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배현석 본고에 대한 comment를 원하시는 분은 hsb2004@naver.com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神學(Theology): 신학은 하나님에 의해 가르쳐지고, 하나님을 가르치며,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救援받은 온 聖徒들이 해야만 하는 것이다. 重生(rebirth)한 사람(聖徒)은 聖靈의 照明하심으로 救贖史的 觀點과 洞察力(insight)으로 聖經을 읽을 때, 三位一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 뜻에 順從할 能力을 소유하게 된다.
우리교회가 소속되어져있는 교단의 정식명칭은 대한예수교장로회이다. 1910년 시작된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를 모체로 1912년 창립되었다. 본 교단은 칼빈주의에 입각한 개혁파 신학(Reformed Theology)을 근본 신앙으로 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 문답을 교리적 표준으로 삼아, 장로교 헌법의 정치원리를 가지며 교회의 전통과 권위 및 질서를 지켜오고 있다. 본 교단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로 칭하고, 영어명칭은 ‘The General Assembly of Presbyterian Church in Korea'로 표기한다.
우리교단의 교리적 표준은, 칼빈주의에 입각한 개혁파 신학(Reformed Theology)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 문답서와 장로교 헌법의 정치원리에 의한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칼빈주의에 입각한 개혁파 신학과 장로교 헌법의 정치원리를 잘 이해하고 이에 합당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칼빈주의에 입각한 개혁파 신학의 핵심이 잘 요약된 “칼빈주의 5대 요점(강령)”을 살펴본다.
칼빈주의 신학과 알미니안주의 신학을 비교하여 살펴본다. 1.聖經神學은 하나님의 계시를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바르게 파악하는 것이고, 敎義學(組織神學 : 主旨 즉, 주장되는 要旨를 體系的 또는 組織的으로 硏究 敍述하는 學問이며 眞理로서 共認된 종교(信仰)상의 가르침)은 성경신학에서 연구하여 놓은 것을 종합하여 교회를 위한 敎義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둘은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의 관계이며 보완관계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즉, 개혁된 사람은 날마다 개혁되어야 하며, 개혁은 날마다 말씀으로 진보함을 의미한다. 즉, 날마다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개혁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성경신학과 교의학이 필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계에서는 이 기초를 소홀히 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교회가 연합해야 한다는 경향이다. 신학의 노선이 선명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연합은 위험하다. 신학적 입장을 먼저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는 범위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므로 형식적 신앙 즉,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또는 가시적 교회를 세우고 형식적 신자들이 모이기만 하면(형식은 갖추고 있으므로, 외관으로는 알 수 없는 상태이며, 판단 할 수도 없고, 판단을 하여서도 아니 됨.), 그 자체가 하나님을 올바로 안다고(요17:3) 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그 열매가 있다고(갈5:22)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자신을 말씀으로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열매가 없다면, 과연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맞는가? 고민하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말씀의 기반에 서있지 않으면, 이에 대한 분별도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즉, 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경건의 자세로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가는 방향(direction)과 이 방향에 의하여 제한받는 특성인, 방향성 또는 지향성(directivity)이 원론적으로는 일치해야 한다. 이때, 방향성(directivity)이 곧, 신조 또는 교의 (doctrine)의 범주(category)를 형성하고, 이 범주의 한계 내에서의 다양성(diversity)은 인정되고 용납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기본적 사상의 체계(a system of thought) 가 같지 아니하면 “멍에를 같이 하지 마라”(고후6:14-18) 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이해와 다양성을 용납하는 과정이 없이 연합이나 일치를 하자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으로서 큰 죄악이다(고후2:17).
