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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믿었네] 주찬옥 - 시놉시스
제목 : 남자를 믿었네
극본 : 주찬옥
연출 : 이은규 최은경
▣ 기획의도
1. 이 드라마는 클래식한 멜로드라마다.
가난하지만 미래를 꿈꿨던 젊은 연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출구 없는 현실은 이들을 갈라놓았다. 두 연인은 그리움을
간직한 채 현실에 적응해보려 애썼다. 결혼했고 결혼생활에
충실하려 했다. 그리운 그 사람을 위해 순정을 간직한 채
양보도 했다. 그 사람의 외로움과 고통을 나눌 수 없어서
안타까워도 했다.
가까이 있어도 심리적으론 너무 멀었던 두 사람이
현실의 벽을 넘어 드디어 이루어지기까지가 이 드라마의 내용이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먼 길을 돌아 드디어 만나게 되는 이들 사랑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2. 이 드라마는 가족에 관한 드라마다.
우리나라는 혈연 중심의 사고가 유난한 나라다.
이러한 핏줄의식은 놀라운 기적을 만드는 긍정적인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리석을 정도의 집착과 멍에와 배타적인 광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드라마에선 밝고 따뜻한 가족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내 핏줄이냐 아니냐를 따져서 지독하리만큼 재산권을 지켜내는
비정한 가족의 모습도 있다. 그리고 혈연은 아니지만 사랑으로
형성된 가족의 모습도 있고.
3. 이 드라마는 캐릭터 보는 맛이 있다.
이 드라마에는 여러 사랑의 유형들이 있다.
사랑하면서도 안타깝게 헤어진 연인이 그리움을 어떻게 간직하는지 열정적인 순정 멜로가 있고
사랑에 서툰 사람이 어떻게 사랑에 집착하는지 전형적인 짝사랑의
아픔이 있고
귀여운 사랑이 있는가 하면
서로를 살뜰히 챙겨주는 황혼의 멜로도 있다.
이들이 겪어가는 사랑과 이별과 그리움, 재회, 질투, 분노, 집착 등의
감정이 생생하고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섬세하게 그려질 것이다.
▣ 인물
1. 오경주네 집
▪ 오경주 (27) -
한강수 화장품의 백화점 판매 여사원. 알바하면서 자력으로 전문대를 졸업한 후 한강수에 입사했다. 학벌 없고 돈 없고 집안 배경 없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와 자존심 하나는 최강이다.
언제나 없는 티 안 내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각기 다른 두 남자에게서 딸 하나씩 낳고 10년 넘게 혼자서 두 딸을 길러온 엄마 인희는 마음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경주에게 의존하는 편이어서 경주로서는 큰 짐이다.
성공하고 싶은 야망이 있어 밤잠 줄이며 악착같이 방통대에 편입 경영학을 공부했다. 공부를 더하기 위해 유학할 생각도 하는 중이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
뜻밖에 본사 근무를 하게 됐다.
조건 좋은 뷰티 아카데미 강사, 메이크업 아티스트 자리다.
자신의 학벌로는 행운이었지만 첫날부터 운이 나빴다.
상사인 기획실장 성남기의 눈 밖에 난 것일까? 성실장은 여자에게 까다로운 사람이긴 하지만 관심 없는 여자에겐 무신경한데 유독 경주에게는 약을 올리기도 하고 모욕을 준다. 괴롭히는 걸 즐긴다는 느낌도 받는다. 웬만한 일에 기죽을 경주가 아니지만 의도를 몰라 힘들다. 더구나 오너 아들인 그는 여자관계가 좀 복잡하다는 소문이 있다. 신경 쓰인다.
이럴 때 늘 위로가 되는 사람은 선우다.
그는 사귀기 시작한지 2년 되는 애인인데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유머감각도 있는 좋은 남자다. 현재 직장은 한강수에 납품하는 작은 회사로 잘나가는 건 없지만 선우 자신은 경주 못지않게 통도 크고 자신감도 있다.
그와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할 뿐 아니라 언젠가는 성공,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낙관도 든다. 그는 그런 신뢰감을 준다.
그런데 선우가 사라졌다. 사귀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나 꿈이나 세상 보는 눈이 닮아있는걸 느끼고 서로의 영혼까지도 통하는 걸 발견하면서 모든 어려움을 함께 할 줄 알았다. 어려움을 나누자고 뜨겁게 끌어안기도 했다. 그랬는데 그 밤을 보내고 난 후 그가 흔적도 없이 떠났다. 할머니와 난치병이 있는 여동생이 있는 집 가장이라 동생의 수술비 때문에 동분서주하는 건 알았지만 연락이 끊기고 가족도 이사를 가버린 건 이해할 수가 없다.
그가 왜 사라졌는지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라 생각은 드는데 상의도 없이 이별 통고도 없이 가버린 건 참을 수 없다. 서로가 집안을 책임지는 부담들이 있어 결혼에 대해 선뜻 내색하기 어렵긴 했고, 얼마 전 농담 삼아 우리 둘이 결혼하면 누구 하나는 미래의 꿈을 접어야 할 거라 말하며 서로 다른 사람 찾아보자고 웃고만 적은 있지만 심각하게 받는 분위기도 아니었는데....그런데 왜 갑자기? 그의 회사가 본사와의 거래중단으로 문을 닫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그의 얼굴에 그늘이 그즈음 있었던 것 같아 가슴이 더 아팠다. 워낙 내색안하는 그였기에. 그의 연락을 기다리다 지친 그녀에게 세상은 텅빈 겨울 들판 같았다. 겨울 내내 그녀는 낫지 않는 지독한 감기를 앓았다. 그렇게 그녀는 혼자가 되었다.
배신감과 상실감의 고통 한가운데로 남기가 손을 내민다.
그동안 괴롭힌 것은 관심의 표현이었다는 유치한 변명도 한다.
그러나 전혀 그럴 마음이 아니어서 거절, 회사도 그만 두었다.
일년이 지났다.
사막과 같은 나날을 견디고 있는데 남기가 찾아와 구애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 및 불행했던 결혼생활 등 그의 과거를 진솔하게 들으며 그도 나처럼 외로운 인간이란 생각을 했다. 차츰 마음이 열리던 중 선우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당장 그를 찾아 나섰다. 마음이 졸아붙고 타들어갔다. 그렇게 찾아낸 선우
였건만 그는 여자와 함께였다.
남기와 결혼했다. 선우의 누나인 화경의 반대가 특히 심했지만 남기의 아버지 성회장이 경주를 좋게 보아 가족들의 갈등을 넘어 결혼에 이르렀다. 엄마 인희는 워낙 선우를 좋아했기에 걱정이 많았지만 경주를 만류하진 않았다.
경주의 결혼생활은 남기의 애정 속에 행복했다. 시어머니나 시누이 화경이
각자의 복심으로 까다롭게 나오기도 했지만 남기와 시아버지의 지지 속에
나름 현명한 처신을 할 심성과 영리함 정도는 경주에게 있었다. 결혼이 안정되자 경주는 친정을 돕고 싶어서 일하겠다고 했다. 남편은 처가 생활비를 대주겠다고 했지만 경주는 자기가 벌어서 떳떳이 주고 싶었다.
화경과 임여사는 서민근성이라며 비웃었지만 성회장이 그러라고 하자 그걸로 끝이었다. 덕분에 경주는 숨 막히는 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출근하는 회사에서 어느날 선우를 본 듯 했다. 화경의 사무실로 들어가는 선우를 얼핏 본 듯 했다. 그럴 리가. 아니겠지..
경주의 지지자여서 큰 힘이 됐던 시아버지 성회장이 지병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병원에 시누인 화경이가 자기 애인이라고, 결혼하겠다고, 그러니 아버지 안심하시라고 남자를 데리고 나타난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근사한 학벌에 멋진 매너로 나타난 남자는 다름 아닌 선우였다.
▪ 한경미(22) -
밝고 솔직하고 정 많고 착하고 웃음 많고 눈물도 많다. 없는 게 있다면 욕심. 누군가 어려운 사정에 빠져 있으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해 시간 들이고 공 들이고 돈 들인다. 오지랖이 넓다.
매사 긍정적인 면을 보는 여자.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자기한테 이로운 얘기로만 듣고 자기 칭찬으로 해석하는 천부적인 능력이 있다.
그렇게 밝은 여잔데도 현재는 좀 주눅이 들어있다.
우식이라는 남자친구 때문이다. 이 남친은 잘해줄 땐 엄청 잘해주는데 결벽증이 있어 경미가 자기 맘에 안 들게 말하거나 행동하면 즉각 타박하고 모질게 야단치고 화를 낸다. 그래서 주눅 들고 남친 눈치 볼 때가 많다.
학자금 대출이 밀려 대학 휴학하고 각종 알바를 전전하던 중 엄마가 파출부 다니는 집 아들에게 취직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집 아들이 오너이자 바리스타인 커피전문점에 취직했다. 좁은 공간에 같이 있다 보니 남친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여러 번 들켰다. 사장님이 한심해하면서 이런 저런 조언을 해준다. 헷. 자기는! 사장님도 꼴 우습고 한심하기는 마찬가지. 어떤 여자한테 한없이 질질 끌려 다니는 중이면서.
서로 연애상담을 해주다가 어느 순간 정이 들기 시작했다.
경미의 남친 우식을 정리하는 것도 쉽진 않았지만 현수의 여친 정민이란 여잔 더 힘들었다.
마치 자기가 그럴 자격이 있는 양, 현수가 양다리 걸친 듯 당당하게 따진다. 현수를 절대 안 놔주겠다고 한다. 자기는 사장님 버리고 딴 남자한테 시집 가 있는 주제에. 이혼도 안 하는 주제에.
우여곡절 끝에 겨우 두 사람만 남게 됐지만..
운명은 가혹하다. 그새 엄마와 사장님의 아버지가 목하 열애중이시다.
형제끼리의 겹사돈은 가능하지만 부모 자식 간의 겹사돈은..
안되는 거 맞지?
▪ 강인희(50) -
경주와 경미의 엄마.
귀여운 아줌마. 잘 웃고 잘 울고 감동도 잘하고 속기도 잘한다.
젊은 시절 착하고 정이 많아 대쉬해 오는 남자들마다 아니 아니 하다가도
어느새 넘어가서 정 주고 몸 주고 돈도 주고 쌩고생 했다.
이제 남자라면 지긋지긋하다고 말은 하지만 아직도 남자 앞에만 서면 절로 수줍다.
두 번 결혼했으나 두 번 다 이혼했다. 첫째가 오경주고 둘째가 한경미인 것이 그 때문이다. 결혼했어도 이혼했어도 언제나 뼈빠지게 일하면서 살았다.
지금 살고 있는 아현동 달동네 꼭대기 집 전세도 경주가 돈 벌기 시작하면서 그나마 가세가 펴는 바람에 이사한 곳이다. 빌딩 청소도 하고 식당 주방이나 홀에서 일 했다가 최근에는 대형마트 시식코너를 맡고 있다. 집 주인이 전세금 천만원을 올리는 바람에 월급이 좀 더 나은 파출부 일을 택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오십대 상처한 남자, 일밖에 모르고 일상생활이 서툰 남자 진헌을 보자 잊었던 여성 본능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게다가 진헌은 경주 회사의 사장 아닌가. 그에게 잘하면 내 딸 경주에게 이익이 됐음 됐지 나쁘진 않겠지?.. 라며 성심성의를 다한다.
심지어는 밤을 샌 진헌에게 보약을 챙겨주기 위해 회사로 찾아가기도 한다. 그곳에서 화경에게 모욕당하는 순간 뜻밖에도 진헌이 감싸준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남자의 호의였다.
그러는 바람에 발동이 제대로 걸렸다. 남자라면 징그럽고 두 번 다시 어리석은 짓 안한다던 결심 잊어버리고 진헌에게 또 마음 퍼주고 정 퍼주기 시작한다.
없이 살아도 이렇게 퍼주는 타입이기 때문에 경주 신랑 남기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별 감흥은 없다. 차라리 선우가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우가 다시 나타나자 몹시 반가워한다.
진헌과 늦사랑을 하게 되지만 둘째 딸 경미와 그 집 아들 현수가 사랑에 빠지자 갈등 끝에 양보, 친구 사이로 남기로 한다.
그러나 천운이 열렸는지 두 사람이 결혼을 할 수 있는 길이 생기게 되는데..
그 무렵 미국에서 돌아온 진헌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발목을 잡는다.
미국에서 며느리 감 여자까지 대동하고 도착한 진헌의 어머니는 댓바람에 인희를 파출부 취급하기 시작한다.
2. 선우네 집
▪ 이선우(29) -
머리 좋고 호감형이고 유머도 있고 미남이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수시 합격도 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어서
2년 버티다 포기했다.
틈만 나면 책을 읽는다. 독서광이고 배짱도 있고 사업 수완도 있다.
모든 걸 다 갖췄으나 한 가지, 돈만 없다.
그러나 이 한 가지가 나머지 백가지를 합친 것만 못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절로 신세 한탄이 나올 법도 한데 선우는 참 낙천적이다. 스스로 사업가적 기질이 있다고 믿고 언젠가 스스로 사업을 일으킬거라 믿는다.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사랑하는 여자 경주를 지키며 살아낼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집에는 일찍 돌아가신 부모 대신 남매를 키워온 늙은 할머니가 있고 여동생이 있다. 그들에게 선우는 유일하고도 듬직한 가장이었다.
그런데 그 여동생이 덜컥 병 나 버렸다. 수술을 하려면 돈, 돈, 돈이 필요하다. 절박하다. 급한 김에 거래처 실장인 화경에게 찾아가 선금을 달라고 해본다.
