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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법인(三法印)에 관하여 >
삼법인은 불교의 교의를 요약하여 제시한 기치 또는 슬로건으로, 초기불교의 기본적 입장을 특징적으로 보여 주는 근본불교의 근본 교의이고 핵심적 사상이다. 여기서 ‘법(法)’이란 산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를 의역한 말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진리라는 뜻이고, ‘인(印)’이란 도장 찍는다는 말에서 파생된 인신(印信), 표장(標章)이라는 말로서 일정불변하는 진리 혹은 틀림없음을 증명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법인(法印)은 ‘법의 표지’ 또는 ‘불법(佛法)의 특징’이라 직설할 수도 있지만, 본래의 뜻은 진실하고 허망하지 않은 진리란 말이다.
처음에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세 가지를 가리켰다. 이 최초의 삼법인의 각각은 간단히 무상(無常). 무아(無我). 고(苦)라고도 한다.
후에는 일체개고를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대체하여(무상과 무아의 개념 속에 이미 고(苦)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제행무상 · 제법무아 · 열반적정을 삼법인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또는 최초의 삼법인에 열반적정을 추가하여 일체개고 · 제행무상 · 제법무아 · 열반적정을 사법인(四法印)이라고도 한다.
남방 상좌부 불교에서는 삼법인을 삼특상이라고 한다.
삼특상(三特相)이란 띠락까나(ti-lakkhaṇa)의 번역어로서, 세 가지 보편적 속성이나 특징이란 뜻이다. 영어로는 three charatecteristics of existence라고 한다. 이 삼특상은 오온(五蘊)과 모든 유위법(有爲法)의 보편적 속성으로 통찰지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위빠사나를 통하여 이러한 삼특상을 반드시 철견해야만 한다.
(1) 무상(無相 anicca): 무상으로 번역되는 아니짜(anica)는 무상함, 덧없음, 또는 항상 하지 않음이란 뜻으로 모든 유위법(諸行)이 변하며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다. 영역은 impermanence.
(2) 고(苦 dukkha): 고로 번역되는 둑카(dukkha)란 불만스러움, 괴로움, 고통으로 모든 윤회하는 존재의 보편적 특성은 고(苦)라는 것, 즉 존재의 전반적 불만족성을 나태나는 말이다. 영역은 suffering, pain, ill, unsatisfaction.
(3) 무아(無我 anatta): 무아로 번역되는 아나따(anatta)는 항상하는 자아가 없고 실재하지 않음을 가리킨다. 영역은 not-self, not-ego, egolessness, impersonality.
빨리 경전의 도처에서 부처님은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a)를 설하셨는데, 특히 이는 대부분 오온(五蘊)의 무상· 고· 무아의 문맥에서 나타나며 오온으로 대표되는 모든 개념적 존재를 분석하고 분해하고 해체해서 드러나는 유위법이 무상· 고· 무아임을 철견할 때 해탈열반은 실현된다고 설하신다. 그래서 유위법(諸行)의 무상을 꿰뚫은 해탈을 무상해탈(無相解脫)이라 하고, 고를 꿰뚫어 실현한 해탈을 무원해탈(無願解脫)이라 하고, 무아를 꿰뚫어서 실현한 해탈을 공해탈(空解脫)이라 부른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삼법인(三法印)이라는 용어는 빨리 경전과 주석서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법인(法印)이라는 말은 산스끄리뜨어 다르마무드라(dharma-mudra)의 번역어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율장(律藏)에서 제일 먼저 사용한 단어인 듯하고, 이를 나중에 대승불교에서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다.
설일체유부는 인도의 부파불교 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독특한 종지를 내세워 대승불교와 각축했던 교파였는데, 이들은 이론투쟁을 많이 겪었던 만큼 자신과 남들과의 차이점을 분명히 할 필요성에서 법의 도장[法印]과 같은 확고한 잣대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삼법인은 상좌부 불교의 삼특상과 비교해 볼 때 수행에 관한 강한 메시지보다는 불교 전반의 가장 큰 특징을 천명하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 제행무상 (諸行無常)>
제행(諸行, sarva samskara)에서, 제(諸, sarva)는 ‘일체’ 또는 ‘모든’의 뜻이다. 그리고 행(行)은 ‘함께’라는 의미의 접두사 sam이라는 말과 kara라는 ‘만든다’ ‘행한다’는 의미가 합쳐진 말로서, ‘함께 모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 어떤 존재를 만들고, 어떤 일을 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아무 원인과 조건 없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하는 행위나 존재가 아니라 어떤 원인과 조건에 따라 만들어진 존재[爲作]나 어떤 이유나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행(行)’은 ‘만들어진 모든 존재’ 혹은 ‘형성된 모든 것들’이란 의미로서의 ‘존재’란 뜻에 더 가깝다.
