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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구리의 우리 고대사 : 사마천 사기등 중국 고대문헌의 지리적인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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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한(마한 진한 변한)의 위치가 기록된 중국 고대사서는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이다
1) 부여 고구려 삼한등 고조선 열국의 위치와 풍습 그리고 지형적인 특성 등을
최초로 기록한 중국 고대 사서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다
2) 정사 삼국지는 서진의 진수(陳壽, AD233 ~ 297)가 작성하고 남조 송나라의 배송지(裴松之, AD375 ~ 451)가
주를 달아 내용을 보충한 역사서이고, 후한서는 남조 송나라의 범엽(范曄, AD 398~445)이 편찬한 역사서다
따라서
정사 삼국지 작성시기가 후한서 작성 시기보다 대략 150년 이상 빠르니
후한서 동이열전은 정사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참고해서 작성한 것이다
■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낙랑군이 아니라 (위만)조선의 위치가 나오니
기원전 2세기(BC 194 ~ 108) 위만조선 시대의 고조선 열국 위치로 판단된다
1) 삼국지 위서동이전의 예濊조에 지금의 조선(今朝鮮)이 나오는데
중국 삼국시대(오 촉 위 AD 220~280)에는 낙랑군이 있었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었으니
지금의 조선(今朝鮮)에서 조선은 위만조선이고 지금은 BC 194 ~ 108년으로 위만조선 시대를 말한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 예(동예 : 동이족의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과,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으니, 지금의 (위만)조선(今朝鮮)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2) 삼국지 위서동이전은 중국 삼국시대 역사서이니, 위만조선 시대의 고조선 열국 위치에 중국 삼국시대
(오 촉 위 AD 220~280)의 고구려와 현도군, 대방군(AD 204년 이후 ~ 314) 의 위치를 추가하였다
(현도군의 위치는 BC 75년의 요동군의 고구려현 서북쪽으로 장성 부근이다)
3) 후한서 동이열전은 삼국지 위서동이전의 고조선 열국 위치를 기본으로 하여
후한 시대(AD 25 ~ 220)맞게 위만조선을 낙랑군으로 바꾸고 대방군의 위치는 삭제하였다
4) 부여는 위만조선 시대의 장성 북쪽의 남북 2천리의 고조선인 북부여다, 장성과 부여 도성사이가 1천리인데
중국 삼국시대의 남북 2천리의 고구려를 남북 1천리 정도인 북부여 남부 지역에 추가하였다
■ 고조선 열국 위치 비정시 핵심 고려사항
1) 바다(海, 바다 해)를 바다가 아니라 큰 강이나 큰 호수로 봐야 한다
(1) 사마천의 사기권2 본기4의 해(海)의 집해(集解)에,
"서광이 말하기를 바다 해(海)자는 한편으로는 하(河, 큰 강, 큰 호수)의 의미로 사용한다.(徐廣曰 海一作河)“
(2) 사마천 사기 제태공세가에서 초나라 성왕이 제나라 환공에게 보낸 서신에서 초나라 성왕은 남해에 있고
제나라 환공은 북해에 살고 있다고 했으니 남해는 양자강이나 동정호를 가르킨다
(3) 섬서성과 산서성 북쪽 내몽고 자치주에는 지금도 바다라고 부르는 호수가 여러개 있다
: 황기해(黃旗海),대해(岱海),합소해(哈素海), 오양소해(烏梁素海) 등
따라서 고대 중국인들은 큰 강이나 큰 호수를 바다라고 했다
2) 한(삼한 : 마한, 진한, 변한)은 동쪽과 서쪽이 바다(큰 강, 큰 호수)가 경계이고 남쪽은 왜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삼면(동서남)이 바다인 한반도 남쪽에 삼한(한 : 마한, 진한, 변환)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3) 부여, 고구려, 마한 등 고조선 열국 위치는 특정 나라 동쪽, 서쪽, 남쪽등 상대적인 위치다
낙랑군 동쪽에 동예(예)가 있고, 낙랑군 서쪽에 고대 요동군이 있다,