그러자 화경, 제안을 해온다.
당장 급한 수술, 생사가 달린 수술이라 다른 대안이 없었다.
선우는 거액을 받고 화경이 시키는 산업스파이가 되기로 한다.
은경의 수술날 경주가 수술실 앞에서 같이 밤을 새주었다.
수술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앞으로 계속돼야 하는 투병생활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창백하게 수술대에 누웠을 동생에 대한 가슴 아픈 연민이 있었고 초라한 자신에 대한 무력감 때문에 자괴감도 있었다.
경주는 그 긴 시간동안 함께 있어주었다. 앞으로도 함께 있어주겠다고 했다.
무사히 수술이 끝난 뒤 할머니와 교대한 선우와 경주는 선우의 집에 들어갔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껴안았다. 사랑을 나누는 동안만은 힘든 현실, 불안한 미래를 잊었다.
그러나 약속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선우는 잠든 경주를 두고 집을 나와 골목을 내려갔다. 화경이 보낸 승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선우는 곧장 공항으로 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 시간을 결코 잊지 않겠다. 선우의 가슴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선우는 하버드 출신의 재미교포 2세가 되어 신생 화장품 회사 오너의 딸에게 접근, 그의 사랑을 얻어냈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와 계속 만나면서 화경이 원하는 정보를 빼다 주었다.
영혼이 없는 시간들을 견디게 한 것은 그리움이었다. 할머니, 여동생, 그리고 경주..
계약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다음 달이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 다음 달이면 경주를 만날 수 있다고 설레던 그 무렵 경주의 결혼소식을 듣는다. 남기와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변했다. 선우가 그렸던 미래가 달라졌다.
일년이 지난 후 돌아간 현실에는 경주도 할머니도 없었다.
요양원에 있는 은경을 찾아가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화경이가 다음 제안을 해 왔다.
이번에는 자기의 연인이 되라는 것이었다.
간단하다고 했다. 병상에 누운 성회장 앞에 한번만 동행해주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그 병실에서 선우는 경주를 만났다. 남기의 아내가 된 경주였다.
성회장이 죽은 후에도 화경은 집요할 정도로 선우를 곁에 두었다.
화경의 속셈을 알 것 같았다.
이번에는 남기와 경주 결혼생활의 파탄이 목적이었다.
선우가 완강하게 그 일을 거절하지 못하고 계속 남아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미 경주는 불행해지기 시작했다. 전보다 물질적으론 풍부해졌지만 어딘가 모르게 메말라보였다. 몸에 수분이 서서히 빠져나간 듯 보였다. 예전의 그 깔깔하고도 싱싱한 경주가 아니다.. 다시 만나는 순간부터 마음의 둑이 무너질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억눌러왔던 감정이 폭발하면서 경주에게 그렇게 힘들면, 그렇게 남편이 괴롭히면 이혼하라고 했다. 자기와 이 집을 나가자고 했다.
그러나 경주는 거절했다. 아이가 생겼다고.
그리고 아이도 아이지만 남편이 불쌍해서 안되겠다고 했다.
화경이가 결혼하자고 했다.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거절했지만 화경은 집요하게 결혼을 종용해왔다.
경주의 결혼생활은 너무나 위태로워보였다.
그래서였다. 경주를 위해서. 남편의 의심과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서.
경주를 근처에서 지켜봐주기 위해서.
결혼소식을 들은 경주는 순간 창백해졌다.
화경과의 결혼이 너무 성급했을지도 모르겠다.
남기가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다.
싱글이었다면, 결혼 전이었다면 이럴 때 홀가분하게 경주 곁에서 도와줄 수 있었을텐데.. 가슴이 미어졌지만 운명이었다.
화경과 임여사는 선우나 경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행보를 하기 시작했다.
중환자실에 누운 남기와 경주를 이혼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돈 때문이었다. 남기가 저러다가 죽기라도 한다면 남기의 전재산이 아내인 경주에게 상속된다는 것이었다.
그걸 막아야 한다고 했다.
결국 경주는 이혼당했다.
위자료도 거의 없이 이혼당하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선우는 자기도 화경 곁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그 무렵 할머니의 죽음에도 화경이가 관계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평창동에 살면서 첩자 역할을 할 때 할머니가 찾아왔지만 화경이가 대문 앞에서 돌려보냈다고 했다. 추운 겨울날이었고 언덕을 내려가던 할머니는 실족, 그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선우는 모든 것을 벗어놓고, 화경이가 마련해준 지위도 재산도 털어버리고
빠져나왔다.
경주는 남기의 납골당에 있었다. 화경과 임여사는 남기의 임종에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막았었다. 납골당에서 남기를 찾아본 경주가 돌아서자 그곳에 선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 은경(17) -
선우의 여동생.
평소에도 병약한 편이라 오빠와 할머니의 걱정을 들었는데 학교에서 어느날 갑자기 쓰러져버렸다.
병원의 진단 결과는 <모야모야병>이라고 한다.
의사는 모야모야병이란 일본에서 70년대 환경적 요소가 작용하는 병으로 유명해졌으나 실제로 이 병은 소아기부터 청년기까지 인구 10만 명당 1, 2명 꼴로 걸리는 병이라고 설명하면서 일본말 모야모야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모양을 지칭한다고, 머리 등 말단 혈관이 막히면서 피가 제 갈 길을 만드느라 작은 혈로를 만들어가는 모양이 연기가 모락 모락하는 것 같아 의태어로 붙여진 병명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젊은이들이 황당하게 걸리는 이유 모를 동맥완전경화인건데 가장 큰 문제는 운이 나쁜 경우 뇌 깊은 곳, 시상하부에서 피가 막히면 점차 시력을 잃어 눈이 먼다는 것!
점진적 시력상실! 이걸 막기 위해서는 수술이 필요한데 한 번도 아니고 여러번 반복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비는 말하나마나 거액이 될 것이고!
▪ 할머니(70대) -
선우의 할머니.
아들 내외를 일찍 잃고 선우 남매를 길렀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가난에 익숙하다. 가난이 그저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손녀딸 병만 낫는다면 다른 어떤 원도 없다.
3. 성남기의 집
▪ 성남기(36) -
한강수 화장품 이사. 기획실 실장.
성회장이 외도해서 낳은 아들인데 5살 때 이 집에 들어왔다.
어릴 적이나 친모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지만 실제 기억인지 꿈과 상상력이 만들어낸 이미지인지는 알 수가 없다. 임여사에 대한 애정도 친모에 대한 애정도 없다. 배다른 누나 화경과도 겉으론 사이가 좋은 척 해도
속으론 후계자 다툼으로 날이 서 있는 편이다.
게다가 결혼생활이 실패, 이혼한 과거도 상처가 되었다.
전처가 낳은 아들이 하나 있다.
이혼은 아내가 먼저 요구해왔다. 그리고 이혼하자마자 보란 듯 재혼해버렸다. 알고 보니 아내는 결혼생활 중 그 남자와 외도를 했었다. 물론 자신도 끊임없이 바람을 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여자에 대한 불신과 모멸이 기본적으로 있다.
게다가 물질적으론 풍족했을지 몰라도 애정은 결핍되어 자랐으므로 내면은 예민한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는 외로운 남자다.
일단 관심이 가는 여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어이 자기 여자로 만들어버린다. 어려운 상대일수록 그 정복욕은 강해지고 차지하려는 의지도 불타오른다. 그러나 일단 넘어왔다 싶으면 시들해지면서 버린다.
그렇게 버린 여자가 꽤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누나 화경이가 뒷수습해주곤 했다. 화경은 그 뿐 아니라 남기가 좋아할만한 타입의 여사원이 눈에 띄면 남기 근처로 보내주곤 한다. 혼자 된 동생이 안쓰러워서는 결코 아니고 타락시키고 싶어서. 그래서 일에 소홀하게. 그래서 아버지 눈에 벗어나게.
경주도 화경이가 던져주는 떡밥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적당히 즐기려했는데 이 여자 자존심이 만만치 않다.
놀려먹는 재미, 괴롭히는 재미가 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진심으로 경주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경주와 결혼한 후 한동안은 안정이 있었다. 행복했고 삶에 의욕도 생겼다.
더구나 성회장이 경영권을 자신에게 넘기고 죽자 의욕 충만,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신제품 개발과 투자는 신중해야 한다고 문진헌 사장이 충고했건만 귓등으로 흘린다. 성공을 하자면 과감해야 한다고, 상식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과는 참담했다. 신제품 개발은 실패했다. 남기의 의욕과잉이 부른 화이기도 했고 화경의 암투와 모략 때문이기도 했다.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옛날 버릇이 나오기 시작한다.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고 여자를 만났다.
게다가 선우가 바로 경주가 그토록 기다렸던 그 남자라는 사실을 알자 경주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경주의 엄마, 즉 장모가 자기보다 선우를 더 반가워하고 좋아한다는 사실도 몹시 자존심 상한다. 기분이 나쁘다.
경주의 임신이 아주 잠깐 둘 사이를 회복시키는가 했는데 누나가 결정타를 날린다. 경주가 가진 아이가 선우의 아이라고.
아내가 배신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분노가 폭발한다.
장모와 연애한다는 문진헌 사장도 믿지 못하겠다. 그래서 사표도 받아낸다. 사방 천지에 믿을 수 없는 적들 뿐이다.
이리저리 들이받고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데도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은 남기로 보인다. 내면의 온갖 상처들이 헤집고 올라와 그를 쓰러뜨리고 있다. 경주가 그를 쉽게 떠나지 못한 이유는 사실은 그가 너무나 불쌍해서였다. 그리고 남기의 경주에 대한 사랑의 깊이는 상상이었다.
▪ 성화경(38) -
한강수 화장품 이사이며 종합개발실 실장이다.
성회장의 딸. 노처녀고 야심가다. 이미지로 말하면 미국 배우 글렌 글로즈 같은 느낌. 여왕 혹은 권력가 타입.
소유욕도 강하고 집착도 강하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라면 끈질기게 기다려서라도 기어이 손에 넣고 마는 독거미 같은 여자.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결혼할 수도 있고 영혼을 팔아치울 수도 있다.
단지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 놈이 후계자가 될 순 없다.
적자도 아니면서. 사생아 주제에.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과 갈망이 크다.
아들 아닌 딸로 태어났다는 불안감, 사랑받지 못한 어머니에게서 난 자식이라는 불안감이 그런 권력욕으로 나타났을지도 모르겠다.
대부분 사람들이 불같은 아버지가 두려워 피할 때도 화경만은 끝끝내 아버지 맘에 들 때까지 끈질기게 노력했다. 그것은 마치 연인에게 선택받고자 끝없이 그의 시선을 붙잡으려는 여인의 열정과도 같았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 후계자가 되려면 상대적으로 남기는 실패해야 한다. 시소게임처럼 남기가 추락해야 자기가 비상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여자문제도 끊임없이 일으키게 예쁜 여사원들을 고르고 골라 남기 근처에 배치했다.
최근 급성장 하는 중저가 브랜드 화장품 회사가 있다.
그 회사의 기밀을 알아내기 위해 선우를 이용, 미남 첩자라는 편법을 썼다. 기밀과 약점을 캐낸 후 아버지에게, 우리가 화장품 업계의 2인잔데 1인자 자리에 오르려면 저가 화장품 라인을 보강해야 된다고, 최근 급성장하는 중저가 화장품 회사를 사들여 보완하자는 야심찬 안을 낸다.
그 회사의 기밀을 알고 있으니 그 약점을 이용하면 쉽게 합병할 수 있을 거라는 얘기도 한다.
칭찬 받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불같은 호령이 벼락치듯 떨어진다. 그런 기밀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상대의 약점이나 캐고 다닌다고, 부도덕한 짓이라고.
상심해 있는데 남기가 결혼하겠다고 나선다.
일도 건성건성, 여자 문제나 일으키고 다니던 남기가 결혼한 후론 다른 모습을 보여 긴장이 된다. 일도 곧잘 한다. 히트 상품을 발굴해 내서 매출액을 급상승시켰다.
자신에게는 화내고 엄격했던 아버지가 남기에 대해선 너그럽고 경주에 대해선 거의 온화한 모습을 보이자 질투와 불안감에 휩싸인다.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화경은 또 다시 무리수를 둔다.
아버지 눈에 들기 위해 선우를 데리고 나타난다.
대니 킴이라는 하버드 학력의 재미교포 2세로 신분을 속이면서.
그러나 그것 역시 아버지를 움직이지 못했다. 아버지는 두 사람 사이에,
특히 남자에게 사랑이 없다는 점을 간파해냈다.
당황한 화경은 유언장을 빼내기까지 한다.
그런데 유언장을 빼돌려 개봉해보니 후계자가 화경이었다.
화경은 병상에 누운 아버지에게 엎드려 처음으로 펑펑 울었고
아버지는 화경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랬는데 정작 성회장이 죽은 후 유언장이 공개되자 충격을 받는다.
남기에게 회사를 물려준다고 명시되어 있었던 것. 계속되는 화경의 편법과 무리수가 오히려 회장의 마음을 바꾸게 만든 것이었다.
배신감에 치를 떨며 온몸이 꼿꼿해졌다. 남기를 쓰러뜨려 회사를 되찾아오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선우와 경주가 과거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자 그 관계를 이용, 남기를 심리적으로 무너뜨리려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선우를 경주에게 보냈다. 둘만 있게 되는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 그 순간을 남기가 보게 하기 위해서.
예상대로 남기는 급격히 무너져갔다. 고맙게 사업도 실패해주었고.
