기를 잃었으며, 수군은 황해를 건너 평양성에 육박하였으나폭풍을 만나 배가 부서지고 병사들이 죽어 그 피해가 막대하였습니다. 이 때 고구려에서도싸움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화의를 요청하자 겨우 체면을 세우고 군사를돌렸는데 이것을 임유관의 싸움이라고 합니다(598) 문제가 죽고 양제가 즉위하자앞서 이야기 한데로 돌궐과의 동맹을 두려워하여 대대적인 고구려 원정에 나서게됩니다.

수양제는 612년1월 113만 3800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였는데, 그 규모에 대해서 사서(史書)에는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황하에서 탁군까지 영제거를 개통하여 보급로를 확보하고,고구려에게 입공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자, 군사를 탁군에 모아 좌우 각각 12군으로편성하고, 매군에 상장 아장 각 1 명과, 기병을 40대로 하여 하루에 한 대씩 출발시켰는데40일간이 걸렸고, 그 대열이 9백리에 뻗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급과 잡무를 담당할강소의 백성이 군대수 만큼 동원되었다고 하니 원정군은 호왈 250만이나 되었다고합니다. 한편 내호아가 거느린 수군(水軍)은 바다를 건너 대동강(大同江)으로 쳐들어와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에게 대패(大敗)하였고,

한편 양제가 친히거느린 육군의 1개 부대는 고구려의 요동성(遼東城)을 포위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못하게 되자, 초조한 수군(隋軍)은 별동대(別動隊) 30만 5000명을 압록강 서쪽에집결시켜 평양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들의 계략을 눈치챈 고구려의 명장을지문덕(乙支文德)의 유도작전에 걸려 들어 압록강·살수를 건너 평양성 부근까지깊숙이 쳐들어왔습니다.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수군에게 거짓 항복하여 적진(敵陣)에들어가 그들의 허실(虛實)을 탐지하고 돌아온 뒤 그의 유도작전에 걸려들어 평양성부근까지 침입한 수군의 대장인 우중문(于仲文)에게 1편의 5시(詩)를 지어 보내 그의어리석음을 비꼬았습니다. 그 내용은 "그대의 귀신같은 계책은 천문을 다하였고(神策完天文),기막힌 헤아림은 지리를 통달하였으니(妙算窮地理), 싸움 마다 승리하여 이미 그공이 높거늘(戰勝攻旣高), 만족함을 알았으면  거치기를 바라노라(知足願云止)라고사서에는 적고 있습니다.

이에 수나라 군대는고구려에게 속은 줄 알고 황급히 다시 북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으나, 을지문덕은수군이 살수를 반쯤 건널 때를 기다렸다가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살수싸움에서수군이 크게 패하여,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450리를 하루 낮과 밤사이에 도망하였으나살아 돌아간 자는 2천 수백명에 불과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수양제는 중국의 땅이넓고 인구가 많아 많은 물자와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이점만을 믿었으나, 거리가멀어 군량(軍糧) 공급이 곤란할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으며, 또 고구려의 장병(將兵)이모두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강병(强兵)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모든 요새가험고(險固)하여 쉽사리 공취(攻取)할 수 없음을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수양제는수륙(水陸)양면에서 모두 패전했으므로 부득이 철군했는데, 이듬해에도 다시 대군을이끌고 고구려에 침입하였고, 그러나 고구려의 저항은 여전히 견고하여 그 중의 요동성(遼東城)도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본국에서 군량수송의 책임을 맡고 있던 양현감이 반란이일어 켰다는 급보가 왔으므로 서둘러 철퇴하였다가, 반란을 평정하고 제3차 고구려원정길에 나섰다가 다시 실패하여 수나라는 결국 멸망하였습니다.

라. 수의 멸망

611∼614년 돌궐과손을 잡을 우려가 있었던 고구려에 3차에 걸쳐 대군을 파견하여 원정을 시도하였으나실패하였고, 중국 통일 후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대운하를 파는 등 너무 서둘러 대대적인토목공사와 원정을 속행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든 면에서 과중한 부담으로 고통을받았습니다. 특히 영제거와 고구려 원정 기지에 가까웠던 산둥[山東] 지방 백성들은그 고통이 더욱 심하였고, 게다가 이 지방은 옛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이어지는나라의 영토여서 북주를 멸망케 한 수왕조에 대한 반감도 높아서, 반란사건도 이지역에서 가장 많이 일어났습니다. 613년 제2차 고구려 원정 도중에 일어났던 양현감(楊玄感)의반란은 2개월 만에 진압되었으나, 그 후 수나라는 본격적인 반란기에 들어갔습니다.

반란의 공포에 싸잡힌양제는 친위대도 수도 대흥(장안)도 믿을 수가 없어서, 두 손자를 수도 대흥과 뤄양에남아 있게 하고, 자신은 장손인 연왕 담과 친척 전부를 이끌고 대업 12년(616) 강도(江都:揚州)로들어가 이궁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것은 사실상의 도피였습니다. 이는 화북지방을잃더라도 강남을 차지하여 최소의 영토와 지위를 보존하겠다는 속셈이었겠지요. 강도에서도사치스러운 생활은 계속되고, 이 때를 놓칠세라 전국에서는 군웅이 할거하니 그 수가120명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양현감과 같이 반란을 주도했다가, 반란이실패하여 달아나 행방을 감추었던 이밀은 낙구창을 점령하고 위공으로 추대되어 이름을떨치고 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617년 타이위안[太原:山西省] 유수(留守) 이연(李淵)은내란이 격화하여 양제가 있던 강도가 고립되자, 타이위안의 호족들을 모아 군사를일으켜 장안(長安)을 탈취하고 양제의 손자인 유(侑:恭帝)를 옹립하였습니다. 그러나618년 양제가 강도에서 우문화급(宇文化及)에 의하여 살해되자, 이연이 공제로부터양위받아 스스로 즉위, 당조(唐朝)를 창건함으로써 수나라는 멸망하였고, 당나라가세워지게 되었습니다(618)

그 후에도 양제의총애를 받던 왕세충(王世充)은 공제의 동생인 월왕(越王)을 옹립하여, 수나라의 대통을잇게 하였으나, 619년 그를 폐위하고 스스로 즉위, 정국(鄭國)을 세움으로써 수나라의황실은 그 맥이 3대 38년 만에 완전히 끊겼습니다.

다음 이야기 - 동아시아 세계의 성립(2). 당의 통일제국과주변국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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