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스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떠난 3월의 불교문화체험기행. 15일 아침 7시, 일기예보는 영하의 날씨와 찬바람을 예고했지만, 순례자들에겐 오히려 신선한 공기였다.
1940년 음력 2월 스무나흗날 아침. 공양상을 물리친 용성스님이 제자 동헌스님(東軒完圭)을 불렀다.
“나 떠난 후에 조선은 반드시 독립할 것인즉 그때 세상사람들에게 이 용성이 당부하는 세간5계를 반드시 지켜주도록 부탁하노라. 첫째, 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하시오. 둘째, 목숨을 바쳐 부모에 효도하시오. 셋째, 목숨을 바쳐 스승을 공경하시오. 넷째, 목숨을 바쳐 친구를 믿고 사귀시오. 다섯째, 목숨을 바쳐 전쟁에는 지혜롭게 이기시오.”
용성스님의 유훈을 화두처럼 가슴에 품고 조계사 앞을 출발했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조계사에는 용성스님이 스리랑카 다르마파라스님에게서 받은 부처님진신사리 1과를 봉안한 7층석탑이 있다. 다르마파라스님은 스리랑카의 마하보디소사이어티(대각회)를 이끌었던 불교개혁운동가로, 용성스님도 이 스님의 영향을 받았다.
불교문화체험기행의 첫 목적지는 독립기념관이다. 충남 천안시 목천면 흑성산 남쪽 기슭 12만여평의 대지에 자리잡은 독립기념관. 3월의 독립운동가로 지정된 용성스님 특별전이 열리는 곳은 제2전시관인 근대민족운동관. 80여점의 사진과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용성스님의 손때가 묻은 주장자와 요령 금강저 발우 염주가 눈길을 끌었다.
<대방광불화엄경>을 한글로 번역한 육필원고, 원고지 칸마다 또박또박 써내려간 글씨는 올곧은 수행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팔양경> 번역원고의 표지에는 ‘총무국 도서과 출판허가’란 붉은 색 도장이 찍혀 있다. 투옥과 식민지 백성의 치욕같은 검열을 겪으면서도 놓지 않았던 한글경전 보급의 염원에 옷깃을 여민다.
사리함과 사리에 이르러서는 법신으로 나투셔 사자후를 하고 계신 용성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하라고 이른 유훈을 다시 듣는다. ‘목숨을 바쳐 통일을 이루시오.’
모례원은 아도화상(阿道和尙 또는 我道)이 처음 신라에 불교를 전한 성지이다. 용성스님이 성지로 가꿔 보존하라고 당부한 우리나라 불교 초전지 가운데 한 곳이며, 용성스님이 23세에 초견성하고 오도송을 읊은 곳이다.
“금오산엔 천년의 달이 떠 있고
낙동강엔 파도가 만리나 출렁이는구나
저 고기잡이 배는 어디로 가는가
옛날과 마찬가지로 갈대밭에서 쉬는구나”
金烏千秋月 洛東萬里波
漁舟何處去 依舊宿蘆花
상남도 구미시 도개면 도개2리 일대. 고구려에서 온 아도화상이 큰 부자이던 모례의 집에 숨어들어 포교활동을 하던 신라불교 초전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키 큰 감나무가 유난히 많은 전형적인 농가의 모습이다. 야트막한 야산과 논밭이 펼쳐진 사이에 살림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을 입구에 아무렇게나 세워진 이끼 낀 돌 하나가 범상치 않은 곳임을 암시해준다.
신라 눌지왕(417~458년) 때의 일이다. 아도화상은 본래 고구려 사람이었는데 7세 때 이곳 모례장자네 집에 와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양 천마리와 소 천마리를 길러 모례를 놀라게 하였다. 지금도 이 마을엔 양천골 우천골(우실)이라는 지명을 쓰고 있다.
아도는 모례의 시주를 받아 도리사를 이룩하였다. 이 마을에는 당시 모례의 집에 있었던 샘과 마을 어귀의 입석이 현존한다. 모례장자의 샘은 거칠게 다듬은 직사각형의 석재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짜맞춘 특이한 모양이다. 지금도 마을사람들에게 식수를 제공한다.