이제는 자신이 전면에 나설 때라는 생각이 들자 화경은 선우에게 결혼을 제안한다. 자기와 결혼하자고.
그는 비록 학벌은 없지만 두고 볼수록 괜찮은 남자라는 생각이 든다. 학벌이야 만들면 되지. 기본기만 있으면. 화경은 실제로 그와 결혼한 후 적당한 때를 잡아 정식으로 유학도 보낼 생각이었다. 그를 멋지게 키워낼 자신이 있었고 그는 그러기에 적합했다. 사업가적 기질도 있고 배짱도 있고 아주 영리하니까.
그런데 선우가 그동안 연인 행세를 해 온 건 계약일 뿐이라며 청혼을 거절한다. 이럴 수도 있나?
그때부터 선우가 청혼을 받아들이기까지 화경은 온갖 회유와 협박을 한다.
심지어는 그가 경주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이용한다. 남기와 경주를 괴롭히지 않겠다는 정치적인 거래까지 한다. 그러고야 결혼 약속을 받아낸다.
화경과 선우가 결혼한 후 뜻밖의 사고 소식을 듣는다.
남기의 교통사고 소식이었다. 남기는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다. 이런 상황을 원했던 건 아니다. 이건 말도 안돼!
이대로 남기가 죽기라도 하면 거액의 유산이 경주에게 상속될 게 아닌가.
그걸 막아야 한다.
화경은 온갖 짓을 다하면서 남기와 경주를 기어이 이혼시킨다.
경주가 위자료도 거의 받지 못한 채 쫓겨나게 만들어버린다.
그러자 그 과정을 옆에서 보며 말리고 싸우던 선우가 이번에는 우리가 헤어질 차례라고 한다.
안된다고 내 곁에 있으라고 명령했다가 죽여버리겠다고 협박도 했다가 나중엔 심지어 울며 매달려보기도 하지만 선우는 떠난다. 그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화경이가 베풀었던 모든 지위와 재산들을 훌훌 벗어던지고.
떠나는 선우에게 화경이 협박한다. 경주와 재회하기만 하면 간통으로 고소하겠다고.
그 무렵 할머니의 죽음에 관한 사실이 드러난다.
선우의 할머니는 선우가 평창동에 있을 때 찾아온 적 있었다.
그 때 화경은 그 집으로 가던 중이었고 경비원의 전화를 받았다.
선우의 할머니라고 하는데 들여보내도 되느냐고.
화경은 몹시 화를 내며 할머니를 돌려보내라 했고 언덕을 내려오던 할머니는 얼음길에 실족, 미끄러졌다. 그리고 미끄러진 할머니를 화경의 차가 치는 바람에 사망했던 것이다.
▪ 성회장(70대) -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간. 평생을 정말 의욕적으로, 정열적으로 일해 왔다.
한강수는 화장품 회사로 출발, 지금은 화장품 뿐 아니라 샴푸, 기능성 비누, 바디제품 등 생활용품들도 생산해낸다.
건강이 악화되자 후계자를 생각한다.
사실 그동안은 딸 화경이가 적임자라 생각했었다. 딸은 능력 있고 욕심도 많다. 그러나 최근 급성장한 모 화장품 회사의 기밀을 빼내기 위해 미남 스파이를 썼다는 얘기를 듣자 생각이 달라졌다. 화경이는 위험하다. 욕심이 많다는 건 장점이지만 너무 욕심이 많다는 것은 단점이자 치명적인 약점이다. 과욕은 화를 부르는 법이니까.
아들은 회사 일에 관심도 덜하고 능력도 딸에 비해 떨어진다. 다만 결혼하더니 꽤 안정되고 의욕도 보인다. 며느리도 회사에서 자기 몫을 해내도 될 거 같고.. 문진헌 사장이 잘 보필해주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를 급히 불러 유언 내용을 바꾼다.
▪ 임여사(60대) -
성회장의 아내. 화경에게는 생모지만 남기의 생모는 아니다.
평생 사랑받지 못하고 살았다는 깊은 분노가 있다.
지금이야 다 정리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성회장에겐 늘 밖에 여자가 있었다. 그래도 살림은 차렸어도 자식은 안 낳았는데 남기 에미만은 예외였는지 남기를 낳아 집에 들였다.
그러니 그 아이가 얼마나 진저리나게 싫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그 남기가 낳은 아들 윤상이도 마찬가지. 별 애정이 없다.
새 며느리가 들어왔는데 남사스러워 죽겠다.
엄마가 파출부고 학교도 전문대 졸업인 천민이다.
경주에게 아낌없이 심술을 부린다. 과일조각 바닥에 떨어진 것도 경주에게 주워 먹으라고 한다. 우리 집은 잘살아도 검소하고 절약하고 아끼는 집이라면서.
▪ 성윤상(10) -
남기의 아들.
과묵하고 조숙하다. 경주가 새엄마가 되자 한참동안 적응하지 못했다.
할머니나 고모가 대놓고 무시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머니나 고모를 좋아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찬바람 부는 집안에서 홀로 자랐다. 그래서 경주가 닫힌 윤상의 마음을 열기까지 애 많이 썼다.
4. 문진헌네 집
▪ 문진헌(55) -
한강수 화장품 사장. 충직한 성회장 사람이다.
평생을 바쁘게 일하며 살아왔다.
일 열심히 하고 살아온 대한민국 남자의 전형.
일만 할 줄 알았지 아내에게 곰살맞게 굴어본 적도 없고 자식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준 적도 없다.
아내와 사별한 후에는 더 일에 매달렸다. 그래서 과로로 쓰러질 만큼 열심히 일했다.
성회장이 죽어가면서 남기를 잘 보필해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 그래서 충언을 아끼지 않았건만 남기는 전과 달리 자기 말을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첨꾼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회사가 걱정이다.
아닌게 아니라 회사가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더 강력하게 충고했더니 사표를 쓰라고 한다. 평생을 바쳐 일해온 회사에서 이제 나가라고 한다.
인희는 자기 때문이라고, 자기 딸 경주 때문이라고 쩔쩔매며 미안해한다. 그건 아니라고, 이제 그만 쉬고 싶기도 했다고, 잘 된 일이라고 인희를 달래줬는데 그러고 보니 정말 새로운 생활에 대한 호기심, 기대감이 든다. 그리고 이 제 2의 인생을 인희와 함께 하고 싶다. 인희도 그동안 뼈빠지게 일해왔으니까 이제 편하고 즐거운 인생의 재미를 맛보게 해주고 싶다.
인희를 파출부라고 생각하지 않은지는 벌써 꽤 됐다.
인희라는 여자는.. 그렇게 오래 고생하며 살았다고 하는데도 전혀 때가 안 묻어있는 느낌이다. 아직 충분히 여자로서의 매력이 있다.
일만 알고 살아온 남자라 당연히 여자 마음 모르고 사랑의 감정도 잘 모르긴 하지만 인희라면 다시 남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결혼을 생각했다. 결혼해서 같이 등산도 다니고 해외여행도 다니면 좋겠다는 소박한 욕심이었다.
그런데 아들 현수와 인희네 둘째딸이 연애중이다.
우린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니들이 양보하라고 억지를 부려보기도 하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 자식의 행복이 우선 아닌가.
아쉽지만 친구로 남자고 하는데 뜻밖의 길이 열린다.
너무 오래 당연히 아들이라고 생각해서 잊고 지냈던 과거가 있는데
현수가 친 아들이 아니고 친구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친구는 죽고 제수씨는 재혼했었다. 현수가 세 살 때였다.
그 제수씨에게 연락이 온 것.
현수가 혼란과 방황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지켜보고 기다려줄 수밖에 없는 것은 안타까웠지만 덕분에 인희와 결혼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는데...
미국에 오래 계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귀국했다.
그것도 중년의 교포 여성과 함께였다.
인희와의 관계에 대해 이미 알고 들어온 어머니는 다짜고짜 교포여성과 결혼하라면서 인희를 파출부 취급하기 시작한다.
난감하다.
그동안 진헌은 어머니 말이라면 언제나 순종적이었다.
홀어머니 외아들로 자랐거니와 아내가 일찍 죽은 후 어머니가 아이들을 기르며 매사를 결정해왔으므로 진헌은 늘 믿고 따랐었다.
그런 어머니가 인희와의 결혼은 말도 안된다고 반대한다.
늙은 아들이 늙은 어머니에게 반항할 수도 없고 ..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
▪ 문현수(27) -
이기적이진 않지만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도회적 남자.
여행가 겸 커피전문점을 운영하는 바리스타다.
커피샵 하면서 가끔 좋은 원두 사온다는 명분으로 훌쩍 여행 다니며 자유롭게 살았는데 최근에는 여자 문제 때문에 발목이 잡혀있다.
자기 집에서 변호사와 결혼하라 한다며 헤어진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잔 결혼하기 전날까지 울고불고 전화하거나 찾아왔었다.
자길 잡아달라고 해서 결혼하지 말라고 잡으면 미안하다면서 빠져나갔고
우린 방법이 없다며 이별하자고 해서 돌아서면 너 없으면 못산다고 붙잡았다. 죽어버리겠다는 말도 수십번 더 했다.
문제는 결혼을 한 후에도 똑같은 패턴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른 면에서는 쿨한데 유독 그 여자한테만 쿨하지 못하다.
파출부 아줌마.. 파출부라기보다는 이모나 고모같은 분위기인 강아줌마 둘째 딸도 힘든 연애를 하고 있다. 연애는 자기 인생에 도움이 되는 연애가 있고 인생을 해치는 연애가 있는데 경미의 연애는 후자인 것 같다.
그래서 조언을 좀 했더니 품앗이 하자는건지 경미도 내 연애에 참견을 해온다. 그렇게 양쪽 남녀들을 정리하는 와중에 정이 들어버렸다.
진작 만났으면 시간도 절약되고 좀 좋았을까..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우리만이 아니었다.
왜 이 나이 먹어서야 만났을까요..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적다는 게 아쉽고 통탄스러워요.. 이 정열적인 연인들이.. 바로 우리 커플의 부모님일 줄이야!
그 무렵 갑자기 아버지에게 비밀이 생긴 거 같다.
상대방이 여자인 거 같은데 전화가 와도 우물쭈물 베란다로 피해나가 받고
인희 아줌마 몰래 만나는 거 같기도 했다.
세상 남자 다 그럴 수 있어도 우리 아버지만은 바람 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이다. 알고 보니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 친엄마라고 한다.
갑자기 세상이 바뀌고 인생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친아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이나 어려야 사춘기 핑계 대고 정체성 운운하며 반항도 해보겠는데 그러지도 못하겠고.. 스물일곱 나이에 친어머니라는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진짜 난감하다.
∎진헌모 (70대)
진헌을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라고 믿고 상처한 진헌에게 새장가를
들이는 게 지상목표인 극성할머니. 미국에서 사는 손녀딸 산후조리 때문에
내키지 않지만 파출부 인희에게 살림을 맡기고 집을 비운다. 미국에서 까지
새 며느리감 구해 돌아왔더니 웬 날벼락인가. 아들 진헌이 파출부와 결혼
하겠단다. 졸도하시겠다.
5. 그 밖의 인물들
▪ 이우식(27) - 경미의 전 남자친구.
웬만큼 사는 집 아들. 대학원생.
강박증이 있다. 이것도 결국 강박증이겠지만 경미에게 잘할 땐
끝내주게 잘하다가 자기 맘에 안 들면 집착에 가깝게 간섭하고
야단친다.
▪ 하정민(26) - 현수의 전 여자친구.
현수네 보다 더 잘 사는 집.
집에서 검사 사위 보겠다고 해서 선을 보고 또 봐서 사법연수원생에게 시집갔다. 검사 못되고 변호사로 취직했지만. 물론 사랑 없는 결혼이다. 사랑은 현수랑 한다.
사랑 따로 결혼 따로다. 나쁠 거 없지 않나? 원래 분산투자가 안전한 투자 아닌가? 그런데 현수가 변해간다. 마음이 점점 멀어져가는 거 같다. 그대로 둘 순 없다.
▪ 유리(28) - 최근 급성장하는 화장품 회사 여동생.
미국에서 생화학을 공부하고 마치고 국내에 들어와 오빠 회사에서 연구원으로 일한다.
미국에 있을 때 선우를 만났다.
줄거리
제 1 막
< 세상 돈은 대체 어디 다 있는 거야?! >
경주는 백화점에 입점해있는 화장품 코너의 판매직원이다.
오늘도 손님에게 화장을 시켜주면서 상품을 소개하자 그 손님, 시원시원하게 아낌없이 고가의 화장품들을 사들인다. 백만 원어치쯤 사더니 총 얼마냐고 묻지도 않고 결제하라고 카드를 내민다. 결제 금액도 할부가 아니고 일시불이란다. 포인트 카드 있으시냐고 했더니 그런 거 필요 없다고 경주더러 가지라고 한다. 자존심 지키느라 괜찮다고 하자 옆에 있던 동료가 얼른 자기 포인트 카드에 적립하겠다고 나선다. 그 바람에 속이 따블로 상했다.
맘 상한 거 안 들키려고 애쓰는데 본사에서 전화가 온다. 뷰티 아카데미 쪽으로 발령 났으니 내일 기획실로 들어오란다. 전화 끊는 경주, 하늘로 뛰어오를 거 같다. 옆 동료가 너무나 부러워한다. 그거 봐라. 그깟 포인트 따위에 만족하니 큰 행운을 놓치지. 나는 나한테 오는 운을 써버릴까봐 전철에서 빈자리가 나도 앉지 않는다구!