낙랑군 남쪽에 마한이 있으며, 낙랑군과 요동군 북쪽에 고구려가 있고 요동군 북부에 만리장성이 있기에
특정나라의 정확한 위치를 결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특정 나라 위치를 결정할 수 있다면 다른 고조선 열국 위치는 자동으로 결정된다
(하지만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는 특정 나라의 정확한 위치를 결정할 수 있는 내용이 없다)
예를 들면)
(1) 낙랑군(위만조선) 위치를 북한 평양으로 결정하면
삼한(마한, 진한, 변한)의 위치는 한반도 남부가 되겠지만 고대 요동의 위치는 서해바다가 될 것이다
(2) 낙랑군(위만조선) 위치를 만주의 요양이나 심양 부근으로 결정하면 삼한의 위치는 요동반도가 될 것이다
(3) 낙랑군(위만조선) 위치를 하북성 진황도시 동쪽으로 결정하면 삼한의 위치는 발해 바다가 될 것이다
4) 잘 변하지 않는 큰강이나 큰산등 지형적인 특성을 확인해서 고조선 열국 위치나 영토를 결정해야 한다
(현대에도 큰강이나 큰 호수, 큰 산맥을 국경선으로 결정한 경우가 많이 있다)
5) 접했다 붙어있다(接, 접촉할 접, 닿을 접, 이을 접)는 나라의 영토 경계인 국경선이 맞닿았다는 표현이고
떨어져 있다(去, 갈 거, 떨어질 거)는 나라의 수도인 도성까지의 거리로 봐야 한다
(사방 1천여리 나라일 경우
해당 나라의 동쪽 끝이나, 남쪽 끝이나, 서쪽 끝이나, 북쪽 끝까지의 거리로 보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 고조선 열국 위치 비정
1) 고조선 열국중 특정 나라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것이 중요한데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는 상대적인 위치만 있고 정확한 위치를 나타내는 내용이 없다
2) 특정 나라의 위치를 결정할 수 있는 정보가 있어야 고조선 열국 위치를 비정할 수 있는데
유일하게 동예(예)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정보가 후한서 동이열전의 동예(예)에 표현되어 있다
(동예의 위치를 결정할 수 있으니 다른 고조선 열국의 위치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3) 동예(예, 동이족의 예)의 위치 결정 → (기준점 : 절대적인 위치)
사기 평준서와 한서 식화지에 따르면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인 연제지간이 동예의 위치로
하북성 중부 동부지역인 창주시(천진시 남쪽) 지역에 동예(예, 동이족의 예)가 있었다
(1) 후한서 동이열전에 따르면 예(濊)의 임금 남여가 항복해서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했고 수년후에 폐지했다고 한다
(2) 한서 무제기에도 예(薉)의 임금 남여가 항복해서 창해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3) 사마천 사기 평준서와 한서 식화지에 따르면
동예(東濊, 예濊, 예薉)의 위치는 창해군을 설치한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인 연제지간(燕齊之間)이다
(4) 연나라는 북경지역에 있었고, 제나라는 산동성 제남시 지역에 있었으니,
연제지간(燕齊之間)인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란 북경과 제남시 중간 지역이니
동예(東濊, 예濊,薉)의 위치는 하북성 중부의 동부 지역인 창주시(滄州市)로 확정할 수 있다.
※주)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는 연나라 도성 계(薊)와 제나라 도성 임치(臨淄) 중간 지역이라는 의미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 예(동예 : 동이족의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과,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와 붙어있고,
동쪽으로는 대해(발해)에 닿았으니, 지금의 (위만)조선(今朝鮮)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후한서 동이열전 : 濊예(동예 : 동이족의 예)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와, 남쪽으로는 진한과 붙어있고,
동쪽은 대해(발해)에 닿으며, 서쪽은 낙랑군에 이른다. 예(동예) 옥저·고구려는 모두가 [옛] 조선 지역이다.
