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睡蓮) - 오영수
지난
해 한여름 어느 일요일이었다. 그날도 교문리(橋門里) 장자 늪 낚시터가 흰조로와서 B는 위켠- 동쪽으로
반 마장쯤, 바로 동네 앞 뱀못으로 자리를 옮겨 갔다. 이 뱀못에는 한때 큰 붕어가 많았으나, 천렵군들이
마구 휘저어서 물이나 난 뒤가 아니면 잘 가지를 않는다. 이날 뱀못에는 젊은 여인이 딱 한사람 앉았을
뿐이었다. 여인은 주홍빛 반소매 브라우스에다 곤색 즈봉을 입고, 차양이 넓은 밀짚모자를 끈으로 턱에
걸었다. 해수욕장 같은 데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이런 차림이 푸른 들판 호젓한 못가에서는 눈이 부시도록
신선하고 이채로워 보였다. 물속에 비친 그림자는 더욱 아름다웠다. 그보다는 낚시를 담근 조촐한 자세-
구태여 젊은 남성이 아니라도 낚시를 즐기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소의 호기심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B는
조용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보아하니 여인의 낚시도구가 심심풀이로 해 보는 임시변통이 아니고, 연조가 얕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손질이 간 고급품들이었다. 그뿐 아니라 낚싯대를 뻗고 찌를 세운 위치며 자세가 이미 틀이 잡혔다.
B는 조용히 “나옵니까?” 여인은 비로소 얼굴을 돌리면서 “어쩌다 한
마리씩......” 하는 여인의 수수하게 둥근 얼굴에 선글라스가 퍽 어울려
보인다. B는 옆에 도사리면서 “실례!” 하고 그물
주머니를 조금 들어본다. 다섯 치가 한 마리, 네 치 세 치가 너댓 마리-. “일찍 나오셨소?” “아뇨.” “여기는
자주 나오시나요?” “봄부터 나오긴 했는데, 큰 못이 붐비면 여기로 오군 해요!” “아 그래요. 전 올 들어 여기는 첨인데
어때요?” "가끔 일곱 치도 나와요!“ “네에, 아무튼 낚시 솜씨가 여간이
아니신데....” 그러자 여인은 “못 해요!” 하고 수줍게 웃는다. B는 “자 그럼, 전
저켠으로 가겠습니다!” 하고 일어서자 여인은 몸을 앞으로 굽히고 길을 내주었다.
B는 건너편, 여인과 엇비슷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도구를 펼쳤다. 얼마 안 되어 세
치 네 치 정도의 붕어가 떡 미끼에 달린다. B는 낚시에 열중은 하면서도 맞은편에 앉은 여인의 거동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다. 오후 두 시 가까이 해서 여인이 낚싯대를 들고 B쪽으로 돌아온다. 자리를 옮기려나
했다. 그러나 조용히 다가온 여인은 등을 돌리면서, 미안하지만 낚시를 빼 달라고 한다. 흔히 있는 일이다. 낚시는 여인의 바로
뒤허리짬에 꽂혔다. B는 미끼를 만지던 지저분한 손부터 말끔히 씻고 조심조심 낚시바늘을 끌러 주었다.
여인은 가볍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B의 고기를 들여다보면서, 미끼가 뭐냐고 묻는다. 떡미끼라면서 조금 떼 주니까, 여인을 나도
떡미끼를 쓰는데..... 그러면서 제자리로 돌아간다. 다섯 시가 지나자부터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고기가
달리기는 하나 바람이 나서 B는 그만 낚시를 걷었다. 도구를 챙겨 메고 돌아가자 여인도 부지런히 낚시를
걷고 있다. B는 걸음을 멎고 “여기는 바람이 안
타는데.......” 그러자 여인은 수건을 물에 짜면서 “해 보세요.” “아니
가겠어요!” “교문리로 나가세요?” “네, 댁은?” 여인은 손가락으로 안동네를 가리키면서
“가까워요!” 한다. “조금 더 하실걸....” “뭐, 내일 또 나오죠!” “그럼
가실까요?” 여인은 제 아버지가 일본서 식당을 하면서 퍽 낚시를 좋아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낚시를 다녔다고 한다. 언덕배기 갈림길에서 여인은 걸음을 멎고 “여기는 자주 나오시나요?”
“네, 가끔 가다!” “인젠 언제 또 오세요?” “글쎄요, 형편만 되면 토요일쯤 와서 하룻밤 묵을까
하는데.....” “그럼 제가 자리잡아 두죠, 꼭 나오세요!” “그럼 안녕히....” 여인은
옆길로 해서 밤나무숲 사이로, B는 수수께기 같은 그러나 뭔지 흐뭇한 마음으로 교문리 버스 정거장으로 걸었다.
한 주일 동안 이 여인의 인상은 B의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낚시터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의 인상은 호기심과 함께 마치 흡습지처럼 B의 마음을 빨아들였다. 지루하게 기다리는 한 주일이었다.
돌아온 토요일 오후 두 시쯤 해서 B는 넉넉히 미끼랑 밑밥을 사 가지고 허둥지둥 장자 늪으로 나왔다. 동네 앞
느티나무 할머니네 집에 둘러 저녁밥과 잘 방을 부탁해 놓고 낚시터로 나왔다. -그 여인은 정말 약속대로
나왔을까? 장소에 대한 딴 약속은 없었으니까 위선 뱀못으로 가 보기로 하고 논둑길로 들어서자, 이때 여인이 먼저 알아보고 모자를
흔들었다. 이때 반가움이란 상대가 젊은 여인이 아니더라고 낚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껴 보는 반가움이다.
여인은 무척 반가와하는 눈치였다. 전날의 약속대로 자리를 잡아 수초를 말끔히 쳐내고 밑밥까지 줘 놓았다.
B는 잡아 둔 자리에 일단 도구를 내려놓고 “이거 참
미안한데-” 그리고는 여인의 그물 주머니를 들어 본다. 아침 열시쯤에 나왔다는데 이십 수 가량, 그 중에는
여섯 치, 다섯 치도 두어 마리 있다. “뭐에 나옵니까?” “큰 건 지렁이에 나와요.” B는
여인의 몫으로 사 온 미끼랑 밑밥을 꺼내 주고 낚시를 펴면서 “근데 수초를 어떻게 쳤나요?” “풀 베는 애를 좀
시켰어요!” “이거 정말 미안한데-” 십 분, 이십 분- 그러나 고기가 통 나올 기미가 없다.