이곳에서 차편으로 15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태조산 도리사는 신라최초의 사찰이다. 도리사에는 아도화상의 자취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아도화상이 참선을 했던 좌선대와 아도화상 사적비가 소나무숲 사이에 그 기상을 그대로 내뿜으며 순례자를 오래도록 붙잡는다. 극락전 세존사리탑 화엄석탑은 도리사에 들러서 꼭 봐야 할 성보문화재이다. 특히 세존사리탑에서는 1977년 금동육각 사리함과 원추형 사리가 발견됐으며, 사리는 적멸보궁에 새로 사리탑을 조성해 봉안하고 있다.
서울 봉익동 대각사는 용성스님이 대각교사상을 펼친 터전이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아 용성스님의 불교대중화의 뜻을 살필 수 있다. 용성스님의 뜻은 오늘에도 이어져 도문스님을 중심으로 연꽃처럼 피어나고 있다.
글=정성운 사진=고영배 기자
*모례원 성역화 어떻게
-도문스님·유훈실현회 중심 추진-
- 2007년까지 사찰 박물관등 건립 -
신라불교 초전지 모례원의 성역화는 용성스님의 “신라불교 초전법륜성지를 잘 가꾸라”는 유훈에 따라 용성스님의 손상좌인 도문스님과 유훈실현후원회(회장 한수승행)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97년 구미시에서 한국교원대학 정영호 박사팀에 의뢰해 ‘신라불교 초전지역 학술조사’를 실시, 모례정과 모례장자 집터, 입석 등을 발견해 위치를 확인했다.
도문스님은 모례원에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을 보존하고 주변 일대를 정비·정화하여 역사교육의 살아있는 현장으로 제공한다는 목적으로 도개면 일대 3천7백여평의 대지를 매입해 ‘신라불교 초전법륜지 도개부곡 아도모례원’을 세우고 불사에 들어갔다. 이미 모례원 담장 벽면을 영산회상도와 아도화상·모례장자도 등 21점의 벽화로 장엄해 이곳이 신라불교 초전성지임을 알리고 있다.
또한 폐교 예정인 이 마을의 송도초등학교와 인근 부지 매입도 계속 추진되고 있다. 이후 2007년까지 성지의 위엄과 신성성을 갖춘 사찰과 전시관 도서관 박물관 등을 세워 교육 문화의 도량으로 성역화하며, 각종 시설물은 1천4백여년 전의 신라건물의 원형을 찾아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총사업비 43억원이 들어가는 대작불사이다.
한편 구미시도 모례장자 집터 일대를 국가지정 사적지로 지정, 보존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백용성스님 누구인가
3·1운동 민족대표
찬불가·경전번역 앞장
선농불교·대중불교 제창
3·1 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선각자이며 최초의 서양식 찬불가를 작곡해 보급시킨 작곡가, 불경번역과 30여권의 불교서적을 저술한 불교 이론가이기도 했던 백용성선사(1864∼1940).
7세부터 한학을 익히기 시작한 스님은 꿈에 부처님을 뵌 것이 인연이 돼 16세 때인 1879년, 경남 합천 해인사 극락암으로 출가해 화월화상을 은사로 불법수도의 길에 들어섰다. 화두(話頭) 참구에 정진한 스님은 23세에 깨달음을 얻고 전국에서 제방 납자들과 더불어 안거(安居)와 운수(雲水) 생활을 했다.
1911년, 스님이 47세 되던 해엔 종로 봉익동에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해 도심에서 선불교를 선양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만해스님을 비롯한 우국지사들과 조국의 새 날을 도모하던 스님은 1919년, 만해스님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해 3·1 독립운동에 동참했다. 이 일로 인해 3년간의 옥고를 치른 용성스님은 출옥후에 경전 번역의 실무 조직체인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고 역경 작업에 힘을 쏟았다. 한편 전통 선 부흥을 위해 망월사에서 시작한 만일참선 결사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은 그의 사상의 요체인 대각(大覺)운동 즉 깨달음에 대한 지향이 그 중심을 이뤘다.
1926년, 당시 불교가 승려들의 파계로 인해 사원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음을 개탄한 스님은 승려 계율 파괴의 요체인 대처식육(帶妻食肉) 금지를 요청하는 건백서(建白書)를 2회에 걸쳐 당국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런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자 대각교를 더욱 확대시켜 ‘대각교중앙본부’라는 명칭으로 불경 번역사업, 일요학교 개설, 불교혁신을 위한 방법 모색 등에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세인의 관심을 끈 것은 선농(禪農)불교의 제창과 실천이었다. 정부는 스님의 독립운동에 대한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공로훈장(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첫댓글 좋은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