[참고 : 고후 2 : 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본문에서 “혼잡하게”는 헬라어로는 “카펠류오”라는 말로서 “소매로 장사하다”, “간음하다”, “부패하다”의 뜻을 의미한다. “수다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변질된 복음을 증거하여 생계수단으로 이용했던 자들이었다. 오늘날에는 자기의 “성공과 명예와 이익”을 위하여 “복음”을 이용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다음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살펴본다. 이 두 학파의 신학적인 경향은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칼빈주의는 장로교 신학의 기초를 이루었고, 알미니안주의는 감리교(침례교, 오순절, 일부 복음주의)적 신학의 기초를 이루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에 입각한 개혁파 신학적 입장의 노선과 교단에 있으면서도, 알미니안주의적인 성도들이 있고, 반면에 알미니안주의적 신학적 입장의 노선과 교단에 있는 성도들이 오히려 칼빈주의에 입각한 개혁파 신학적 노선에 있는 경우도 있으므로 一刀兩斷식 또는 二分法으로 평가하거나 판단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2-1. 용어 기원의 배경 칼빈주의(Calvinism), 또는 칼빈주의 5대 요점(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이라는 이름의 신학체계가 역사에서 나타난 것은 이 신학체계를 반대한 17세기 초에 화란에서 있었던 알미니안주의자들(Arminian)이 제기한 다섯 가지 이의(Arminian remonstrance)를 반박한 도르트 총회의 결의문의 핵심요약이다. 존 칼빈이 본인이 작성한 것은 아니지만, 칼빈주의에서 주장하는 구원의 도리를 잘 요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영어 앞 글자를 따서 TULIP이라고도 한다. 개혁주의 특징인 전적은총설(Sola Gratia)로도 불린다. 칼빈주의 5대 요점은 논리적으로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부분만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2-2. 아르미니우스 추종자들의 저항 1610년 James Arminius ( Dutch seminary professor)가 죽은 후 1년이 된 해에 James Arminius의 가르침에 대한 글 5가지가 그 후예들에 의해서 발간되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이라고 불리게 된 이 추종자들은 화란 정부에 항의형식으로 제출했다. 이들은 화란교회의 공식적 표준교리문서인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부정하고, 자기들이 제출한 교리적인 입장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칼빈주의 5대 강령 (TULIP)으로 요약할 수가 있는데 ①전적 부패 (Total Depravity) ②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③제한 속죄 (Limited Atonement) ④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⑤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of Saints) 으로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변경되기를 원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과 관계가 되어 있었다. 2-3. 알미니안주의의 5가지 요점 1.사람은 믿음과 어떤 선행을 위해서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만큼만 타락하였다. (Calvinism에서의 전적 부패)
2.하나님은 신앙과 불신앙을 미리 보시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서 선택하시거나 유기(책망)하신다.(예지 예정설) (Calvinism에서의 무조건적 선택)
3. 비록 믿는 자들만 구원을 받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개인을 위하여 죽으셨다. (Calvinism에서의 제한 속죄)
4.이 은혜는 거부될 수도 있다. (Calvinism에서의 불가항력적 은혜)
5.참으로 중생한 모든 사람이 확실하게 믿음 안에서 보호될 지의 여부는 더욱 살펴보아야 할 점이다. (Calvinism에서의 성도의 견인)
이 중에서 다섯 번째의 것은, 중생한 신자도 믿음을 잃고 구원을 잃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며, 이 추종자들인 알미니우스주의자들도 일치된 견해에 이르지 못했다. 즉, 어떤 자는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하고, 어떤 자는 구원을 잃을 수 없다고 한다.
2-4 알미니안주의의 철학적 기조 첫째: 성경은 믿음을 자유롭게 응답하는 행위로 여기므로,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야기될 수 없으며, 하나님과 관계없는 상태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둘째: 성경이 믿음을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의 편에서 해야 할 의무로 여기므로,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은 보편적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이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1) 사람은 복음이 자기에게 제시될 때 복음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죄에 의해 완전하게 타락하지 않았다. (2) 복음을 거절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에 의해 완전하게 통제되지 않는다. (3)하나님이 믿게 될 사람을 선택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믿을 것을 보시고 시작하시는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떤 사람의 구원도 보장하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한 것은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창조해 내는 것이었다. (5)신앙을 유지하여서 은혜의 상태에 자신을 지키는 것은 신자들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이와 같은 알미니안주의는 사람의 구원을 궁극적으로 사람 자신에게 달린 것으로 만들었다. 구원하는 믿음은 그 사람 속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라, 사람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도르트 회의(1618.11.13.-1619.5.9. 154번의 회의)에서 James Arminius의 신학사상을 성경의 증거에 비추어보았으나 하나님의 말씀과는 조화를 이루지 못함을 확정적으로 선언하고, 그들의 주장은 그들만의 것으로 받아들였을 뿐, 전 참석자들은 만장일치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단순히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므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논점들과 관련하여서 “칼빈주의적” 신학적 입장과 견해를 확실히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구체적으로 신학적 입장을 확립한 것이 후대에 “칼빈주의 5개 요점”(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이라고 알려졌다. “칼빈주의”(Calvinism)란 이름은, 프랑스 종교개혁자 “존 칼빈”(1509-1564)의 이름에서 유래하였으며, 그의 신학적 입장이다.