인희는 마트에서 냉동만두 시식코너를 담당하고 있다.
만두를 끓여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집 주인이 전세금 어떻게 할 건지 결정은 했냐고 묻는다. 버벅거리다가 전화를 끊자 옆 동료가 무슨 전화냐고 묻는다. 담달이 전세 만긴데 집주인이 천만 원 올려 달라 한다고, 계속 살건지 이사 갈건지 묻는다고 대답해준다. 이사갈 거면 부동산에 내놔야 하니까.
동료 아줌마가 돈 있냐고 걱정해온다. 이사 가면 이사비용이니 뭐니 백만 원 이상 깨질 텐데.. 라며 자기가 더 걱정해준다. 어디 돈 많은 노인네 없냐고 농담하다가 두 아줌마는 돈 걱정 좀 안 하고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세상 돈 대체 다 어디 있는 거냐고 푸념한다.
동료 아줌마는 월급을 몇 푼이라도 더 받을 자리를 소개해주겠다고 한다. 아는 사람이 살림을 살아줄 사람을 구한다고, 믿고 맡길 아주 확실한 사람을 구하는데 보수가 여기보다 괜찮다고 한다. 자기가 하고 싶지만 딸이 곧 시집을 가게 돼서 할 수 없다는 얘길 한다. 사돈댁에 파출부보다는 그래도 마트에서 일한다는 게 더 면이 설 거 같아서 그런다고. 인희도 파출부 일자리라 선뜻 좋다 하진 못하고 생각해보겠다고 한다.
경미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교대 시간이 되자 남자 친구는 벌써 문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 우식은 일마치고 나오는 경미에게 날씨가 춥다며 목도리를 둘러주고 따뜻하게 데운 손난로도 쥐어준다. 자상하기로 치면 세상에 둘도 없는 남자. 지극정성이다.
그런데 밥 먹으면서 학교문제가 나오자 집요해지기 시작한다.
지난학기에 받은 학자금 융자가 끝나려면 멀었는데 또 받을 수는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경미의 말에 그런 거 미리 미리 알아보고 준비하지 않는다고 훈계한다. 어떡할 거냐고 집요하게 따져 묻는 바람에 대답에 지치고 궁지에 몰린 경미가 ‘아, 몰라 어떻게 되겠지..’ 하자 너는 왜 매사가 그런 식이냐고 본격적으로 야단치기 시작한다.
그날 저녁 중국어 학원에서 만난 선우는 민감하게 알아챈다. 경주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을... 경주와 선우는 김밥과 오뎅, 소주로 길거리 만찬을 한다.
본사에서 뷰티 아카데미를 신설하는데 메이크업 강사를 사내 모집했다고... 지원하긴 했지만 될 거란 기대는 안 했다고... 화공과나 화장품학과 석사들도 많고 방송국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 경력 있는 애들도 많은데 자기가 뽑혔다고... 경주는 기뻐하며 자랑한다. 선우는 같이 좋아하면서 네 실력이면 당연하다고 아낌없이 칭찬한다.
그러나 사실 화경이 경주를 특별히 발탁, 신설되는 아카데미 메이크업 담당 강사로 보내기로 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집에 들어온 경주는 다음날 본사 들어갈 때 입을 옷과 구두, 핸드백을 미리 고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마땅치가 않다. 백화점에선 유니폼으로 갈아입으니 출근할 땐 늘 청바지에 아무렇게나 입었다. 옷차림에 부담이 없었다. 그러나 본사에 가는 건데.. 정장이 없다. 가방이나 구두도 마찬가지. 다 낡고 디자인이나 색이 안 맞는다.
경미와 둘이 한탄하고 있는데 인희가 저기 말야.. 하면서 얘기를 털어놓는다. 담달이 전세 계약 만긴데 집 주인이 천만 원 올려 달라 했다고. 이까짓 집이 무슨.. 말도 안된다고 와글와글 떠들다가. 경주, 근데 한달 남겨놓고 갑자기 올린다고 하면 불법이라 해보지만 사실은 몇 달 전에 미리 통보했다는 답을 듣는다.
인희가 경주에게 돈 모아논 거 좀 빌리자고 한다. 경주는 엄만 왜 이제야 얘길 하냐고 몇 달 전에 얘기 들었으면 그 때 얘길 했어야 하지 않냐며 짜증을 낸다. 그동안 집에 생활비는 내가 젤 많이 내왔다고! 왜 번번이 목돈 들어갈 때면 나한테 기대는 건데!! 나도 내 돈으로 내 인생 업그레이드 좀 시키고 싶다고!!
그 순간 옆에 있던 경미, 불에 기름을 붓는다. 나 아무래도 학교 휴학해야 될 거 같다고. 휴학하고 돈 좀 벌어야 학교 계속 다닐 거 같다고.. 그냥 휴학이고 뭐고 학교 때려칠까?
그날 밤 인희는 동료아줌마에게 전화해서 그 집에 대해 묻는다. 집은 어디며 식구는 몇이냐고. 그러자 동료 아줌마, 실은 그 집 아무나 안 들인다고, 주인이 일할 사람 직접 보고 결정한다 그랬다고 얘기한다. 한숨이 나온다. 세상사는 게 이 나이 먹었어도 아직도 만만치 않구나..
방에서 속상해 뒤척이던 경주와 경미에게 각각의 애인들에게서 문자가 온다. 선우는 경주의 답 문자가 없자 전화가 왔고 경주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자 당장 집 앞으로 달려온다.
아현동 꼭대기, 휘영청 달은 밝은데 허위허위 올라오는 선우를 경주가 마중 나온다. 집 앞이라 슬리퍼에 맨발로 나온 경주의 발에 선우가 자기 장갑을 끼워준다. 두 사람은 서울시내 야경을 내려다보며 데이트 한다. 선우는 경주의 마음을 위로하고 풀어준다. 특유의 유머로 기어이 경주를 웃게 만든다. 선우는 십년만 기다리라고 그러면 십년 안에 부자 돼서 호강시켜줄 거라고 장담한다. 버스, 전철 다 끊겨서 택시 타고 가야할 시간이 되자 경주는 택시비 아까운데 뭐하러 왔냐고 투덜댄다. 선우는 택시비 따위는 중요치 않다고 당장 네 맘 풀어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한다. 경주는 택시비 좀 보태줄까라고 지갑 뒤지고 선우는 그런 경주에게 입맞춤을 한다. 택시비 받았다고. 그리고는 아현동 골목을 걸어 내려간다. 그 모습을 보는 경주,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 그러고보니 장갑을 안 돌려줬네.
< 첫 출근, 위축되다 >
다음날 경주는 본사로 출근한다. 다들 화려한 옷차림 화려한 모습이라 위축된다. 그런데 구두가 말썽이다. 뭔가 이상해서 화장실에 가 신을 벗어 확인했더니 구두 한쪽 뒷굽 고무가 빠져 못이 튀어나왔다. 그 때문에 징 박은 것처럼 걸으면 울린다. 한쪽만.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소리 안내려고 절룩거리며 걷는다. 그렇게 긴장하며 뷰티 아카데미 첫 모임을 가졌다. 그러자 그 어색한 동작이 도리어 기획실 실장, 남기의 눈에 띈다.
남기는 경주의 뒷굽 떨어진 구두를 아무렇지도 않게 놀려먹는다.
첫날부터 확실히 찍혔다. 그때부터 남기는 경주만 보면 사사건건 놀리고 모욕하고 무안을 준다. 혼자 있을 때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동료 메이크업 강사들이 있는 자리에서도 그러니까 경주는 자존심 상하고 괴롭다. 그러나 괴로운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쓴다. 남기는 안간힘 쓰는 경주의 반응을 즐겼다.
인희도 파출부 일하러 소개받은 집으로 갔는데 인터뷰가 까다로웠다.
진헌의 모친은 진헌의 딸, 즉 손녀딸의 산후조리를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고 했다. 아들과 손주의 식사와 살림을 살아줄 사람이 필요한데 입주 가정부를 들일까 생각했지만 아들이 불편해 싫어한다고. 입주는 아니어도 입주 가정부의 보수를 줄테니 저녁까지 남아서 아들과 손주에게 따뜻한 저녁상을 차려줬으면 한다는 게 할머니의 조건이었다.
인희는 집안을 둘러본다. 가구라든가 식기들도 하나같이 고급이다. 역시 잘사는 집은 다르구나..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집 주인이 화장품 회사에 다닌다고 한다. 한강수 화장품 사장이라는 얘기에 인희,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경주가 다니는 회사 사장 집이란 얘긴데.. 경주에게 좋은 일이 될까 해로운 일이 될까..
인희는 걱정이 되었다.
< 엘렉트라 콤플렉스 화경 >
화경은 자라면서 아버지나 아버지 회사 부사장, 전무, 이사 등등에게서 많이 들은 얘기가 있다. 그들은 어린 화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화경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참 좋았을 텐데.. 혹은 화경이가 남자고 남기가 여자인 게 나을 걸 그랬습니다.. 라는 대사였다.
아니 어쩌면 한두 번 정도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이 왜 어린 화경에게 꽂혀 평생을 지배하는 트라우마가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질적인 문제도 있겠고 사랑받지 못한 엄마에게서 난 딸이라는 자격지심일 수도 있겠지.
여자인 게 아깝다는 말, 남자로 태어났으면 한자리 했겠다는 말은 똘똘했던 화경에 대한 칭찬이었다. 그러나 화경에게는 여자기 때문에 아무래도 안되겠다는 벽으로 느껴졌다. 화경은 평생 사랑받지 못한 엄마를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면서 산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얼마나 한심하고 추한 것인지 깨닫고 자신은 절대 그렇게 살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미인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처럼 살았다. 남자들이 하는 취미를 즐겼고 남자처럼 권력을 추구했고 승부욕과 사업가적인 기질을 길렀다. 웬만한 남자는 눈에 차지 않았다. 남자들도 화경의 카리스마에 지레 질려했다. 화경을 압도할 남자가 없었고 그러다보니 나이를 먹었다. 여자도 남자 못지않게 능력이 있다고 동등하다고 외치면서도 그녀 내면 깊은 곳엔 역시 남자가 우위에 있어 자기를 지배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모순이 있었다.
회사를 물려받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후계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과 갈망은 집요했다. 재산 욕심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같은 아버지를 두려워 피할 때도 화경만은 끝끝내 아버지 맘에 들 때까지 끈질기게 노력했다. 그것은 마치 연인에게 선택받고자 끝없이 그의 시선을 붙잡으려는 열정 같았다.
그러자면 남기가 실패해야 했다. 시소게임처럼 남기가 추락해야 자기가 비상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여자문제도 끊임없이 일으키도록 예쁜 여사원들을 고르고 골라 남기 근처에 배치했다.
경주도 그런 경로로 선택된 경우였다.
< 선우의 삶, 그의 고통스러운 선택>
그 무렵 선우는 몇 달째 봉급도 못주는 회사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한강수 화장품 회사에 용기를 납품하던 작은 회사의 영업 담당이던 선우는 나쁜 자금사정으로 부도직전이던 회사가 설상가상 한강수 측의 납품선 변경통고로 무너지게 되자 포기한 사장대신 화경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탄원하기위해 나섰다. 불안한 회사에 더 이상 중요한 납품을 맡길 수 없다고 냉정히 거절하는 화경. 그러나 진솔하면서도 당당한 선우의 태도에 화경은 깊은 인상을 받는다. 화경이 보기에 그는 스타일도 좋고 무엇보다 요즘 보기 드물게 젊은 친구가 책임감이 강하다. 설득력도 좋다. 화경은 무슨 생각인지 사람을 시켜 선우의 뒷조사를 시킨다. 화경의 거절로 빈손으로 돌아온 선우는 모든 개인재산까지 다 저당 잡히고도 해결 못한 사장이 안타까워 자기 집 전세금을 빼서라도 자금위기를 넘겨보겠다 위로한다. 어려울 때 함께 동고동락한 사장의 처지를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급한 불을 끄고 다시 화경을 찾아가지만 이번에는 만나주지조차 않는 화경. 경비원들에게 끌려 나가는 선우를 멀리서 지켜보던 화경은 회사의 보안 담당을 불러 선우가 가장 어려워 질 때 까지 기다렸다가 자기에게 데려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선우의 가족은 할머니와 여동생이었다.
여동생 은경이 어릴 때 부모가 돌아가셔서 가장 노릇은 선우의 몫이었다. 안타깝게도 고2인 은경은 난치병을 앓고 있었는데 <모야모야병>이었다. 평소에는 관리만 잘하면 큰 문제는 없는 미세혈관이 막히는 병이었는데, 중요부위에서 막히면 큰 수술을 해야 해서 언제나 조마조마하는 게 가족의 근심거리였다. 오빠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생활비가 쪼들리자 밤에 늦게까지 알바 일을 하던 은경이 무리가 됐던지 수업 중에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 병원에 가보니 운이 나쁘게도 이번엔 뇌 깊은 곳, 시상하부에서 핏줄이 막혀 쓰러졌다한다. 수술을 바로하지 않으면 점차 시력을 잃어 눈이 먼다는 것! 할머니는 그렇게 말리는데도 늦게까지 일했다며 안타까워하고 선우는 자기 때문이라 생각해서 더 미안했다. 가족을 안심시키고 뇌수술이라 많이 비싼 수술비를 구하러 이리저리 뛰는 선우.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번 무리하게 전세금에 손대지 말걸, 후회하기엔 상황이 너무 급했다.
