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에게는 생활보다 중요한 것이 있어 마음이 조급해져 산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황폐화되지 않은 차이나지역대학이라.”
“人生の残り時間を計算すると焦りが先立ち、家族サービスという名の義務を果たしたら山に戻りたくなる。男には暮らしより大切な何かがあるようだ。まだ荒れていない「China地域大学」 か。”
최근 이춘아 선생의 메일에는 대전 인근 계룡산 동월계곡을 아침산책하면서 풀을 보고 그 이름을 동행한 아이에게 이야기하듯 가르쳐 준 기쁜 경험이 쓰여 있다. 나도 그런 작은 기쁨을 찾기 위하여 가까운 지인들과 문화단체를 만들었지만, 작은 기쁨은 쉽게 오지 않았다. 아마 몇 년간의 변호사 생활의 지루함과 그 속에서의 작은 인간관계에의 싫증도 작용하였지만, 그런 소극적인 결론으로는 찾을 수 없는 것이 기쁨이라는 것을 알았다.
最近李チュンアさんからのメールに、朝大田近くの鶏竜山の渓谷を散歩しながら道端にある草の名前を連れの子供に語るように教えてあげたときの嬉しい経験が書いてあった。私もそんな小さな嬉しさを見つけるために仲のよい知人たちと一緒に文化団体を作ったが、ささいな嬉しさを手にすることはそう簡単ではなかった。たぶん何年間の弁護士生活の退屈さとその中での狭い人間関係からの影響もあっただろうがそんな消極的な結論からは見つけることのできないのが嬉しさであることが分かったのだ。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책이다. 책 속에는 세상과의 대화가 있고 그 대화 속에서 작은 기쁨을 느끼고 있지만, 그 기쁨의 강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それで目を向けたのが本である。本の中には世の中との対話があり、その対話の中で小さな嬉しさを感じたりもするが今はその嬉しさの強度がどんどん落ちているのも事実である。
일전에 소개한 한상복 선생이 인류학과 후배들과 같이 중국 내륙 실크로드를 답사하고 사진을 올렸다.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고 싶지만 그만큼 친한 것도 아니고, 시간도 공간도 제한되어 있다.
以前紹介したハンサンボクさんが人類学科の後輩たちと一緒に中国内陸のシルクロードを踏査したときの写真をネットに掲載した。彼に会って話を聞いてみたいのだがそれほど親しい仲でもなく時間も空間も制限されているのだ。
처는 자신은 사람 속에 있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고 한다. 물론 가족이 그 행복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다고도 한다. 처가 행복하다는 것은 나에겐 퍽 행복한 지점이다. 나는 어떤 때가 행복한가. 추상적으로 얘기하면 책이던 사람이던 내가 하고 싶은 감성적 코드를 충족시키는 만남인 것이다.
妻は自分は人の中にいることが一番の幸せだという。もちろん家族がその幸せをしっかり支えてくれているとも言っている。妻が幸せであることは私にとってとても幸せな支点である。私はどんなときに幸せを感じるのだろうか。抽象的に言えば本であろうが人であろうが私がやりたいと思う感性的なコードを満たしてくれる出会いなのである。
그런데, 일전의 “도연초”라는 책에도 있듯이 남녀간의 만남은 이루어지는 것보다 이뤄지지 않아 애타는 것이 더 간절하다는 메시지는 충족시키는 만남이 쉽지 않다는 것으로 확대하여 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무던히 노력해야 어떤 지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인지 난감한 생각도 든다. 그래도 방법은 노력 밖에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다.
ところで“徒然草”という本にも書いてあったように男女の出会いは叶うより叶わないほうがもっとせつないというメッセージは満たしてくれる出会いはそう簡単ではないことだ、と拡大して解釈することもできるような気がする。いったいどれくらい努力すればある一点に到達することができるのか見当がつかない。しかしやはり努力するしかないという平凡な真理に戻ってくるしかないのである。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란 책을 보면 그는 나이 60을 넘겨 신문기자를 그만두고 안락한 쇼파 대신에 어려운 12,000km 실크로드 도보여행을 선택했다. 그에게 기쁨은 프랑스에는 없는 순수한 우애를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에 있었다고 한다. 자연풍광은 차라리 부차적이었다.