여인은 B에게로 연신 고개를 돌려보곤 한다. 모처럼 마련해 준 자리에서 고기가 나오지 않는 것이 여인은
무척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B는 태연히 미끼를 갈아 달고 거푸 담배를 붙여 문다. 여인은
기어이 “안 와요?” “오겠죠, 설마!” 여인은 미끼를 달아 낚시를 던지려다 그만 두고 B에게로
다가와서 “저 자리에서 해 봐요!” 그러나 B는 “천만에, 난 이 자리가
좋아요!” “고기가 나와야죠....?” “새로 친 자린데 그리 빨리 나와요?” B도 실상은 B
자신보다도 안타까와하는 여인을 위해 고기가 달려 주었으면....했다. 그새 여인은 두 치에 세 치 정도로
두세 마리 올렸다. 고기를 달 때나, 달린 고기를 처리하는 솜씨가 기특할 만큼 얌전하다. 깨끗한
낚시다. 근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B의 낚시에도 모우션이 온다. 수면에
한 치 정도 세운 찌가 반쯤 내린다. B는 가볍게 손잡이를 쥐면서 확실한 차안스를 노린다. 특히 첫 번에 오는 고기를 미끼를 떼일망정
서툴게 걸진 말아야 한다. 서툴게 걸어서 놓치면 딴 고기까지 놀래 달아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내렸던
찌가 두 번쯤 깜박거리고 얌전하게 솟구친다. 한 치, 한 치 반- 가볍게 챈다. 맞쳤다. 대를 통해 오는 감량을 보아 그리 크지는
않다. 조심히 다루어 올린다. 네 치다. 서슬에 여인이 옆에 와 도사리면서 “이제부터 오나
보지요?” “글쎄요, 몇 시죠?” “다섯 시 오 분 전예요!” “앞으로 두
시간....” 또 찌가 움직인다. 확실한 모우션이다. 챈다. 역시 네 치 정도다. 해가 뉘엿이
넘어가고부터는 수면이 거울같이 고요하다. 제법 입질이 잦다. 여남은 수나 올렸을까? 논매기 일꾼들이 거의
돌아가자, B가 먼저 “더 하실래요?” “아뇨, 걷겠어요!” B는 도구를 챙기고, 그물 주머니를
담가 둔 그대로 위를 묶어 풀에 덮어 둔다. 여인이 건너다보고 “왜요, 안 들어가시게?” “낼
아침 일찍 나올 텐데 밤새 이렇게 살려 두죠!” 보아 하니 여인도 담가 둘 참이다. “댁은 고댄데
들여 가시지, 그물이 상하니까요.” “괜찮아요.” B와 여인이 밑밥까지 줘 놓고 자리를 떴을 때는
마을에 저녁 안개가 조용히 퍼지기 시작했다. 여인은 물에 짠 수건으로 목이랑 얼굴을 문지르면서 비로소
선글래스를 벗었다. 선글래스를 벗고 보는 여인은 훨씬 더 부드러운 얼굴이고 뭔지 까다롭잖게 대할 수 있는 그런 인상이다. “몇
마리나 올렸죠?” “세 보지는 않았지만 삼십 마리나 될까요?” “암튼 낚시 솜씨가 보통이 아니셔-” “전 오전부터
했잖아요!” “고기도 사람을 알아보나 보지요?” “사람을 어떻게요? “아니 미인을 말요!” “미인을....
누가요....” “누가 아니라, 그놈 고기들이 죽자고 미인에게만 모여드니 말요!” 여인은 한 걸음을
멎고 꽤 큰 소리로 웃는다. “아니 정말이지, 내가 고기라도 이왕이면 미인의 낚시에 걸리고 싶죠!” “누가 미인이게 자꾸
미인 미인 하세요?” “젊은 여성은 다 미인으로 통하죠!” 느티나무 할머니네 집 앞에서 걸음을
멎고 “난 여기서 묵겠어요. 그럼 내일 또....” 그러나 여인을 두리번두리번하면서 B의 뒤를 따라
마당으로 들어선다. 할머니가 느티나무 밑에 밀짚 방석을 펴다가 “한 분인 줄 알고 저녁을 한 상만
했는데....” 하고 걱정스런 눈으로 B를 바라본다. “아니, 저 분은 이 안동네 분입니다. 걱정
맙쇼!” 그러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샘물을 갓 길어 왔는데 세수나 하시지-” 한다. B는
허리에 찬 수건을 빼면서 여인을 보고 “좀 씻을래요?” 그러나 여인은 방이랑 부엌이랑을 연신
두리번거리기만 하면서 “아니, 난 집에 가서....” 어느 새 밀짚 방석 위에는 밥상이 내놓였다.
여인은 신기한 듯이 밥상을 한동안 내려다보다가, 느티나무를 올려다보면서- 벌레가 떨어지지 않을까? 하고
중얼거린다. 어디서 모깃불을 놨는지 풀 타는 냄새가 풍겨 온다. B는
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르다가 여인을 보고 “어떻게 밥 같이 할 용기가 있어요?” “없어요. 난 가겠어요. 그럼 내일
또....” B는 여인을 따라 길목까지 나가서 “이 동네 너머지요, 댁은?” “네,
고대에요.” “자 그럼.......” “근데 선생님 바람 쐬려 안 오시겠어요?” “어딜요?” “이 언덕길
위로요!” B는 약간 망설이면서 “바람 쐬는 것도 좋지만....” 하고 차림과 장화를 가리키고
웃으니까 “어때요 밤인데, 참 시원해요, 나오세요-” “그럼 나가죠.” 여인이 어스름 속으로
빨려가듯 사라진 언덕길에는 박꽃이 별나게 희었다. B는 벗고 신고 하기가 귀찮아서 고무장화를 신은 채
옆으로 앉아 저녁을 먹는다. 할머니가 화로에 쏘시개로 연기를 피다가 “시골 찬이
그렇소!” 한다. B는 “뭐 별수 있소, 이럼 됐지!” 하긴 했으나 실상은 찬이 맞잖아 시장은 하면서 밥도 별로
당기지 않았다. 상을 물려 내고 담배를 붙여 벌렁 자빠져서 두 다리를 쭉 뻗어 본다. 적당한 피로가 되려
어떤 쾌감을 준다. 느티나무에서 이름 모를 밤벌레가 지이지이 울다간 멎고 또 울곤 한다.
- 가 볼까? 성냥을 그어 시계를 본다. 아직 한 시간도 채 못 됐다. 좀더 있다가 가기로 하고 눈을 감는다.
졸린다. 자서는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면서도 눈시울이 무겁고 머릿속이 아리송해 온다. 귓가에서 모기
소리가 앵 한다. 때려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손이 올라가지 않는다. “손님, 방에 드시지, 모기가 뜯잖소?” 하는
소리에 B는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상반신을 일으킨다. 할머니가 낡은 부채를 들고 곁에 서 있다. B는 “저, 바람을 좀 쐬고
오겠소!” 그리고는 골목으로 나와 언덕길로 올라갔다. 밋밋한 등마루
황톳길목에는 여인이 여남은 살 나 뵈는 사내아이의 손목을 잡고 서 있다. 여인은, 밤이라 색깔은 잘
모르겠으나 희게 보이는 원피이스에 샌들을 끌고 부채를 들었다. 키가 더 커 보인다. “일찍 나오셨소?” “아뇨, 조금
전.....” “여기는 정말 시원한데요-” “그래도 오늘 저녁에는 바람이 별로 없군요.” B가
잔디 위로 궁둥이를 내리자, 여인은 한동안 망설이다가 아이에게 신문지를 두어 장 내오라고 한다. 댁이 어디냐니까, 숲 속으로 빤하게
보이는 불을 가리키면서 저 집이라고 한다. “여기가 바로 본댁인가요?” “아뇨!” “글세 그런 것 같아요.”
“어째서요?” “전 이삼 년 전부터 여길 다니는데....” “그래서요?” “한번도 본 적이 없고 또 이런 시골에서
낚시를 하는 젊은 여성이 있을 턱도 없겠고......” 아이가 신문지를 가지고 왔다. 여인은 한 장을
B에게로 건넨다. B는 낚시복이라 아무렇게나 딩굴어도 괜찮으니 아이를 주라고 한다. 그러나 B는 굳이 내미는 신문지를 받아 깔면서
“실례지만 뭐라고 불러요? 아직 인사도, 전 B라고 합니다만....” 여인은 웃으면서 “정말
실례했어요. 정옥입니다!” “성이 정씬가요?” “아네요. 전 성이 괴상해서 되도록이면 통성은 안 하기로 하고 있어요.”
“자기 성인데 괴상이고 뭐고가 있나요?” “마예요!” “말맛자 마- 희성이군요.” “성이 백 가지나 된다던데
어떻게 하필이면 말 성이 됐는지....” “왜 마가 어때서요?” “여자 말띠는 팔자가 사납다잖아요. 띠보다도 바로 성이
말이 돼서 시집도 제대로 못 갈 것 같아요!” 그리고는 또 웃는다. “그러니까 아직 미스시군요?” “아직이 아니고
아마 평생 그럴 것 같아요!” “그래서 수녀라도 되시나요?” “아아뇨!”
