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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카트만두로 돌아와 본격 원정을 위한 준비에 골몰하고 있을 때 당혹스러운 소식이 들려왔다.
보통 카트만두에서 티베트와의 접경 지역인 코다리로 이동할 때는 육로를 이용한다.
커다란 트럭에 카고백을 잔뜩 싣고 차량 캐러밴 Caravan
(교통수단이 없는 히말라야 등지의 등산에서 목적지 산기슭까지 등산대의 짐을 실어나르는 과정)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계획도 그랬다.
하지만 우리보다 앞서 같은 코스로 길을 떠났던 러시아 원정대에 심각한 사고가 발생했다.
차량 캐러밴 도중 마오이스트들의 총격을 받아 원장대장이 큰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원정이 끝난 다음에야 확인할 수 있었지만 결국 그 원정대장은 사망했다.
네팔의 내전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현재의 국왕이 수 년 전 자신의 형과 조카 등 왕실 일족 모두를 사살하는 유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중무장을 한 마오이스트들이 대거 창궐하여국토의 대부분을 장악해버린 것이다.
현재 국왕의 치안 능력이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곳은 카트만두와 포카라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전 중에도 암묵적으로 지켜져온 밀약이 있다.
그것은 '외국인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팔은 국가 수입의 90퍼센트 이상을 관광에서 얻는 나라다.
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트레커들과 원정대들이 먹여 살리는 나라인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달으면서 외국인들이라고 해서 이 전국적인 내전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마오이스트들이 이른바 '전쟁세'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세란 일종의 혁명 채권이다.
훗날 자신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 그때 갚겠다는 내용을 가진 약속어음인 것이다.
내 주변의 지인들 중에서도 이 전쟁세를 치르며 네팔의 오지 트레킹을 다녀온 사람들이 많다.
비록 악화된 상황이긴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신체적인 위해를 당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바로 엊그제 차량으로 이동 중인 원정대에 총격을 가해 그 원정대장을 살해했다고 하니 망연자실해질 수밖에.
"다른 방식을 찾아 봅시다. 차라리 단체로 전쟁세를 내면 냈지 여기까지 와서 총 맞아죽긴 싫어요."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우리끼리 골머리를 짜내봤자 뾰족한 수를 찾아내기는 어렵다.
이럴 때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이 바로 정용관이다.
엄홍길은 한 사람을 더 불렀다.
매번 원정 때마다 엄홍길이 계약을 맺곤 하는 '윈드 호스 트레킹 회사'의 사장 카르마다.
카르마와 정용관은 사방파랑으로 뛰어다니더니 이내 우리에게 해결책을 제시했다.
육로를 포기하는 대신 대형 군용헬기를 빌려서 코다리까지 이동하자는 것이었다.
"군용헬기? 그런 걸 렌트할 수가 있어?"
"예. 가능합니다.
해당 헬기의 조종사가 구 소련제국이 멸망할 때 가지고 나온 건데... 아직까지는 타고 다닐 만합니다."
쓴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구 소련제국의 멸망.
헬기를 가지고 망명하여 장사를 해먹는 조종사.
총을 쏘는 네팔의 마오이스트.
티베트를 강점한 중국.
그리고 이 모든 복잡다단한 국제정세 속을 헤치고 기어이 초모랑마로 가야만 하는 우리들...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알 수 없는 해괴한 풍속도가 아닐 수 없다.
어찌 되었거나 우리 대원들은 모두 개조된 군용헬기에 올라탔다.
탑승이 완료되자 거대한 프로펠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본의 아닌 스카이다이빙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덜렁거리는 헬기 속 의자를 잡은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네팔의 코다리와 티베트의 장무는 바투 붙어 있다.
우정의 다리는 그 사이의 계곡을 잇는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국경이 갈리는 곳이다.
미리 도착해 있던 셰르파들이 장무의 국경 너머에서 우리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어대는 모습이 빤히 보였다.
이번에 우리와 함께 등반하게 되는 셰르파들은 모두 베테랑급들이다.
등반의 목표가 지독히도 어려운 것이었던 만큼 최강의 셰르파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8000미터급 산의 정상에 여러 번 올랐던 사람들도 많다.
우리는 간단한 입국 수속을 거쳐 국경을 넘어서면서 그들과 일일이 포옹을 하고 악수를 나눴다.
그때마다 엄홍길이 정겨운 주석을 덧붙였다.
"이 친구가 밍마야. 나하고는 8000미터를 세 번 같이했어. 빙벽 솜씨가 장난이 아니야...
이 친군 알지? 덴지!
내가 전에 빌라 에베레스트 경영할 때 주방에 있던 친군데, 지금은 아마도 네팔 쿡들 중에서 한국 음식 솜씨가 최고일걸?"
엄홍길의 셰르파 사랑은 눈물겨운 데가 있다.