[상카라(saṅkhāra)는 행(行), 의도적 행위나 작용, 형성된 것(有爲法), 업형성력 등으로 해석된다. 상카라는 빨리 성전에서 크게 다음 네 가지 의미로 나타난다.
(1)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행개고(諸行皆苦)의 문맥에서 제행으로 나타나는데 항상 복수로 쓰인다. 이 경우의 제행은 유위법(有爲法 sankhata-dhamma)을 뜻한다. 즉 열반을 제외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유위법을 행이라고 불렀다. 이 경우에 행은 ‘형성된 것’에 가까운 뜻이다. 그 외 수명의 상카라(ayu-saṅkhāra), 존재의 상카라(bhava - saṅkhāra), 생명의 상카라(jivita-saṅkhāra) 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경우도 ‘형성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영역은 formations.
(2) 오온(五蘊)의 네 번째인 행온(行蘊)으로 나타난다. 이 경우에도 항상 복수로 쓰인다. 오온 가운데서 색(色)은 아비담마의 물질법이고 수(受),상(想),행(行)은 아비담마의 심소법(心所法)이고, 식(識)은 아비담마의 심법(心法)이다. 그러므로 오온에서의 행(行)은 상좌부 아비담마의 52가지 심소법 가운데서 느낌(受)과 인식(想)을 제외한 나머지 심소법 모두를 뜻하는데, 감각접촉, 의도, 주의, 집중, 의욕, 선한 심리현상들, 불선한 심리현상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행은 ‘심리현상’로 이해해야 한다. 영역은 mental activities.
(3) 12연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 즉 무명연행(無明緣行)으로 나타난다. 12연기에서의 행도 항상 복수로 나타나는데「청정도론」에서는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a - abhisaṅkhāra),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 흔들림 없는 행위’로 설명이 되듯이 ‘업 지음’ ‘업 형성력’ ‘의도적 행위’로 해석된다. 이 경우의 상카라는 업(kamma)이라는 뜻으로 쓰였고, 이는 의도(cetanā)와 동의어로 간주한다. 영역은 kamma-formations, volitional activities.
(4)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행위인 신행(身行), 구행(口行), 의행(意行)으로 나타난다. 「청정도론」에서는 이 삼행(三行)도 12연기의 행처럼 업형성력, 즉 의도적 행위로 이해한다. 그래서 신행, 구행, 의행은 각각 신업, 구업, 의업의 삼업(三業)과 일치한다. 영역은 activity.]
그리고 무상은 anitya를 번역한 말이고, ‘항상(恒常)’이라는 nitya의 반대말이므로 ‘무상’이란 글자 그대로 ‘항상함이 없다’, ‘변화하고 변천한다.’는 말로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멸하며 시간적 지속성이 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제행무상’이란 “모든 존재는 항상(恒常)함이 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생멸변화하여 변천해 가며, 잠시도 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마치 꿈이나 환영이나 허깨비처럼 실체가 없는 것을 말한다. 즉,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매순간마다 생멸 · 변화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항상불변한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의 실상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일체는 무상한데 사람은 상(常, 항상)을 바란다. 거기에 모순이 있고 고(苦)가 있다. 불교 경전에 "무상한 까닭에 고인 것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과 같이 무상은 고의 전제이다.
또 현실을 그와 같이 인식하는 것을 무상관(無常觀)이라고 하며, 무상의 덧없음은 몽환포영로전(夢幻泡影露電: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에 비유되어 불교적 인생관의 특색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무상관은 단순히 비관적인 덧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인간은 지위나 명예에 집착하는 탐욕을 버리고, 오늘 하루의 소중한 생명을 방일함이 없이 정진노력하려는 정신적인 결의가 생겨나게 되며, 이러한 것이 무상관의 참된 뜻이다.
그런데 삼법인 중에서 제행무상을 첫 번째로 설하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중생들의 전도몽상(잘못된 생각)을 깨버리기 위해서이다. 즉, 이 세상에 항상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이 세상에 영원한 실체가 있다는 영원주의에 빠져 있어서 이런 전도몽상을 깨뜨리지 않고는 더 이상의 논리적 전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상을 삼법인 중에 맨 앞에 제시한 것이다.