도르트 공회가, James Arminius의 가르침에 기초한 믿음에 대한 글 5 즉,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옹호한 교리체계는 이단적이므로 그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계에서는 알지 못해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고, 알면서도 개인의 성공과 야망을 위해서 받아들인다고 생각되어진다. 참으로 두렵지 않을 수 없다.
도르트 공회에 참석한 회원들에게는 “구원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의 사역”으로 여겨졌다. 결단코 죄인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구원에 기여할 수도 없다고 믿었다. 아담의 타락은 인류를 완전히 파괴했다. 모든 사람은 본성상 영적으로 죽었다. 그들의 의지들은 죄와 사탄에게 매여 있다.
복음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은 그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며, 그의 한없는 은총의 대상인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어느 죄인이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 구원을 얻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으로 하신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도르트 공의회의 회원들이 성경의 가르침으로 이해했던 것이었다.
2-5. 알미니안주의 5요점과 칼빈주의 5요점을 비교한다. 알미니안주의 5 요점 2-5-A. 사람은 믿음과 어떤 선행을 위해서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만큼만 타락하였다. 자유의지 또는 인간의 능력 인간이 타락으로 자유의지 또는 능력이 심각하게 훼손되었지만, 완전 무능력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죄인을 회개하고 믿게 하시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를 방해하지 않고 믿게 하신다. 각 죄인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고, 자신의 영원한 운명은 그 자신이 그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람의 의지는 죄 된 본성에 예속되어 있지 않으므로 영적인 문제는 악 대신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죄인은 하나님의 성령과 협력하여 중생되든지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망하든지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잃어버린 죄인은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지만, 그가 본인의 의지로 믿을 수 있기 전에는 성령에 의해 중생될 수 없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람의 행위요 중생에 선행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죄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다. 즉, 그것은 사람이 구원에 기여하는 것이다.
칼빈주의 5 요점 2-5-A. 전적 부패(무능력) 또는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인간은 전적부패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하여 철저하게 부패하여 있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지 않으며, 악한 본성에 예속되어 있으므로, 영적인 면에서 악 대신 선을 선택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성령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중생을 해야 하며, 성령께서 죄인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셔야 한다. 믿음은 사람이 구원에 기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알미니안주의자들과 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 아니다. 사람의 의지는 죄에 묶여 있으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은총만이 사람의 구원의 유일한 근거이다.
알미니안주의 5 요점 2-5-B. 하나님은 신앙과 불신앙을 미리 보시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선택과 유기를 하신다(예지예정설). 창세 전에 하나님의 선택은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복음)에 스스로 응답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보시고 선택하셨다. 이것을 예지예정설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의지에 의해 주어진다고 한다. 즉, 믿음은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능력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이고 이것이 구원의 궁극의 원인이라고 한다.
칼빈주의 5 요점 2-5-B.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하나님이 창세전에 어떤 사람들을 구원할 것인지에 대하여서는 조건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달려 있다. 특정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믿음, 회개등과 같은 인간 편의 순종이나 반응을 미리 보시고 하신 것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절대적 주권으로 선택하신 각 개인에게 믿음과 회개를 주신다. 이 행위들은 선택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택되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선한 그 무엇을 하나님이 미리 보시고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뽑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기꺼이 영접하는 자리로 이끄신다. 이와 같이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신 것이 구원이 궁극적인 원인이다.