“그럼?”
정옥이는 일본 k시에서 났다. 그의 아버지 어머니는 k시에서 한국식 식당을 경영하면서 딱
딸 하나뿐인 정옥이와 별 굴탁 없이 살았다. 그의 아버지가 무엇보다도 낚시를 좋아했다. 그런 그의
아버지는 정옥이를 어릴 적부터 낚시터로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어린 딸을 물가에 데리고 다니는 그의
아버지가 못마땅해서 늘 말싸움을 했다. 그러나 정옥이는 어머니보다 이런 아버지가 더 좋았다. 어릴 때
그의 아버지의 넓고 든든한 등에 업혀 개울이나 진탕을 건널 때가 가장 즐거웠고 그럴 때 그의 아버지가 “정옥이 여기
빠뜨릴까?” 하면 정옥이는 그의 아버지의 굵직한 목을 감아 안고 궁둥이를 들까불었다. 그러니까
정옥이가 아직 낚싯대를 채 가누지도 못할 때부터 그의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서 낚시를 담갔다. 여학교
일학년 때 시골로 소개를 갔다가 일본의 패전과 함께 거의 알몸으로 환국을 했다. 고향인 대구서 두 해
동안 별 하는 일도 없이 친척들에게 신세만 지다가 그의 아버지는 결국 식당 경영이라도 해 볼 양으로 서울로 올라갔다.
그의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간 지 한 달이 채 못돼서 벌어진 6·25와 함께 그의 아버지도 소식이
없었다. 모녀는 매일같이 역에 나가 피난 열차를 기다리고 찾았으나 그의 아버지는 종내 오지 않았다. 수복과 함께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아 서울로 올라갔다가 1·4후퇴와 함께 어머니만 돌아왔다. 환도를 기다려 모녀는
아버지를 찾아 서울로 올라왔다. 막연할 뿐이었다. 하다못해 그의 어머니는 역전 뒷골목에서 일본식 국수
장사를 시작했다. 한창 모여드는 판이라 장사가 그대로 되었다. 계집아이 하나를 데리고 정옥이가 가게를 맡고, 그의 어머니가 부엌에서
국수를 말았다. 값도 싸고 맛도 좋다고 해서 단골도 늘어 갔다. 그럭저럭 너댓 달 하는 동안에 밑천도
좀 잡혔다. 그럴수록 아버지 소식은 더 궁금했다. 거리를 다닐 때면 사람들 틈에서 아버지를 찾아 살피노라고 눈꼬리가 따가왔다.
늦게 자리에 든 어머니도 말똥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한숨을 쉬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이러던 어느 날
김씨가 찾아왔다. 김씨는 일본서 그의 아버지가 부리던 숙수다. 무척 반가웠다.
김씨의 말은, 정옥이네 소식을 알려고 부산서 대구로 세 차례나 오르내렸다는 것이다.
김씨는 마치 자기 집에나 온 것처럼 좋아 날뛰면서 어머니를 돕고 가게를 손질도 하고 했다.
사흘을 묵는 동안 김씨와 어머니는 여러번 의논을 한 끝에 좀더 반반한 가게를 얻어 국수뿐 아니라 화식까지 하기로
작정을 했다. 어머니도 무척 생각한 나머지였다. 어머니로서는 첫째 정옥이 공부 문제도 있고 또 변변히 못한 장사라지만 사내 손 없이
꾸려 가기가 무척 힘도 들었다. 더구나 식당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숙수는 두어야 했고 그렇고 보면 전부터 부리던 사람이고 또 김씨
자신의 처지도 퍽 딱한 형편이었다. 다시 가게를 옮겼다. 좀더 넓고 큰길 쪽으로 내민 허술한 이층이었다.
그때만 해도 가게를 얻는 것쯤 그저 줍기나 마찬가지였다. 김씨는 목수와 함께 부지런히 가게를 꾸몄다.
일주일 뒤에는 간단한 왜식 식당을 차리고 손을 맞았다. 나날이 환도해 오는 사람들로 해서 역전에는 언제나
사람과 짐 사태였다. 식당도 바빴다. 이때부터 정옥이는 다시 학교를 나가게
됐다. 정옥이가 고등학교 졸업을 한 달쯤 앞둔 어느 날 밤 어머니가 정옥이 앞에 조심히 않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씨가 어떻게 졸라 대는지 인젠 더 어떻게 핑계를 댈 수가 없노라고-. 이씨란 두 해
전부터 정옥이에게 눈독을 들이면서 사흘드리 드나드는 관내 세무서 직원이다. 나이는 서른 둘이고 6·25 때 그의 아내를 잃은
독신이라고 한다. 이 이씨는 나이에 비해 월등 성숙한 정옥이를 두고 작년부터 약혼을 졸라 왔다. 약혼을
해 주면 정옥이가 졸업할 때까지의 학비 일체를 자기가 대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아직도 나이가 어리고 더구나 재학중인데
뭘 그렇게 성급히 서둘 게 있느냐 두고 보자는 이런 투로 어물어물 했다. 이 두고 보자는 애매한 투도
한두 번 말이지 일 년이 지나고 정옥이가 졸업이 다 된 지금에 와서도 그대로 어물댈 수만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의 어머니는 이씨가 거의 강요하다시피 졸라 대고, 시골에 처자식 눈깔이 멀뚱멀뚱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으면서
딱 잘라 버리지 못하는 데에는 그럴 까닭이 없지도 않았다. 세금..... 그 몸서리나는 세금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서씨란 자가 나와서 엄청나게 과세를 해 놓는다. (이것은 어쩌면 서로 짜고 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면 이씨가 나와서 불평을 못할 정도로 재조정을 해 준다. 그럴 때면 서씨를 빙자하고 얼마의 돈을 받아가는 것을
물론이었고, 이런 다음이면 의례히 이씨와 서씨는 가장 상급 손님 위치에서 입맛대로 실컷 두드려 먹었다.
이런 때 이씨는 전송을 나온 정옥이 어머니 귀에다 숨김을 불어 넣으면서 “누구누구는 여기보다 매상이 훨씬
떨어지는 데도 얼마란 걸 알아야 한다- 이런 말씀이야.” 그러면 정옥이 어머니는 “네, 왜
모르겠어요. 모든 게 이주사의 각별한 호읜줄....” “그러니까 정옥이 학비쪼라고 생각하란 말씀이야,
알겠소?” 그리고는 어깨를 두드려 온 그의 어머니다. 그의 어머니는 한숨을
쉬면서 “얘야 어떡하면 좋으냐?” 정옥이로서는 대꾸조차 하기 싫었다. “그럼 어머니 생각은
어떠세요?” “글쎄, 장사를 그만 두는 한이 있더라도 차마....” 그리고는 말 끝을
흐리자 “그럼 나에게 물어 볼 필요도 없잖아요!” 이렇게 발끈 내쏘고는 책상 위에 머리를 박고 어깨를
들먹였다.