점진적 시력상실! 이걸 막기 위해서는 수술이 필요한데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반복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리저리 변통을 했지만 많이 부족한 상태에서 은경의 상황이 너무 급박해진다.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실명할 수밖에 없단다. 선우는 참담한 심정이 된다. 할머니는 주름진 얼굴에 그저 눈물만 흘린다. 차마 경주에게까지 손을 못 벌리던 선우가 경주를 급히 찾아갔을 때 경주는 남기의 부름 때문에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길게 하며 빠져 나오지 못했다. 그때 화경의 전갈을 받는 선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화경을 만난 선우에게 화경은 뜻밖에 제안을 한다. 상당한 돈을 줄 테니 보기에 따라 불법적인 일을 해달라는 것. 선우는 착잡했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그러나 그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만약 내일도 수술을 못하게 된다면? 그 사이 돌이킬 수 없이 눈이 멀게 된다면.... 그럴 수는 없었다.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선우에게는 갈등할 시간도 계산해볼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 일을 해야만 했다. 그게 살인청부만 아니라면. 그 일은 다행히 청부살인은 아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주어지고 무척이나 까다로운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제 그의 육체와 영혼은 일정 기간 동안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선우의 사정을 할머니한테 듣게 된 경주는 그렇게 아꼈던 적금을 해약, 선우에게 내밀었다.
선우는 감동은 받고 돈은 안 받겠다고 했다. 수술비가 마련됐다고 했다.
그 거액의 수술비를 어떻게 마련한 것인지는 끝내 얘기하지 않았다.
자기를 믿고 기다리면 된다는 말만 했다. 궁금해 하는 경주에게 선우는 한동안 그녀에게 자신의 속사정도 털어놓을 수 없고, 일이 끝날 때까지 연락조차 못하리란 말은 결코 할 수 없었다.
은경의 수술 날 경주가 수술실 앞에서 같이 밤을 새주었다.
수술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앞으로 계속돼야 하는 투병생활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창백하게 수술대에 누웠을 동생에 대한 가슴 아픈 연민이 있었고 초라한 자신에 대한 무력감 때문에 자괴감도 있었다. 경주는 그 긴 시간동안 함께 있어주었다. 앞으로도 함께 있어주겠다고 했다.
무사히 수술이 끝난 뒤 할머니와 교대한 선우와 경주는 선우의 집에 들어갔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껴안았다. 사랑을 나누는 동안만은 힘든 현실, 불안한 미래를 잊었다.
다행히 은경이 무사히 퇴원하고 나자 약속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화경이 보낸 승용차가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우는 곧장 공항으로 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 시간을 결코 잊지 않겠다. 선우의 가슴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 선우의 부재, 그 의미>
그 후 경주는 선우를 볼 수 없었다. 연락이 두절되었다. 궁금해 집에 가보니 이사를 가고 없었다.
그의 핸드폰에선 없는 번호라는 안내가 흘러나왔고 그의 회사는 이미 문을 닫았다. 외국으로 간다고 하면서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 각항공사에 탑승자를 알아봤지만 확인이 쉽지 않았다. 그러는 경주를 지켜보던 남기가 웬일인지 도와주겠다고 한다. 기꺼이 부탁했다. 그래서 선우가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는 사실까지는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은 행적도 알 수 없고 연락도 오지 않았다. 정말 미칠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돈 때문에 일을 찾아간 거라면 소식 한 줄은 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마지막 만나던 날 선우가 한 말 한마디, 눈빛하나하나까지 다시 되 돌이켜 보길 수십 수백 번 반복했다. 답답한 마음만 컸지 짐작할만한 어떤 기억의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내가 부담이 됐던 거면 차라리 말로라도해주지. 야속했다. 일이라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맹렬하게 일하고 먹고, 뛰고 간혹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 생각했다. 그는 배반할 남자가 아니다. 나는 그를 믿고 기다리겠다. 결심했다.
남기가 뜻밖에도 경주에게 결혼을 하자고 했다.
농담처럼 가볍게 던졌다. 이제는 아버지를 안심시켜드려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회사를 물려받을 수 있다고. 당신이란 여자는 우리 집의 착실한 며느리가 될 수 있을 거 같다고 했다. 경주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였다. 그동안 괴롭힌 것은 관심의 표현이었다는 유치한 말도 했다. 경주는 거절했다. 더 이상 그를 보는 게 힘들어 사표를 쓰고 화장품 회사를 떠났다.
1년 후
< 바삐 사는 사람들 >
인희는 여전히 진헌의 집에 다니며 파출부 일을 하는 중이었다.
진헌모는 미국에서 온다 온다 하면서 쉽게 오지 못하고 있었다. 손녀딸은 국제변호사여서 아이를 낳자마자 일을 해야 했고 진헌모는 증손자 기르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인희가 살림을 잘 살아준다는 아들 얘기에 안심하고 더 있다 오겠다고 했다.
진헌은 모친의 말대로 너무나 바빴다.
밤 열두시 다 돼서 술에 취해 들어오고 어쩌다 일찍 들어와 저녁을 먹는 날도 식탁에서 계속 핸드폰으로 지시를 하다가 결국 다시 나가기 일쑤였다.
인희는 그런 그가 안쓰러워서 늦게 귀가하더라도 잘 챙겨주기 시작했다. 계약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를 돌봐주고 싶어서...
간혹 경미나 경주가 농담 삼아 남자친구 만드시라고 재혼을 권유하면, 이제 남자라면 징글징글하다고 자유롭고 좋은데 이 나이에 새삼 뭐 땜에 상전 모시냐고 하던 인희였다. 그랬는데 진헌이 너무나 허술하고 일상생활이 누구 도움 없이는 안 되는 사람이라 잊었던 모성애가 절로 발현되고 있었다.
회사의 큰 변화로 야근을 거듭하던 진헌이 어느 날 과로로 쓰러졌다.
인희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인희는 마치 아내처럼 그를 보살피고 챙겼다. 며칠 쉬던 진헌은 문득 자기도 모르게 그동안 인희에게 익숙해지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경미는 휴학한 채 아르바이트 두 군데를 뛰고 있었고 아직도 혼나는 연애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딸들 얘기가 나오자 현수가 경미를 취직시키겠다고 한다. 자기가 운영하는 커피 전문점이었다. 시간제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월급 받는 직원으로, 바리스타 일도 가르쳐주겠다는 덤도 얹어서.
그러자 우식은 바리스타의 기본이라든지 커피의 종류 등등을 자료 조사해 와 경미에게 주는 등 경미 일에 신경을 써준다. 그러나 자상과 집착을 넘나드는 우식은 커피숍에 들러 경미를 감시한다. 손님에게 쓸데없이 과잉친절을 보인다든가 웃음이 헤프다든가.. 경미를 피곤하게 만든다.
의심하고 집착하고 집요하게 캐묻고 화를 내고 야단치고 그리고는 사과하면서 자상하게 굴고 성의가 듬뿍 담긴 선물을 하곤 한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현수는 우식이란 놈과 우식에게 끌려 다니는 경미까지도 못마땅해 한다.
그런 세세한 신경도 사실은 강박증 증상이야. 너한테 잘하는 거 아냐.
자상하다고 착각하지 마!
그러나 현수도 인생 만만찮았다.
실은 일 년 전 사귀던 애인, 정민과 헤어졌다.
정민은 집에서 검사와 결혼하라 했다면서 이별을 통보해 온 것. 현수는 혼란과 분노와 배신감에 떨면서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애썼는데 그러나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정민이 다시 연락을 해왔다. 집에서 강요한 결혼이니 어쩔 수 없지만 오빠를 사랑한다고 했다. 헤어지자고 결정하면 오빠를 잊을 수가 없다고 울었고 그럼 집에서 반대해도 우리끼리 결혼하자고 하면 오빤 어떻게 그렇게 쉽냐고 화를 냈다.
이 지지부진한 연애는 일 년전 정민이 결혼식을 올리면서 드디어 끝나는가 했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난 후 정민이 커피샵에 불쑥 나타났다. 현수가 잘 사니? 라고 묻자 잘 살 수 있을 거 같애? 라고 되물어왔다. 현수는 남편과 불행하다는 그녀의 푸념을 들어줘야 했고 늘 그리웠다는 고백을 들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되면 밥해야 된다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정민이 현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장 이혼할 것처럼 얘기해서 현수가 심각하게 받아들여 그럼 나에게 오라고 하면 발을 빼곤 했다. 이혼해야 할 이유도 많았지만 이혼 할 수 없는 이유도 왜 그렇게나 많은지..
현수는 그녀가 자기를 가지고 논다고 화를 냈다. 너한테 나는 대체 뭐냐고 유치한 질문도 했다. 술을 진탕 마셨고 여자란 존재를 혐오해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나타나면 꼼짝할 수가 없었다.
다른 일에는 비교적 쿨한 현수가 왜 그렇게 끌려 다니는 건지 경미는 알 수가 없었다. 경미가 보기에는 그리 복잡해보이지도 않았다. 단순했다. 경미는 현수에게 딱 잘라 선언했다. 그 여잔 절대 이혼 안 해요!!
경주는 화장품 회사를 나와 스파에서 타이 맛사지를 하며 살고 있었다.
일 년 전 그렇게 사라진 선우에게선 아직 연락이 없었다.
경주는 전보다 말수가 줄어들었고 얼굴에 쓸쓸한 그늘이 생겼다.
상실감이 컸고 걱정과 두려움도 원망도 컸다. 그리고 외로웠다.
어느날 맛사지 실에 들어가니 뜻밖의 손님이 와 있었다. 성남기였다.
남기는 경주를 찾았다고 했다.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보고 싶었다고.
그 후 남기는 날마다 찾아왔다. 맛사지를 받으며 얘기를 했고 같이 식사하자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불행하고 외로웠던 성장기 그리고 짧고 불행했던 결혼생활까지.
경주는 그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돈 많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가 떠올랐다.
남기는 경주에게 다시 청혼했다.
그때는 우리집의 며느리로 적당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젠 달라졌다고. 나에게도 좋은 아내가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경주는 그에게서 진심을 읽었지만 여전히 정중하게 거절했다.
< 그가 그립다 >
어느날 경미가 뜻밖의 말을 한다. 선우를 한번 봤다고 하는 것이었다.
버스 타고 가다가 얼핏 봤다고, 아무래도 선우인 거 같긴 한데 스타일이 너무나 달랐다고 했다. 외제차를 몰고 있었는데 버스 안에서 어어 하며 놀라는 사이 골목을 빠져나와 버스를 앞질러 사라졌다고.
그래서 경주는 당장 그를 찾아 나선다.
경미가 말한 한남동 일대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를 한번 본 거 같다는 말에 의지해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정말 모래사장에서 바늘찾기였다. 그를 봤다는 골목 입구에서 몇 시간 동안 오가는 차량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했다. 집집마다 벨을 눌러가며 이 집에 혹시 이선우라는 사람이 살고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한남동은 집마다 웬 개들은 그렇게 많은지.. 경주는 차츰 지쳐갔다.
이곳에 살고 있기는 한건가? 우연히 지나간 정도는 아니었을까? 혹시 아는 사람 집이었나? 얼핏 본 남자가 선우가 맞기는 한건가?
그런 경주에게 남기가 다가온다. 자기 차 안에서 좀 쉬라고, 차 안에서 오가는 차들을 살펴보라고.
처음엔 거절했던 경주는 경사진 골목을 내려오다 발을 삐자 할 수 없이 그의 호의를 받아들인다. 차 안에서 남기는 그녀에게 자기가 도와줄 일은 없냐고 묻지만 주민등록을 옮긴 것은 아니어서 제도적으로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봐야했다.
< 이상한 데이트 그리고 엇갈리는 운명 >
그 때부터 경주와 남기는 퇴근을 하면 으레 남기의 차에 타 평창동 일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데이트였다.
선우를 찾을 거라던 희망이 절망으로 점점 채워질 무렵 경주는 선우를 발견한다. 평창동 입구에 있는 카페 앞에서였다.
선우는 젊고 아름다운, 부잣집 딸이 틀림없어 보이는 여자와 카페에서 나와 차에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차 안에서 그 여자와 키스를 나눈 후 차를 출발, 떠나갔다.
경주는 믿을 수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 명백해졌다. 그는 배신했다. 그는 타락했다. 그는..
남기가 우는 경주를 안아줬다. 너무나 힘들었던 시간들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 때 사실 선우는 한남동에 살고 있었다.
경주가 그토록 찾아다녔던 그 골목의 담장 높은 집에서.
화경이 선우에게 거액을 주고 시킨 일은 일종의 첩자 역할이었다.
마침 선우는 군대에서도 정보 관련 업무를 했었고 한동안 어느 재벌회사 기획팀에서 보안담당 업무를 맡아본 적도 있었다... 허긴 그런 경력이 없어도 좋았다. 그는 미남이고 머리가 좋았다. 최적의 조건이었다. 미남계 첩자!
타겟은 최근 중저가 브랜드로 급성장하는 <다뉴브>라는 화장품 회사 오너의 딸이었다. 유학 후 돌아와 다뉴브에서 일할 예정인 그 딸과 어떻게든 친해져 그 회사의 기밀과 약점을 알아보라는 임무였다.
