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성찰하는 노인의 지혜, 클린트 이스트우드 A to Z
Army 군복무
1. 군 복무 시절의 이스트우드 2. 한국 전쟁 출신의 해병대 하사관으로 출연한 [승리의 전쟁]
스무 살 때 그는 자신의 진로를 음악으로 정했고, 시애틀 대학 음대에 합격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입학 직전에 그는 징병되어 몬테레이의 포트 오드(Fort Ord)에서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수영 교관과 교육용 필름 영사기사로 군 복무를 했다(그는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했을 때 5km 이상 헤엄쳐 해변에 도착할 정도로 뛰어난 수영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군대는 그에게 인생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그곳에서 마틴 밀너와 데이비드 잰슨이라는 배우를 만났고, 그들은 클린트에게 배우가 되어 보라고 권유했다. 복무를 마친 후 제대 군인에 대한 지원금을 받아 LA 시립대학과 다른 교육 기관에서 연기를 배운 후 그는 1954년에 드디어 스튜디오의 카메라 테스트를 받게 된다.
Blue collar 블루 칼라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서 느껴지는 육체 노동자의 느낌은 그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클랜드 기술학교 시절 그는 블루 칼라 노동자들의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런 태도는 [더티 파이터](1978)의 필로 베도나 [브롱코 빌리](1980)의 브롱코 빌리 맥코이 같은 캐릭터에서 드러난다. 그는 전형적인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철강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공황 시절 일자리를 찾아 떠돌아다녀야 했고, 어머니는 IBM 공장 노동자였다.
이스트우드도 생계를 위해 어린 시절부터 육체 노동을 했는데, 방과후나 방학 기간에 캘리포니아 산림청에서 통나무를 베고 산불 끄는 일을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엔 정말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다. 경호원으로 일하기도 했고, 제지소에서 벌목을 했으며, 제철소 용광로에서도 일했다. 항공사에서 정비 일을 하기도 했으며, 주유소 주유원이나 건초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는 감독이 된 후, 완벽한 준비성과 철저한 현장 관리로 절대 정해진 제작비와 촬영 일정을 초과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랜 토리노](2008) 같은 영화는 35일 예정이었는데 33일 만에 촬영을 마쳤다), 이것도 블루 칼라 노동자 시절 몸에 밴 자기 관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Carmel 카멜
1. 시장 당선시 취임 연설을 하고 있는 이스트우드 2. 재직 기간 중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가 카멜을 방문했다
오랜 기간 동안 북캘리포니아 지방에 거주했던 이스트우드는 주 정부의 관료주의와 형식주의에 신물이 난 나머지 직접 카멜시 시장에 출마해 1986년에 당선되어 1988년까지 재직했다.
정치적으로 보면 그는 공화당에 가까운데, 대부분의 할리우드 스타들이 민주당 지지자인 것을 감안하면 보수적 성향을 띤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공화당 내 매파를 멀리한다. 그는 전쟁에 반대하며, 결정적으로 조지 부시 일가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부시가 일으킨 전쟁을 자기 파괴적이며 심각할 정도로 멍청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Don Siegel 돈 시겔
1. 현장의 이스트우드와 시겔 감독 2.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첫 연출작인 [어둠 속에 벨이 울릴때]에 돈 시겔을 바텐더 역으로 출연시켰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감독이라면,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그를 스타덤에 올린 세르지오 레오네와, 이스트우드가 감독이 되는 데 큰 도움을 준 돈 시겔을 들 수 있을 것이다(이스트우드는 [
용서받지 못한 자](1992)를 "세르지오와 돈에게 바칩니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감독 돈 시겔'과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첫 영화는 [
일망타진](1968). 이스트우드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이용한 경찰 드라마였다. 두 번째 영화는 [수녀와 무법자](1970)로, 이스트우드는 수녀(셜리 맥클레인)을 구하는 시니컬한 총잡이로 등장한다. 1971년엔 '시겔-이스트우드' 콤비의 영화가 두 편이나 나온다. [
매혹 당한 사람들]은 서부극이나 액션 일변도였던 이스트우드의 이미지에 큰 변화를 둔 작품. 이스트우드는 남북전쟁 중 부상을 입은 군인으로 등장하는데, 우연히 만나게 된 작은 마을의 사람들과 뒤엉키며 전개되는 충격적인 스릴러다. 그리고 같은 해 나온 [
더티 해리]는 엄청난 흥행을 일으키며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이스트우드가 시겔과 함께 한 마지막 작품은 [
알카트라스 탈출](1979). 샌프란시스코의 감옥 섬에서 촬영된 탈옥 영화였다.