무상이란 영원함(항상함)이 없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변한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 모든 생각,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연기법에 의해 모두가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 때문에 제행은 <인연화합에 의해 이루어진 모든 행위(제행)와 존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건과 존재들은 무수한 인과 연들에 의해 현재의 모습을 가진다는 것이 연기설의 핵심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항상 하지 못하며, 무상하고, 고정불변의 독립된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인연화합으로 존재하는데, 조건으로 발생된 것은 영원할 수가 없다. 조건이 해체되면 실체라고 했던 것도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립된 실체가 있을 수 없고, 그래서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인연에 의해서 생겨진 모든 사물은 한바탕 꿈과 같고, 환상과 같으며, 물위의 거품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풀잎의 이슬 같고, 번갯불과 같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제행무상은 불교적 존재론인 동시에 연기법에 대한 시간적인 해석을 의미한다.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는 연기법의 시간적인 관점에서 인과 연에 의해 잠시 현재의 모습을 잠정적으로 띠지만 그것이 고정적일 수 없으며, 더더욱 영원할 수는 없고, 무상해서 변한다는 말이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됐을 때 얼음과 물은 별개가 아니다. 얼음과 물은 다만 변화했을 뿐이며 다른 것이 아니라는 원리, 이것이 ‘불이(不二)’이다. 그 모양과 형태가 다르므로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되고 물이 변해서 얼음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은 변화의 측면을 ‘무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무상은 고정됨이 없음을 말하는데, 만약 고정돼 있다면 어떻게 물이 얼음이 될 수 있으며, 어린이가 어른이 될 수가 있고, 나무가 자랄 수 있겠는가. 그러니 고정돼 있다는 것은 바로 죽은 세상일 것이니, 그런 이치란 있을 수가 없다. 이 사회가 점점 발전하는 것도 무상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인간의 감정을 예로 들어보자. 사람이 일순간 아주 기분 나쁜 일이 있어서 화가 불끈 솟았다 하자. 화가 났을 땐 분명 화가 나 있었으나 상대방이 사과를 해서 기분을 되돌리고 나면 어느 새 화가 사라지고 만다. 이럴 때 화의 실체란 무엇인가. 화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슬픔, 불행뿐만 아니라 기쁨, 행복 같은 감정도 어느 순간 있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고 만다. 그렇게도 사랑했던 사람과 결혼했지만 어느새 사랑이 식어버려 헤어지게 되는 것도 무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세상 모든 것은 항상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 모든 존재는 예외 없이 생주이멸(生住異滅)한다. 즉, 만들어진 모든 것은 잠시 머물렀다가 변화해 결국 소멸되고 만다는 말이다. 우주도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 별이 생기면 일정 기간 동안 머물렀다가 무너져 공으로 돌아가고, 우주도 마찬가지다.
불교에서 항상 하는 유일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무상의 이치는 불교의 기준이요, 근거요, 법인(法印)인데, 절대 독존의 변치 않는 유일신은 바로 이 무상의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
불교에서 ‘법(法)’이라고 하면 ‘진리’ 혹은 ‘진리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외에도 ‘존재’ 혹은 ‘일체’, ‘모든 존재’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예를 들면, 삼법인에서 ‘법’은 진리를 의미하며, 여기 제법무아의 제법(諸法)에서 ‘법’은 진리라는 뜻이 아니라 존재, 일체, 혹은 모든 존재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법은 다르마(dharma, 팔리어로는 dhamma)의 번역으로써 ‘지킨다, 의지한다’는 뜻이다. 다르마라는 말은 인도에서 일반적으로 보편적인 진리 또는 종교적 규범(종교), 사회적 규범(법률과 관습, 제도), 행위적 규범(윤리, 도덕, 의무) 등의 뜻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는 선 또는 정의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들이 힌두교라고 부르는 종교에 대하여 인도인들은 단지 다르마라고만 말한다. 