몇 년 전 새로 이 업계에 뛰어든 회사 <다뉴브>는 정치 권력의 비호아래 급성장한 천회장이 한강수의 핵심인력과 제품노하우를 빼내 만든 회사였다. 당시 법적으로 문제가 있었지만 검찰의 불기소로 유야무야된 뒤 성회장은 그냥 잊어버리라 엄명했지만 당시 경영일선에 처음 나선 화경은 분을 참지 못했고 절치부심 복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안전하지도, 수월하지도 않은 이 일을 무리해서 추진하는 화경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 만전을 기하려했다. 계약은 터무니없이 까다로웠고 사전 준비는 놀랄 만큼 철저했다. 물론 성회장은 물론 회사 내 본인의 심복을 빼곤 아무도 모르게 추진된 일이었다. 당연히 선우는 철저히 신분을 위장해야 했다.
돈푼이나 있는 집에서 딸에게 접근하는 남자의 뒷조사쯤은 당연히 있을수 있는 거고 만에 하나라도 신분이 드러나면 불똥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이었다. 선우는 집안 좋은 재미교포 2세가 되었고 유리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갔다.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 극장에서 우연히 만난, 사실은 우연을 가장하고 만난 선우와 유리는 당연한 수순을 밟으며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유리가 한국으로 들어간 후 유리가 그리워서 뒤따라 들어와 버렸다. 고 설정해서 귀국했다.
선우는 가족, 친구, 애인 친지와 연락을 철저히 끊었고 다른 신분, 다른 이름으로 살도록 강요받았다. 화경과 아예 계약을 그렇게 했다.
선우는 한남동 고급 주택에서 화경이 제공하는 온갖 지원을 받아가며 지내고 있었다. 갇혀 지내자니 심심해서 선우는 독서광이 되었고 그래도 시간이 남자 온갖 채소를 취미 삼아 기르기 시작했다. 예쁜 채소도 있었다.
선우는 채소를 기르면서 공터만 보이면 채소를 심어 길러먹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가 그리웠고 은경이는 얼마나 회복됐는지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리운 사람, 경주도 보고 싶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자기 화장품회사에서 제품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유리를 만나러 나가는 길이면 차를 돌려 경주네 집 앞으로 가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래서 실제로 가보기도 했다.
경주가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런데 어느날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는 경주를 목격했다.
두 사람은 다정해보였고 그는 한강수의 성회장 아들 성남기였다.
<슬픈 몸부림>
그럴 수도 있는 일이고 연락을 끊었을 때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었지만 정작 눈앞의 현실에 마주치자 선우는 견디기 힘든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자신의 삶이 빠진 진흙탕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수렁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말수를 잃어가던 선우는 결국 경주에게 연락을 시도한다.
동행자 몰래 경주에게 공중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하는 경주의 목소리 ...
울컥하는 마음, 망설이는 사이 누군가 전화를 뺏어 걸고 그를 돌려 세운다.
계약을 파기한 결과로 화경에게 불려가 심한 추궁을 당하는 선우. 화경은
그녀답게 선우의 자존심에 호소한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거냐고. 누군지
말하면 그 관계는 자기 측에서 파토나는 쪽으로 조정하겠노라고. 화경은
그녀가 경주인줄 몰랐고 선우는 화경이 개입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피눈물을 삼키며 계약대로 연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빨리 일을 마무리 할 수 있도록 사정했다. 안 그래도 화경 쪽은 남기가 성회장의 신임을 더 얻기 전에 일을 마무리해 공을 세우고 싶었다. 그러려면 무리하지만 선우가 유리한테 청혼이라도 하고 가족 속으로 더 가까이 갈 필요가 있었다. 일은 급속하게 속도를 더해가고 화경은 성회장에게 다뉴브 인수 계획을 보고한다. 물론 선우를 이용한 뒷 작업은 쑥 뺀 채. 실현가능성에 회의적이긴 하지만 화경에게 신중히 추진하라고 지켜보겠다는 성회장 말로 화경은 이 일을 공식화해 강력 추진한다.
< 이대로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
남기는 아들 윤상에게 경주를 소개했다. 경주도 남기를 엄마에게 경미에게 소개했다. 인희는 남기는 어쩐지 어렵고 선우보다는 정이 덜 가긴 했지만
경주의 선택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남기가 집안에 결혼 얘기를 꺼내자 화경은 처음엔 의외라서 놀랬다. 사람을 시켜서 경주를 뒷조사 시키고 직접 만나도 보았다. 시누이 자격으로. 놀라왔다. 나이에 비해서나 학력, 경력에 비해 너무 야무졌다. 집에 들여서는 안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있었다. 그래서 반대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보낸 여자긴 했지만 그냥 즐기라는 여자였지 결혼 상대감은 아니라고 했다.
집안 보잘 것 없고 학벌도 형편없고 뭐 하나 볼 것 없는데 무슨 결혼이냐고 반대한다.
화경이가 반대하니 임여사도 반대했고 결국 성회장까지 집안 시끄러운 결혼을 꼭 해야겠냐고 물어왔다.
남기는 첫 번째 결혼이 실패했으니 두 번째는 내가 원하는 결혼을 하겠다고,
자신의 생모도 아버지 화장품 회사 판매원이었다고 들었다면서 경주와 결혼하겠다고 나선다. 급해진 화경은 경주 몰래 인희를 만나 모욕적인 언사로 모멸감을 준다. 마침 그 자리를 마주친 진헌은 인희를 옹호하고 화경에게 따끔하게 사과시킨다. 결국 성회장이 경주를 집으로 부르고, 경주를 만나본 성회장은 결혼 허락을 내린다.
성회장이 남기의 결혼을 인정하자 그걸로 끝이었다. 임여사와 화경은 입을 다물었지만 그러나 성깔은 남아 결혼준비에서부터 경주와 인희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화경은 뒷조사를 통해 경주에게 사귀던 남자가 있었고 회사 건물에서도 몇 번 만난 사실을 동료들 입을 통해 확인한다. 그리고 경주에게 건강검진을 받도록 유도해 <처녀성 검사>까지 몰래 하려고 한다. 사내 심복을 통해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남기는 난생 처음 누나에게 크게 화를 내고
더 이상 자기 두 사람 일에 간여하지 말라고 소리 지른다. 남매는 비로소 두 사람이 어린 시절의 오누이로 다시는 돌아갈 수없을 거라는 걸 예감하며 전율했다. 화경은 겉으로는 냉정하게 동생을 달랬지만 마음속의 감춰진 칼날이 이제는 칼집을 벗어나려하는걸 스스로 느꼈다.
아무리 계약 때문이긴 하지만 이제 거짓인생의 정점을 향해 유리를 속여야하는 선우는 인간적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유리의 청혼 거절로 파탄이 나기라도 했으면 했다. 그러나 빨리 계약을 끝내고 경주에게로 달려가야 한다. 다행이 일이 순조롭게 되느라 화경 쪽에서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 하기를 채근한 게 희망이 되어 눈을 질끈 감고 내쳐 달려나갔다. 마침내 화경이 원하는 거의 모든 정보를 알아내 건넸다. 이젠 끝이었다. 일을 마무리 지어야했다. 선우는 유리에게 결혼허락을 받기 위해 미국에 들어갔다 다시 나오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국행 비행기를 끊었으며 그 길로 사라졌다.. 일주일 후 유리에게는 미국으로 들어간 대니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연락이 갔다. 선우가 신분을 위장했던 대니는 실제로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인물이었다. 물론 교통사고가 난 날자는 좀 다르지만.
선우는 현실로 돌아갔다. 유리에게 죄책감이 없진 않았지만 그보다 해방감이 더 컸다. 선우는 명품 옷과 명품 시계 등 액세서리 모두를 일말의 미련도 없이 벗어던지고 경주에게로, 가족에게로 달려갔다.
화경은 아버지의 건강이 더 나빠지기 전에 경영상의 능력을 아버지에게 보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남기나 어떤 경쟁자와도 다른 자신만의 역량을 근거로 후계문제를 언질 받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결혼으로 남기가 정돈되기 전이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이제 공들인 다뉴브 인수 작업을 위해 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회사는 모두 화경의 능력에 혀를 내두르고 역시 그녀가 미래의 한강수 주장이 될 거라는 기존의 풍설을 믿었다.
그러나 일은 예상대로만 풀려가진 않는 게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니던가.
화경이 아버지에게 최종 합의서를 설명 드리러 갔을 때 성회장은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인수과정을 보면 상대의 약점을 놀랍게 꿰고 있던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해냈는지 물었다. 순간 화경은 말을 버벅거렸다. 속시원한 대답을 못들은 성회장은 화경을 보내고 문사장을 불러 최근 화경이가 무슨 일을 해왔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한다.
그래서 화경이가 그 회사 기밀을 알아내기 위해 미남 첩자라는 편법을 썼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성회장은 화경을 불렀다. 칭찬 받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불같은 호령이 벼락치듯 떨어진다. 그런 기밀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상대의 약점이나 캐고 다닌다고, 부도덕한 짓이라고. 아니 불법을 저지른 거 아니냐고. 화경은 변명하지않고 정면으로 맞받았다. 천회장은 그보다 더한 일을 우리한테 저질렀다고. 이것보다 몇 십배 쓴맛을 봐도 싼 놈이라고. 그놈 때문에 회사가 거덜날 처지에 몰렸던 걸 벌써 잊으셨냐고. 성회장은 대노했다. 화경을 스스로 잘못 가르쳤다고 나무라고 인수작업의 중단을 당장 선언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화경은 낙담했다. 아버지 성회장에게 대들기까지 했다. 성회장의 태도는 확고부동했다. 회사가 해서는 안 될 선은 있어야하고 그것은 회사의 장기적인 존립을 위해서도 결코 양보할 수없는 원칙이라고 재천명했다. 불법은 안 된다는 것. 아무리 상대가 한 짓이 있어도 우리도 그런 식으로 복수할 수는 없다는 것. 인수합병작업이 돌연 중단되자 오히려 한강수의 주가는 회복된 반면 그동안 기대를 모으던 다뉴브는 폭락했고 큰 위기에 빠졌다. 성회장은 다뉴브에게 조건 없이 자금 지원을 명했다.
< 결혼, 그 행복과 불행의 단초들>
재혼이긴 했지만 결혼이 다가오자 가장 들뜬 모습을 보인 것은 남기였다.
그의 인생에 그런 생기와 밝은 기운이 있었을까 싶게 빛을 흘리고 다녔다.
경주는 침착했다. 결혼식장의 하객들은 경주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불쌍해
하거나 경멸하거나 안타까워 했지만 슬퍼하는 사람은 시장 한 켠 기둥
뒤에 숨어 퀭한 눈에 핏빛 눈물이 배인 선우 뿐이었다. 조금 더 일찍이었다면 혹시 경주를 되찾아올 수는 있었을까? 어쩌면 그가 계약서에 서명한 순간 이런 슬픔은 각오했던 것 아닌가? 그는 차마 눈부시게 예쁜 경주의 드레스 입은 모습을 더 이상은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식장을 벗어났다. 초봄의 으슬거리는 그늘 속으로 휘적이며 걷는 그의 뒷모습은 훅 불면 쓰러질 종이접기 인형처럼 속이 휑비어 보였다.
결혼을 했을 때 경주는 이제는 다른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남기도 빠르게 안정되어갔다.
윤상이와 친해지기가 쉽진 않았지만 차츰 아이도 경주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남기는 처가에도 잘했다. 인희와 경미가 편안히 살 수 있게 아파트를 마련, 이사하게 해주려 했지만 인희가 끝까지 고집을 피워 살던 집에서 살게 했다. 식구들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했지만 경주의 고집은 완강했다. 남기는 불편한 것도 개의치 않고 처가에 오기를 좋아했다.
경주는 남기와 친정에 올 때 윤상이도 데리고 왔다. 윤상이는 경주 친정에 오면서 훨씬 빨리 마음을 열었다.
그러자 누구보다 좋아한 사람은 성회장이었다.
남기는 경주에게 전처와는 사별했다고 말했다. 가족 간의 갈등이 심했고 그 때문에 병을 얻었다고 했다. 윤상 역시 엄마는 죽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혼이었다. 아내가 남기를 배신했고 먼저 이혼을 요구했었다. 그리고 이혼 후 곧장 다른 남자와 보란 듯이 결혼했다. 결혼 중에 바람 핀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남기도 바람 피긴 했지만..
남기는 이 때문에 상처가 있었고 친모와 아내.. 여자들에 대한 상처를 쉽게 극복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성회장의 걱정이었다.
성회장은 남기의 안정을 누구보다 기뻐했다.
그러자 화경, 경주에게 맹렬한 질투심을 느낀다. 남기의 마음을 잡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성회장은 뭐란 말인가.
성회장은 가족을 포함 누구에게도 말대꾸 못하게 하는 불같은 노인네인데 경주가 겁없이 말에 토를 달고 주장하고 심지어 성회장이 가족을 대하는 태도까지 문제 삼으며 지적했다.
조마조마해서 지켜보던 가족들은 몹시 놀랐다. 경주의 야단을 맞으며 성회장이 기분 좋게 웃었던 것이다. 경주는 경주대로 시아버지 성회장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남편 남기보다 성회장이 더 경주의 방패막이가 되었다. 화경의 걱정은 현실이 되고 있었고 남기는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었다.
성회장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경주는 며느리로 병상을 지켰다.
초조해진 화경은 다시 성회장의 신임을 되찾기 위해 무리수를 두기로 결심, 선우를 찾았다.
수술을 받은 성회장이 부쩍 쇠약해진 모습으로 퇴원했고 퇴원 기념 가족 모임에 놀라운 손님이 하나 나타났다. 화경이가 데리고 등장한 대니라는 이름의 미국교포 2세.. 선우였다.
경주는 너무나 놀라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선우는 미리 알고 있었던 듯 침착하게 하바드 대학 나온 수재 역할을 해냈다.