마지못해 하면서도, 그러나 아무런 수식도 없이 도란도란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고 난
정옥이는 “오늘 밤에는 별나게 반딧불이 나네요.” 하고 가볍게 부채를 젓는다. “시골 여름밤답군요. 근데 저
반디의 생리도 참 재미있죠. 낮에는 쇠똥밭에서 지글지글 열을 앓다가 밤만 되면 저렇게 불을 달고....” “제 짝을
찾는다지요?” “그렇다더군요!” “안타까와라.” “그래서요, 얘기 마저 하세요?” “늦었어요. 낼 아침 일찍
나가셔야 할 텐데 주무셔야죠!” “괜찮아요. 얘기하세요.” “뭐 시시한 얘기....” “재미, 아니 재미있다면
실례지만 이렇게 반딧불을 바라보면서 얘기를 듣고 있으니까 참 즐겁군요.” “고맙습니다. 근데 어째서 생소하다시피 한 선생님에게
아직 누구에게도 못 한 제 신상 얘기를 했을까, 저도 모르겠어요-” “그럴 기회가 없었겠죠!” “그보다 이런 시골에 나와
있으니까 젤 답답한 게 말동무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마....” “말동무가 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 치고 얘기나 더
하세요!” “아니 정말 늦었어요. 기회 있으면 또 하죠!” “그럴 기회를 또 만들어 주시겠어요?” "전 선생님만
좋으시다면....“ “그러죠. 근데 여기는 쭉 계시나요?” “당분간 있을 거예요!” “자
그럼-.” B가 일어서자, 정옥이는 웃으면서 “이보세요. 얘가
이렇게....” 보아하니 아이놈이 반딧불을 따서 양쪽 눈에다 하나씩 붙이고 정옥이에게 기댄 채 잠이
들었다. B도 웃으면서 “역시 시골 아이답군요.” “낼 아침은 몇 시에 나가시죠?”
“글쎄요, 찌만 보일 정도면 나가겠어요!” “전 좀 늦게 여덟 시쯤....” “자리를 잡아 두죠. 꼭 나오시죠?”
“그럼요!” “자 그럼....” “안녕히” 할머니네 마당에는 아직도 모깃불 속에 나무 토막이
타고 있었다. B는 어떤 행복감 같은 즐거움에 흐뭇이 젖어 자리에 누었다.
성냥을 그어 시계를 보니 네 시쯤 조금 지났다. 담배를 붙여 물고 문턱에 걸터 장화를 신는다.
옆방에서 할머니가 “손님 벌써 나가시오?” “슬슬 나가죠!” “조반은 어떡해요?” “점심
겸 천천히 내오슈!” 동이 트기 시작한다. 논둑길 풀섶에는 이슬이 차분히 내렸다.
이른 새벽, 이슬을 떨면서 낚시터를 찾아가는 상쾌함과 즐거움이란 비길 데가 없다.
낚시터에 들어서자 물 냄새만도 아닌, 수초 냄새만도 아닌, 그 독특한 냄새가 훅 풍겨 온다. 발자욱 소리를 죽여
가며 조용히 도구를 편다. 동녘이 제법 훤해 온다. 받침대를 꽂고, 주름살 하나 없는 수면에 첫 낚시를 던진다. 수심은 어제 그대로나
아직도 찌가 선명찮다. 의자를 펴 자세를 정하고 담가놓은 그물 주머니를 반쯤 들어올려 놓는다. 바로 이때다. 갑자기 낚싯대 끝이
와작와작한다. 반사적으로 낚싯대를 잡아 든다. 줄이 핑핑하고 두 간 반 대가 활처럼 휜다. 옆으로 수초가 위험해서 되도록 안전한
곳으로 낚싯대를 젖힌다. 붕어가 틀림없고 적어도 일곱 치 이상이다. 가는 바늘과 목줄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고기의 인력(引力)에다 부담만 주면서 조심히 다룬다. 고기는 서너 번 발악을 하다가 진득하니 끌려 나온다. 끌려 나오면서 한두
번 수면을 차고 굽이를 쳤으나 이미 맥은 빠졌다. 발 밑에 끌어당겨 아가미에서 밑으로 손바닥을 받쳐 재빨리 우벼 올린다. 넉넉히 여덟
치는 된다. 살도 쪘고 모양과 빛깔도 상품이다. 이런 거물급이 또 온다면 아무래도 바늘을 갈아야겠다고-
하면서 미끼를 갈아 두 번째 낚시를 던진다. 그새 날은 활짝 밝았다. 날이 밝아지자 안개가 퍼지기
시작한다. 수면에서 안개가 피어오른다. 안개 속에서 들사람들의 들기 먹은 말소리가 꿈같이 들려온다. 찌에
모우션이 온다. 신중히 챈다. 네 치 정도다. 재빨리 따넣고 다시 낚시를 던졌으나 이때에는 벌써 찌가 안 보일 정도로 안개가
짙어졌다. 담배를 붙여 물고 떡 미끼를 빚는다. 고기가 미끼를 따는지 어쩐지 알 수가 없다. 이런 날은
쬐기 마련이고 논고에는 흔히 올챙이가 죽어 뜨는 것을 본다. 이윽고 해가 뜬다. 안개 속으로 보이는
아침해는 부드럽고 별나게 붉다. 해가 뜨자 안개는 산꼭대기에서부터 걷히기 시작한다. 정옥이네 동네는 아직도 안개 속에 자욱하다.
정옥이가 여덟 시에 나온다고 했지만, 엊저녁이 늦었기 때문에 아직도 잠중인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B는
정옥이 자리에다 받침대를 꽂아 놓는다. 임지가 있다는 표시다. 공휴일이라 많은 낚시 팬들이 나올게고 여기로 몰려오는 패가 있을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일곱 시- 정옥이가 기다려진다. 언덕배기로 자꾸만 눈이 간다.
첫차로 나온 낚시꾼들이 둘씩 셋씩 넘어오고 있다. 모두가 아래편 큰 늪으로 가는 모양이다. 또 한 패가
넘어온다. 이 패 맨 뒤에 분명 정옥이가 오고 있다. 어제와 꼭 같은 차림이다. 이 패도 역시 아랫늪으로 꺾이고 정옥이만이 이쪽으로
돌아온다. 느티나무 할머니 집 앞에서 정옥이가 모자를 흔든다. B도 일어서서 수건을 흔들어 보인다.
논둑길을 지나 못뚝에 들어선 정옥이는 멈칫하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선다. B가 일어서서 뭐냐니까 정옥이는 두 팔을 좌우로 반 팔쯤 재
보인다. 뱀인 모양이다. B는 못뚝을 돌아가면서 “인제 일곱 신데 빨리
나왔군요?” 그러나 정옥이는 연신 뱀에만 눈을 쏘고 시잇시잇 하고 있다.
보아하니 풀섶에 율무기가 개구리를 물고 도사렸다. 괜찮으니 건너 뛰라고 하나 정옥이는 역시 망설이기만 한다.
보다못해 B가 장화발로 옆 무논에다 차 던져 버렸다. 정옥이는 제자리에 도구를 펴다가 신문지에 싼 것을
들고, B에게로 다가와서 그물 주머니를 들어 본다. “어머나, 여덟 치죠?” “첫 낚시에 걸렸어요!” “지렁이?
떡밥?” “지렁이!” “참, 인물이 좋네, 살도 찌고-” “여기 붕어는 원래 모양이 좋아요!” “붕어로서는
여성인 게죠?” “걸 어떻게 아나요?” “그러게 미남에게 걸렸죠!” “미남이라니 누가요?” “내가 붕어라도
이왕이면 미남의 낚시에 걸리죠....” B는 비로소 어저께 별 생각 없이 지껄인 농을
생각하고 “아하, 어저께 복수를 단단히 하시는군. 그러나 미남이란 좀 심각한 아이러닌데-” “뭐 젊은 남성은 미남으로
통하죠!” “이거 섣불리 농 한번 했다가 큰콘데.....” 하고 웃으니까, 정옥이도 비로소 깔깔 웃는다.
“통쾌하신가본데?” “그럼요!” 정옥이는 또 한바탕 웃고는, 시골엔 이런 것밖에 없다면서 신문지에 싸
온 찐 감자를 펼쳐 놓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정옥이는 두 간 반에다 지렁이를 달고 두 칸에다 떡밥을 달아
적당한 위치에 던져 놓고 손을 씻으면서 “오늘도 꽤 나오네요.” 하고 언덕배기로 눈을 주고 있다. “모두 아랫못으로
가죠?” “...................” 대꾸가 없이 B가 고개를 돌려 보자, 이때 정옥이는
딱 고기를 달아 올리는 참이었다. “커요?” “아뇨. 네 치!” “숫놈이죠?” “푸훗!”