때로는 힌두 다르마(힌두의 법)라고 부른다. 이 경우 다르마는 종교라고 해석해도 되며, 힌두 다르마는 동시에 사회적 규범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사회적 규범이란 <마누법전>과 기타의 법전에서 규정된 여러 가지 조항이다. 이 법전들은 ‘카스트와 인생의 주기에 관한 법’이 기본으로 되어 있다. 카스트에 관한 법은 소속된 카스트에 따른 규정으로서 그것은 또한 구성원의 행위규범, 즉 의무와 권리이기도 하다. 카스트에 관계되는 다르마와 같이 법전류에는 불살생 또는 자민(慈愍)과 보시 등 힌두교도로서(인도적인 표현으로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보편적 도덕이 가르쳐져 있다. 인도사람(힌두교도)의 인생관은 이 두 가지가 합해져서 기본을 이룬다. 이처럼 여러 측면을 가진 다르마는 근원을 신들이 계시한 <베다성전>에 두고 있다. 그것은 ‘영원불변의 법(사나 다나 다르마)’이므로 지켜야 하는 ‘정의’이며, 또한 그것을 지킴으로써 사후에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불교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힌두교와 같은 의미로 ‘다르마’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불교는 힌두교도의 입장에서 보면 ‘붓다 다르마’, 즉 부처님의 법으로써 부처님을 통하여 계시된 진리이다. 그러나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힌두의 법이 카스트와 기타의 규제를 포함하여 그것을 통해 실천된 인도적인 법에 있는 것에 대해, 불교의 법은 카스트를 초월한 보편적인 법이며 인류보편의 진리이다. 다시 말해 힌두의 법, 카스트의 법이 세속적. 세간적인 법인데 반하여, 불교의 법은 출세간적 법이라고 자부되어 왔다. 불교가 사성평등을 설한 근거도 여기에 있다. 즉 출세간법으로서의 평등성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은 불교가 인도라는 틀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종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법’의 정의를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법은 ① 세존에 의하여 잘 설해졌으며, ② (듣는 자가) 스스로 볼 수 있는 것, ③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왔으며, ④ 와서 보라는 것. ⑤ (이상, 즉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 ⑥ 지자(智者)가 스스로 깨닫는 것(自內證)이다.
부처님에 의하여 잘 설해진 법이란 ‘처음도 좋고, 중간에도 좋으며, 마지막에도 좋은’ 의미와 표현형식을 구비하고 있어서 완전원만하고 청정한 것을 말한다. 이 같은 정의는 ‘깨달은 진리- 설해진 가르침- 깨달음에로 인도할 것’이라고 하는 원환(圓環)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편, <법집론주>(필리성전에 대한 주석서)에 의하면, 불교의 법에는 4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① 교법(敎法) : 배워서 그것을 통달하는 것이 원래 뜻이다. 이는 깨달음과 가르침이라는 불교의 기본 구조를 나타내는 법에 해당한다. 또한 그것은 종교로서의 불교 전체를 가르키는 것으로써 ‘성스러운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② 인(因) : 연기의 법, 인과의 이치를 뜻한다. 그것은 불교가 주장하는 진리, 즉 ‘참다운 것’이다.
③ 덕(德) : 가치있는 것, 필요한 것, 착한 것 또는 도덕적 규범 등을 뜻한다. 불교는 보리열반으로 인도하는 바른 행위, 실천수행해야 할 덕목을 가르치고 있으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불살생, 자비, 보시 등 힌두교가 가르치는 것과 공통된 것도 많다(덕에 반대되는 법은 비법이라고 불리우며, 그것은 불선이고 잘못된 것이며, 나쁜 과보를 가져오게 된다.) 덕은 이와 같이 착하고 가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원래의 뜻이지만 인도 원어로 말하면 일반적으로 ‘성질, 속성’을 지칭한다. 속성은 실체에 부속되어 있으나, 그것을 통하여 실체를 나타내는 특색도 있다. 즉, 어떤 실체 그 자체를 나타내고 있는 것과 같은 성질, 말하자면 그것을 보존하고 있는 것, 받치고 있는 것이 다르마이다. 다르마의 일반적 용법으로는 이 성질. 속성이라고 하는 것이 본뜻에 가깝다.
불전 중에서는 이 용법은 수없이 많다. 예를 들어 ‘생멸법(生滅法)’하면 ‘태어나면 멸한다는 성질’을 의미한다. 이 경우 선악과 미추는 관계없다. 이 성질이라는 의미와 관련하여 발달된 것이 앞에서 말한 ‘물질’ 또는 ‘현상’이라고 하는 법의 의미다.
④ 무아(無我) : 불교에서는 의식의 대상이 된, 일정한 내용에 따르는 개념을 법이라고 한다. 또한 모든 현상이 인연에 의하여 생기하는 것(연기)이며, 끊임없이 생멸변화하는 것(무상), 변화지 않는 실체가 없는 것(무아)를 가르친다. 이는 성질, 그 같은 도리, 진리라는 의미로 귀결된다.
