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원효』
내가 오늘 아무리 비우려고 해도 비워지지 않는 마음속 찌꺼기를 어떻게 하면 비울 수 있겠습니까? 비워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를 물어보기 위해 불자들이 수시로 스님을 찾았다. 이에 스님은 천 명의 대중을 모아놓고 화엄경을 설했다고 하는 천성산 화엄벌을 찾아서 수좌(首座)*처럼 억새 융단 위에 앉아 스님 말씀을 들어보려 하기도 하고, 산 8부 능선쯤에 있는 원효암 마당에서 스님의 명호(名號)를 불러봐도 스님은 대답하지 않는데, 한승원* 작가는 잘도 스님을 불러 만나고 왔다고 하고, 직접 무등산 원효사를 찾아서는 70살쯤 되어 보이는 원효스님의 화신 같은 노스님을 만나고 왔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스님! 스님께서는 중생을 만나실 때 어떤 편견을 가지고 만나고 그러나요? 그렇다면 저는 더 이상 스님을 찾지도 무엇을 물어보지도 않을 작정입니다. 세상에 편견(偏見)처럼 위험하고 가탈스러운 일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하물며 어린아이에게도 편식(偏食)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스님께서 절대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스님을 찾아 스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직은 부족하지만 불경을 공부하기도 하고, 염불을 듣고 새겨보기도 하고, 절에 가서 흙이나 나무 아니면 종이 또는 쇠로 만든 부처님 화상(化像)에다 머리 숙여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할 것이라고 서원(誓願)하기도 하는 건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스님께 무얼 물어보고자 불러봐도 대답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다 할아버지 얼굴로 나타나신 스님에게 ‘저는 누구입니까?’하고 물으면 스님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니 저가 물어보려고 했던 것을 잃어버리고 마는지 모르겠습니다. 스님! 스님! 스님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 연달아 불러보는 이유는 이미 스님께서 알고 계시리라고 짐작합니다만 혹시 모르고 계시다면 저의 마음을 좀 헤아려 주실 것을 간곡히 청원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제가 스님을 존경해 마지않는 것처럼 스님께서도 제 길을 일러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스님께서는 아비지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옥황상제와 염라대왕을 만나랴, 스님보다 천 년쯤 전에 살다 가신 첫 번째* 부처님인 석가모니 부처님 만나랴, 지장보살 만나랴, 너무나 바쁘시겠지만 아마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 내 인생에도 내가 이승에서 해야 할 일이 있고,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이 가여운 중생에게도 시간 좀 내 달라는 것입니다.
스님! 저는 스님이 제 부름에 대답하지 않아도 언젠가 꼭 만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때는 궁금한 것들을 모두 스님에게 물어볼 작정입니다. 스님께서 너무 바쁘셔서 저를 만나주시지 않으신다면 할 수는 없지만 저는 스님을 만나 고언(高言)을 듣기 위해 살아있는 동안 정성을 다해 청원 드릴 것입니다. 나중에 저도 죽어 저승에 가면 당연히 스님을 만날 수 있겠으나 그전에 만나고 싶어 안달하는 뜻을 헤아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애원하는데도 미망(迷妄)에 빠진 중생이라고 더 공부하고 오라고 하시면 저보다 먼저 스님을 만났다고 하는 한승원 선생을 통해 스님에 대해 여러 가지를 주섬주섬 들으며 스님의 뜻을 헤아린 뒤에 다시 정중히 간청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 6.30. 출근 지하철에서 3권 '원효와의 대화'를 읽은 뒤 -
* 수좌(首座) 참선하는 수행 스님이란 뜻
* 한승원 : 소설 원효를 쓰기 위해 원효의 저서는 물론 원효연구가들, 논문과 서적, 삼국의 역사, 불경 등 수많은 책과 자료를 탐독하고 원효의 행적을 좇아 경주 남산과 왕경 서라벌, 영축산과 반고사터로 추정되는 곳을 수차례 오갔는데, 그것은 신화 속에 박제된 원효를 한 사람의 보통 인격체로 깊이 사귀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지금껏 철저하게 오독(汚瀆)되어 온 원효의 삶을 문학적으로 온전히 복원하고 생생한 숨결을 불러넣었다는 평가다. 원효는 일심(一心)과 화쟁(和諍)과 무애(無碍)를 실천한 불국토주의자로 1400년 만에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낸 소설 『원효』의 작가
* 신라사람들은 원효를 제2의 부처님으로 생각했다. 그에게 견주면 석가모니는 첫째 부처인 것이다
끝으로 소설 원효에 쓰인 명구들을 몇 군데 추려 옮긴다.