1. 시겔과 이스트우드의 첫 영화인 [일망타진] 2. 마지막 영화인 [알카트라스 탈출]
이스트우드가 시겔에게 배운 가장 큰 교훈은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듣는 자세. 이러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스트우드도 시겔에게 많은 것을 제안할 수 있었고,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시겔의 현장 장악 능력과 명확한 연기 지시와 타이밍과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센스도 이스트우드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
더티 해리] 현장에선 이스트우드가 몸이 아픈 시겔 대신 몇 장면을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
매혹 당한 사람들]을 찍을 땐 감독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 이스트우드에게, 마치 워밍업이라도 시키듯 메이킹 다큐멘터리 연출을 맡기기도 한 돈 시겔 감독. 그렇게 만들어진 [매혹 당한 사람들: 스토리텔러](1971)는 장편과 단편을 모두 아우른다면, 이스트우드의 첫 연출작인 셈. 이후 장편 극영화 감독 데뷔작인 [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1)에서 이스트우드는 돈 시겔을 바텐더 역으로 카메오 출연시켰다.
Eastwood Rule 이스트우드 룰
1. [무법자 조시 웨일즈] 2. [로프를 찾아라]
[무법자 조시 웨일즈](1976)의 원래 감독은 필립 카우프먼이었지만 그는 1주일 만에 교체되었고, 이스트우드가 직접 메가폰을 잡았다. 이 사태에 대해 미국감독협회(DGA)는 하나의 원칙을 공표했다. 협회 소속의 감독이 연출을 할 때, 다른 감독에 의해 교체될 수는 있지만, 연출 중인 영화에 관련된 그 어떤 배우나 스태프에 의해서 교체될 순 없다는 것. 바로 '이스트우드 룰'(Eastwood Rule)이다. 이후 [로프를 찾아라](1984) 현장에서 리처드 터글 감독도 '이스트우드 룰' 덕에 크레디트에 감독으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한편 이스트우드의 전기를 썼던 마크 엘리엇의 주장에 의하면, [무법자 조시 웨일즈] 현장에서 카우프먼 감독과 이스트우드의 사이가 나빠졌던 결정적 이유는 당시 여주인공이던 산드라 록 때문이라는데... 그들은 우연히 같은 날 밤 산드라 록에게 저녁 식사와 데이트 제안을 했다고 한다. 이후 산드라 록은 이스트우드와 연인이 되어 14년 동안 동거한다.
Flags of Our Fathers [아버지의 깃발]
1. [아버지의 깃발] 2.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2006년에 내놓은 두 편의 영화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2차 대전을 바라보는 그의 두 가지 시선이다. 무대는 똑같이 이오지마 전투. [아버지의 깃발]은 '성조기를 꽂는 군인들'(Raising the Flag on Iwo Jima)이라는 그 유명한 기록 사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파헤치는데, 이 영화를 위해 꼼꼼히 리서치를 하던 이스트우드는 당시 일본군 사령관이었던 타다미치 구리바야시라는 인물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그 결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기획하게 되었다.
이스트우드의 전쟁영화엔 영웅주의가 없다. 그는 죽은 자들을 추모하고 위로하며, 적이었던 미군과 일본군에 대한 두 편의 영화를 만듦으로써 이젠 지난 세기의 아픔이 된 2차대전이라는 비극에 대한 화해를 주선한다. 전쟁영화가 만들어낼 수 있는 거대한 스펙터클이나 휴머니즘보다는, 죽고 죽일 수밖에 없었던 두 나라 병사들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 철저히 미국 병사와 일본 병사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두 영화의 두 가지 이야기는 서로의 반대편에 자리하면서 결국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건넨다.
Gran Torino [그랜토리노]
1. [그랜 토리노]의 한 장면 2. 현장에서 촬영감독 톰 스턴과 함께
이스트우드가 연출한 영화 중 가장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바로 [그랜 토리노](2008)다. 북미 지역에서 1억4,81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둔 이 영화는, 자극적인 이야기나 화려한 스펙터클 없이, 오로지 드라마의 힘과 캐릭터의 진중함, 그리고 묵직한 메시지로 관객을 움직였다.
현재까지 '배우 이스트우드'의 마지막 작품인 이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월트 코왈스키. 한국전쟁의 아수라장을 겪었던, 이젠 유산을 노리는 자식들과 늙은 개 한 마리와 클래식 카 '그랜 토리노'밖에 남지 않은 노인이다. 그는 우연히 이웃의 동양계 소년 타오를 알게 되고, 삶의 새로운, 그리고 마지막 전쟁에 직면하게 된다. 이스트우드의 '마초 총잡이' 캐릭터에 기댄 코왈스키는, 희생과 구원의 삶을 선택하면서 과거의 이미지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재미있는 건, 한때 이 영화가 [
더티 해리] 시리즈의 마지막 속편이라는 루머가 돌았다는 사실.