“미남이죠?” 정옥이는 참다 못한 웃음을 터뜨리면서 “미끼 못 달겠어요. 너무 웃기지
말아요!” 햇살이 쫙 펴지고, 아침을 치른 논매기 일꾼들이 여기저기 떼를 지어 나오고 있다.
길로 자란 갈대 잎에도 바람끝 하나 간들 않는다. 한창 꽃망울을 단 수련 위로 잠자리가 미끄러지듯 날고 있다.
어디서 쏜살같이 날아온 왕잠자리 어부랭이 한 쌍이 낚싯대에 쯩! 하고 부딪쳐 물 위에 떨어진다.
치르르르치르르르.... 그러나 날개가 점점 물에 젖어 다시는 날아 뜨지는 못한다. 그러면서도 얼려 붙은 체 서로 떨어지진 않는다.
죽어도 같이 죽자는 모양이다. 지독한 놈들이다. 낚싯대 끝으로 건져 줄까 하는데 난데없이 뻑! 하는 소리와 함께 가물치란 놈이 잠자리
한 쌍을 냉큼 삼켜 버린다. 두서너 겹 파문이 퍼지고 수면은 다시 조는 듯 고요하다.
B는 혼잣말로 “아무튼 영광이야-” 그러자 정옥이가 고개를 돌리고 “네,
뭐가요?” “아니, 붕어에게 하는 말요!” “붕어가 말을 알아듣나요?‘ “글쎄요!” “무슨 말인데요?”
“별말 아네요. 그저 좀 질투가 나서 하는 소리죠!” “붕어가 뭘 어쨌게요?” “글쎄, 네 치면 아직도 애숭이 놈인데 첫
푸로포오즈로 미인에게 걸렸으니 영광이지 뭐예요?” 정옥이는 무슨 소린지 한동안 멍 하다가 갑자기
깔깔대면서 “선생님은 보기보담 농을 잘하셔!” 이때 낚시군 두 사람이 맞은편 못뚝으로 들어서고 있다.
아래쪽 큰 늪으로 갔다가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그 중 핼멧을 쓰고 낚싯대를 어깨에 멘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잘
나와요?” B는 눈앞에다 손을 저어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랑곳없이 이쪽으로 돌아온다. 돌아와 봐도
자리가 없으니까 한 사람은 되돌아 건너편에다 자리를 잡고, 핼멧만이 정옥이 옆에서 낚시를 지켜보고 섰다. 직업은 모르겠으나 한 사십
되어 보이는 얼굴이 넓죽한 사나이다. 정옥이가 세 치 정도의 붕어를 올리자 사나이는 “흠, 여기는
나오는데-” 그리고는 정옥이 자리에서 서너 간 사이를 둔 위편에다 도구를 팽개치고, 노끈을 단 쇠갈퀴로
쩜벙쩜벙 수초를 치기 시작한다. 큰 소리를 지를 때부터 알아보기는 했지만 이건 남의 방해지 낚시라고 할
수가 없다. 나잇살깨나 먹었으면서 올바르게 배운 낚시는 결코 아니다. 보아하니 정옥이도 입을 뽀로통하니
내밀고는 미끼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한동안 수초를 치고 난 사나이는 이번에는 깻묵덩이를 풍덩풍덩 던지기
시작한다. 주먹만큼씩한 깻묵덩이를 무작정 던져 놓고 담배를 붙이면서 정옥이 곁으로 다가가서 “얼마나 올렸소?” “정옥이는
좀 냉담하고 “못 올렸어요!” “자리가 좋은데요?” “자리가 좋으면 뭣해요, 다 쫓아
버렸는데!” 사나이는 피식이 웃으면서 “그 괜찮아요. 저쪽 고기들이 쫓겨 이쪽으로 모여들게요. 두고
봐요!” 듣자하니 되려 고기를 몰아 보낸 셈이 된다. 이쯤 되면 더 말이 필요 없다.
근 한 시간이 지나도록 건너편에서도 이쪽에서도 고기가 달리는 기미가 없다. B와
정옥이가 간혹 한 마리씩 올리면 건너편에서는 괜히 세 간 대를 거치장스럽게 휘두르면서 “이놈의 데 고기는 임자가 따로 있나
어떻게 통 까딱도 안 해.” 이렇게 빈정거리면서 정옥이를 향해 “그 아주머니, 뭐에
달려요?” 하고 또 고함을 지른다. 아주머니- B와 정옥이를 이 사람들은 아마 부부로 아는
모양이었다. 정옥이는 B에게로 얼굴을 돌려고 눈으로 웃으면서 “다 먹어요!” 해 버린다. 말하자면 지렁이도 먹고 떡미끼도
먹는다는 말이다. 할머니가 점심을 내왔다. 우산을 세워 볕을 가리고, 싫다는 정옥이를 억지로 권해 같이
점심을 먹는다. 건너편에서 “우리도 점심 먹을까?” “벌써?‘ “벌써고 뭐고 배 고프면
먹을 일이지.” 그리고는 도시락을 들고 이쪽으로 돌아온다. 한손에는 진로(眞露) 술병도 들었다.
“자네, 먹을 때 못 먹고 안 먹을 때 먹는 게 뭔지 아나?” “그게 뭔데?” “글쎄 맞춰보라고!” “먹을 때
못 먹는다....” “그게 바로 낚싯군 점심이야!” “왜?” “고기가 먹을 때는 점심도 못 먹거든!” “고기가
먹는다고 못 먹기야....” “그러니까 고기가 한창 먹을 때는 점심을 먹을 새가 없단 말야, 알았어? 그러니까 고기가 안 먹을
때 먹어 두자는 거야.” B와 정옥이는 점심을 마치고 할머니를 돌려 보내고도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고기가 젤 안 달릴 시간이기도 했다. 수면을 바라보고 있던 정옥이가 “귀엽죠?” 하고 가리키는
수련 잎에는 조그마한 개구리가 한 마리 앉아 있다. “고놈 참!” 그러나 정옥이는 “우리 집
개구리는 달아뺐어.” 한다. “개구리가 달아나다뇨?” 정옥이는 웃으면서 한 달쯤 전에 수련을
캐다가 수조에 심었다는 것이다. 일본서 그의 아버지를 따라 낚시를 다니면서 늘 보아 왔고 또 수련을
좋아했기 때문에 아이를 시켜 두 포기를 캐다 심고 개구리도 세 마리나 붙들어다 넣었다고- 그런데 개구리가 두 마리는 달아나고 한
마리만 재롱을 피더니 며칠 전부터 그나마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올챙이를 잡아다 넣죠?” “글쎄요, 근데 여기 수련은
어릴 때 일본서 보던 수련하고는 좀 달라요, 이런 것 뿐예요?” “이건 본수련이 아니고 개수련이라고 해서 잎은 거의 같아도 꽃이
다르죠!” “네에. 그렇군요.” “수련에 대한 이야기가 있죠. 아세요?” “아뇨, 어떤
얘긴데요?”
원래 수련은 꽃이 홍·백 두 종류인데 낮에 폈다가 밤에는 꽃잎을 닫고 잠을 자기 때문에
수련(睡蓮)이라고 전해 온다. 옛날, 중국 산서(山西)에 퍽 연을 사랑하는 선비가 있었다.
이 선비가 하는 일은 앞 연못에 핀 수련을 바라보면서 시를 읊거나, 현금(玄琴)을 뜯는 것이었다.