법이란 말을 현대적 용법으로 정리한다면, ① 가르침(교법, 종교) ② 진리(깨달음의 내용) ③ 성질 특히 착한 성질(공덕) ④ 존재(유형 무형의, 심적.물적인 제 현상, 개념) 그리고 ⑤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법에 대하여 : 부처님이 열반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4가지 큰 교법에 대해 말씀하셨다.
당신이 멸도한 후, 비구들 중 누군가로부터 “이것은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이것은 많은 장로들에게서 들었다”, “이것은 여러 비구에게서 들었다”, “이것은 어떤 한 비구에게서 들었다”고 하는 경우, 그것을 법과 율에 의거해 자세히 살핀 다음 합당하면 받들고, 합당하지 않으면 배척하라고 하셨다.
무아(無我)는 산스크리트어 아나트만 혹은 니르아트만의 번역어로 비아(非我)라고도 한다. 불교의 근본 교의 중 하나로 처음에는 자신이나 자기 소유물을 자기 것으로서 집착함을 금하는 실천적인 입장에서 주장되었다. 후에는 영원독립이며 주재적인 자아("아트만")의 실재를 주장하는 브라만교의 교의에 반대하여, 사람은 5온(五蘊)의 집합이요, 생명의 주체는 없고 또한 모든 존재는 인연으로써 생긴 것일 뿐이고, ‘나’라는 존재 또한 무수한 인과 연들에 의한 작용일 뿐이며, 고정적인 본성은 없다고 하는 무아설(無我說)을 주장하게 되었다.
아뜨만(atman)은 힌두교와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자아(自我), 개아(個我), 진아(眞我)로 만물 속에 내재하는 영묘한 힘을 뜻한다. 인도의 철학자들은 이 말을 둘러싸고 많은 학설을 전개하였다. 우파니샤드나 베단타학파에서는 이것을 보편적 실재라고 생각하여 세계원리인 브라만(梵)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하였으며, 현실의 나인 아뜨만은 브라만과 하나가 됨[梵我一如]으로써 최고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상키아 학파에서는 아트만을 순수 정신원리인 푸루샤(purua)로 보고, 물질적 원리인 프라크리띠(prakti)와 대치시킴으로써 세계의 생성을 설명한다. 이들은 이러한 불변하는 아뜨만이 매생을 재육화 한다고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힌두교의 윤회는 이 아뜨만의 전변이지만 불교의 윤회는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이다.
무아(無我)란 이론적으로는 고정적 · 불변적인 실체로서의 아("我 · 아트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타마붓다가 말한 무아는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것, 즉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제법(諸法)을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가리킨다. 즉, 아("我 · 아트만")라고 하는 실체가 존재하는가. 어떤가 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고타마에게 있어서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무아는 일반적으로 제법무아라는 명제로서 설명되었고, 불교의 근본진리라고 하는 연기설은 이 무아설을 기초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불교로서의 생명은 무아의 실천이라든가 무아행이라고 하는 실천면에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성이 없고(無我)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無常) 까닭에 우리들의 수양이나 노력에 의해서 역경을 극복하여 더욱 향상할 수가 있다. 따라서 불교의 이상인 열반은 이 무아행이 철저하게 이루어진 경지를 말한다.
그리고 무아의 <내가 없다>는 것에서 ‘나’라는 것은 ‘나’ 개인 뿐만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 사물까지, 이 세상의 일체 모든 존재를 의미하는데, 이 우주법계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생각하는 본질적인 자아도 사실은 실체가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사람이나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도 무아이며, 나무나 풀이나 돌이나 지구, 태양, 우주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닌 무아이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 사건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일과 사람들의 감정들까지 모든 것이 고정적인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제법무아는 제행무상이 ‘나(我)’에게 적용됐을 때 깨닫게 되는 경지로서 연기법에 대한 공간적인 해석을 의미한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저 홀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 다른 모든 존재들과의 상호연관과 연기적인 도움을 통해서만 그 자리에 그렇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연기법의 공간적인 관점을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며 공(空)한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즉, 제법무아는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존재는 그것이 고정된 실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인연 따라 연기되어진 존재로서 인연가합(因緣假合)으로 있는 것이란 의미다.