☞ 『 <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예(濊, 동예東濊)」 >』
한무제 원삭 원년(B.C.128)에 예(濊)의 임금(君) 남여(南閭)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구(萬口)를 이끌고,
요동군에 귀속하였으므로, 한무제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원문] 元朔元年(B.C.128), 武帝年也. 濊君南閭 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 『 < 한서(漢書) 卷六 「무제기(武帝紀) 第六」 >』
원삭元朔 원년(BC 128) 동이(東夷) 예(薉)의 임금(君) 남려(南閭) 등 구(口) 28만 명이 항복하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했다. [원문] 元朔元年(B.C.128) 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 『 < 사마천 사기(史記) 卷三十 「평준서(平準書) 」 >』
팽오가(彭吳賈) (위만)조선을 멸하고자 하여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니, 연제지간(燕齊之間,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쓰러질듯 소란스러웠다. [원문] 彭吳賈滅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閒靡然發動.
☞ 『 < 한서(漢書) 卷二十四下 「식화지( 食貨志 ) 」 >』
팽오가(彭吳賈) 예맥(=예=동예)과 (위만)조선 간 (도로를) 둛으려고, 창해군을 설치하니, 연제지간(燕齊之間,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쓰러질듯 소란스러웠다.(한무제 시절에 조선은 위만조선만 있었기에 예맥과 조선으로 해석해야 한다)
[원문] 彭吳穿 穢貊·朝鮮, 置滄海郡, 則燕·齊之間靡然發動.
4) 위만조선(낙랑군)과 요동군, 대방군 위치 비정
(1) 위만조선(낙랑군) 위치는 동예(예) 서쪽으로, 하북성 중부의 동부지역 창주시(동예) 서쪽이니
부양하(滏陽河) 서쪽인 하북성 중부의 형수시 무강현(武强县) 지역에 위만조선(낙랑군)이 있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 오늘날 (위만)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예 및 옥저·고구려) 지역이다.
⊙후한서 동이열전 : 동예(예) 서쪽은 낙랑군에 이른다.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위만)조선의 지역이다.
(2) 고대 요동군의 위치는 위만조선(낙랑군) 서쪽으로 형수시 무강현(위만조선) 서쪽이니
형수시 무강현의 천평구(天平沟) 서쪽인 하북성 중부의 형수시 안평현(安平县) 지역에 고대 요동군이 있었다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 : 위만이 (요동군) 동쪽으로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고공지 상하장에 위만조선을 세웠다
(3) 대방군의 위치는 낙랑군 남쪽이니, 형수시 무강현(낙랑군) 남쪽으로
부양하(滏陽河) 북쪽의 하북성 중부의 형수시(衡水市) 지역에 대방군이 있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 후한 말에 공손강이 (낙랑군)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을 만들었다
5) 삼한(한 : 진한, 마한. 변환) 위치 비정
⊙삼국지 위서 동이전 : 한(삼한)은 대방군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큰 강, 큰 호수)를 한계로 삼고,
남쪽은 왜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세째는 변한, 진한은 옛 진국(辰國, 천자 진이니 삼한을 다스리던 나라)인데
(삼한을 다스리던) 진왕은 월지국을 통치했다 (기자조선의 준왕)이 신하와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삼한)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삼한왕)이라 칭하였는데 준의 후손은 단절되었다
⊙후한서 동이열전 : 한(삼한)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진이다
전체 국토의 넓이가 사방 4천여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큰 강, 큰 호수)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이 [한족 중에서]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삼한을 다스리는 왕)으로 삼아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는데,[삼한의] 왕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1) 마한의 위치는 낙랑군 남쪽으로 형수시(낙랑군) 남쪽에 있고, 남북 길이가 4천리이니
하북성 남동부와 산동성 서부, 안휘성 지역에 마한이 있었다
따라서 마한의 서쪽 경계인 바다는 하북성 노장하(老漳河), 산동성 서부 소양호(昭陽湖)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 마한은 (삼한 중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
(마한 사람들은] 산과 바다(큰 강이나 큰 호수) 사이에 흩어져 살았다
⊙후한서 동이열전 : 마한은 (삼한 중에서) 서쪽에 있는데, 그 북쪽은 낙랑군, 남쪽은 왜와 붙어있다
(2) 진한의 위치는 동예(예) 남쪽으로 창주시(동예, 예) 남쪽이니 산동성 동부지역에 진한이 있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 :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는데, 그 북쪽은 예맥(동예, 예)와 붙어있다.