남기는 그동안 선우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고 경주를 위해 그를 찾아보기까지 했으나 실제 인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남편 남기는 그가 선우인지 결코 알 수가 없었다. 성회장 앞에서 선우의 연기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스펙이나 기개, 충만한 자신감, 심지어 어려운 집안 형편 속에서도 자수성가한 아버지이야기까지 바로 성회장에게 맞춤형 인간이었다. 화경은 자기 계략이 맞았다고 생각, 기뻐한다. 선우를 실제로 회사에 영입, 문사장에게 부탁해 사장 비서실로 인사발령을 낸다.
그런데 놀랄 일이 벌어진다. 성회장은 오히려 화경을 한직으로 발령내도록
문진헌 사장을 불러 지시를 내린다.
놀라 항의하는 화경에게 성회장은 타이른다. 화경이 이전부터 결혼상대로 생각해온 이전 남자친구를 왜 벌써 포기했느냐고. 버리지 말라고. 아버지가 싫어하지 않았느냐는 화경의 원망에 성회장은 간곡히 타이른다. 내가 좋아하건 싫어하건 그것은 내인생이야. 그런 속에서도 니가 어떤 남자를 선택하느냐는 너의 인생이라고. 나에게 맞추려 하지 말고 니 방식대로 하되 훌륭하게 해내는 것이 진짜 성공이며 내 눈에 맞추려고만 들다간 네 자신을 잃을까 걱정이라고. 사업을 위해 가정마저 희생시키는 시대는 자기 시대로 끝나야한다며 결혼은 네 맘대로 해도 괜찮다고 당분간 근신하라고 타이른다. 그 선우라는 남자, 멋진 놈인데 그러나 너를 바라보는 눈길에 사랑이 없었다고. 그리고 너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회사를 위해 일부러 조건 좋은 남자와 애정 없는 결혼을 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부탁한다.
성회장의 결혼, 임여사와의 결혼이야말로 회사를 키우기 위해 했던 정략결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화경이 아버지의 진심을 이해하기에는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겨진 성장의 내상이 너무 깊은 건지도 몰랐다.
선우의 출현에 당장이라도 달려가 붙들고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따져 묻고 싶은게 경주의 마음이긴 했지만 두 사람이 놓여진 상황은 그마저 힘들었다.
선우의 눈빛은 빛이 차단된 동굴의 깊은 속내처럼 아무런 의미도 건네오지
않았다. 그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고 경주는 그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낯설게 느껴져 당혹감에 황망해졌다.
경주는 과거를 영원히 묻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과거는 이미 흘러갔고 운명은 서로 다른 궤도를 달리게 돼 버린 거라고...그러면서도 눈물이 흐르는 건 어쩔 수 없는 고통이 아직 생생하다는 증거였다.
경주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남기에게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돈 벌어서 친정을 돕고 싶다는 말도 당당하게 했다.
결혼한 후 남기가 친정 식구를 위해 경제적 지원을 하려 했을때 경주가 단호히 거절했기에 반대하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했고 아내의 말이라면 뭐든 해주고 싶은 남기는 회사에 자리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 예전에 경주가 일하던 뷰티아카데미의 실장으로 발령냈다. 회사에서는 수군댔다. 오너며느리에 대한 온갖 설왕설래가 무성했다. 경주는 그러나 개의치 않고 밀고나갔다.
화경의 입장은 남기와는 많이 달랐다. 화경은 심복들을 통해 경주를 궁지에 몰아넣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출발- 그러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당분간 자기 남자친구 노릇을 해달라는 화경의 제안을 선우가 쉽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인생에 구원자처럼 행세하는 화경을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게 선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자신이 격리되어있는 동안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을 추스르기 힘든 슬픔이 밀려왔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할머니의 사고 사망은 화경과 관련이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동생 은경이 건강을 회복해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된 것 뿐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기숙학교에 들어가 지방에서 혼자지내고 있었다. 외로웠다. 자신감에 넘치던 과거의 선우는 어디로 가고 대상없는 분노와 자괴감으로 무너질 것 같았다.
그의 새 출발은 경주를 마음속에서 지우기 전에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경주와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서 인정해 주는 것이 먼저 필요했다.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일정한 종자돈을 마련해 세상을 향해 다시 도전하는 수 밖에는 길이 없어 보였다.
화경이 선우와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동안 화경의 심경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선우를 업무적으로만 대해오던 느낌이 깊이 좌절한 듯 보이는 그를 볼 때마다 조금씩 물기가 배는 어떤 것으로 진전되는 것이었다. 사실 그런 느낌은 화경에겐 드문 일이었다. 처음 만날 때부터 선우란 남자에게는 다른 남자들에게서 느끼기 어려운 어떤 면이 있었다. 감정의 직설법이랄까, 타인과 소통할 때 뭔가 두 사람 사이에 낀 정서적 거리감을 일시에 무너뜨리는 진솔한 분출 같은 게 있었다.
자기 방어막에 닫혀 사는데 익숙한 화경에게는 이런 경험이 이례적으로 흥미로웠다. 언제나 자신이 주도해온 그간의 남자 관계로는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미묘한 자극이 있었다. 그녀는 난생 처음 아버지의 사랑을 놓쳐버릴 것 같은 위기 의식 속에 있었고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의존하고 싶기도 했다. 그런 느낌을 선우에게 내보일 정도로 나이브하진 않았지만 선우와의 새로운 일 관계 속에는 건조한 계약으로만 보기 어려운 미묘한 행간의 감정들이 숨어있었다.
상심해 있는 화경과는 반대로 남기는 일이 잘되고 있었다.
현장에서 일하는 경주의 아이디어가 한몫했다. 그래서 히트 상품을 발굴해 내서 매출액을 급상승시켰다.
이제 선우는 한강수 화장품 회사의 일원이 되어 임원회의나 기획회의 때
사장을 배석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사내에서 경주와 마주치는 일도 종종 생겨났다. 경주는 선우가 왜 갑자기 대니라는 이름으로, 전혀 다른 신분으로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화경을 속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화경과 어떻게 그런 사이가 된 것일까. 우연히 함께하던 그 키스하던 여자는 누구였을까. 모른 척 해야 할수록 의문은 깊어졌다. 그래서 몇 번은 서로 외면하고 지나쳤으나 결국 어느 순간 참고 있었던, 억눌렸던 그 무엇이 폭발했다. 경주는 선우를 둘만이 만나던 곳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솔직하게 이야기 해줄 수 없느냐고 진심으로 부탁했다. 내내 침묵하던 선우는 늦었지만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하고 자신은 경주의 앞길에 결코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때가되면 사라지겠노라고 담담히 말한다. 그의 눈빛에서 깊은 슬픔을 읽은 경주는 억장이 무너지지만 세세한 사정을 묻는 것이 남편에 대한 마음의 예의가 아닌 거라 참고 참으며 고맙다고, 먼저 결혼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돌아서 나온다. 혼자 남아 앉아있던 그를 유심히 보는 사람이 있었고 화경은 비로소 경주가 선우와 심산치 않은 관계임을 눈치 채게 된다. 그러나 단순하지 않은 화경은 곧장 선우나 화경에게 추궁하는 대신 인희나, 경미에게 두사람 사이를 알아내기 위한 염탐을 해보기도하고 선우의 여동생에까지 사람을 보내 내용을 알아내려 애쓴다. 그리고 결국 두 사람이 같이 잔적이 있는 깊은 관계였음을 알아낸다.
제 2 막
<혼란, 감정의 소용돌이>
경주는 생각보다 야무진 데가 있었음이 그의 남편 보좌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그가 꼭 무슨 회사경영에 재능이 있어서는 아니지만 밤에는 온라인 MBA를 늦게 까지 듣기도 하고 오랜 경험을 가진 진헌에게 경영에 있어서
사람 쓰고 대접하는 일에 대해 귀담아 듣기도 하면서 회사의 고비마다 남기를 곧추서게 만든다. 남기는 아내가 고맙기도 하고 한편 약간의 자존심에 손상을 입기도 했으나 대체로 보아 인생에서 가장 광채로운 나날이었다. 그 빛의 그늘 속에 화경의 불안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성회장의 눈길이 무서워 내놓고는 못해도 끊임없이 경주를 견제할 사단을 만들어 냈고 임여사도 점점 노골적으로 화경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경주와 선우사이를 알게 된 것이다. 느낌이 묘했다. 경주가 괘씸한 건 그녀 성격상 당연했지만 선우에게 섭섭한 느낌이 드는 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녀는 이 두 과거연인의 이별이 자기 탓일 수도 있다는 데에는 결코 그 생각이 미칠 리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이용가치가 있는 건이냐만 중요해야 했고 ,그렇다면 기뻐할만한 소재여야 했다. 그러나 감정이 묘하게 기쁘지 않고 화가 났다. 마치 두 사람의 관계가 자신을 배반한 듯 느끼는 것이다. 결국 화경은 두 사람의 과거를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경주에게 말하고 남기나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는 대신 회사에 나오지 말고 간여하지도 말 것을 제안한다. 올 것이 왔다고 느끼지만 자신이 떳떳하다고 생각하는 경주는 자신이 먼저 두 사람 사이를 남편에게 털어놓는다. 처음 당황함을 감추고 대범하게 넘기고 마는 남기가 오히려 불안했는데 결국 나쁜 예감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남기는 분풀이를 화경에게 퍼붓고 화경에게 당장 선우를 쫓아내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선전포고를 한다. 그러나 화경은 오히려 남기와 경주사이를 조롱하면서 경주의 정숙하지 못함을 아버지한테 왜곡해 전달한다. 이미 쇠약할대로 쇠약해진 성회장은 사태의 중요성을 알아채고 마지막 총기를 모아 현명한 판단을 내리려 애쓴다.
어느 날 성회장은 경주를 불러 남기가 결혼 실패와 지어머니일로 힘들어하는 점이 있으니 니가 신경을 많이 써줬으면 한다고 손을 잡고 당부한다. 아마 남기는 한번만 더 배신을 체험하면 더는 버텨내지 못할 줄을 성회장은 알고 있었다. 경주는 시아버지 앞에 결혼에 죽을 때까지 충실할 것을 굳게 약속한다. 성회장은 눈물을 흘리며 약한 모습을 보인다. 경주를 보낸 뒤 유언장 때문에 변호사를 부른다는 소식을 들은 화경은 조바심이 극에 달한다. 결국 성회장을 만나고 돌아가는 변호사의 차에 접촉사고를 낸 뒤 유서를 훔쳐보고 마는 화경. 그러나 그녀는 곧 후회한다. 거기에는 자기에게 유리한 유언 내용이 들어있었던 것. 성회장은 결국 경영은 화경이 해내야할 일로 본 것인데 그녀는 결국 아버지를 믿지 못한 게 난생처음 부끄럽고 두려웠다.
다음날 화경은 아버지의 부름을 받는다. 그리고 화경에게 마음 수련을 잘하고 있는지 묻고 왜 그렇게 조급한 욕심을 제어 못하는지 안타까워한다. 화경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던 마음과 그러면서도 엄마와 자신이 버림받지 않을까 마음이 항상 불안했던 이야기를 고백하며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딸을 달래는 성회장.
나는 네가 자랑스럽고 너를 정말 사랑한다고, 따뜻하게 대하지 못한 성격 때문에 미안하다고. 너의 뜻을 알았으니 걱정 말라고 한다.
그러나 다음날 다른 변호사를 불러 새로운 유언장을 작성하게하고 진헌을 불러 선우를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런 뒤 눈을 감는다.
< 사랑, 풀 길 없는 수수께끼>
성회장의 사후 유언장이 공개된다.
다들 충격을 받는다. 남기에게 회사를 물려준다고 명시되어 있었던 것. 계속되는 화경의 편법과 무리수가 오히려 회장의 마음을 바꾸게 만든 것이었다. 화경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온몸이 꼿꼿해졌다. 남기를 쓰러뜨려 회사를 되찾아오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남기는 장례식이 끝나자 의욕적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인사를 단행한다. 화경을 이름뿐인 부사장으로 임명하고 선우를 업무상 비리를 이유로 해고하고 진헌을 부회장으로 하고 어머니 임여사를 회장으로 모셔 올린다. 아버지의 사람들이 많이 물러나고 젊은 남기 충성 멤버들이 이사로 승진한다.
경주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뭔가 남기의 의욕 속에 순탄치 만은 않은 그을음이 보인 것이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은 막이 생긴듯했다. 그럴수록 경주는 성심을 다하려했다. 성회장의 부탁도 부탁이지만 스스로 큰 연민과 책임감이 남편을 향해있었기 때문이다. 부부사이에 잘해준다는 것 , 성실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만일 그게 사랑이라고 불러 마땅한 그 무엇이 아닌 모든 다른 어떤 것도 사랑만큼은 못한 거 아닐까? 그렇다면 경주는 남편을 사랑하게 된 것일까. 경주는 기도하듯 조심스러웠고 그런 느낌은 묘하게 남기를 자극하고 있었다. 불쑥 비아냥거림이 튀어 나오기도 하고 술을 과음하는 날이 잦아졌다.
화경은 선우와 경주가 과거 연인이었다는 그 관계를 이용, 남기를 심리적으로 무너뜨리려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선우를 경주에게 보냈다. 둘만 있게 되는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 그 순간을 남기가 보게 하기 위해서.
남기는 점점 의욕과잉의 허세에 빠져 들어갔다,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대규모 투자는 신중해야 한다고 문진헌 부회장이 충고했건만 귓등으로 흘린다. 성공을 하자면 과감해야 한다고, 상식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과는 참담했다. 경기 타이밍도 좋지 않고 신제품 개발은 실패했다. 남기의 의욕과잉이 부른 화이기도 했고 화경의 암투와 모략 때문이기도 했다.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옛날 버릇이 나오기 시작한다.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고 여자를 만났다.