예를 들어 여기에 자전거가 한 대 있다고 하자.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자전거이지만 연기법에서는 이 또한 무아라고 한다. 즉 ‘자전거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전거는 인연 따라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어서 공(空)한 것이란 의미다.
시간적으로 보더라도 자전거는 언젠가는 녹슬어 사라질 것이며, 공간적으로 보더라도 바퀴와 체인과 의자와 바퀴살과 모든 부속품들을 해체한다면 그 순간 자전거는 자전거로서의 기능과 이름을 잃게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자전거가 아니라 각각의 부속품들일 뿐이다. ‘자전거’라는 이름을 가지기 위해서는 각각의 부속품들이 인연 따라 조화롭게 화합해 서로를 붙잡아주고 서로를 의지해 줌으로써 각각이 있어야 할 곳에 서로에 의존해 있어야 자전거라 할 수 있다.
상호의존 혹은 상의상관(相依相關)이라는 연기적인 모임이 없고서는 자전거가 생겨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내 앞의 자전거는 있기는 있되 실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적으로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일러 무아 혹은 공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인연가합이란 인연 따라 합쳐진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임시로 잠깐 거짓으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제법무아는 어느 하나 남김없이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거짓으로 잠시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이기에 인연이 다하면 흩어질 수밖에 없는 연기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설하고 있다.
인간 존재 또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노병사를 막을 수 없다. ‘나’라는 존재를 놓고 보더라도 어느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외모도 변하고, 성격도 변하며, 능력도 변하고, 체질도 변하고, 생각도 끊임없이 변해가다가 결국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 특정한 모습을 정해 놓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려 한다.
그래서 여기에 이렇게 분명히 ‘나’라는 존재가 살아 움직이고 있음에도 왜 무아라고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그리고 앞서 설명했듯이 일체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가 인연이 다하면 소멸할 수밖에 없으며, 항상 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할 뿐이라고 했는데, 항상 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면 지금의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하지만 우리는 잠시 인연 따라 이런 모습으로, 이런 성격으로, 이렇게 생긴 몸뚱이를 받아 이번 생에 나왔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 나의 모습이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고,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해가는 억겁의 세월 가운데 한 찰나의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의 실체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실체란 없고, 일체가 무아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나의 실체로 집착하고, 그런 아집으로 말미암아 대립, 분열 등의 괴로운 문제를 발생시키고, 덧없이 자기파멸을 초래하고 있다. 이 같은 우려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일체는 무상할 뿐만 아니라 무아라 하신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무아설은 나의 절대적인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나를 찾기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봐야 한다. 더구나 부처님은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自燈明 法燈明)」라고 하시고,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自歸依 法歸依)」라는 말씀을 강조하시며, 나의 주인은 ‘나’이며, 나를 제어하는 것은 곧 ‘나’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럴 때의 ‘나’란 무엇인가. 이럴 때의 ‘나’는 그야말로 나에게 내재해 있는 진짜 모습인 진아(眞我), 즉 나의 본성, 혹은 불성(佛性)을 말하는 것이다. 겉으로 나타난 탐욕에 젖어 있는 비아(非我)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제법무아에서 고타마 붓다가 말한 무아는 <있다. 없다>는 것에 치우친 이론이 아니다. 붓다가 말한 무아란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 제법(諸法)을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가리킨다. 즉, 아(我)라고 하는 실체가 존재하는가 어떤가 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고타마 붓다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무아는 일반적으로 제법무아라는 명제로서 설명됐고, 불교의 근본진리라고 하는 연기설은 이 무아설을 기초로 조직됐다. 따라서 불교에서 무아설의 생명은 무아의 실천이라든가 무아행이라고 하는 실천면에 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부와 명예, 권력 등을 가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으나 모든 것이 변하는 제행무상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항상 할 수 없고, 언젠가는 사그라질 그런 무상한 것이고, 제법무아의 관점에서 볼 때, 그렇게 애쓰며 모으고 만든 내 것이란 것도 사실은 그 실체가 없는 거짓된 모습에 불과하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나와 나의 모든 것은 모두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이어서 그 인연이 다하면 없어지고 만다. 인연을 모르고 연기의 법칙을 모르기 때문에 나와 내 것이라고 하는 집착에 벗어나지 못하고 참된 나(眞我)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참다운 자아를 탐구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는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모든 집착을 끊는 곳에 진정한 자아가 있다는 것을 증득해야 깨들음에 이를 수 있다.
