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오늘 말씀으로써 그동안의 긴 고별설교는 마무리가 됩니다. 그 마지막 말씀은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 말씀에 대해 한번 깊이 묵상해보려고 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원문으로부터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갖기 위해,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였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표현 „…하고자,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였다“를 고별담화에서 모두 7번 사용하셨습니다 (13:19; 14:25; 15:11;
16:1,4,25,33).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앞 단락을 종결하시면서, 그 단락의 가르침의 목적을 나타내시면서, 가르침의 내용을 다시 기억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르치실 때에 어떠한 기법을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나오는 단락에서는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였다“라고 하셨는데 어떠한 의도로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십니다. 즉 제자들이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평안에 대해서는 먼저 14:27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단락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에 대해서는 상세히 다루었습니다. 우리는 왜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하십니까?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평화와 화평이라는 말을 원어에서 같은 단어입니다. 이 우리가 누리는 이 평안은 또한 예수님의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평안은 어떤 평안입니까? 이것은 무서운 폭풍우 속에서도 가질 수 있는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풍 가운데에서도 배에서 주무셨습니다. 배에 물이 들어와서 당장에 뒤집힐 수 있는 순간에도 평안하게 주무셨습니다.
사람이 가져야 할 평화, 화평, 평안에 대해서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모든 사람이 끊임없이 추구하고있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커다란 가치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추구하고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이 평안은 얼마나 큰 가치가 있을까요? 전쟁과 핍박의 걱정과 궁핍의 걱정을 피하기 위해 인간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합니까? 주위사람들로부터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걱정을 합니까? 그런데 인간이 추구하는 이 모든 것은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는 가짜 평안이며, 상황에 종속되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어느 것이라도 자신의 평안을 깰 수 없을 정도로 도를 닦을지라도, 혹은 마음에 물밀듯 밀려오는 평화를 누릴지라도, 이 평화는 인간이 만들어낸 평화이며 한시적이며, 조건적이며, 속이는 것입니다.
평안이란 무엇입니까? 평안이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애써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것이고, 주님이신 예수님만이 그의 자녀에게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예수님을 통해 죄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을 때에만 예수님으로부터 선물로 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내가 아무리 불안하고 곧 죽을 것 같은, 멸망 당할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올지라도, 내가 진실한 회개로 하나님과 화평을 맺었다면, 실상 나는 평안한 것입니다. 두려움은 단지 나의 감정일 뿐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속아서도 안 되며, 평안에 속아서도 안 됩니다. 세상 자녀는 본인이 아무리 평안히 느낄지라도 하나님과의 화해가 없다면, 그는 불안한 존재요, 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사람은 여러 일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길지라도 그는 평안한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음에도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아직 자신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많이 성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하고 거짓 없이 예수님께서 나의 구주 시라는 것을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인이 되게 하신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평안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는 자신이 삶의 주인이면서도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고 착각하고 산다면, 그의 거짓 평안은 자신이 죽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밝혀질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요즘 유행되는 „세계 평화를 위하여!“ „종교 간의 평화를 위하여!라는 말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세계평화와 종교 간의 평화를 위해 애를 써야 하지만, 이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도 없고, 그 자체가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평화는 영적인 것이며,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므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에서 우리는 평안을 누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늘 마음이 평안하고, 세상과 주위 사람과도 화평한 관계를 유지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한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앞의 말씀과 어떻게 조화를 이룹니까?
이 말씀은 우리가 가지는 평화의 한가지 성격을 나타냅니다. 우선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는 환란이란 무엇인지 조금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환란(틀립시스)이란 21절의 해산의 고통에 대해 사용된 표현과 같은 말입니다. 따라서 환란의 정도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대단히 큰 고통입니다. 또한 불안과 두려움이 수반된 고통입니다. 이 고통이라는 말은 당시 유대인에게 잘 알려진 마지막 날에 받는 고통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로도 사용됩니다(단12:1; 마24:21; 행14:22).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이 말씀은 신자의 본질을 규정하는 말씀입니다. 신자는 본질적으로 두려움과 고통을 가지고 삽니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무시하는 자는 자신이 만든 우상을 섬기는 자입니다. 이 고통과 불안은 세상의 증오에서 오기도 합니다(15:18이하). 세상이 교회를 증오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세상은 신자를 넘어뜨리고자 각종의 방법을 동원합니다.
교회는 결코 세상을 교회의 친구로 바꿀 수 없습니다. 교회가 고통과 증오를 피하고자 할 때에는 타락이 옵니다. 늘 타협하고자 하는 유혹에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고통을 의도적으로 받을 필요는 없지만, 이것이 오면 감사한 마음과 믿음으로 받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신자가 불신자들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할 때에 큰 두려움으로 떨리고 불안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혹은 형제들 앞에서 자신의 고통과 불신, 불안, 두려움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불신자와는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얼마나 기가 막힌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불안 속에서도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자신을 곧 죽일 것만 같은 위험 속에서도 안심하라고 하십니다. 꿈쩍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한 발자국을 떼어 앞으로 내어 디디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승리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죽음에 속한 것을 모두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죽음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와 더불어 죽음의 강력한 무기인 불안, 두려움 등도 우리에게는 무력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체에 조금만 이상이 생겨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큰 공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진정한 용기와 희망과 기쁨과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캄캄한 암흑 가운데서도 비록 가느다랗지만 우리에게 보이는 한 줄기 빛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떠난 것 같은 절망적이 상황 속에서도 가느다란 한 줄기 밧줄이 있습니다. 이 줄은 비록 실오라기처럼 약한 것 같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절대로 끊기지 않는 튼튼한 줄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실존은 동전과 같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한 편으로는 불안과 고통이 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불안과 고통을 없는 것으로, 혹은 완전히 극복된 것으로 선포한다거나, 이것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피하려고하는 자는 환상에 잡혀서 사는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고 이것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의 삶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이 환란을 예수님 안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평안은 아무도 빼앗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평안을 취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는 이 평안을 취할 권리가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22절 말씀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을 통해, 큰 고통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본 사람의 기쁨은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제자들의 기쁨은 어떠한 위협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유지되었습니다. 이같이 우리의 기쁨과 평안도 환경에 지배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위기의 순간에 계속해서 불안할지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의 불안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믿음의 훈련과 연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불안을 통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예수님께 대한 신뢰가 성장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이때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불안하고 슬프고 좌절이 될 때에는 유행되는 마인드 컨트롤이나 적극적, 긍정적 사고를 통하여 영적인 현실에서 도피할 것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을 붙잡도록 노력을 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서 기도할 때, 예수님의 단 한 말씀이 우리를 모든 이러한 것으로부터 충분히 해방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말씀은 매우 긴 고별 설교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만큼 큰 무게가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닥쳐올 가장 큰 시험과 시련에 대비를 시키셨습니다. 그들은 몇 시간 후에 가장 큰 암흑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장이 날 것 같은 사건 이후에 비로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흩어진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미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33절은 믿음의 현실주의를 잘 나타내줍니다. 믿음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만능의 열쇠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불안과 불신, 또는 죄악을 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심리적 요법으로 극복하고자 하지 않고, 이것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온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이 평안은 이미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으로서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우리는, 자신에 대해 한번 되돌아보며, 내가 불안해하고 있지 않은지를 잘 점검하여, 예수님께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받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