어느 날 낮 꿈에, 한 수련꽃 속에서 그림 같은 소년이 고개를 내밀고 좀 떨어져 있는 붉은
꽃에다 대고 손짓 눈짓을 하고는 숨어 버렸다. 다음 날 붉은 꽃 속에서 역시 그림 같은 소녀가 얼굴을
내밀고 방긋이 웃으면서 전날의 흰 꽃에다 대고 손짓을 하고는 숨어 버렸다. 참 이상했다. 선비가 잠을
깨어 보니 수면에는 잠자리만 한가로이 날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날도 선비는 애써 꿈을 꾸었다. 두 소년
소녀가 나타나 손을 잡고 물 위를 미끄러지듯 춤을 추었다. 선비는 그 춤이 하도 아름다워서 현금을 뜯었다. 소년 소녀도 더욱 흥겹게
춤을 추고 선비는 정신 없이 현금을 뜯기만 했다. 그런데 이렇게 매일 꿈을 꾸다가 깨어 보면 흰 꽃과
붉은 꽃이 조금씩 사이가 가까와지는 것이었다. 선비는 무슨 생각에선지 두 꽃 사이를 전대로 떼어 놓고 흰
꽃잎을 하나 따 버렸다. 다음 날 꿈에 소년은 팔소매 없는 옷을 입고 못내 부끄러워하면서 소녀의 시선을
피했다. 며칠 뒤에 꽃은 져 버리고 말았다. 선비는 슬퍼하면서 몹시 후회를 했다. 그러나 이렇게
중얼거렸다. - 두 꽃이 합쳐 버리면 아무리 현금을 뜯어도 다시는 춤을 추지 않았을 것이라- 고. “참 재미있는
얘기군요. 애급 국화라죠? 꽃말은 환상이든가? 순결이든가? 학교 때 들은 것 같아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좀더 해 보실까요?” B와 정옥이는 낚시 자리로 내려앉았다. 이때 건너편에서 “옳지, 나온다
나온다-” 오랜만에 달리는 고기가 무척도 대견한 모양이었다. 고기를
끌어당기면서 “이 친구야. 어데 갔다 이제 왔노. 헷 제에기.....” 그러자 정옥이 옆에 앉은
헬멧이 좀 벨이 쑤시는지 낚싯대를 휙 하니 소리가 나게 던지면서 “어디 갔다 와, 주일날이라고 예배 보고
왔지!” 그러자 건너편 사나이는 “더도 말고 자치 한 마리만 걸려 주소.” 하는데,
이쪽에서도 “자치는 여깄다!” 하고 달아올리는 것을 보니 겨우 세 치 정도다. 고기는 한창 달릴 시간이다. 그러나
아랫늪으로부터 천렵꾼 한 패가 몰려오고 있다. 아이들까지 합해서 칠팔 명, 그 중 둘은 투망을 들었다.
천렵꾼들은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투망질을 하기 시작한다. 투망으로 해서 밀려온 물너울이 발밑에
철썩댄다. 이렇게 되면 낚시는 그만이다. 건너편 사나이가 “여보, 우린 낚시를 걷으란
말요?” 하고 패들을 쏘아보자, 투망을 든 천렵꾼 한 사나이가 “왜 그러오?” 하고 시치미를 뗀다. 그러자 헬멧이
제법 시비조로 “당신들이 몰라서 묻소?” “아니 여보, 모르니 묻는 거 아뇨. 대관절 어쩌란 거요?” “당신들이 남의
낚시 방해를 왔소? 천렵을 왔소?” “아니 가만, 여기서 투망도 못하고 하면 우린 그럼 맨손으로 돌아가란 말요? 헷 참 별꼴
다....” B와 정옥이는 낚시를 걷는다. "별 꼴이다. 야 이것 봐-“ “그래 당신들이 이
못의 주인이야, 이 못의 고기는 당신들만이 잡긴가?” “핫, 내 원 참....” 형세로 봐서 삿대질
정도는 있을 법하나 워낙 천렵패의 수가 많으니까 둘은 약간 기가 꺾이는 모양이다. B와 정옥이가 도구를
챙겨 자리를 뜨자 “저봐, 모처럼 나왔다가 그만 쫓겨가잖아?” “체, 가고 안 가고 우리가 알 게 뭐람!”
“그러니까, 나만 좋으면 그만이다- 이거지?” “아니 여보, 누가 뭐랬소. 당신들은 낚시로 잡고 우리는 투망으로 잡잖소. 아니
도대체 이 못에는 낚시로만 잡으란 법으로 돼 있소?” "허, 이거 아무리 도의가 썩었기로...“ 하고 헬멧이 빈정대자,
건너편 사나이는 아니꼬와 죽겠다는 듯 미끼를 별나게 퇴퇴 침을 뱉는다. 정옥이가 B를
돌아보고 웃으면서 “그래도 도의가 어쩌고 하네. 남의 옆에서 쩜벙쩜벙 수초를 치던 것은 까맣게 잊은 모양이죠?” “그놈의
도의, 모자모양으로 썼다가 벗었다가...” 느티나무 할머니네 집에 들려 밥값을 치르고 언덕배기를 넘어서자
정옥이가, 아직 시간이 많은데 쉬어 가라고 한다. 실상은 B도 그랬으면 하던 참이었다. 정옥이가 들어
있는 집은 초라한 초가집이었다. 육십 가까운 부부가 며느리와 손자 하나 데리고 안채에 살았고 정옥이는 그 바깥방을 빌려 있었다.
정옥이 방은 겉과는 달리 방안만은 벽이며 장판이 깨끗했다. 방 바로 앞은 호박 덩굴이 덮인 담이 가렸고,
담 밑에는 둥근 수조가 놓였다. 수조에는 수련이 너댓 잎 떴고, 아직 피지 않은 꽃대가 수면에서 한 치쯤 올랐다. “이렇게 물을
가뜩 채웠으니 개구리가 달아날밖에!” 그러자 정옥이가 대야에 물을 떠 내오면서 “그런가봐요. 물을 좀
퍼내고 또 붙들어다 넣어야겠어요." “고기도 있나요?” “많아요. 헤쳐 보세요!” B는 수련을
한옆으로 헤쳐 본다. 정말 꽤 큰 붕어가 열 마리도 넘게 조용히 엎뎌 있다. 정옥이 말인즉, 작은 놈과
비늘이 벗겨졌거나 상채기가 난 것들은 다 줘 버렸다고- 그러면서 수조가 좀 컸으면 좋겠다고 한다. B는
간단히 손과 낯을 씻고 바로 담 밖 밤나무 숲 그늘에 깔아 놓인 밀짚 방석에 앉아 가슴을 헤친다. 그늘이 짙고 바닥에 습기까지 있어
한결 시원했다. 이윽고 엊저녁에 정옥이가 데리고 나왔던 아이놈이 고무 베개를 내다 준다.
B가 베개를 베고 장화 그대로 상반신만을 자리에 눕히자 아이놈이 곁에 와 앉는다. 아이놈은 굵직한 방아깨비를 한
마리 손에 쥐고 있다. “너 몇 살이지?” “열 살요!” “삼학년?” 아이놈은 고개를
끄덕인다. “네 아버지는?” “군대!” “흠, 너 내 심부름 좀 하겠니?” 아이놈은 또
고개를 끄덕인다. “너 버스 타는 데, 게 가서 담배 좀 사와, 이건 너 사탕 사 먹고-” 아이놈은
돈을 받으면서 쥐고 있던 방아깨비를 내민다. “응 그래 그래, 이건 내가 맡아 있을께, 빨리 갔다
와.” B는 방아깨비 뒷다리를 모아쥐고 새삼스레 바라본다. 그놈 아무리
뜯어봐도 선량하게만 보인다. 미워할 수 없는 상판대기다. 끄덕끄덕 방아를 찧는 것이 체통에 어울리지 않게 우습기도 했다.