무아라고 하여도 상식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나’또는 ‘자기’와 같은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한 생을 살다가 죽는 ‘나’는 인정한다. 단지 이와 같은 존재를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여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일상적으로 말하는 ‘나’란 비실체적적인 몇 가지 요소들이 모여서 일시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임시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가짜 나(假我)’라고 부른다. 이 ‘가짜 나, 임시적인 나’의 존재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열반적정(涅槃寂靜)>
초기경전에서는 열반을 “탐욕의 사라짐, 분노의 사라짐, 어리석음의 사라짐, 이것을 이름하여 열반이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초기경전에 의하면 당시의 열반설에서는 색계정(色界定)이나 무색계정(無色界定) 등의 여러 가지 선정의 상태를 이상적인 열반이라고 간주하거나, 또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욕락에 빠지는 세속적인 쾌락이 열반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었던 듯하다. 석존이 수행시절에 가르침을 받은 두 선인은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定)이라고 하는 뛰어난 무색계정이 열반의 이상이라고 하였는데, 석존은 곧바로 그들과 동일한 선정에 들어갈 수 있었어도 여전히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뛰어난 무색계정도 실제로는 이상적인 열반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여기고 이 두 스승으로부터 떠났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6년간의 고행 후에 열반은 신체를 혹사하여 고통스럽게 하는 고행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이 고행도 포기하였다. 그리고 고행이나 욕락과 같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이 아닌 중도적인 생활과 심신상태 아래에서 세계 인생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여 불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열반은 단순한 고행이나 선정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와 인생의 진리에 관한 올바른 지혜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열반의 상태는 고요하고 괴로움이 없이 편안한 것으로, 이를 적정(寂靜)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경전에서 열반이란 말을 멸(滅), 적(寂), 불사(不死), 최상의 안락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최상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열반은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이자 최고의 이상이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결국 이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열반적정인은 불교의 이상관이라고 할 수 있다.
열반적정에서 열반과 적정은 동의어다. 열반(涅槃)은 범어 니르바나(Nirvana)를 음역한 것으로 타오르던 불길을 ‘확 불어서 꺼뜨린 상태’를 의미하며, 소위 탐.진.치라는 인간의 마음을 더럽히는 삼독심(三毒心)에 의한 번뇌의 불이 꺼지고 아무 것에도 어지럽혀지지 않은 편안한 해탈의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적정(寂靜)은 마음에 번뇌가 없고, 몸에 괴로움이 사라진 편안한 모양, 즉 해탈과 열반의 경지를 말한다. 따라서 열반적정은 일체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인 이상경을 강조하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중생들에게는 끊임없이 내면에 탐진치 삼독심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탐욕의 불길이 끊이지 않고 활활 타오르고 있으며, 조금만 참지 못할 일이 생겨도 성냄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그리고 그 근본에는 어리석음이라는 무지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우리 인생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이 불길은 끊임없이 타오를지언정 단 한 순간도 꺼지지 않고 있다. 이 탐진치 삼독심의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일시에 ‘확 불어서 꺼뜨린 상태’가 바로 열반적정이다.
모든 탐욕이 사라지고, 성냄이 사라지고, 어리석음이 사라진다면 그 상태는 과연 어떤 것일까. 그 곳에는 안온한 평화와 고요가 저절로 피어날 것이다. 다툼이 없는 완전한 무쟁(無諍), 분별이 없는 완전한 고요, 나뉨이 없는 완전한 평화의 상태가 될 것이다. 이처럼 아무런 괴로움도 없고, 투쟁도 없고, 분별도 없는 완전한 고요의 상태, 이것이 바로 열반적정이다.
부처님이 생존했던 시기의 인도에서는 각종 인생관이 존재해 제각기 이상세계란 것이 제시되고 있었고, 그 이상세계가 단순한 관념으로만 끝나거나 혹은 사후에 있어서만 달성이 가능한 것이었던 데 비해, 부처님이 제시한 적정한 열반은 올바른 지혜에 의해서 현세에 실현되는 것이었다.
일찍이 붓다께서는 6년간의 고행 후에 얻은 결론은, 열반은 신체를 혹사해 고통스럽게 하는 고행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체험했다. 그리고 고행이나 욕락과 같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이 아닌 중용적인 생활과 심신상태 아래에서 인생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열반의 경지에 도달해 불타가 됐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열반은 단순한 고행이나 선정(禪定)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와 인생의 진리에 관한 올바른 지혜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열반의 상태는 고요하고 괴로움이 없이 편안한 것으로, 이를 적정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열반은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이자 최고의 이상이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결국 이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열반적정은 불교의 이상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최상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은 입멸에 드시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말씀하셨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 열반경의 4구게>. 즉, “모든 현상은 한시도 고정됨이 없이 변한다는 것이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이니, 이 생멸에 집착함을 놓으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 생멸이 생멸 아님을 깨달으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가 된다.