그는 셰르파들을 절대로 피고용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우리와 동격의 등반 파트너로 대접해주는 것이다.
셰르파들에 대한 그의 신뢰와 배려가 어찌나 지극한지 등반대원들 사이에서
'대장님은 우리보다 셰르파를 더 아끼는 것 같다'는 투정 어린 항변마저 터져 나왔을 정도이다.
우리가 행여 그들에게 소리라도 지를라치면 그는 어김없이 우리를 불러 꾸짖곤 했다.
"너희들 쟤네가 한국 말 못 알아들을 것 같애? 다 알아들어! 절대로 쟤네들에게 욕하거나 막 대하지 마!
내 앞에서 다시 한 번 그러다 걸리면 내가 절대로 용서 안 할 거야!"
셰르파들 역시 엄홍길을 대할 때 남다른 태도를 갖추었다.
그들은 엄홍길을 진심으로 존경했으며 마치 맏형을 대하듯 믿고 따랐다.
1998년의 안나푸르나에서 그가 추락하는 셰르파를 구조하려다 발목뼈가 완전히 부러져 180도로 돌아가버리는
엄청난 사고를 당했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그들 사이에서 신화로 회자되고 있었다.
셰르파를 위해 자신의 안전을 내던진 그의 용기와 희생이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셰르파들에게 엄홍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엄 사부? 베스트! 히 이즈 베스트 클라이머, 앤 굿 맨!"
이번 원정을 함께한 셰르파들 중에는 2000년 칸첸중가에서 죽은 다와 타망의 친형인 틸타 타망도 끼어 있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틸타의 고산 등반 능력은 그다지 뛰어난 편이 못 된다.
나이도 셰르파들의 평균 연령에 비해 훨씬 많다.
그를 고용한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집안에 경제적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다.
틸타는 따뜻하고 멋진 사내였다.
그는 남들만큼 높은 곳에 오르거나 남들만큼 무거운 짐을 나르지 못하는 대신에
베이스캠프에서 요구되는 온갖 잡일들을 혼자 도맡아서 처리했다.
그가 어찌나 열심히 일하는지 우리는 그를 보면 언제나 핀잔을 주곤 했다.
"헤이, 틸타! 그만 좀 하고 쉬어! 너 그러다 완전히 뻗는다구!"
굳이 엄홍길의 지시가 없었더라도 우리는 셰르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하긴 제아무리 원수지간이라도
그런 환경 속에서 몇 달을 함께 보내자면 저도 모르게 마음의 벽을 허물고 서로를 끌어안게 되기 마련이다.
셰르파들과 대원들은 서로의 이름을 완전히 외울 수 있게 되기까지 매일 아침 상견례를 했다.
그 과정에서 배꼽 잡는 일화들도 많이 생겼다.
"가만 있어봐, 너도 다와야? 저 친구도 다와잖아! 어어라, 몇 년 전에 죽은 틸타의 동생도 다와였고...?"
셰르파들의 이름은 몇 가지가 안 된다.
대체로 태어난 요일을 이름을 지어주는 까닭이다.
덕분에 그들의 이름을 외우려면 온갖 잔머리를 굴려야 했다.
올드 다와, 영 다와, 톨 다와는 기본이다.
턱수염 밍마, 눈 찢어진 니마, 한 성깔 하는 락파, 능글맞다 펨바 추티, 영어 잘하는 펨바 린지...
우리는 그들의 특징을 잡아내어 별명을 갖다 붙이면서 이름을 외워 나갔다.
이름이 헷갈리기는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인의 성씨라고 해봤자 몇 가지가 안 된다.
흔한 말로 '김이박'이 대부분인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도 편법이 동원됐다.
"나는 카메라 박이라고 불러줘!"
MBC 카메라맨 박창수다.
"나는 머니 박! 나한테 잘 안 보이면 너희들, 먹고살기 힘들어질 걸?"
박근영이다. 그는 원정기간 내내 '큰손'으로 통했다.
막대한 원정 자금의 결제가 모두 그의 손끝에서 이루어졌던 까닭이다.
"핸섬가이 김! 원정대에서 제일 핸섬한 사람이 바로 나니까!"
원정대의 막내 김동민이다.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대원들 모두에게 주먹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렇게 장난치는 우리들을 보며 셰르파들도 껄껄대며 웃었다.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갖고 놀리면 그들 역시 우리의 이름을 갖고 놀렸다.
우리는 그들에게 한국 음식을 나누어주었고 그들은 우리에게 네팔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우리가 숨이 가빠 헐떡거릴 때 그들도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숨을 몰아쉬었다.
그들이 웃을 때 우리도 웃었고 우리가 울 때 그들도 울었다.
그들과 우리는 완벽한 등반 파트너였다.
장무(2750미터)를 출발한 차량 캐러밴은 니알람(3700미터)을 거쳐 딩그리(4200미터)로 향했다.