- 근데 정옥이는 뭘 할까? 베개를 내보낸 것은 한잠 자라는 것인지? 그러고 보면 정옥이도 제 방에서 한잠 자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스르르 눈이 감긴다. 팔이 옆으로 늘어떨어지고 그와 함께 방아깨비도 손에서
빠져 나갔다. 앗차! 하고 눈을 떴다. 시계를 보아하니 다섯 시 십오 분 전이다. 머리와 눈시울이 한결
가벼운 것 같다. B는 약간 당황하면서 상반신을 일으키자 정옥이가 뒤적이던 월간 잡지를 옆으로 밀고 웃으면서 “더
주무시죠!” 한다. B는 “아, 이거 정말....” 그리고는 쑥스럽게 웃는다.
정옥이는 엊저녁과 같은 원피이스로 갈아 입고 모로 앉았다. 곁에는 냉수 사발과 토마토와 부채가 놓였다. 정옥이의
아무렇게나 쓰담아 넘긴 머리와 화장기 없는 얼굴이 퍽으나 신선해 보인다. “아이 어디 갔나요? 심부름 좀 시켰는데.”
“게 있잖아요?” B의 미쳐 보지 못한 옆자리에 담배와 사탕 봉지가 놓여 있다.
B는 담배를 떼면서 “아이는?” “곧 올 게요!” 그러면서 정옥이는 B에게
토마토를 내민다. B는 담배를 반쯤 태우고 토마토를 한 개 집어 움쑥 깨물자 토마토 속이 튀어 얼굴과
안경이 엉망이 됐다. 서어츠 깃에도 튀었다. B가 안경을 끄르고 허리에서 수건을 빼자, 정옥이는 별나게
큰 소리로 웃으면서 부채로 얼굴을 가린다. B는 천천히 안경을 닦으면서 “남의 실패가 저리도
유쾌할까....” 하고 정옥이를 바라본다. 정옥이는 부채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볼륨 있는
가슴만이 너울처럼 들먹인다. 이런 정옥이에게서 결코 향수는 아닌, 고급 비누 냄새가 풍겨 왔다. “할 수 없지,
이왕이면....” 하고 B가 다시 토마토를 들자, 정옥이는 비로소 부채를 내리고 “정말 눈물이 다 났어요!” 한다.
“왜요? 너무 비참해서?” “하도 우스워서!” 아이놈이 두 손을 움켜쥐고 뛰어왔다. 뭐냐니까
개구리라고 한다. 보아하니 올챙이로부터 아직 얼마 나지 않은, 등에 파란 줄이 있는 어린 개구리가 세 마리다. 정옥이 시킨
모양이었다. 아이놈은 개구리를 수조에 갖다 넣고 B에게 손을 내민다. B는 비로소 방아깨비가 생각났다.
“응, 방아깨비, 자느라고 놓쳐 버렸어, 어쩌지?” “난 몰라, 난 몰라!” B는 좀 난처해
하면서 “자, 대신 이거 주께, 밭두렁에 가서 또 잡아 응-” 하고 사탕 봉지를 쥐여 준다.
아이놈이 사탕 봉지를 찢자, 정옥이가 “그 이리 내. 개구리를 잡은 손 안 씻었지? 가서 손부터 씻고
와!” 정옥이는 아이놈이 고분고분 사탕 봉지를 정옥이 옆에다 놓고 안으로 들어가는 뒤꼴을
바라보다가 “쟤라도 없으면 어쩔까 싶어요!” 하는 정옥이 얼굴에 옅은 그늘이 순간 지나간다. “아, 이젠 가
봐야지. 잘 쉬었습니다. 유쾌했습니다!” B가 일어서자, 정옥이는 차편은 늦게까지 있는데 더 놀다 가라고
한다. 그러나 B는 “고맙습니다. 또 오죠!” “언제 또 오세요?” “글쎄요. 별
지장만 없으면 토요일날 나오죠!” 이때 정옥이가 좀더 잡기만 한다면 B는 그대로 또 앉아버렸을는지도
몰랐다. 정옥이는 버스 정거장 중간까지 따라오면서 “토요일 꼭 나오시죠!” “네!”
“그럼 안녕-” B는 얼마쯤 걷다가 돌아다보니 정옥이는 길가 논뚝에 도사리고 앉아 벼포기를 헤치고 있다.
무슨 벌레라도 찾는 모양이었다. 이런 정옥이를 멀찌감치서 바라보는 B는 왠지 눈시울이
뜨끈해진다. 아무런 까닭도 없다. 그렇게 밝고 굴탁 없는 정옥이- 이건 설명할 수 없는 B의 순간적 감정이었다.
이래서 B는 마정옥(馬貞玉)을 알게 되었고, 정옥이와 알고부터는 한여름 동안 줄곧 장자 늪으로만 나갔다. 으례
토요일날 나가서 일요일 저녁 늦게야 돌아오곤 했다. 어느 날 밤인가는 원두막에 앉아 광나루 쪽에서 통금
사이렌이 아련히 들려 올 때까지 이야기를 했다. 정옥이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공부도 공부지만 이씨의
성화에 구실을 만들기 위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정옥이가 B대학 교육과 삼학년 되던 봄, 어느 날 밤, 요리사 김씨가 정옥이 방에
뛰어들었다. 그때 정옥이는 촉수가 낮은 파란 불을 켜놓고 어슴푸레 잠이 들었는데 어떤 중압감과 함께
술냄새가 확 끼쳤다. 엉겁결에 이불을 감싸고 몸을 도사리기는 했으나 숨이 꽉 막혀 뭐라고 고함을 질렀는지 어쨌는지 어머니와 김씨의
말다툼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건넌방에서, 어머니의 가느다란 ㅡ그러나 절박한 말소리
사이사이, 김씨의- 정옥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다 내 덕이야. 이만큼이라도 자리를 잡은 것도 다 내 때문이야. 그래 나는 남 좋은
일만 하러 다니는 놈인가. 목숨을 걸고라도 정옥이는 내 것으로 만들고야 말테니까. 이씨 흥 이 자식 한번만
더 지분대 봐라. 그래도 두지는 않을 테니까- 정옥이는 와들와들 떨기만 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다음 날부터 정옥이는 앓아 눕고 말았다. 진찰을 해 봤으나 어떤
쇼크에서 온 한때 현상이지 별 탈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정옥이는 입원을 하겠다고 했다. 집이 싫었다. 그의 어머니도 그러라고 했다.
입원한 지 일주일 뒤에, 그의 어머니와 정옥이는 말을 짜고, 두 모녀를 늘 돌봐 주는 복덕방 영감과
의논을 했다. 정옥이가 여기에 와 있게 된 것도 실상은 복덕방 영감의 알선이었고, 이 집 주인은 복덩방
영감과 먼 일가뻘이었다. 정옥이는 카리에스로서 메디컬 센터에 입원을 한다고 퍼뜨리고는 복덕방 영감을 따라
여기로 와 버렸다. 정옥이의 생활비며 그 밖의 모든 연락은 지금도 이 복덕방 영감이 해 주고 있다. “그러니까 이씨와 김씨는
정옥씨가 지금도 메디컬 센터에서 기프스로 꼼짝못하고 누워 있는 줄로만 알겠구먼?” “그럼요, 적어도 일 년간!”