알미니안주의 5 요점 2-5-C. 보편적 속죄 또는 일반적 속죄 비록 믿는 자들만 구원을 받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모든 사람(인류 전체)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비록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지만, 오직 자유의지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는다.
칼빈주의 5 요점 2-5-C. 제한속죄 또는 특수한 구속(救贖, Limited Atonement) 그리스도의 구속(대속)은 선택받은 자들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며, “구속언약의 백성”에게만 실효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특정한 죄인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믿음도 포함된다. 믿음이라는 선물은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모든 이에게 적용되며 그로 인하여 그들의 구원은 보장된다.
알미니안주의 5 요점 2-5-D. 가항적 은혜(성령은 효과적으로 거부될 수 있다.) 성령은 복음의 초청에 의해서 외적으로 부름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내적으로 부르신다. 성령께서 각 죄인을 구원으로 이끄시지만, 사람은 자유롭기 때문에 성령의 부르심에 거절할 수 있다. 성령은 죄인인 그가 믿기까지는 중생시킬 수 없다. 즉, “사람의 공로”인 믿음은 중생을 선행하며, 중생을 가능하게 한다. 이와 같이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성령을 제한한다. 성령은 인간이 “자기 의지”로 믿을 것과 손을 내어 미는 자들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다. 이렇게 죄인이 믿고 손을 내어 미는 경우가 아니면 성령은 생명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이길 수 없는(invincible) 것이 아니다. 즉, 그것은 사람에 의해서 거부되고 훼방 받을 수 있다.
칼빈주의 5 요점 2-5-D.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또는 성령의 효과적인 부르심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으로 부르시는 외적인 일반적 부르심과 성령을 피할 수 없도록 구원으로 부르시는 내적인 특별한 부르심은 택함을 받은 자에게 미치게 하신다. 모든 사람들에게 구분 없이 주어지는 외적인 일반적 부르심은 거절될 수 있다. 그러나 선택된 자에게만 주어지는 내적인 특별한 부르심은 거절될 수 없다. 이것은 항상 회개를 가져온다. 성령께서는 이 특별한 내적인 부르심을 수단으로 하여 “저항할 수 없도록 하여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신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적용시키는 사역에서 사람의 의지에 제한을 받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 성공을 위하여 사람의 협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은혜롭게도 선택된 죄인을 변화시키시고, 믿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자유롭게 기꺼이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며, 그 은혜를 이길 수 없다(invincible). 즉,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하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데 실패하지 않는다.
알미니안주의 5 요점 2-5-E.중생한 모든 사람이 확실하게 믿음 안에서 보호될지의 여부는 더욱 살펴보아야 한다. 중생하여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도 믿음을 지키는 데 실패하여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 점에 있어서는 일치된 입장을 가지지 못한다. 즉,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
칼빈주의 5 요점 2-5-E. 성도의 견인(堅忍,Perseverance of Saints) 하나님에 구속계획에 의해서 선택되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대속되며, 성령에 의해서 믿음이 주어진 모든 사람은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믿음 안에 지켜지며, 그리하여 끝까지 견인한다.
2-5-F. 알미니안주의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ㆍ 구원은 하나님과 사람의 공동의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즉, 사람의 반응이 결정적 요인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준비하셨지만, 구원받을 사람의 자유의지로 하나님과 협동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선택하는 사람들에게만 효과적이 된다. 인간의 의지는 결정적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구원을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는 도르트 공의회에 의해서 거부(배척)되었다. 이것은“항의 문서”(Remonstrance)에서 내포되어 있는 사고 체계였다. 이것은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해 1610년에 화란 교회에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제출되었으나 1619년에 도르트 회의에 의해서 그것은 비성경적이라는 이유로 거절(排斥)되었다.
2-5-F. 칼빈주의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 완수된다. 성부께서는 백성을 선택하시고, 성자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성령께서는 선택된 자를 중생과 믿음과 회개를 하게 하신다. 선택ㆍ구속ㆍ중생이 하나님의 사역이며 은혜에 의해서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의 구원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을 자들을 결정하시는 것이다. 칼빈주의에 따른 결과 도르트 공의회에 의해서 재확인되었다. 이 신학체계는 1619년에 도르트 공의회에서 성경에 내포된 구원론이 재확인되었다. 이 체계는 그 때에 5가지 요점으로(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해 제시된 5요점에 대한 응답(반동)으로서) 공식화되었고, 그 이후로 “칼빈주의 5가지 요점”(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이라고 알려져 왔다.
