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엿보기
얼음 강을 건너온 미나리체(달아실)
손한옥
2002년 《미네르바》, 2016년 《미소문학》으로 등단. 시집 『목화꽃 위에 지던 꽃』, 『직설적, 아주 직설적인』, 『13월 바람』, 『그렇다고 어머니를 소파에 앉혀 놓을 수는 없잖아요』
손한옥 시인에게 있어 놓쳐서는 안될 콘텍스트는 바로 ‘엄마’와 ‘밀양이라는 지수화풍(地水火風)’ 그리고 ‘코끼리’다. 엄마는 앞서 이야기 하였으니 이번에는 ‘밀양이라는 지수화풍’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이란 게 무엇이던가. 만물 생성의 근본 아니던가. 내 몸을 이루는 것이 또한 지수화풍이니, 삶과 죽음 또한 지수화풍의 이합집산의 결과 아니던가. 그렇다면 시인이 말하고 싶은 ‘밀양이라는 지수화풍’은 과연 무엇일까. 두 번 째 시집(『직설적, 아주 직설적인』)에서 시인은 「나의 시원(詩原), 밀양의 지수화풍(地水火風)에게」라는 산문을 통해 아주 길게 직접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워낙 길어서 여기에 옮길 엄두가 나질 않았는데, 다행스럽게도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그 길고 긴 사연을 몇 편 시로 풀어놓았다. 그가 스스로 명명한 ‘밀양이라는 지수화풍’은 과연 어떤 모습이고, 그것이 어떻게 손한옥 시인의 시적 콘텍스트로 작용했을까.
대도시 부산에 살던 시인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위암에 걸린 아버지를 따라 그의 생가가 있는 고향, 소읍 밀양으로 이사를 오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긴 늪 숲을 지나 다원 벌을 지나 금곡다리를 지나 애장들겅을 지나 수통미를 지나 양당 뜰을 지나 상엿집을 지나 단장면 미촌리 사촌 보리포구 당산나무 숲을 지나면 나의 생가 나온다//새봄에 오래된 봄처럼 보았다 백 년 늙은 감나무 연둣빛 새순 꼬추 달린 머슴아와 놀던 여섯 살 앉아 있다//여린 듯 거칠고 아리고 몹씋 시/내 피를 돌고 돌아 불감당인 말들/수통미에서 이따리목까지 끓이지 않고 흐르는 무진한 시 종자들/고종감 반시감 뚤뚤이감 동이감 붉디붉게 익어가는
-「밀양 1」 전문
위암 걸리신 아버지와 우리는 고향인 단장면 미촌리 구미로 이사 왔다/시골 아이들은 빨간 모자 달린 옷을 입고 부산에서 전학 온 내가 우상이었다/아이들은 나를 데리고 다니며 마을 곳곳의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조심하라고/귀신이 있는 곳까지 알려주었다 귀신은 어둡고 컴컴한 곳 가마니 드리워진 변소나 오래된 바위거나 고목 아래 있다 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귀신을 나는 믿고 지내며 조심조심 살았다//바람과 구름과 진달래 감나무와 밤나무 탱가리와 꺽두구 쑥과 소나무 사나운 태풍과 붉은 홍수 구릉논과 양달 뜰과 이따리목과 칠탄정 피라미와 버들피리 풍개와 대꽃 참외와 포도 살구꽃과 가지 당국화와 우물 아버지의 임종과 지붕 위의 헌 옷 짚으로 만든 머리띠와 대나무 지팡이 까마귀와 까치 새끼줄 감긴 빈소와 곡소리 엄마와 어니와 내 동생 욱이 사무치는 그 땅 봄 여름 가을 겨울 꿈속에서도 찬란한 땅 밀양 내 시종자의 고향
-「밀양 2」 전문
손한옥 시인의 시원을 찾아가려면 “긴 늪 숲을 지나”야 하고 “다원 벌을 지나”야 하고 “금곡리를 지나”야 하고 “애장들겅을 지나”야 하고 “수통미를 지나”야 하고 “양달 뜰을 지나”야 하고 “상엿집을 지나”야 하고 “보리포구 당산나무 숲을 지나”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거기에 “백 년 늙은 감나무” 아래 “꼬추 달린 머슴아와 놀던 여섯 살” 유녀의 시인이 앉아 있다.
이제야 알겠다. 손한옥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손한옥 만의 시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여린 듯 거칠고 아리고 몹쓸 시”와 그의 “피를 돌도 돌아 불감당인 말들”과 “무진한 시종자”(「밀양 1」)들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이제야 알겠다. “바람과 구름과 진달래” “감나무와 밤나무” “탱가리와 꺽두구” “쑥과 소나무” “사나운 태풍과 붉은 홍수” “구릉논과 양당 뜰과 이따리목과 칠탄정” “피래미와 버들피리” “풍개와 대꽃” “ 참외와 포도” “살구꽃과 가지” “당국화와 우물” “아버지의 임종과 지붕 위의 흰옷” “짚으로 만든 머리띠와 대나무 지팡이” “까마귀와 까치” “새끼줄 감긴 빈소와 곡소리” “엄마와 언니와 내 동생 욱이 사무치는 그 땅” “봄 여름 가을 겨울 꿈속에서도 찬란한 땅”(「밀양 2」)이 밀양이고 ‘밀양이라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다. “살구꽃 찔레꽃 가지꽃 채송화 황국 지천”에 피었고, “나를 업고 키운 여윈” 언니의 등, “오줌 묻어 따가웠을 여덟 살” 언니의 등이 아직도 “별등”(「저, 별등」)으로 빛나는 그곳이 밀양이고 ‘밀양이라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다. 그곳에서 손한옥 시가 시작된 것이었다.
-박제영 시집해설, 「미나리체로 쓰여진 시, 모심과 모심의 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