“문병이라도 온다면?” “문병, 면접 일체 사절로서 어머니도 잘 못 간다고 하고 있나 봐요!” “카리에스 환자가 매일
낚시질만 다니니....” 하고 B가 웃자, 정옥이는 어릴 때 정말 카리에스를 앓은 일이 있고, 그것은 요리사 김씨도 안다고
했다. B는 일주일을 기다리다 못해 오후 느즈막히 나갔다 가는 막차로 돌아오기도
했다. 어떤 날은 낚시터가 붐비고 더구나 정옥이는 사람을 되도록 피하기 때문에 덕소나 양수리 쪽으로
원정을 가기도 했다. 둘이서 우장 한 개로 소나기를 피하는 때도 있었다. 손을 잡고 개울을 건너기도 했고, 거머리가 있는 진탕에서는
B가 정옥이를 일쑤 업어 건너기도 했다. 이런 때 정옥이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등에 업혀 버릇한 때문인지도
몰랐다. 가을이 한창인 시월 하순 네쨋번 토요일이었다. B는 부랴부랴 서둘러
장자 늪으로 나갔다. 가는 길로 정옥이에게 들렀다. 정옥이는 없고, 주인 영감이 “맡겨 두래요!” 하고 정옥이 낚시 도구를
내준다. 정옥이가 어디 갔느냐니까 영감은 “나도 모르겠소. 엊저녁에 그의 어머니가 와서 허둥지둥
떠나 버렸으니까요!” B는 다그쳐 “그래 어딜 간답디까?” “글쎄, 그걸 나도
모른다니까요!” “아무런 전갈도 없읍디까?” “이것(낚시 도구)을 맡겨 두라고 하고 또 무슨 쪽지를 적어 주었는데 어디다
놓아 버렸는지 암만해도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B는 어이가 없어 한동안 멍하고만 있자니까 “아마
무슨 다급한 일이 생긴 것 같습디다. 서두는 품이 뭣에 쫓기는 것 같더군요!” “서울로 간답디까?” “잘은 모르지만 밤차가
몇 시고- 하는 것을 보아서 서울 본댁으로 가는 건 아닌가보던데...” 영감의 느리고도 태평 같은 대꾸에
B는 머리끝이 서도록 치받치는 짜증을 지그시 누르고 “노인, 그 쪽지 좀 잘 찾아 보슈!” “아 글쎄, 오늘 댁이
나오신다기에 아침부터 찾고 생각을 해 보는데, 나이 먹으니 통 정신이 없어서....” B는 맥이 풀려
낚시고 뭐고 아무런 경황이 없다. 정옥이 방 문턱에 걸터앉아 방안을 둘러본다. 눈익은 보스턴백이며 조그만
경대며 사진틀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정옥이가 쓰던 책상 위에는 이 집 아이놈의 책보따리가 놓였을 뿐이다.
도로 돌아갈까 했으나 해도 졌다. 그보다도 혹시 밤새라도 무슨 소식이나 있을지, 또 그 쪽지라도 찾을 수
있을는지 해서 “노인, 오늘 밤 여기서 좀 묵겠소. 괜찮죠?” “그러슈. 댁만
좋으시다면!” 이날 밤 B는 아이놈과 나란히 누웠으나 한 여름 동안 정옥이와 지내 온 가지가지가 되살아나
밤이 깊어 갈수록 더욱 눈만 초롱거릴 뿐이다. 밖에는 무서리가 내리는지 문 틈으로 찬기가 스며든다.
어깨를 움츠려 포대기를 걸치고 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그러나 생각은, 어느 방향으로 달리는 기차 차창에 한 팔을 세워 턱을
고인 정옥이 모습을 쫓고 있다. 달리는 기차와 쫓고 있는 정옥이 환상은 멎는 데가 없다. 줄곧 달리기만 한다.
동녘이 훤해지자 내키지 않으면서도 낚시터로 나가 본다. 낯익은 사람들도 몇몇 보였으나 탐탁히 인사도 않고 낚시를
걷어 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노인네 집에 들려, 다음 토요일 아니면 일요일에 나올 테니까 정옥이에게서
소식이 있거나 또 쪽지가 보이거든 단단히 간직해 달라고 신신 당부를 해 둔다. 다음 토요일에도 그 다음
토요일에도 정옥이 소식은 없었다. 먼 발치로 낚시터를 바라보기만 하고 맥없이 돌아오면서도- 설마 무슨
소식이 오겠지! 그러나 정옥이는 B에 대해서, 모 대학 조교수로 성이 B라는 것밖에는 이름도 주소도 모른다. B 역시 그렇다.
마정옥이의 과거와 현재의 처지와 시내 모처에서 화식 식당을 한다는 그의 어머니밖에는 아는 바가 없다. 묻고 알리고 할 필요가 없었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머리를 조아리고 싶도록 후회가 된다. 등한했기 이를 데가 없다. 정옥이가
굳이 소식을 알리려면 필경 이 노인 집밖에 없다. 그나마 정옥이가 이 노인네 집 주소를 알고나 있는지 없는지! 그마져 미심쩍다.
B는 번번이 헛걸음만 하면서도 입동이 지나도록 장자 늪 낚시터로 나다녔다. 정옥이가 돌아와서 B를 찾을
곳은 결국 이 장자 늪 낚시터밖에 딴 곳은 없기 때문이었다. 낚시터에 얼음이 얼자 B는 비로소 정옥이
낚시 도구를 기름 걸레로 말끔히 닦고 손질해서 벽장 속에다 둘 나란히 걸어 둔다. 겨울방학까지 꼭 마쳐야
할 논문도 팽개쳐 버렸다. 정옥의 소식을 알기 전에는 모든 것이 귀찮았고 의미가 없었다. 눈만 초롱초롱할
뿐, 눈에 뜨이게스리 몸도 수척해 갔다.
다음 해 경칩을 지난 첫공일, B는 정옥이 낚시 도구까지
가지고 가슴을 울렁이면서 장자 늪으로 나갔다. 노인네 집에 들렀다. 노인은 볕살이 두터운 축담에서
해바라기를 하다가 B를 보고 반색을 하면서도 정옥이에 대해서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B는 뱀못
낚시터, 정옥이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해를 보내고 돌아오기를 주일마다 되풀이 했다. 보리가 익고
모내기가 한창이자 수련이 돋아났다. 참외가 날 무렵 수련은 꽃을 피웠다. B는
낚시를 던져 놓고 수련을 바라보노라면 꽃잎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흔들리는 꽃 속에서 정옥이가 웃으면서 소롯이 얼굴을 내민다.
B는 정옥이의 이 환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눈만 깜짝이기만 하면 정옥이는 간
데 없고 꽃만 말뚱이 남는다. 몇 번이고 눈을 가늘게 해서 초점이 흐리도록 꽃을 바라보면서 정옥이의
환상을 잡곤 놓치고 하다가 문득 B는- 이건 어쩌면 중국 산서 지방, 어떤 선비의 수련몽(睡蓮夢) 이야기를 정옥이란 가상의 여인에게
투사(投射)시킨 꿈이 아닐까? 지난 여름부터 지금까지 줄곧 꿈의 연속이 아닐까? 그러나 B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꿈일 수가 없다. 꿈이어서는 안 된다. 정옥이는 오고야 만다. 오지 않고는 안 될
정옥이다. 정옥이가 돌아오면 정옥이와 만날 곳은 여기밖에 없다.
수련이 지고 수련이 또 폈다. 이 해도 B는 정옥이를 기다리면서 여기 장자 늪 뱀못
낚시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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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하상님 홈페이지에서 옮김
오영수, ‘수련’, 「산산산 갯마을·명암 외」, 삼성출판사 한국현대문학전집 25. 1981년. 228~252쪽.
작고한
작가 오영수(吳永壽, 1909~1979)의 낚시터를 배경으로 낚시꾼 남녀의 사랑을 그린 단편소설을 올린다. 2백자 원고지로
145매이어 단편치고 긴 작품이다. 절판이 되어 요즘 구하기 어려운 작가의 전집을 우연히 헌 책방에서 구해 반가운 김에 입력을 서둘러
보았다. 또 이 단편 소설은 월간 낚시춘추 창간호인 1971년 3월호에 게재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교문리 장자 늪 낚시터에서 젊은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을 묘사한 단편소설이다. 그 전문을
올린다. 1961년 작품이라 요즘 한글 맞춤법과는 차이가 있지만, 원문 그대로 입력했다. 작가
오영수(吳永壽, 1909~1979)는 갯마을 등 소설로 유명하지만, 붕어낚시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낚시를 주제로 한 글도 여러 편
남기고 있고, 문인 낚시 동호회의 열렬한 멤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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