(3) 변한(변진)의 위치는 진한 남쪽으로 산동성 동부(진한) 남쪽이니 강소성에 변한(변진)이 있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 (변진의) 독노국은 왜와 붙어있다. 토지는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다
변진(변한) 사람들은 진한 사람들과 뒤섞여 산다
⊙후한서 동이열전 : 변진(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와 붙어있다
변진(변한) 사람들은 진한 사람들과 뒤섞여 산다.
6) 고구려(북부여 남부 지역) 위치 비정
동예(예, 예맥) 북쪽은 고구려 옥저가 붙어있고 고구려 동쪽에 옥저가 있으니 동예의 북서쪽에 고구려가 있다.
고구려 위치는 동예 북서쪽으로 창주시(동예, 예) 북서쪽이니 하북성 북부지역에 고구려가 있었다
※주) 고구려가 요동군 동쪽 천리 밖에 있다는 내용은
247년 동천왕이 수도를 옮긴 동옥저 지역의 평양성 위치를 가르킨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 (1) 동예(예)의 북쪽에는 고구려·옥저가 붙어있다
(2)고구려는 요동군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위만)조선·예맥(동예, 예)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면적은 사방 2천리다
⊙후한서 동이열전 : (1) 동예(예)의 북쪽에는 고구려·옥저가 붙어있다
(2) 고구려는 요동군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위만)조선·예맥(동예, 예)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면적은 사방 2천리다
7) 동옥저, 북옥저 위치 비정
(1) 동예의 북쪽은 고구려·옥저가 붙어있고 고구려 동쪽에 옥저가 있으니 동예의 북동쪽에 동옥저가 있다.
동옥저 위치는 동예 북동쪽으로 창주시(동예) 북동쪽인 하북성 진황도시와 요서회랑에 동옥저가 있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 동예(예)의 북쪽에는 고구려·옥저가 붙어있다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읍루·부여와, 남쪽은 예맥(동예, 예)와 붙어있다.
⊙후한서 동이열전 : 동예(예)의 북쪽에는 고구려·옥저가 붙어있다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다에 연접하였으며, 북쪽은 읍루·부여와,
남쪽은 예맥(동예, 예)와 붙어있다. 그 지형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사방 천리의 절반 쯤 된다.
(2) 동옥저 북쪽에 북옥저가 있으니 북옥저의 위치는 요서회랑(동옥저) 북쪽으로 의무려산 지역에 북옥저가 있었다
(남옥저에 대한 내용이 없으니 남옥저는 북옥저 남쪽의 동옥저로 본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와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풍속은 남·북이 서로 같으며, (북쪽은) 읍루와 붙어있다.
⊙후한서 동이열전 : 북옥저가 있으니 치구루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 풍속은 모두 남옥저와 같으며, 읍루의 남쪽 경계와 붙어있다.