결국에는 수행을 통해 제행무상을 깨닫고 제법무아의 존재를 앎으로써 고통과 괴로움을 모두 초월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곧 열반적정이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두 가지 원리를 적용해 현실을 현실대로 깨닫고,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해탈이라는 궁극적 경지로 나아간다는 원리이다.
열반의 상태에 관하여 한 경에서는 비유하여, ‘마치 마른 나뭇단을 많이 넣고 매우 뜨겁게 달군 큰 가마에서 불타고 있던 사람이 천신만고 끝에 거기에서 벗어나 시원한 장소로 도망쳐 나왔을 때, 그가 느끼는 최상의 안락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열반(涅槃)으로 음역한 nibbāna는 ‘불어서 꺼진’의 뜻이다. 경전에서는 탐욕(탐, rāga), 성냄(진, dosa), 어리석음(치, moha)의 불이 완전히 꺼진 것을 열반이라고 설명한다. 이 열반은 진정한 불교신자라면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지복이자 최고선이다. 이 열반은 출세간이며, 형성된 것을 완전히 벗어난 형성되지 않은 것이며, 고요함을 특징으로 하는 하나의 본성을 가졌다. 비록 열반은 본성에 있어서는 하나지만, 남음(upādi)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측면에서 보면 두 가지가 있다.
① 유여의 열반(有餘依涅槃 saupādisesa-nibbāna): ‘받은 것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는 뜻이며, 아라한의 경우 번뇌는 완전히 소멸하였지만 그의 수명이 남아 있는 한 과거 집착의 산물인 오온(五蘊)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② 무여의 열반(無餘依涅槃 anupādisesa-nibbāna): ‘남음이 없는 열반’이라는 뜻이며 아라한의 수명이 다하고 입멸(入滅)을 하게 되면 이러한 오온(五蘊)까지도 완전히 멸하기 때문에 이런 열반을 완전한 열반(般涅槃 parinibbāna)이라고 한다.
< 일체개고(一切皆苦) >
고(苦)는 괴로움을 뜻하는 불교 용어이다.
고타마 붓다는 29세에 왕자의 위치와 처자까지 버리고 출가하였으나 그가 출가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일체개고(모든 것을 괴로움이다), 즉 "인생은 고(苦)이다"라고 하는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즉, 현실세계의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직시한 고타마 붓다가 얻은 것은, 모든 것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아니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뜻대로 하고 싶다는 자기모순적인 욕망이 인간의 내면에 감춰져 있다는 것이었다.
고타마 붓다는 이와 같이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고(苦)라고 하며, 자기모순적인 욕망이야말로 고의 원인이라고 밝혀내었다. 일체개고의 현실인식은 현실 또는 존재 그 자체에 고(苦)라고 하는 고정된 성질 또는 실체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며, 또한 고의 원인이 현실 또는 존재 그 자체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시시각각 흘러가고 변화하고 있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없는데(제행무상) 인간은 항상 불변을 바라고, 또 모든 것은 무엇 하나 고정적 실체인 것은 없는데도(제법무아) 그것을 실체라고 고집하려 하는 데에 고의 원인이 있다고 고타마 붓다는 말하였다.
따라서 올바른 지혜(반야 · 보리)를 통해서, 이러한 자기모순에 빠진 자기 자신을 반성하며 욕망을 버리고 집착에서 벗어날 때야말로 아무 것에도 어지럽혀지지 않은 이상적인 열반적정의 경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삼법인 또는 사법인이라는 교의 속에서 나타나는 불교의 기본적 입장이다.
삼법인은 각 법인마다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연결된 하나의 실천이론으로 볼 수도 있다. 제행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하면 제법이 무아하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된다.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하하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하면 우리는 욕망과 집착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모든 욕망과 번뇌를 떠날 때 우리는 열반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상은 주로 다음 블로그 > amisan511, 글쓴이 : 아미산에서 인용하였고, <불교사상의 이해> (동국대 불교교재편찬위원회), 불교시대사, 기타 자료에 있는 일부 내용을 추가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