Harry Calahan 해리 캘러헌
[더티 해리] 시리즈의 거친 형사 해리 캘러헌
스파게티 웨스턴의 총잡이와 함께 배우 시절 이스트우드의 가장 대표적인 캐릭터는 단연 '거친 형사' 해리 캘러헌이다. 1971년 돈 시겔 감독의 [더티 해리]를 통해 선보인 이 캐릭터는,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폭력을 통해 악당을 응징하는, 길 거리에서 매그넘 권총을 빼 들고, 경찰 내부에선 조직의 명령과 항상 삐걱거리는 인물. 그는 궁지에 몰린 범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여섯 발, 아니 다섯 발을 쐈다고 생각하지? 솔직히 나도 지금 흥분해서 정신이 없어. 이건 44구경 매그넘, 세상에서 제일 센 권총이지. 네 머리를 날려버릴 수도 있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봐. '나는 운이 좋은가?'라고. 그래, 넌 운이 좋으냐?"
도시에 대항하는 희망 없는 싸움의 주인공. [더티 해리] 시리즈의 폭력은 충격적이었고, 이스트우드는 영화사상 가장 신랄하고 고독한 경찰이 된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모호했다. 그는 경찰이라는 사실 말고는 범죄자와 아무 차이가 없었다. 아니, 더욱 심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이 강조했던 '법과 질서'는 어쩌면 이스트우드에 의해 구현되고 있었을지도 모르며, 그 '폭력 경찰'은 도시 근교의 백인들을 사로잡았다. 당시 미국 백인들에겐 불안 심리가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보호받기를 원했다. 그때 '더티 해리'가 등장한 것이다.
이후 테드 포스트 감독의 [
매그넘 포스](1973), 제임스 파고 감독의 [
집행자](1976), 이스트우드가 직접 메가폰을 잡은 [
서든 임팩트](1983) 그리고 시리즈의 마지막인 버디 밴 혼 감독의 [
추적자](1988)까지 17년 동안 다섯 번 해리 캘러헌이 된 이스트우드. 그는 말한다. "나는 실제 삶에서의 폭력을 옹호하는 사람이 아니다. 만일 내가 보다 많은 폭력을 부추기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면, 다시는 그런 영화들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In the Line of Fire [사선에서]
이스트우드가 감독도 제작자도 아닌 '배우로만' 참가한 마지막 영화는 바로 [사선에서](1993)다. 캐슬락 엔터테인먼트와 콜럼비아가 제작한 이 영화에서 제작자는 이스트우드에게 감독을 고를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그는 독일 출신의 볼프강 페테르젠 감독을 선택했다. 그가 맡은 역은 대통령 경호원인 프랭크 호리건. JFK가 암살 당하던 현장에 있었던 그 죄책감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는데, 대통령의 암살을 노리는 테러리스트의 등장으로 그의 신경은 다시 한 번 곤두선다.
"이스트우드는 관객이 '그가 할 수 있을까'라고 의심하는 것보다 항상 많은 것을 주는 배우다." "이 영화에서 이스트우드가 그토록 파워풀하게 보이는 건, 그가 현재의 액션을 과거의 존재감을 통해 물들이는 방식 때문이다. 그 어떤 미국 배우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스트우드는 배우로서 자기 자신의 한계를 잘 안다. 그는 다른 누군가를 연기할 수 없다., 그는 자기 자신의 그 어떤 면을 연기해야 한다." "미국 영화에서 가장 위대한 두 개의 풍경을 꼽으라면 존 포드 서부극에 등장하는 모뉴멘트 밸리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얼굴이다." 이 영화에서 이스트우드가 보여준 이미지와 모습에 대한 찬사들이다.
Jazz 재즈
1. 찰리 파커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버드] 2. 포레스트 휘태커는 이 영화로 칸영화제 남자 연기상을 수상했다. 트리뷰트 콘서트에서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는 이스트우드
이스트우드의 유년기는 외로웠다. 그래서 피아노를 배웠고 16살 때는 살롱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그때 오클랜드에서 열린 '재즈 앳 더 필하모닉'(Jazz at the Philharmonic) 콘서트에서 처음으로 찰리 파커의 연주를 들었다. '아무도 저렇게 연주하지 않는데, 저 사람은 저런 걸 어디서 배웠을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한 것일까? 그는 카멜의 시장으로 일하는 동한 찰리 파커의 일대기인 [버드](88)를 구상한다. 재즈를 통해 인종을 초월하고 통합시켰던 흑인 천재에 대한 이 영화를 만들면서 그는, 그 영화를 사람들이 보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재즈에 대한 이스트우드의 광적인 열광은 그의 영화 현장에도 반영된다. 그의 현장은 재즈처럼 즉흥적이다. 이스트우드는 직관적이고 느낌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며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한다. 연출 스타일은 지시를 많이 하지 않고 요점만 전달하는 방식. "배우들의 연기를 위해서는 감독이 긴장하지 않고 톤을 유지해야 한다. 혼란 속에서 에너지를 뽑으려는 감독도 있는데, 나는 그런 게 너무 싫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1996년엔 카네기홀에서 재즈 애호가 이스트우드를 위한 조촐한 행사가 있었다. 그를 위한 트리뷰트 개념의 콘서트가 열린 것. "미국의 진정한 예술 두 가지를 꼽으라면 재즈와 웨스턴"이라고 말하는 이스트우드는 콘서트에서 이렇게 인사말을 던졌다. "저는 재즈를 사랑합니다. 오늘의 이 위대한 유산을 다음 세대로까지 전수합시다." 그리고 직접 피아노 앞에 앉아 즉흥 연주를 했다.