- 술은 생각을 풀어내는 기능을 마비시키지만 살고 있는 세상 저 너머에 또 하나의 드높은 세상이 있음을 가르쳐주고, 답답한 막힘을 뚫어주고, 허위의 껍질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얽히고 설킨 삶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게 했고, 번뇌의 고삐에서 풀려난 망아지가 되게 했다. 그래서 자유의 준마가 되자! 취해버리자! 그는 요석이 따라주는 대로 마셨다. - 2권 205페이지
-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선인들이 참으로 잘 살아온 길을 읽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 길을 내 눈으로 비춘다는 것이고 비춘다는 것은 그 길을 통해 깨닫는다는 것이고, 깨닫는다는 것은 캄캄하기만 한 어둠 속을 헤매는 행위를 영원히 끊는다는 것이다.
- 2권 301페이지
- ‘술과 선이 한가지 맛(酒禪一味)이라는 것입니까?’
‘시간(法)을 안주로 마시면 그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네.’
‘시간이란 놈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파괴자 아닙니까?’
‘물론, 그놈은 두통도 파괴하네.’- 3권 317페이지
-『금강 삼매경』은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실 수 없으실까요?
‘간단하게 말해 주다니? 우주를 한입에 간단히 삼키려 하는군. 그래 한두 마디로 뭉쳐서 던져줄 터이니 얹히지 않도록 잘 삼켜보게나... 깨뜨림이 없되 깨뜨리지 않음이 없고, 세움이 없되 세우지 않음이 없으니 이야말로 이치가 없는 지극한 이치요. 지극한 이치가 아니면서 큰 이치인 것이『금강 삼매경』이네.
<진실로 그렇지 않으면서 그것이 그러하다> 하는 것은 ‘고리’하고 똑같네. 뫼비우스의 띠가 그것이네. 장자의『제물론』에 환중(環中)이란 말이 나오네. 그것은 옳고 그름이 반복되어 서로 한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고리라고 했으니, 고리의 중심은 비어 있네, 옳고 그름을 이 고리로 삼아서 중심을 얻는다면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게 된다는 것이네.”
‘금강이란 것을 중생들이 알기 쉽게 단 한 마디 비유로 말한다면 무엇일까요?’
‘그대 성질 급하기가 번갯불에 콩 구워 먹을 사람이구먼 그래 말해 줌세. 금강은 꽝! 꽈당! 하는 벼락 치는 소리 같은 것이네. 벼락 소리는 의혹을 깨뜨리는 것이고 모든 선정(禪定)을 뚫어버리네. 모든 보배(眞理)는 구멍을 뚫어야 목걸이나 귀고리나 코걸이나 배꼽걸이나 팔찌 따위를 만들 수 있네. 세상의 모든 법을 다 깨뜨려버리고 가장 바르게 생각하는 것(正思)이 그것이네.’ - 3권 342페이지
- 인터넷으로 주문해 책이 집에 배달되어 왔을 때 제1권 맨 뒷장에다 책 산 데 대한 감회를 적었는데 그것을 옮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만나는 사람이 여럿 있게 마련이다. 내가 원해서 만나는 사람, 원하지 않지만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사람... 원효는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 중의 한사람이다. 나는 지금부터 원효를 만나기 위해 어쩌면 제법 먼 길을 떠나야 할지 모른다. 그가 나를 반겨주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신발 끈을 야무지게 잡아매야 할까 보다." (2006.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