2-6 각 체계의 기본 개념들 A.펠라기우스와 어그스틴의 논쟁 “존 칼빈”이나 “야고보 알미니우스”는 그들의 이름으로 불리어진 두 체계의 기본 개념들을 본인들은 시작하지 않았다. 각 체계의 기본적인 원리들은 이 두 사람들의 시대보다 더 오래되었다. 칼빈의 신학적 입장이나 기본 교리들은, 제5세기에 펠라기우스를 대항했던 어거스틴에 의해서 이미 변증되어 왔다. 알미니우스 교리들은 3.4세기의 많은 교부들에 의해 지지된 것 같으며, 이교 철학의 부패한 영향으로 교회 속에 퍼졌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본성이 죄로 부패하였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그는 모든 유아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있었던 것과 같은 죄 없는 상태 속에서 세상에 태어난다. 인간의 의지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고, 복음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어거스틴은, 인간의 본성은 아담의 타락으로 완전하게 부패하여 아무도 스스로 율법이나 복음을 순종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죄인들이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서 창세전에 구원을 하기로 예정한 사람들에게만 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행위”는 펠라기우스가 생각하는 것처럼 죄인의 자유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B. 반 펠라기안주의(Semi-Pelagianism), 알미니안주의의 선구자 카톨릭 수도사 카시안(Cassian)은 “인간의 영혼의 구원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 필요하지만, 은총을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렸다.”고 주장한다. 이 중간 방식은, 펠라기안주의와 어거스틴주의의 중간적인 입장으로서 양쪽의 요소들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반 펠라기안주의”라고 불렀다. 이 교리는 카톨릭에서는 긍정한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원죄에 의해서 부패하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는 보편적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러나 사람마다 자유의지를 따라서 부르심에 순종하거나 거절할 수 있다.
C. 칼빈주의- 종교개혁 신학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자도자들은 펠라기우스주의와 반 펠라기우스주의를 성경적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거절하였다. 어거스틴(Augustine)과 같이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주권, 인간의 전적 부패, 무조건적 선택의 교리들을 지지했다. 개혁자들은 예정의 관점에 서 있었다. 그것은 칼빈에 의해서만 가르쳐진 것이 아니라, 루터, 쯔빙글리, 멜랑톤(멜랑톤은 후에 반 펠라기안주의적으로 입장을 후했다.) 불링거, 부서 등의 종교개혁 지도자들에 의해 가르쳐졌다. 어떤 다른 점들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와 차이점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정교리에서는 일치했고, 강조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교리들은 기독교 신앙의 생명의 피였다.
2-7.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차이 이 역사적인 논쟁에 관련된 주제들은 참으로 진지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구원에 대한 개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두 체계들은 차이는 “강조점”에 차이가 아니라, “내용”에 차이이다. 칼빈주의는 구원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는 데, 알미니안주의는 “사람의 응답과 반응”이 있어야만 하는 즉, 하나님과 사람의 공동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2-8. 칼빈주의 다섯 요점에 대한 경계할 점 ㆍ 칼빈주의 다섯 요점들은 비록 나누어져서 진술되어 있지만, 진실로 나눌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함께 묶어져 있다. 전부를 부정하지 않고는 그 하나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가지 요점으로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 하신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ㆍ성자ㆍ성령 이 세 위격들은 주권과 지혜와 능력과 사랑으로 함께 일하심으로서 선택된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신다. 성부께서는 “선택”하시고, 성자께서는 “구속”으로서 성부의 뜻을 완수하시고, 성령께서는 “중생”케 하심으로써 성부와 성자의 목적을 시행하신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영광의 생명으로 이끌어 옮기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을 시종을 행하시는 것이다. 계획을 세우시고, 수행하시고, 구속을 주시며, 부르시며,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들이다. “죄인들”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발견하실 때에 죄 있고, 무가치하며, 무능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에는 손가락 하나도 들 수 없는 존재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자신을 도무지 구원할 수 없으며, 구원은 오직 총체적으로 완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도 오직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영광이 세세무궁 영원토록 여호와께만 있을지로다. 아멘.