Kids 자녀들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겐 3남 4녀가 있다. 첫 아이 킴버 이스트우드(1964년생)은 TV 시리즈 [
로하이드](1959~66) 당시 알게 된 스턴트우먼 록산느 튜니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하지만 당시 이스트우드는 매기 존슨(1953년 결혼. 1979년부터 별거. 1984년에 이혼)과 결혼한 상태였다. 매기와의 사이에선 첫 아들 카일 이스트우드(1968년생)과 딸 앨리슨(1972년생)을 낳았다.
스콧 이스트우드(1986년생)와 캐스린 이스트우드(1988년생)는 이혼 후 연인이었던 재슬린 리브스와 낳은 아이들. [
핑크 캐딜락](1989) 때 만난 배우 프랜시스 피셔와의 사이엔 딸 프란체스카 피셔-이스트우드(1993년생)가 있다. 그리고 [
용서 받지 못한 자]로 주목 받을 당시 자신을 인터뷰하러 찾아왔던 앵커우먼 디나 루이스와 1996년에 두 번째 결혼을 했고, 그해 12월에 모건 이스트우드(1996년생)를 낳았다. [
앱솔루트 파워](1997)에 출연하기도 했던 킴버는 현재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활동 중. 카일 이스트우드는 뮤지션으로 뉴욕의 재즈 커뮤니티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앨리슨과 스콧은 배우로 활동 중이다.
lovers 연인들
1. 이스트우드와 산드라 록 2. [용서받지 못한 자]로 오스카를 수상했을 때, 그의 곁엔 프랜시스 피셔와 어머니 루스 이스트우드가 있었다
떠들썩한 스캔들은 없었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겐 수많은 연인들이 있었다. 그의 첫 연인은 배우였던 질 배너. 이후 알리 맥그로와도 잠깐 연인 관계였다(그녀는 이후 [
러브 스토리](1970)로 스타덤에 올랐고 스티브 맥퀸과 결혼했다). 이후 1940년대의 미국 수영 챔피언이었던 아니타 로에스트와 잠시 사귀었고(1950~51년) 1953년에 수영복 모델이었던 매기 존슨과 첫 번째 결혼을 한다.
존슨과 결혼한 상태에서도 이스트우드는 몇몇 여성과 염문을 뿌렸는데, 스턴트우먼이자 댄서였던 록산느 튜니스가 대표적. 10년 넘게 내연 관계였던 그녀와는 첫 딸 킴버를 낳기도 했다. 페기 립튼(1965년), 잉거 스티븐스(1968년), 진 세버그(1969년), 조 앤 해리스(1971년), 케이 렌즈(1973년), 산드라 록(1975~90년), 제이미 로즈(1983년), 레베카 펄(1983~86년), 대니 크레인(1990년), 프랜시스 피셔(1990~95) 등은 모두 한 번 이상 영화에서 공연했던 상대 여배우들이다. 카트린느 드뇌브(1966년)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1989년)도 한때 이스트우드의 연인이었다.
이들 중 산드라 록은, 결혼만 하지 않았지 거의 부부나 마찬가지였는데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연출한 5편의 영화에 그녀를 주연으로 기용했고, 두 편의 작품에선 배우로서 공연했다. 산드라 록의 감독 데뷔작 [
랫보이](1986)을 제작한 사람도 바로 이스트우드다. 하지만 둘은 1990년에 헤어졌고, 산드라는 (결혼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이혼 수당이 아닌) 별거 수당을 청구하는 소송을 청구했고, 10년 가까이 이어진 법정 싸움 끝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꽤 거액으로 합의했다고 한다. 이후 1996년에 디나 루이스와 결혼한 이스트우드는 66세의 나이에 늦둥이를 보며 더 이상 스캔들 없이(!) 살고 있다.
Musical 뮤지컬
1. [페인트 유어 왜건] 2. [고독한 방랑자]에서 노래하는 이스트우드
이스트우드에게 단 한 편의 뮤지컬 영화가 있으니 바로 [페인트 유어 왜건](1969)이다. 리 마빈, 진 세버그 등과 함께 출연하는 '범죄 코미디 뮤지컬 서부극'인 이 영화에서 그는 여러 곡의 노래를 직접 부른다. 이후 그는 영화 속에서 종종 노래를 부르거나 사운드트랙에 자신이 부르는 노래를 넣곤 했는데, [수녀와 무법자] [고독한 방랑자](1982) [
매혹 당한 사람들] [
브롱코 빌리] [
더티 파이터] [
켈리의 영웅](1970) [
미드나잇 가든](1997) 등이 이스트우드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영화들. 직접 영화음악을 작곡하기도 하는데 [
미스틱 리버](2003) [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5) [
아버지의 깃발] [
체인질링](2008) [
히어애프터](2010) 등은 그가 음악 작업을 한 영화들이다.