8) 부여(북부여 북부 지역) 위치 비정
부여 남쪽에 고구려가 있고, 고구려 남쪽에 만리장성이 있다 부여와 장성의 거리가 1천리이니
고구려의 남북거리는 1천리이고, 부여의 남북 거리도 1천리로 추정하여 위치를 비정해야 한다
(위만조선 시대인 BC 2세기 2천리 북부여를 고구려와 부여로 각각 1천리로 나누어서 비정할 수 밖에 없다)
고구려 북쪽에 부여가 있으니, 부여의 위치는 하북성(고구려) 북쪽이니 승덕시와 적봉시 지역에 부여가 있었다
※주)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요동군 북부지역에 있었다(산서성 서부 임조에서 요동군 양평현까지다)
현도군의 위치는 요동군 고구려현 서북쪽의 만리장성 근처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 부여는 (만리)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도군에서 천 리쯤 떨어져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붙어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사방 2천 리다
⊙후한서 동이열전 : 부여국은 현도군의 북쪽 천리 쯤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붙어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사방 이천리다.
9) 읍루 위치 비정
북옥저 북쪽과 대해(요하) 서쪽에 읍루가 있으니
읍루의 위치는 의무려산 북쪽과 서요하 사이이니 만주 통요시(通遼市) 지역에 읍루가 있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 읍루는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 여리 밖에 있는데, 큰 바다(요하)에 닿아 있으며,
남쪽은 북옥저와 붙어있고,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후한서 동이열전 :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이다.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여리 밖에 있는데, 동쪽은 큰 바다(요하)에 닿고
남쪽은 북옥저와 붙어있고,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10) 선비 오환(말갈) 위치 비정
후한서 오환선비 열전에서 오환이 본래 고조선인 동호(북부여)라고 했으니 오한은 북부여(동호)를 건국한 부족이고
선비(鮮婢, 고조선의 노비)는 고조선인 동호(북부여)의 일부라고 했으니, 선비는 북부여에서 분리된 부족이다
⊙후한서 오환선비 열전 : 오환은 본래 동호(북부여)이다. 한나라 초기에 흉노의 묵특이 동호를 멸망시키자
남은 무리들이 오환산에서 동호(북부여)를 보존했기에 산 이름을 종족의 명칭으로 삼았다.
선비는 역시 동호(북부여)의 일부인데, 따로 선비산에 의탁하여 [살았기 때문에] 선비라 불렸다.
선비의 언어와 습속은 오환과 같다
(1) 선비의 위치는 (북)부여의 서쪽이니 북경 지역(북부여 중심지역) 서쪽으로 산서성 대동시 지역에 선비가 있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 부여는(만리)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도군에서 천 리쯤 떨어져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붙어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사방 2천 리다
⊙후한서 동이열전 : 부여국은 현도군의 북쪽 천리 쯤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붙어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사방 이천리다.
(2) 오환(말갈)이 등장하는 시기는 한나라 초이니, 오환(북부여)과 부여(졸본부여)가 연나라 북쪽에 나란히 있었다
(졸본)부여는 요동군 북쪽을 차지했으니 하북성 중부 지역(요동군 북쪽)에 졸본부여가 있었다
따라서 오환(말갈)의 위치는 졸본부여(하북성 중부) 서쪽이 되니 산서성 중부지역에 오환(말갈)이 있었다
⊙사마천 사기 화식열전 : 연(燕)나라는 북쪽으로는 오환과 부여(졸본부여)와 이웃해 있고,
동쪽의 예맥조선(穢貉朝鮮), 진번(眞番)과 (상업의) 이득을 얻는다.
첫댓글 열국이 중국대륙에만 있었다면 우리 역사로 정의하기 어려워질듯...
요서와 산동에 있던 왕검조선이 점차 만주와 한반도로 옮겨오면서 전기진국 그리고 후기진국(후삼한)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아야 우리 역사가 된다고 본다. 저 주장은 오히려 중국의 속지주의에 활용되어 우리 역사가 송두리째 중국사로 전락할 위험요소를 안고 있는 주장일터입니다.
우리조상인 동이족은 중국 대륙을 주름잡았습니다
역사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우리 선조의 역사는 불리한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것이지만...