지금까지는 각 체계들의 간략한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칼빈주의 체계의 성경적 지지를 살펴볼 것이다.
2-9. 칼빈주의 다섯 요점에 대한 성경적 지지 어떠한 신학적 입장이나 견해라도 성경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은 성경의 지지를 받고 있는가? 그리고 알미니안주의적 관점은 어떠한가? 다음은 요점을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을 제시하고자 한다. 성경의 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이번에는 한 두 구절로만 간략하게 살펴본다.
A. 전적 부패(타락) 또는 전적 무능력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죄로 죽어 있다. 그의 의지는 악한 본성에 종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영적으로 선을 행하여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 없다.
창2:16-17“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명령하신 최초의 금지 규정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는 것이다. 1)여기서 ‘알게 하다’는 말은 단순히 인식의 차원이 아니라 그 열매를 먹을 경우 선악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2)‘선악’이란 인간은 이 세상에 출현할 때부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선’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는 것이 ‘악’임을 의미한다. 3)하나님께서 금지 규정을 두신 것은, 인간에게 만족과 감사의 생활과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4) 인간에게 절제와 도덕율과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삶의 태도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므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해야 할 것이다. )
롬5:12-“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에게 멸망에 이르게 하고, 한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에 이르게 한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자녀를 생산하지 않았으므로 아담의 자손은 모두 다 범죄 한 조상에게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인 것이다. 박윤선.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에 사망이 온 인류를 지배하게 되었다.(고전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은 한 개인일 뿐만 아니라 인류라는 공동체에 연합된 한 부분이라는 점이다. 아담이 인류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모든 인류는 그 안에서 범죄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담의 죄는 그의 죄임과 동시에 인류의 죄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죄의 원리는, 여호수아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를 정복하였을 때 아간 한 사람이, 전리품을 모두 전멸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전리품의 일부를 취하는 죄를 지은 대가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아이 성 정복에 실패한 것이다(수7:1-5). 다시 말하면 그 당시에 “아간의 죄”를 한 사람의 죄로 보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전민족의 죄로 간주하셨던 것이다(수7:1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인간은 홀로 되거나 소외된 존재가 아니다. 택함 받은 성도는 그 속한 사회나 공동체를 떠나서는 실제적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를 떠나서는 진정한 성도가 될 수 없다. 강병도.) 고백공동체인 교회에서 지체가 죄를 범할 경우에는 그것이 개인의 죄로만 볼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죄로 간주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징계의 절차에 따라 시행하여야 한다. 징계는 저주가 아니다. 징계는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B. 무조건적 선택
롬9:11-13-“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 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들뿐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지 못하고 영원히 멸망 받는 자들이 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워하였다”는 말은, 심리적 증오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택하지 않으셨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은 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택하지 않으심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시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해서, 하나님을 거슬려 죄인 된 인생들 중에서 어떤 자들은 선택하시고, 어떤 자들은 유기하신 것이다. 박윤선. “미워하였다.”는 말은, 헬라어로 “미세오”로서 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의 대상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 말의 의미를 감정적인 것으로 이해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 말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가족과 생명도 미워해야 한다고 할 때에 사용된 “미움”이란 말과 비슷하다(눅14:28) 즉, 미움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할 때에 자신의 가족과 생명이 단순히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기울이시지 않는 자는 “미움”을 받는 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항상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참조, 대하24:22; 욘3:10) 강병도.
(참조 : 대하24:22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니 그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 스가랴는 요아스 왕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의 은혜를 악으로 갚음에 대해서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라고 예언을 했다. 신원(伸冤 vengeance:원한을 풀어 버림) 즉, 억울함을 갚아달라고 했다. 이러한 스가랴의 말은, 원수 갚는 것과 처벌하는 것을 구하는 기도이다. 신원하여 달라는 것은 “가인을 고발하여 울부짖는 아벨의 피”와 같이 살인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악 특히, 복음에 대하여 행한 불신자들의 훼방은 언젠가는 반드시 그들에게 갚아진다.
