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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천 목사님 일대기
2005. 11. 18 김 충 권 목사
일재치하인 1912년 12월 9일 평안남도 대동군 남형제산 고산리에서 태어나셨다. 형제산 남쪽 기슭에 농토를 두고 농사를 지었다. 32세에 해방을 맞도록 부모님을 모시고 아들 셋 딸 셋 6남매를 두고 일제의 수탈을 견디어 내며 살고 있었다. 해방이 되면서 공산주의가 서서히 점령을 하였다. 공산주의는 친공과 반공의 선을 분명히 그었다. 친공은 공산혁명에 앞장세웠지만, 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공직에서 내어 쫓고 재산을 몰수하고 감옥에 가두고 사형까지 서슴치 않았다. 한 동네 살던 사촌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나쁜 이미지를 씻지 못하고 안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마을의 교회인 고산교회 전도사님도 공산주의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순안경찰서에 수감되었다. 때는 1950년 9월 28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고 공산당이 북쪽으로 쫓겨 가면서 반공혐의가 있는 자들을 모두 죽이고 떠났다. 그 때 순안결찰서의 전도사님도 시체로 발견되었다. 교회 성도들이 목화밭에 묻혀있는 시체를 찾아내어 소달구지로 실어와 장례를 치러 주기도 했다. 1950년 12월 3일 일요일 저녁에 평양에 살던 누님이 친정을 찾아 오셨다. 큰 아들 덕로가 묵으면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큰 아들까지 데리고 오셨다. 평양 소식을 들려 주셨다. 일요일인데 평양 시내가 어수선해서 교회는 예배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단다. 모두 남으로 피난을 가느라 혼란하다고, 공산주의가 다시 내려오면 젊은 동생은 필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다른 식구들은 몰라도 남동생은 잠시 무슨 변통이라도 내어야 하겠다고, 아버지에게 말씀하셨다. 바로 이튼 날 새벽 위로 아들 둘을 데리고 임재천 할아버지는 해주로 떠났다. 해주에는 여동생이 살고 있었다. 해주에 도착한 지 1주일도 채 안되어서 공산당 조직이 다시 재건되었다. 이전 보다 더 삼엄하게 반공주의자를 색출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더 선택을 해야 했다. 아들 둘은 아직 어리니까 무슨 일이 있으랴 싶어, 걸어왔으니 걸어가든지 어쩌든지 집으로 돌려보내고, 일주일만 피했다 오겠다고 피난 행렬에 끼여 영등포로 내려왔다. 이것이 54년이 되었다. 피난행렬은 서울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조치원으로 대전으로 다시 대구로 계속해서 내려갈 기미였다. 임재천 할아버지는 대전에 북쪽에서 온 피난민들이 많이 모여 있다는 삼성교회에서 앞으로 있을 일을 의논하며 추이를 지켜 봐도 돌아 갈 수 있다는 소문은 들을 수가 없었다. 고향에서 온 사람들은 하나 둘 일을 찾기 시작했다. 임할아버지는 고향 인 고산교회에서 전도사님이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을 때 교회를 돌본 경험이 있어서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기로 했다. 총회신학교에서 신학을 마치고 45세가 되어서야 목사가 되었다. 대구 변두리 대가교회, 강원도 주문진교회, 북평교회 등지로 다니면서 목회를 하였다. 목회는 아내 없이 혼자 하였다. 목사가 교회를 치리하는 데는 여자 성도가 많아서 여자가 할 일이 많이 있음에도, 북에서 기다리는 아내를 생각하면 결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목회한 지 15년, 나이 60세에, 1972년이 되어서야 고향을 곧 갈 수 있다는 생각을 접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서야 결혼을 하였다. 그 부인이 지금까지 34년을 단 둘이 함께 사는 이월선 사모님(89세)이시다. 그 방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뒤로 돌돌 말린 영어사전이다. 앞 뒤로 몇 페이지 씩 뜯겨져 나가고, 손때가 새까맣다 못해 굳어서 책장이 부러지려고 했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산 것인데, 지금껏 머리맡에 두고 보신단다. 책이야기를 꺼내니까, 이불 가 상 위에 있는 ‘노자’를 집어 드셨다. 천자문 배우던 시절의 책이다. 노자에서 특별히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면 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독신기독’이라신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남이 듣고 있지 않을 때도 언행을 삼가서 자기 스스로 속이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남은 속여도 자신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니, 누구든지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서 사회가 이렇게 어지럽다고 하셨다. 이 말은 대학에 나오는 ‘君子 必愼其獨也’인데, 이제는 정신도 아물아물하셔서 대학인지 노자인지 헛걸리시는가 보다. 이 노자는 지금부터 35년 전 강원도 북평교회에 시무할 때, 이웃교회 젊은 목사와 학교 선생님들이 노자를 좀 가르쳐 달라고 할 때도 깊게 읽은 적이 있다. 본래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가지 못했을 때 이웃동네 서당에서 배운 것이었다. 그 때 제자들이 모두 잘 되어 지금도 찾아와 절을 하고, 전화로 안부를 묻기도 한다. 올해 초 장례를 준비할 만큼 편챦으셨다. 끝내 가족을 못 만나고 가시는구나했는데, 소변줄을 하나 더 차고 회복하시더니 요즘은 식당까지 걸아가 식사를 하실 만큼 되었다. 며칠 전 적십자사에서 화상상봉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북한에 가족이 누구 있느냐고 물어 왔단다. 눈을 또 지그시 감고 가족을 생각하시는지, 이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맡길 뿐 아무 욕심도 바람도 없으시단다. 그 사이 사모님은 배를 깎아서 접시에 정돈하고, 음료수를 올려놓고 좀 드시면서 이야기하라신다. 몇 저름 배를 깨어 무는 사이 11시 30분,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를 하러 가셔야 한다고 하셔서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한 손에 지팡이 잡고, 한손에 소변주머니 들고서도 출입구까지 나와서 배웅을 해 주셨다.
카페 손님 여러분, 2005년 12월 5일 적십자사에서 화상상봉을 준비하다가 연락이 왔습니다. 북한에는 임목사님 가족이 한사람도 남아 있지 않답니다. 부모와 아내는 물론 자녀들 여섯중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답니다. 임목사님이 이 소식을 듣고 기력이 급력히 약화되시어, 치료도 거부하고 누워만 계십니다.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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