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구 은 주
큰딸아이가 가까이 사는 탓에 자연스럽게 손자 녀석을 맡게 되었다. 활동량 많은 다섯 살 남자 꼬마 뒤를 쫓아다니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아이를 보는 것은 살림살이하기보다 훨씬 힘이 든다. 아이를 한참 보고 나면 가끔씩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남편과 아이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고기를 먹으라고 채근한다. 다시 힘을 내려면 고기밖에는 없다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나 역시 그러겠노라고 순순히 따른다.
어느새 기력 회복에는 고기가 정답이 되었다. 어디 우리뿐이랴, 기력이 쇠할 때면 너도나도 고기를 찾는다. 암묵적으로 힘의 근원은 고기라고 모두가 합의한 듯하다. 고기를 먹고 나니 눈이 번쩍 뜨인다는 사람도 있고, 귀가 뻥 뚫린다는 사람도 있다.
유난히 고기반찬에 분주하게 젓가락이 오갔던 어느 날 저녁, 식사 후 습관처럼 책상에 앉았다. 평소에 보이지도 않았던 한강의 장편소설 『채식주의자』가 책꽂이에서 마치 볼록 렌즈처럼 다가온다. 나를 비난하는 것인가? 조금 찔린다. 오래전 읽다가 너무 음산해서 중간에 멈추었던 책, 갑자기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채식주의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때마침 무슨 이유에서인지, 딸과 사위가 언젠가는 육식을 끊고 비건이 되겠다고 심각하게 말한다. 그녀가 말하는 채식주의란 무엇일까. 그녀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육식 문화에서 채식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분명 평범한 일은 아니다.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로 인한 세상의 야릇한 시선은 피할 수 없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수數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에서 채식주의자는 어쩔 수 없이 별난 인간으로 취급된다. 다수에 의해 만들어지고 정의되는 ‘정상’,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비정상일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언제나 그렇듯 철학과 문학은 다수에 의해 규정된 정상이 오히려 비정상임을 고발한다. 한강의 『채식주의자』 역시 같은 톤으로 ‘가짜 정상’에 도전한다. 비정상은 정상을 만날 때 가장 두려운 법, 그래서 현실은 정상과의 조우를 피하려고 겹겹이 장벽을 쌓아 놓는다.
가짜 정상에 중독된 보통 사람들은 장벽을 넘을 수도 없고 넘을 생각도 없다. 세상에 비정상의 울타리를 넘어 정상이 되는 것처럼 두려운 게 있을까. 다수가 가는 길이 진리라고 여겨지는 세상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제정신으로는 안 된다.
꿈은 본래적 자아인 정상으로의 초대다. 주인공 영혜의 꿈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꿈은 그녀를 채식주의자로 만든다. 채식주의란 단지 고기를 안 먹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일체의 공격성을 해체하는 것, 동물적 본능을 해체하여 식물됨을 희망하는 것이다. 머리 위에 오줌을 갈겨도 조금의 분노가 없는 식물이 되는 것. 그러기 위해 그녀는 고기뿐 아니라 일체의 음식을 거부한다.
거식증은 내 몸의 모든 동물적 요인들을 해체하고 철저히 무기력하게 되려는 적극적 의지의 표현이다. 밖으로 향하는 모든 공격 에너지의 근원을 끊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정상을 향한 정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몸부림, 그녀는 비로소 식물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이미 동물화되어 있는 세상에서 식물에의 길은 쉽지 않다.
질서를 깨어야 하고, 그것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당연한 절차다. 마침내 정상이 되려면 정신병원을 각오해야 한다. 남의 살을 먹고 남의 살을 자기 살로 만들어야 삶이 가능해지는 세상, 남의 살을 제 살로 만드는 것이 정의가 되어버린 동물화된 세상에서 온전한 채식주의자가 갈 곳은 한 곳뿐이다. 창살 있는 정신병원.
세상은 식물을 은연중 무시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식물인간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세상이 조롱하는 것처럼 식물은 그렇게 수동적인 존재만은 아니다. 식물은 자기 머리 위의 갈겨진 오줌도 거름으로 만든다. 그것을 세상이 알 리 없다. 식물의 역동적 반항으로 인해 세상이 유지되고 있음은 더더욱 모른다.
아마도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은유적 표현일 것이다. 일체의 공격성을 포기한 상태의 인간을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 육식 문화로 표현되는 공격적인 세상살이에 정면으로 맞설 힘은 또 다른 공격성이 아니라, 공격성이 철저히 해체된 식물 같은 삶뿐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해석은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