(참조 : 욘3: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것을 보시고 선언하신 재앙을 내리시지 않으셨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은총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베풀어진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러한 것은 결국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항상 당신의 크신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되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C. 제한적 속죄 또는 특수한 구속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할 것이라” (“예수”라는 이름은 의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구원하실 자는 “자기 백성” 즉, 자기에게 소속된 자들을 의미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태초부터 미리 정해 두신 믿음의 자손들을 의미한다.)
D. 불가항력적 은혜 혹은 성령의 효력 있는 부르심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남자는 장로 또는 집사로 불리며 넥타이 휘날리며 여러 가지 봉사를 하고, 여자는 권사 또는 집사로 불리며 치맛자락 휘날리며 여러 가지 봉사를 하며 교회 안에서 열심을 내면서 다닌다고 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입술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도 아니다(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한다(참조 요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참조:마12:12). 예수께서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 E. 성도들의 견인(堅忍) 또는 믿는 자들의 안전
요5: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얻게 되는 “영생”은, 성령께서 택한 자를 새롭게 하시는 순간에 획득되는 것이며 영원토록 지속되며 영생을 보장받는다(참조, 눅19:1-10; 23:39-43).
(눅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0절이 핵심 구절로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즉, 그분은 하나님의 곁을 떠나 유리방황하는 죄인들을 구원하려 오셨는데 삭개로를 영접하시고 그에게 구원을 베푸신 것은 그 같은 사역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중요한 사실들은, 첫째, 복음은 뭇사람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자체 내의 힘을 갖고 있다. 둘째, 이 같은 복음은 세상에 속히 그리고 반드시 증거되어야만 한다(5절). 셋째, 이러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참된 기쁨의 근원이 된다(6절). 넷째,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영적인 변화뿐 아니라 생활윤리 면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즉, 삶의 방향이 주님을 향하게 된다. 또한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키 위한 몸부림이 있다.)
(눅23:39-43)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두 강도 중 하나가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후 구원을 얻게 된 사건은 우리들에게 세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한다. 첫째, 십자가에 달려 곧 돌아가시게 된 순간에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의 복음 전파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에 고민하게 한다.(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둘째, 십자가에 달려서라도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는 강도의 모습은 우리에게 늦었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임을 교훈해 준다.(겔18:3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암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셋째, 예수께서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분명한 소망을 갖게 해준다.(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새롭게 된 사람은, 말씀을 좇아 성령에 의지하여 살아가므로 예수님을 닮아가며(골3:10a), 끊임없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새롭게 터득해 가는 사람이다(골3:10b) (골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또한 성령께서 거하시는 증거들이 드러난다(갈5:22-23).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 동안에 많은 실수와 죄를 짓지만 종국에 가서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참조, 롬8:14-16) 또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영생은 결단코 잃어버리지 않도록 성령께서 지켜주신다.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글을 마치면서 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은 분명하고도 확실한 성경적 지지와 근거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의 관점은 확실히 성경적 근거로는 거리가 있으므로 정통칼빈주의에 입각한 개혁파의 신학적 입장을 신봉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수납하기가 어렵지만, 계속적으로 알미니안주의를 비롯한 기타의 신학적 입장들을 연구하여 같은 관점과 주의는 일치시키고, 일치가 되지 않은 부분들은 계속적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무조건 형식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혼잡(고후2:17)을 싫어하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극히 주의해야 할 점은, 신학적 입장과 관점과 이해가 다르거나, 또는 연약하거나 어린 지체들을 배척하는 자세는 주의해야 한다. 성령하나님께서 조명해주셔서 깨달을 때까지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할 것이다. 글을 좀 더 간략하게 쓸 마음으로 시작하였으나 의도보다는 길어진 것 같다. 그러면서도 미흡하다는 생각은 여전하지만 다음으로 미루면서 오직 우리 주님께서 택하신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소망한다.
2011.11.15.
주님 이외에는 별로 찾는 이가 없는 외로운 범어동 골짜기에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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