Next projects 차기작
현재 촬영중인 그의 차기작은 [
J. 에드가]. 2012년 개봉 예정으로, FBI의 전설적인 인물이었으며 1924년부터 197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48년 동안 국장직에 있었던 J. 에드가 후버의 전기 영화다. 동성애나 복장 도착 같은 그의 사적인 측면과 스캔들에 초점을 맞춘 영화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후버 역을 맡은 상태. 조쉬 루카스가 찰스 린드버그 역을 맡았고, 이외에도 나오미 왓츠, 주디 덴치, 더모트 멀로니 등 쟁쟁한 배우들이 등장한다.
Oscar 오스카
1. [용서받지 못한 자] 2.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이스트우드
배우로서 최고의 흥행력을 갖추었고, 1971년 감독 데뷔 이후 꾸준히 작품을 내놓았지만 오스카는 그에게 냉담했다. 그 봉인이 풀린 건, 1993년 시상식. 그는 예순세 살의 나이에 작품상과 감독상과 남우주연상 후보에 동시에 올랐고, 작품상과 감독상 트로피를 양손에 쥐게 되었다. 이후 그는 오스카의 단골손님이 되었는데, 1995년 시상식엔 그가 제작한 작품들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어빙 G. 탤버그 상이 수여되었고, 2004년 시상식엔 [
미스틱 리버]로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에 올랐으며, 2005년 시상식에선 [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12년 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작품상과 감독상과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역시 마찬가지로 작품상과 감독상 트로피를 양 손에 쥐었다. 2007년엔 [
아버지의 깃발]로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그의 영화를 통해 오스카 트로피를 가져간 배우들도 꽤 있는데, [
용서받지 못한 자]의 진 해크먼(남우조연상), [미스틱 리버]의 숀 펜(남우주연상)과 팀 로빈스(남우조연상),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힐러리 스웽크(여우주연상)와 모건 프리먼(남우조연상) 등이 그 주인공.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의 메릴 스트립, [미스틱 리버]의 마샤 게이 하든, [
체인질링]의 안젤리나 졸리, [
우리가 꿈꾸는 세상: 인빅터스]의 맷 데이먼 그리고 이스트우드 자신은 수상을 하진 못했지만 노미네이션의 영광을 안았다.
Play Misty for Me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1.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의 한 장면 2. [매혹 당한 사람들] 현장에서 직접 카메라를 잡으며 다큐멘터리를 찍는 이스트우드
이스트우드에게 감독의 꿈을 심어준 사람은 돈 시겔 감독. 그는 클린트에게 뭔가 안목이 잇다며, 꼭 영화 연출을 한 번 경험해보라고 권했다. 당시는 배우에서 감독으로 변신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던 시절. 이때 돈 시겔은 이스트우드에게 딱 한 가지 충고만 했다. "카메라에 자네 자신을 담게 될 때 대충 넘어가지 말게나. 그러다가 버릇 된다네."
사실 이스트우드의 첫 영화는 다큐멘터리였다. 돈 시겔이 감독한 [
매혹 당한 사람들]의 현장을 스케치한 단편. 하지만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1) 이후 그는 본격적인 감독의 길을 걷게 된다. 작은 마을의 DJ를 스토킹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인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는 소수의 스태프와 80만 달러의 적은 제작비로 만들어진 영화. 하지만 1,0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거두며 선전했고, '감독 이스트우드'에겐 꽤 괜찮은 시작이 되었다.
그의 연출 스타일은 지시를 많이 하지 않고 요점만 전달하는 방식. "배우들의 연기를 위해서는 감독이 긴장하지 않고 톤을 유지해야 한다. 혼란 속에서 에너지를 뽑으려는 감독도 있는데, 나는 그런 게 너무 싫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Quigley Publications 퀴글리 연감
1. 이스트우드의 흥행 1위작인 [그랜 토리노] 2. 그 뒤를 잇는 [사선에서]
퀴글리 출판사에선 매년 연감을 발표해 그 해 최고의 흥행 배우를 선정하는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1973년 처음으로 1위에 올랐고 이후 1974년, 1984년, 1985년, 1994년까지 총 다섯 번 1위에 선정되었다.