Bernard Ollivierの“私は歩く”という本を読むと、彼は60歳を超えてから新聞記者をやめて座り心地のよいソファーの代わりに12,000kmのシルクロードの徒歩旅行を選んだ。彼にとって嬉しさとはフランスにはない純粋は友愛を持った人たちとの出会いだったそうだ。自然の風景はかえって二の次であったのだ。
혁명의 20대,30대 초반을 마치고 안정된 삶을 찾아 40에 와서 안착했다. 그 때 국토가 보고 싶었다. 지금 몰고 다니는 차는 그 때 산 것이고, 그 차로 꽤나 여러 곳을 다녔다. 그 후 변호사 5년간은 삶의 안정과 건강과 등산으로 보냈다. 그리고 나서 위에서 얘기한 문화단체를 거쳐 지금 책에 매달리고 있다. 그때그때 마다 하고 싶은 것에 매달렸던 것이다. 똑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보람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싶은 대목이다.
革命の20代と30代前半を終えて安定した生活を求め40代になってやっと落ち着いた。その時、ふと国土に会いたいと思った。今持っている車はそのとき買ったものでずいぶんあちこちを走り回ったものだ。その後、弁護士としての5年間は生活の安定と健康、登山で過ごした。それから上に述べた文化団体をへて今は本に夢中になっているのだ。その時その時やりたいことをやってきたのである。同じではないがそれでも生きがいはあったのだと自分を慰めてあげたくなる人生の節である。
인생의 종착역이 아직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보인다는 사람을 만나는 간접경험을 통하여 나도 초조해지는 느낌이 있다. 생활보다 중요한 남자의 할 일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런 것이 있다면 나도 그렇게 하지 않겠나 싶다.
人生の終着駅はまだ見えないけどそれが見えるという人たちに会う間接的な経験を通して私も焦りを感じるときがある。暮らしより大切な男のやるべきのことが何であるかはよく分からないけどそれがあるのなら私もそうするだろうと思う。
다시 이춘아 선생의 메일로 돌아가서 동월계곡에 갔더니 아 가까운 곳에도 좋은 것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유스하라에도 차이나에도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이 있고, 올리비에가 만난 사람이 있고, 역사가 깃던 장소가 있을 것이다. 혹시 가까운 곳에는 그런 만남과 장소가 없을까요.
また李チュンアさんのメールに戻る。鶏竜山の渓谷で“あ、私の近くにもこんなにいいことがたくさんあるんだな”と気づいたそうだ。梼原にもチャイナにも私たちが知らないあるものがあるだろうし、 Ollivier が出会った人たちもいるだろうし、歴史の風情がある場所だってあるだろう。果たして私たちの近くにこういう場所と出会いはないのだろうか?
요새 한국의 철학적 관심의 일각은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에게 있는 것 같다. 그 책 중에 “앉아서 하는 유목주의”라는 얘기가 있다. 유목민처럼 돌아다니지 않아도, 앉아서 사유로 하는 놀이라는 뜻이리라. 여러 곳을 가지 않더라도 사유를 통하여 볼 수 있고, 그 사유가 없다면 여러 곳을 갔더라도 가지 않은 것이다라는 뜻이다.
最近韓国の哲学的な感心の一角はフランスの哲学者であるドゥルーズにあるようだ。彼の本の中に“座ってやる遊牧主義”という話がある。遊牧民のように歩き回らなくても、座ったまま思惟で遊ぶという意味であろう。あちこち行かなくても思惟を通して見ることもでき、その思惟がなかったら色んなところを行っても結局は行ってないのと同じことになるだろう。
사유가 부족한 나는 유목을 할 수도 없고, 제자리 앉아 책을 보고 있지만 생활보다 더 중요하다는 그 남자가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의 하소연이다.
思惟が足りない私は遊牧もできず座ったままただ本を読んでいるのだが、暮らしよりもっと大切な男のやるべきのことをまだ見つけられないままいるのだ。これが今日の私の愚痴であ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