우리에게 불리할 것이라 생각하여 거짓역사를 만들자고 주장하시는 것 같습니다
유불리를 따져서 역사를 조작하는 것은
족보를 분실했으면 족보를 찾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자기 족보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돈을 주고 번듯한 양반 족보를 사서 조상을 바꾸는 것은 똑 같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의 북한 지역이
고대 중국 왕조의 속지라는 동북공정을 중국이 완성하고 현재는 전세계에 전파하고 있습니다
중국 동북공정의 내용은
만리장성이 압록강을 넘어서 황해도까지 있다고 중국 일부 학자의 주장이 있고요
압룩강 부근의 돌로 만든 고구려의 호산산성을 허물고,
벽돌로 만리장성을 최근에 새로 만들어
압록강 부근 호산산성이 만리장성의 동쪽 시작점이라고 중국이 관광상품으로 홍보하고 있습니다
또한 북한 평양에 위만조선 낙랑군이 있었다는 엉터리 내용을
우리나라 중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가르키고 있다는 사실을 중국이 이용하여..
한나라(전한, 후한)부터(BC 194) 위나라를 거처 사마염의 진나라 까지(AD 313년)
약 500년 동안 북한지역이 중국 속지였다는 것이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 내용입니다
또한 북한 평양에 고구려 수도 평양이 있었다는
우리나라 역사교수들의 엉터리 주장으로 인해
고구려가 멸망한 후 북한 지역이 당나라 속지인 것으로 동북공정을 완성되어 있습니다
(바이두 백과 사전에서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고구려 백제 발해도 중국의 지방정권이라 내용이 동북공정 결과에 포함되어 있고요
따라서
엉터리 사실 거짓으로 만든 우리나라 역사로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반론하기도 어렵고 시기도 놓쳤습니다
진실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방법만이
중국의 동북공정을 허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남아있다고 봐야 합니다
@수구리 현재 민족사학계 그 어느 학자도 대륙동이는 인정하지만 우리나라 열국들이 저 그림처럼 위치했다고는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문헌적으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으나 고고학적 증거도 뒷받침되어야 할터입니다. 예전에 황순종(?)인가 하는 분이 저렇게 주장하는 걸 보긴 했습니만 아무튼 별로 동의가 안되고 저렇게 위치시키기 관심이 확 사라져버리네요. 다시 고증하여 새롭게 위치시켜 주시죠.
@장문휴 .
고증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천 사기의 춘추시대 연나라 위치, 전국시대 연나라 위치,
전국시대 연 5군의 위치가 하북성 중부지역 호타하 근처로 나왔고요
그리고 사마천 사기의 조선열전에서
위만조선 낙랑군이 하북성 중부 형수시 무강현에 있다고 일관되게 동일한 위치를 가르키고 있었습니다
이번의 글에서는
삼국지 위서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에 따른
고조선 열국을 비정하는 과정에서도...
지난번 비정과 다른 방법을 사용했음에도
위만조선 낙랑군이 하북성 중부 형수시 무강현에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따라서 비정 방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지극히 정상적으로 진행하였으니
비정된 위치는 정확하게 옳바르게 비정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고조선 열국의 정확한 위치입니다
@수구리 산동의 동이는 인정할 수 있으나 마한 서쪽에 바다가 있다했는데 일개 호수를 바다로 비정하는건 무리라고 봅니다.
좋은 머리로 다시 열국을 만주와 한반도로 위치시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 주장은 결코 동의를 얻기 어렵습니다. 흥미가 떨어져 보기가 싫습니다.
@장문휴 사마천의 사기권2 본기4의 해(海)의 집해(集解)에,
"서광이 말하기를 바다 해(海)자는 한편으로는 하(河, 큰 강, 큰 호수)의 의미로 사용한다.
(徐廣曰 海一作河)“ 고 했습니다
그리고 산동성 서쪽의 호수는 작은 호수가 아닙니다
( 독산호 + 소양호 + 미산호인
산동성 서쪽 호수의 길이는 160km, 최대 넓이가 40km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독산호 북쪽에 옛날에는 거야택이 있었으니 지금보다 길이가 2배 더 컸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