여기서 그의 흥행 기록을 잠시 살펴보면 먼저 배우로서 최고 흥행작은 1억4,810만 달러의 [그랜 토리노]. 1억 달러의 수익을 넘긴 영화로는 [사선에서](1억231만 달러) [
용서받지 못한 자](1억116만 달러) [
밀리언 달러 베이비](1억49만 달러) 등이 있다. 시기 별로 보면 1960년대 최고의 흥행작은 [
석양의 무법자](1966). 미국 시장에서 2,51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1970년대엔 [
더티 파이터]가 8,520만 달러로 단연 최고. 1980년에 나온 속편도 7.069만 달러로 큰 수익을 거두었다. 1970년대에 나온 [
더티 해리] 시리즈 세 편은 모두 3,000~5,0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두며 선전했고, 돈 시겔 감독과의 마지막 영화인 [
알카트라스 탈출]도 4,300만 달러의 수익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1980년대엔 [
더티 파이터 2]를 선두로 여전히 [더티 해리] 시리즈가 인기 있었으며, [
화이어폭스](1982) [
로프를 찾아라](1984) [
페일 라이더](1985) [
승리의 전쟁](1986) 등 4,000만 달러 이상의 흥행을 기록한 작품들이 꾸준히 이어졌다. 두 편의 1억 달러 이상 흥행작을 낸 1990년대엔, 앞의 두 작품 외에도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7,152만 달러) [
앱솔루트 파워](5,007만 달러) 등의 흥행작이 있으며, 2000년 이후엔 의외로 [
스페이스 카우보이](2000)가 1억 달러에 육박하는 성적(9,046만 달러)을 거두었다. 감독으로서도 큰 차이는 없는데, [
미스틱 리버]가 9,014만 달러의 성적으로 선전했다.
Rawhide [로하이드]
단역을 전전하던 이스트우드에게 한 줄기 빛을 내려준 작품은 바로 TV 시리즈 [로하이드]였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CBS에 놀러 갔을 때 그를 우연히 본 방송사 간부는 카우보이 역에 적격이라고 생각했고, 그는 그렇게 캐스팅되었다. 당시 TV의 서부극 시리즈는 큰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CBS는 [로하이드]를 10회 정도 방영한 후 반응이 신통치 않자 접을 생각을 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어 [로하이드]를 계속 이어갔고, 카우보이인 라우디 예이츠라는 캐릭터로 무려 7년(1959~1965)을 살았다.
처음엔 분량이 많지 않았지만 점차 마초 헝크(몸 좋고 섹시한 남자) 이미지를 굳혀가며 인기를 모았고, 1년에 1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스타가 되었다. 이스트우드에게 탄탄한 초석이 된 [로하이드]. 이후 그는 선량한 카우보이 이미지를 벗고 무법자가 된다.
Spaghetti western 스파게티 웨스턴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약 10년간 이탈리아 상업영화계를 장악했던 스파게티 웨스턴의 본격적 시작은 이스트우드와 레오네가 만났던 1964년의 [황야의 무법자]였다. 사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은 [로하이드]를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영어가 서툴러 현장에서 이스트우드와 거의 소통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영화사상 가장 마초적이고 폭력적이며 외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이스트우드가 스파게티 웨스턴에서 보여준 무표정은, 사실 긴 시간이 응축된 마스크였다. 재즈 애호가였던 그는 레스터 영 같은 연주자를 보며 가슴이 고동쳐도 냉정을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제임스 딘 같은 배우, 잭 케루악 같은 작가, 쳇 베이커 같은 뮤지션이 보여준, 새로운 방식의 섹시함 또한 이스트우드의 머릿속에 있었다. 드디어 그것을 써 먹을 시간이 왔고, 그는 그 이미지들을 기억해냈다.
사실 [황야의 무법자]에 내정된 배우는 제임스 코번이었지만 그는 개런티가 비쌌다. 당시 가난했던 이탈리아 영화계는 1만5,000달러의 개런티를 지불하고 이스트우드를 대타로 기용했다. 레오네는 이스트우드의 나른하고 고양이 같은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1. [석양의 무법자] 2. 현장의 레오네 감독과 이스트우드
역할을 만들어나가면서 이스트우드가 영감을 받은 캐릭터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
요짐보](1961)에 나오는 미후네 도시로였다. 그 결과 이스트우드는 '비정하고 잔인한 게리 쿠퍼'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는 레오네 감독이 원하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바로 신화적이며 전형적인 캐릭터였다. 그는 말이 아닌 몸으로 연기했고, 표현을 억제했다.