딩그리는 역사책 속에 등장할 만큼 오래된 교역도시다.
카트만두와 라싸에서 온 상인들이 서로 만나 생필품을 교환하곤 했던 바로 딩그리다.
하지만 오늘날의 딩그리는 그저 퇴락한 시골마을에 불과하다.
먼지 자욱한 거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낡은 당구대가 더없이 처량해 보인다.
조악한 홍등을 밝혀놓은 구멍가게 안에서는 값싼 창녀들이 서글픈 화장을 하고 앉아 있다.
원래 계획은 딩그리에서 이틀 밤을 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하룻밤을 자고는 이내 그곳을 떨치고 일어섰다.
고소적응에 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딩그리를 통과하고 나면 별세계로 접어든다.
바로 저 유명한 티베트 고원이 끝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나는 그곳을 지나치며
영어의 '윌더니스 wilderness'라는 단어는 바로 이곳을 묘사하기 위해 생겨났으리라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윌더니스는 '와일드 wild'에서 파생한 단어다.
그리고 와일드의 다양한 뜻이야말로 티베트 고원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곳은 야생의, 황량한, 거친, 미개의, 흐트러진, 전혀 뜻밖의 공간이었다.
티베트 고원에서 우리들의 마음은 길을 잃는다.
동서남북 어디를 쳐다봐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황량한 돌투성이의 고원뿐.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이곳의 풍광 앞에 서면 인간은 너무나도 작고 가냘픈 존재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고원의 저 끝에 꿈속인 듯 아련하게 펼쳐져 있는 히말라야의 은빛 설산들이 이 황량한 풍경에 색채를 더해줄 뿐이다.
하지만 자연 풍광만큼 놀라운 것은 생명력이다.
이따금 티베트 고원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달려가는 야생사슴들의 무리가 보였다.
심지어 몇 마리의 야크를 앞세운 채 홀로 그 고원을 걸어가고 있는 야크 몰이꾼의 모습도 보였다.
티베트 고원에도 마을이 있다.
나는 이런 곳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롭게만 느껴졌다.
야트막한 흙 담 뒤에 숨어 신기한 듯 우리 일행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빛이 맑았다.
조신한 몸놀림과 경계하는 눈빛 속에서도 그들의 순수한 마음이 읽혀지는 듯했다.
다가가 말을 걸고 싶었지만 그들은 손사래를 치며 물러섰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재빨리 외면하고 제 갈 길만을 재촉했다.
그제야 내 행동이 그들에게 무례하게 비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생활인을 바라보는 것은 건방진 일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종교가 바로 이토록 척박한 땅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렇게 황량한 고원지대를 끝없이 달린 끝에 마주치게 된 것이 롱북 사원이다.
롱북 사원이 지프의 차창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나는 반가움과 동시에 당혹감에 휩싸였다.
내가 상상했던 규모보다 훨씬 작았던 것이다.
해발 5000미터 즈음에 위치하여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사원'으로 손꼽히는 롱북 사원은
14세기의 기록에도 등장할 만큼 유서 깊은 티베트 불교의 명찰이다.
이곳의 주지는 항상 당대 최고의 선승이었다.
덕분에 히말라야 등반의 초창기인 1920년대의 영국 원정대원들은
매년 이곳에 올 때마다 롱북 사원의 주지를 알현하고 그로부터 축복을 받는 것을 당연한 순서로 여겼다.
현재의 롱북 사원이 이토록 쇠락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중국인들 때문이다.
그들이 티베트를 강점할 때 이곳에서는 피의 강물이 흘렀다.
광활하게 펼쳐져 있던 사원 건물들도 4분의 3 이상 파괴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홍위병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곳에는 또 한 번의 저주가 내려진다.
당시 그들에게 맞아죽은 승려들의 수가 수백 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이곳에 머무르는 내내 나는 티베트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중국의 도덕성을 믿지 않는다.
언표된 사회체제만 다를 뿐 그들의 제국주의적 태도는 미국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저기 보인다! 초모랑마다!"
롱북 사원을 지나 한 구비를 돌자마자 터져 나온 탄성이다.
과연 거기에 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 초모랑마가 우뚝 서 있었다.
그 웅장한 산세와 너무도 도도하여 범접하기 힘들게 느껴지는 기품이 우리를 압도한다.
그 규모가 너무도 커서 반히 보이는 산을 향해 차를 타고 가는데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나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초모랑마를 바라보며 우리가 역사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히말라야 등반의 노른자위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산에서 이루어졌다.
네팔 쪽의 남쪽 루트가 각광받게 된 것은 중국이 티베트를 강점하고 네팔이 문호를 개방한 1950년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의 초모랑마 등반사는 모두가 다 이곳 북쪽에서 이루어졌다.
그렇다.
우리는 역사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숨 쉬고 있다.
우리는 지금 역사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려 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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