게다가 화경이 배치해놓는 작은 덧들은 충고해줄 충직한 측근을 잃은 남기를 끈질기게 옥죄어온다. 결정타는 남기가 경주를 만나기전 스캔들을 일으켰던 CF 모델 하지영과 남기가 다시 만나도록 만든 일이었다. 자제력을 잃기 시작한 남기는 경주의 간곡한 부탁도 무시하고 나쁜 소문을 만들고 다닌다.경주의 고통은 남기에게 동정받지 모했고 오히려 묘한 가학심리만을 부추겼다. 처가에 갔다가 장모와 웃고 있는 선우를 본걸 게기로 두 사람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즉 장모가 자기보다 선우를 더 반가워하고 좋아한다는 사실에 몹시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경주의 임신이 아주 잠깐 둘 사이를 회복시키는가 했는데 누나가 결정타를 날린다. 경주가 가진 아이가 선우의 아이라고.
아내가 배신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분노가 폭발한다.
장모와 연애한다는 문진헌 부회장도 믿지 못하겠다. 그래서 사표도 받아낸다.
진헌은 한강수 회사를 위해 평생을 보냈거니와 성회장 사후에도 그의 유지를 받들어 남기를 대표이사로 추대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인데도 가차 없었다.
사방천지에 믿을 수 없는 적들 뿐이었다.
물론 제일 괴롭히는 사람은 경주였다.
경주는 가장 자기 편이 되어줬던 성회장이 죽은 뒤 고립무원이 되고 있었다. 남기는 일에 바빴고 일이 실패한 뒤에는 난폭해져 갔다.
선우가 나타나 혼란스러웠고 선우 때문에 남기의 의심은 점점 더 노골적이 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우가 곁에 있다는 사실은 묘한 안심도 되었다. 경주는 선우가 있어 든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회사에서 쫓겨난 선우는 화경에게 작별을 고하고 떠났다. 누구한테도 소식을 남기지 않고. 그러나 화경은 능력 있는 여자였다. 적절한 시간에 선우 앞에 나타나 그의 동정심을 일으킬 줄 알았다. 객관적으로도 화경은 힘든 상황이었다. 자신을 눈에 가시로 여기는 남기가 어머니의 비호만 아니면 벌써 회사에서 쫓아냈을 거라는 건 다 아는 비밀이었다. 자주 불러 상의하는 화경을 내치지 못하는 선우는 어느날 너무 술이 취해 함께 잠든 사실을 발견한다. 두사람 다 별 의미를 안 둘 수도 있는 나이였지만 또 그렇게 의미 없는 일이 되기도 힘들었다.
화경의 별난 성격은 이런 감정 상태에서도 선우를 냉철하게 이용한다는 점이다. 선우가 자기를 기다리는 장소에 경주를 나타나게 해서 남기가 보게 만드는 저열한 수법은 말할 것 없고 어디선가 과거 경주와 선우가 함께 찍은 사진을 남기가 보게 만든다든지....깨알같은 노력을 끝없이 추구하는 별난 집요함. 선우는 경주의 불행을 옆에 지켜보기가 점점 힘들어지자 남기를 만나 남자대 남자로 제안을 한다. 어떻게 하면 경주를 행복하게 사랑해 주겠느냐고?
자기가 죽어야만 한다면 죽어주겠노라고. 이미 과거는 지나갔고 그녀는 당신의 사람이 아닌가. 이쯤하면 좀 좋아질 줄 알았는데 그날 남기는 폭발하고 드디어 경주를 폭행까지 하게 된다.
집으로 잠시 피난한 경주의 푸른 눈두덩과 마주친 선우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을 느낀다. 어떻게든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 억제하면서 경주를 만나고 대해왔지만 어느 순간 억눌러왔던 감정이 폭발하면서 경주에게 그렇게 힘들면, 그렇게 남편이 괴롭히면 이혼하라고 했다. 자기 때문이라면 모든 걸 다 바쳐 평생을 보상하겠노라고....
그러나 경주는 거절했다. 아이가 생겼다고.
그리고 아이도 아이지만 남편이 불쌍해서 안되겠다고 했다.
화경이가 선우에게 결혼하자고 했다.
선우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거절했지만 화경은 집요하게 결혼을 종용해왔다. 그 무렵 경주의 결혼생활은 너무나 위태로워보였다.
그래서였다. 경주를 위해서. 남편의 의심과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서.
경주를 근처에서 지켜봐주기 위해서.
결혼소식을 들은 경주는 순간 창백해졌다.
어쩌면 그래도 남아있을지 모르는 일말의 가능성, 그가 믿으라고 했던 그 말들.. 경주는 절망했다기보다는 지독히 외로워졌다.
결혼식에 참석하고 온 남기가 웬일인지 기분이 좋아보여 경주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하지영이었다. 눈치 보던 남기가 정리한다며 나갔다 오겠다고 한다. 믿고 싶었다. 그러나 자제력이 약한 남기는 술이 들어가면 또 못 헤어날 것이다. 남기를 붙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은 약속할수 있냐고. 자고 오면 안 된다고. 당신을 믿겠다고 . 내 믿음을 제발 지켜달라고. 오늘따라 웃음까지 얼굴에 담은 남기가 참 오랜만이어서 낯설었다. 떠나는 남기의 차를 경주는 오랫동안 지켜봤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고 눈물이 자기도 모르게 주르르 흘렀다. 역시 새벽 2시가 되도록 남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설핏 소파에 앉아 졸았나 싶은데 전화벨소리에 깜짝 놀라 깼다. 병원이었다. 음주 운전중에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추돌사고였다.
만취운전을 하던 남기가 방심하는 순간 추돌 사고를 냈는데
놀라 정신이 들어 차를 세우고 내린 후 차체를 살피느라 왔다갔다 하다가 달려오던 다른 차에 치고 말았다. 그 차는 뺑소니로 사라지고 남기는 의식불명에 빠졌다.
언제 의식이 깨어날지 혹은 생을 마감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주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내내 하지영을 달래서 간신히 작별하느라 2시까지 술을 마시고 그러고도 끝이 안나 억지로 들여보내고 차속에 앉아 질질 짜는 하지영을 붙들고 정말 미안하다를 반복했다는 전갈은 경주를 오열케 했다.
선우는 화경과의 결혼이 너무 성급했다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싱글이었다면, 결혼 전이었다면 이럴 때 홀가분하게 경주 곁에서 도와줄 수 있었을텐데.. 가슴이 미어졌지만 운명이었다.
경주는 마냥 슬픔에 빠져 있을 수 없었다. 남편 없는 회사에선 끊임없이 경주에게 의사결정을 물어오는 중이었다. 경주는 회사에 나갔다. 그리고 남기 대신 사장 자리에 앉았다.
어려운 결정은 진헌이 도왔다. 그리고 선우도 돕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경과 임여사는 선우나 경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행보를 하기 시작했다. 중환자실에 누운 남기가 저러다가 죽기라도 한다면.. 그렇게 되면 한강수의 재산이 말도 안되는 저 여자 경주에게 상속될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빨리 대책을 세워야 했다.
변호사를 선임, 어떡하든지 경주에게 재산이 가지 않도록 방법을 찾는다. 경주의 뱃속 아이가 선우의 아이라고 몰아가기도 하고 아이를 유산시키려는 음모도 벌인다.
남기는 병상에 누워있는데 상속권을 둘러싸고, 재산을 둘러싸고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이혼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강제로 이혼 시키려고 한다.
< 끝내는 이혼하다 >
경주는 처음엔 억울해서, 분해서, 화가 나서 싸움에 지지 않으려 했다.
병상에 누워있는 남편이 불쌍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남기가 지금이라도 깨어나 의사를 표현할까봐, 일본으로 치료 차 수송한다고 거짓말하고 서울의 다른 병원으로 옮겨 경주의 접근을 차단한 것을 아는 순간이었다.
<이하 유산 상속을 둘러싼 엄마 화경대 경주,남기 갈등은 세부 중략>
결국 경주는 이혼당했다.
위자료도 거의 없이 이혼당하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아들의 사랑했던 여자를 , 그의 아들을 뱃속에 데리고 있는 여자를
그네들은 마치 자신들의 아성에서 재물을 빼내갈려고 벼르는 도적 대하듯 몰아부쳤다. 남기가 깨어나기만 한다면 그 모든 상황은 바로 잡힐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되어야했는데 남기가 숨졌다.
제 3 막
선우는 자기도 화경 곁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그 무렵 할머니의 죽음에도 화경이가 관계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남동에 살면서 첩자 역할을 할 때 할머니가 찾아왔지만 화경이가 대문 앞에서 돌려보냈다고 했다. 추운 겨울날이었고 언덕을 내려가던 할머니는 실족, 그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선우는 모든 것을 벗어놓고, 화경이가 마련해준 지위도 재산도 털어버리고
빠져나왔다.
남기가 끝내 사망했다.
화경과 임여사는 남기의 임종에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래서 경주는 장례가 다 끝난 후 납골당으로 찾아갔다.
납골당에서 남기를 찾아본 경주가 돌아서자 그곳에 선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화경의 집착은 정말 집요했다.
경주와 선우 두 사람을 간통으로 고소하겠다고 나왔다
그러자 선우가 역공격을 했다.
선우도 나중에 알았지만 할머니의 죽음에 화경이가 관계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평창동에 살면서 첩자 역할을 할 때 할머니가 선우를 찾아왔던 적이 있었다. 경비원이, 할머니가 맞는 것 같은데 들여보내도 되겠냐고 전화했지만 화경은 단칼에 잘랐다. 절대 들여보내지 말라고.
대문앞에서 돌아선 할머니가 언덕을 내려오다가 살얼음 낀 언덕길에서 실족, 뒹굴었고 그 때 화경의 차가 올라오다가 할머니를 치었던 것이다.
그 얘기를 듣자 화경, 당황하며 꼬리를 드디어 빼고 사라진다.
한편 진헌과 인희는 그동안 점점 가까워지면서 결혼에 대한 생각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지만 상대방을 위해 살고 싶다는 자연스런 욕구가 생겼다.
그런데 보아하니 경미와 현수 사이도 핑크빛이었다.
부모의 결혼이냐 자식들의 결혼이냐로 한참동안 논란이 있었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진헌과 인희가 양보하기로 한다.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당연 그 길을 택하겠지.. 진헌과 인희는 친구 사이로 남기로 결정한다.
친구는 친구이되 허물 없는 친구사이.. 약간은 야해도 괜찮은 친구사이.
그런데 한 여자에게 연락이 온다. 진헌은 여자의 전화를 받은 후부터 생각에 잠긴다. 근심이 있어 보인다. 인희는 진헌에게도 여자 문제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건 아니고..
그 여자는 현수의 친어머니, 진헌에겐 친구의 아내, 제수씨라 불렀던 여자였다. 친구가 죽었을 때 현수는 세 살이었고 제수씨는 젊고 예뻤다. 제수씨는 아들을 진헌에게 맡기고 재가를 했다.
그런데 이제 현수를 보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몇 년 전에 죽었고 딸 둘은 시집 보냈다고 했다. 진헌은 인희와 상의했다. 그리고 여러 논의 끝에 어찌됐든 본인에게 알려주자고 결정했다.
아들에게 너는 사실은 이 집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린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전해 듣는 현수의 충격도 생각보다 컸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건만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선뜻 만나본다 안본다 결정을 할 수 없었다.
인희가 현수와 얘기했고 경미가 그리고 진헌이 현수와 얘기를 나눴다.
왜 그동안 그렇게 오래 비밀로 했느냐는 현수의 말에
진헌은 말 못할 비밀이 전혀 아니었다고,
그냥 니가 우리집에 오면서 자연스럽게 가족이 되었다고,
오랫동안 그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고 말했다.
모여살면서 정이 들면 가족인 거지 꼭 혈연이나 결혼이라는 법으로만 가족이 되는 거냐고 했다.
현수는 처음으로 아버지 진헌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어렸을 때부터 너무나 바빠서 한번도 자상하게 놀아주지 않았던 아버지.
늘 근엄하고 야단만 치는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현수였다.
현수는 경미와 함께 친모를 만나본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폭탄 선언을 한다.
자기가 이 집 양자였으니까 이젠 파양하겠다고.
놀라는 진헌과 인희에게 그렇게 하면 어머니 아버지도 그리고 우리도 결혼을 할 수 있을 거라면서 합동결혼식 얘기도 꺼낸다.
< 새 인생, 다시 찾은 사랑 >
서울 근교 경기도의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
승합차가 아담한 농가 앞에 선다. 승합차 운전사는 서울에서 내려온 화원 주인이고 그를 맞아들이는 부부는 선우와 경주였다.
선우와 경주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이제 막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취미로 기르는 각종 채소 모음이었다.
선우가 신분을 위장하고 혼자 숨어 지냈을 때 취미로 길렀던 채소에서 사업적 힌트를 얻었다.
집안에서 채소 가꾸기를 할 수 있는 씨앗, 도구, 요령, 화분, 실내장식, 베란다 화단 공사 등등이었다. 화초처럼 길러서 실내를 푸르게 할 수 있고
직접 따먹을 수도 있다는 무공해 채소 가꾸기는 유행이 급상승 중이었다.
체인점을 열고 싶다는 문의가 쏟아지는 중이었다.
선우와 경주는 건강하게 새 인생을 시작했다. 그리고 성공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행복해보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