영국의 대배우이자 이스트우드와는 [
독수리 요새](1969)에서 공연했던 리처드 버튼은 이스트우드의 연기 스타일을 이렇게 평가했다. "클린트는 스펜서 트레이시, 제임스 스튜어트, 로버트 미첨 같은 배우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에겐 '역동적인 무기력함'이 있다. 카메라 앞에선 아무 것도 안 할 것처럼 그냥 서 있는 것 같지만, 결국엔 모든 것을 해낸다." 표현을 최소화하고 표정을 아끼는 배우. 그런 면에서 이스트우드는 미국의 전통적인 남성상에 맞닿아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가 이탈리아에서 찍었던 영화에 대해, 고향인 미국의 저널과 대중은 냉소적 폭력적이라고 비판했고 이스트우드를 냉혹한 살인자로 취급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뭔가 새로운, 낡은 법을 부수고 좀 더 현명하면서도 위험한 액션 영웅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스트우드는 그러한 대중의 요구에 부응한 셈이고, [
더티 해리] 시리즈의 거친 형사 해리 캘러헌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Thelonious Monk: Straight, No Chaser [델로니어스 몽크]
이스트우드의 활동 중 중요한 영역은 뮤지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것이다. 찰리 파커에 대한전기 영화 [
버드]를 연출했던 1988년, 그는 전설적인 재즈 피아니스트인 델로니어스 몽크에 대한 다큐멘터리 [
델로니어스 몽크]를 제작했다. 이후 1998년엔 몬테레이 재즈 페스티벌을 담은 비디오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재즈 가수인 토니 베넷, 작곡가였던 쟈니 머서, 재즈 피아니스트인 데이비드 그루벡 등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2003년엔 다큐멘터리 [피아노 블루스]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그의 다큐 제작이 뮤지션에만 한정되는 건 아니다. 서부극 감독인 버드 보에티처에 대한 TV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그는, 2008년엔 시사주간지 [타임]의 영화평론가 리처드 쉬켈을 감독으로 워너브러더스의 역사에 대한 다큐를 만들기도 했다.
Unforgiven [용서받지 못한 자]
이스트우드는 스파게티 웨스턴에서 어렵사리 구축한 무법자 이미지를 스스로 깨트린다. 그 시작은 [
평원의 무법자](1972)였고, 그는 서부극을 뒤집기로 작정한 듯 보였다. 마틴 스콜세지는 이스트우드를 이렇게 분석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1950년대, 즉 원폭 이후 사회의 산물이다. 존 웨인, 제임스 스튜어트, 헨리 폰다, 게리 쿠퍼 같은 배우들의 낭만주의는 그에게 없다. 대신 그는 인간의 어둡고 왜곡된 부분을 건드렸다. 그리고 독특하면서도 강하고 건조한 위트와 유머를 가미했다."
[
무법자 조시 웨일즈](1976)에서 이스트우드는 존 포드의 [
수색자](1956)에 오마주를 바치면서 한편으로는 뒤집는다. 남북전쟁 당시의 부패한 사회상이 농부를 무법자로 만든다는 이 영화에서 이스트우드가 맡은 주인공 조시 웨일즈는 가족을 죽인 범인을 찾아 나선다. 이 영화는 서부극으로서는 파격적인 인종적 견해를 보여준다. 그는 선한 인디언 캐릭터를 만들어냈고, 조시 웨일즈는 결국 복수를 거부한다. 이 영화는 베트남 전쟁을 암시하는 반전 영화였다.
그리고 1992년 [용서받지 못한 자]가 이어진다. 그를 거장의 자리에 안착시킨 이 영화에서는 그는 '왕년의 무법자 총잡이' 윌리엄 머니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반영한다. 그는 다시 말을 타고 총을 잡는다. 하지만 그가 다시 만난 서부는 그 어떤 전설도 사라진 황량한 공간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이 영화를 하는 것이 매우 시의적절 하다고 생각했다. 폭력은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어떤 결과를 남긴다는 내용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서부극에서 폭력은 종종 미화되고 낭만화된다. 나는 그 신화를 벗겨내고 싶었다." 그는 이 말과 함께 서부극 장르에 작별을 고한다. 폭력에 의한 구원은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Vanessa in the Garden [정원의 바네사]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감독 필모그래피 중엔 두 편의 TV 작품이 있다. 다큐멘터리인 [피아노 블루스]와, 스필버그가 제작했던 TV 시리즈인 [
어메이징 스토리]의 한 에피소드인 [정원의 바네사](1985)다. TV 극영화로는 유일한 작품인 셈. 하비 케이틀과 산드라 록이 출연하는 [정원의 바네사]는, 아내를 잃은 화가가 아내의 유령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다시 불러들인다는 내용이다.
White Hunter Black Heart [추악한 사냥꾼]
촬영 준비보다는 코끼리 사냥에 사로잡힌 영화감독 존 윌슨. 분주한 스태프들 사이에서 커다란 수컷 코끼리에게 방아쇠를 당길 순간만을 기다린다. 촬영을 앞두고 원주민으로부터 코끼리 떼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곧장 달려가지만, 정작 코끼리 앞에선 쏘지 못한다. 그리고 무고한 희생자만 생긴다. 그 앞에서 존 윌슨은 힘 없이 "액션"을 내뱉으며 촬영을 시작한다.
