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인류 역사의 비극 십자군 전쟁(Crusades)
십자군(十字軍)
십자군(Crusade) 전쟁은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Jerusalem)과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聖墓)을 이슬람교도의 지배로부터 탈환하려는 목적으로 조직된 기독교 군대의 전쟁을 말하는데 총 8차에 걸친 전쟁이 기록되어 있지만 작은 전쟁까지 포함하면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제1차 십자군 전쟁> 3년간
동로마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Comnenus)는 유럽 여러 나라, 특히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다. 1095년 클레르몽(Clermont)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Urbanus II)는 알렉시오스를 도와 그리스도의 성묘(聖墓)를 탈환하고자 그리스도 교도(敎徒)의 군대를 소집했다. 제1차 십자군은 주로 프랑스와 독일지역의 민중, 기사, 귀족들로 구성되었는데 1099년 7월 15일에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그곳에 살던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했다고 한다.
<제2차 십자군 전쟁> 5년간
제2차 십자군(1145-1149)은 이슬람 세력이 시리아(Syria) 북부를 빼앗고 1144년에 에데사(Edessa) 백작령의 땅을 점령해 라틴(Latin) 제국과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이 차단될 위험에 빠지자 유럽에 큰 충격을 주어 되찾기 위해 조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제2차 십자군은 모두 실패했고, 이슬람 세력은 통합되어 더욱 강해졌다고 한다.
<제3차 십자군 전쟁> 3년간
제3차 전쟁(1189-1192)은 이슬람 아이유브 왕조(Ayyubid dynasty)의 시조(始祖)이자 이슬람의 영웅인 살라딘(Saladin)이 정복한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하기 위한 기독교 십자군의 전쟁이다.
예루살렘이 이슬람에 함락되자 교황 그레고리오 8세가 영국과 프랑스에 십자군 동원을 요청하자 잉글랜드의 왕 헨리 2세(Henry II)와 존엄왕(Auguste)으로 불리던 프랑스의 필리프 2세(Philippe II)가 이에 호응하여 군대를 조직했다고 한다. 그러나 1192년에 예루살렘을 공격하지만, 살라딘(Saladin)의 대군에 밀려 철수했고, 야파(Jaffa)를 탈환하려던 살라딘도 리처드에게 패배하여 전쟁의 피로감에 지친 리처드와 살라딘은 야파(Jaffa) 조약을 맺고 휴전하였다니 결국 실패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야파는 현 이스라엘 텔아비브(Tel Aviv) 지역이다.
<제4차 십자군 전쟁> 3년간
제4차 십자군 전쟁(1202년~1204년)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의 촉구로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예루살렘이 아닌 이슬람의 본거지로 여겨지는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한 기독교의 십자군이었다.
그러나 종교적·신앙적 동기보다는 세속적, 경제적 목적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여 원정을 가던 중 갑자기 이슬람 본거지 이집트가 아닌 동로마제국으로 목표가 바뀌었다고 한다.
이 원정계획은 플랑드르(Flandre), 발루아(Valois), 신성로마제국 및 베네치아(Venezia) 공화국이 주축이었는데 1204년 갑자기 이집트가 아닌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를 침공하여 처참하고 무자비하게 이 도시를 유린했고,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을 약탈하고 파괴했다고 한다. 이 약탈과 파괴는 단일 사건으로 역사상 최대의 문명적 재앙으로 기록되었는데 이 전쟁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에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제5차 십자군 전쟁> 3년간
제5차 십자군 전쟁(1227~1229년)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의 주장으로 이루어졌는데 헝가리 왕의 지휘 아래 이슬람의 근거지인 이집트로 가서 다미에타(Damietta-나일 삼각주에 있는 두미아트의 州都)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을 바꾸자는 이슬람의 제안을 거절하고, 카이로로 진격하다 실패하였다고 한다.
<제6차 십자군 전쟁> 7년간
제6차 십자군 전쟁(1248~1254년)은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에 의해 단독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여 1229년 예루살렘을 양보받았지만, 1년 만에 다시 빼앗기고 말았으니 성공이라고 해야 할까 실패일까.....
<제7차 십자군 전쟁> 3년간
제7차 십자군 전쟁(1270~1272년)은 프랑스의 루이 9세(Louis IX)가 주도했다. 이때 루이 9세는 이슬람 군대와 싸우다 크게 패하여 포로로 붙잡혔다. 결국, 엄청난 몸값을 내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는데 루이 9세는 추락 된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다시 전쟁에 나서 튀니지(Tunisia)를 정복하고 시리아(Syria)까지 진출했지만, 병으로 갑자기 죽는 바람에 결국 제7차 십자군 원정도 무산(霧散)되고 말았다.
<제8차 십자군 전쟁>
1291년, 팔레스타인에 마지막 남은 기독교인들의 거센 항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의 도시 아크레(Acre)가 이집트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면서 200여 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외에도 많은 원정(遠征)이 있어 10차까지 기록된 것도 있으니 중세 200년간은 오로지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린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분쟁으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엄청난 문화재의 파괴도 많았던, 어찌 보면 암흑(暗黑)의 시기였다고도 평가된다.
<템플 기사단(Knights of Templars)>
성전(템플) 기사단 / 화형 준비 / 템플기사 화형 모습 / 술탄 살라딘
십자군 전쟁에서 템플(성전) 기사단을 빠뜨릴 수 없는데 템플 기사단은 원래 1118년에 프랑스의 기사 위그 드 파양(Hugues de Payens)이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결성한 종교 기사단이라고 하는데 훗날 십자군의 주력 부대로 활약하기도 한다. 가난한 수도사(修道師)들로 조직된 기사단은 여러 곳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막대한 부를 쌓게 되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템플 기사단은 마침내 종교계의 금융계를 휘어잡는 요즘으로 말하면 대기업이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각 교단(敎團)들과의 충돌이 잦아지고 마침내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Philippe IV)가 기사단에 막대한 빚을 지게 되자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려 기사단을 몰아붙이고 교황을 부추겨서 기사단을 해단(解團)하도록 하는 등 템플 기사단은 곤궁에 처하게 된다.
결국, 교활한 필리프의 농간으로 성전기사단 기사들은 감옥에 갇히고 1314년에는 파리 시내에서 산 채로 화형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성전기사단을 궁지에 몰아넣어 결국 해산하게 만든 클레멘트(Clement) 교황은 이번엔 교활한 필리프로부터 공격을 받고 포로가 되어 그 충격으로 한 달 뒤 죽는데 죽으면서 필리프에게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프랑스 국왕 필리프도 사냥을 나갔다가 야생 멧돼지의 공격으로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