존 휴스턴 감독이 험프리 보가트와 캐서린 헵번 주연의 [
아프리카의 여왕](1951)을 찍을 때의 에피소드를 영화로 옮긴 [추악한 사냥꾼]는, 어느 영화감독의 집착과 광기를 통해 나약한 인간의 내면을 탐구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위대한 감독의 이면을 보여주면서, 일종의 '신화 벗기기' 작업을 수행한다. 원제인 '백인 사냥꾼, 검은 마음'은 원주민들이 존 윌슨에게 하는 말이다.
(e)Xtra 단역 시절
1. 연구원으로 나온 [괴물의 복수] 2. 비행사로 나온 [타란툴라]
20대 중반에 첫 영화를 찍었으니 꽤 늦은 데뷔였고, 여기에 이스트우드는 4~5년 동안의 무명 시절도 겪었다. 하지만 이런 느린 성장 과정 속에서 이스트우드는 단 한 번도 조급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항상 뭔가를 배우는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
사실 그의 20대 경력은 한심했다. 1954년에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들어가 주급 75달러를 받았던 시절, 그는 실습생이었다. 첫 작품은 [괴물의 복수 Revenge of the Creature](1955). 과학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다. 이후 그는 다양한 장르의, 하지만 저예산 B급 영화에서 자막에 이름도 못 올리는 단역을 맡았다. 하지만 1955년에 유니버셜에서 쫓겨나는데, 그 이유는 배우가 되기엔 목젖이 너무 크다는 것. 해고 당했을 때 빈털터리였지만 배우 생활을 접기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이때 운명처럼 TV 시리즈 [
로하이드]를 만나게 된다.
단역 시절을 이스트우드는 긍정적으로 회고한다. "배울 게 많았다.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야 하고, 맘에 들지 않는 스토리라도 해야 한다. 그러면서 많은 배우들을 만나고 많은 아이디어를 접하며 다양한 감독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면서 배우게 된다. 이 사람처럼 해야겠다, 혹은 이 사람처럼 하지 말아야겠다."
Youth 유년기
공황기인 1930년에 태어난 이스트우드는, 일자리를 따라 캘리포니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던 아버지 때문에 수많은 이사를 해야 했다. "항상 길 위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돌아다니는 생활이 좋았죠"라고 낭만적으로 회상하지만, 친구 없이 상상 속에서 놀아야 했던 외로운 유년기였고, 그의 어머니인 루스 이스트우드는 "장난감과 대화하는, 조금은 달랐던 아이"라고 어린 이스트우드를 기억했다.
그의 전기를 쓴 영화평론가 리처드 쉬켈은 이렇게 말한다. "언제나 낯선 존재였죠. 천성적으로 수줍음을 많이 탔던 것 같아요. 잘 어울리지 못했어요. 그래서 혼자 있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에 흥미를 느꼈고, 그래서 피아노를 배웠겠죠." 그 덕에 이스트우드는 틴에이저 시절 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며 용돈을 벌 수 있었고, 음악에 대한 그의 애정은 이후 영화감독이 되어서도 좋은 자양분이 된다.
Zeitgeist 시대 정신
[
더티 해리]가 1970년대 초 백인 중산층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
용서받지 못한 자]가 걸프전 시대의 미국에 대한 언급이듯,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의 영화들은 시대 정신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의 영화는 현재 시대의 정신뿐만 아니라, 과거로 돌아가 미국의 역사를 조용히 바라보며, 그 위에 덧씌워 있는 신화를 벗겨낸다. 서부 개척기를 다룬 [
페일 라이더](1985)나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그는 서부의 영웅상을 파괴하고, 그 시기는 미국의 황량했던 시절일 뿐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스트우드는 역사 속의 드라마를 끌어낸다. [체인질링]은 1920년대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충격적인 유괴 사건의 전말을 그리고, [
고독한 방랑자]는 대공황이 휩쓸고 지나간 미국의 중서부 지역을 배경으로, 떠돌이 컨트리 가수를 통해 그 시기의 일상과 문화를 조명한다. 2차대전에 대한 두 편의 영화 [
아버지의 깃발]과 [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전쟁의 참혹함을 가차 없이 드러낸다.
1958년 인류 최초의 우주인이 되고 싶었던 미 공군 최정예 조종사 팀의 이야기인 [
스페이스 카우보이]는 42년 후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퍼펙트 월드](1993)는 케네디가 암살된 1963년을 배경으로, '완전한 세상'을 꿈꾸는 탈옥수와 소년의 로드무비다. 그리고 그의 다음 프로젝트는, 8명의 대통령을 거치며 미국 사회를 장악했던 FBI 국장 에드가 후버의 이야기다. 현재와 과거를 아우르며 미국이라는 나라의 맨 얼굴을 드러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는 진정한 '시대 정신'의 실천자다.
첫댓글 마주 앉아 담배 한번 같이 피우고 싶은 사람이다 히히
아하,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