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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한두실에서 복사골까지
저자:김종상
출판사:고글(2014.05.15출간)
가격:15.000원
김종상의 《한두실에서 복사골까지》는 팔순 기념문집으로 발간한 자전적 수필집이다. 여기에는 외래문화의 격랑에 표류하고 있는 우리 고유문화에 대한 애증, 민족의 자존과 정통성이 무시되고 교권도 만신창이가 된 교육의 현실, 일제의 수탈로 파산한 가정의 장손으로 어렵게 살아온 어린 시절과 많은 사랑과 감화를 주었던 존경하는 선배들에 대한 이야기, 문단의 원로라는 사람이 알량한 감투를 탐하여 배신하고 기만하며 분파와 갈등을 조장해온 아동문단의 역사들이 은은하면서도 깊은 울림으로 가슴에 젖어든다. 그 중에서도 선생님의 어머니와 아내인 사모님의 이야기는 같은 여성으로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세상에서 남다른 큰일을 해낸 사람들 뒤에는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준 사람들이 있다. 큰일을 해낸 사람이 남자일 경우 그들은 어머니거나 아내, 혹은 인연의 끈이 닿아 교감을 나누었던 여성들이 많다.
반세기가 넘는 교단생활에서도 큰 자취를 남겼고, 육십 년이 가까이 된 문단생활에서도 시, 동시, 시조, 동화, 소설, 수필에 까지 많은 작품을 남긴 김종상 선생님의 보람과 영광의 그늘에도 사랑과 헌신의 생애를 사신 두 여성이 있다. 한 분은 ‘한두실과 관음절시대’의 어머니이고, 또 한 분은 ‘감의 고장 상주와 복사골시대’를 함께 하신 사모님이시다. 선생님은 이 두 분의 끝없는 사랑과 헌신으로 교단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고, 오늘날 한국 문단의 큰 어른으로 자리매김을 하셨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선생님이 걸어오신 80개 성상을 되돌아보면 오할은 어머니의 사랑이고 오할은 사모님의 봉사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한두실에서 복사골까지》를 읽어보면 선생님의 삶의 자세와 사회적으로 우뚝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의 결실이었다.
선생님은 안동군 서후면 대두서의 김해김씨의 한 종가집 장남으로 태어나서 유년시절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다. 원래는 마을에서 유복하게 살던 종가였는데, 선생님이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일제 앞잡이의 농간으로 농토 대부분이 남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어 파산을 하게 된다. 당시 일제의 수탈은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는 이 일에 대한 울분을 안고 홀연히 만주 땅으로 떠나버리셨다. 할아버지 또한 분기충천 하셔서 땅문서를 갖고 정처 없이 어디론가 가버렸다.
혼자 남게 된 어머니는 남은 땅을 거두어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살림을 꾸려간다. 그러면서도 장남인 선생님에 대한 사랑이 끔찍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은 선생님이「들로 가신 엄마 생각 책을 펼치면 책장은 그대로 푸른 보리밭, 이 많은 이랑의 어디 만큼에 호미 들고 계실까 우리 엄마는…」이라고 노래한 시 『어머니』에서부터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이 그려진다. 이 『어머니』는 4차 초등국어4-1, 5차 초등국어6-1, 7차 중등음악1 에 수록되었다고 한다. 이 무렵의 어머니가 선생님을 위하는 모습은 아래와 같은 내용에서 엿볼 수 있다.
◾20리가 넘는 학교에 늦을까봐 두멍이라는 물독에 얼음을 깨고 새벽밥을 지어 따슨 밥을 먹여주셨고.
◾춥다고 옷은 이불 밑에 데워서 꼭 손수 입혀주시고, 고무신은 저고리 앞섶에 품었다가 발에 신겨 주셨다.
◾학교 가는 모습이 마을 앞 산모롱이를 돌아서서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사립문에서 하염없이 지켜보셨고,
◾학교에서 돌아올 때는 귀가시간이 늦으면 마을 앞 동구나무 밑에 나와 기다리시다가 손을 잡고 집으로 왔다.
그 시절에는 해만 지면 마을로 오는 산골길에 늑대가 떼를 지어 출몰하므로 어머니는 늘 불안했으니, 어머니의 삶은 걱정과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선생님이 다른 책에 쓴 어머니의 이야기를 보면 낮에 농사일로 아무리 지친 날에도 어머니는 밤이면 호롱불에 심지를 돋우고 고대소설을 노래로 쓴 『옥단춘가』 를 구슬픈 목소리로 부르며 삼을 삼고 선생님은 그 곁에서 토막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일기를 쓰고 공부를 했다고 한다. 안동은 삼베인 안동포로 유명한 고장이므로 안동포는 어느 가정에서나 했다.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은 선생님의 기억 속에서 떠나지를 않아서 나중에 『겨울 어머니』,『동구나무 가로등』,『어머니 무명치마』,『어머니, 그 이름은』등의 작품으로 승화되어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을 뿐만 아니라 ‘한정동아동문학상’도 받고 캐나다교포신문 ‘캐나다뉴스’에 어머니 날 특집으로 실리기도 했다.
그렇게 키운 선생님이 학교 교사가 되었다. 1955년이었다. 그 때부터 선생님은 젊은 날을 고생으로 보낸 어머니를 모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외국을 방랑하다가 해방 후에 귀국하신 아버지도 어려운 생활과 힘든 농사일에 너무 고생을 하셨으니, 이제는 좀 쉴 수 있게 했으면 했다. 그러나 두 분 모두가 고향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했다. 어머니가 더했다. 정이 든 벗들이 있고 당신의 손길만 기다리는 논밭을 떠날 수가 없다고 했다. 객지생활은 고독하고 삭막하며 외롭고 할 일도 없어 잠시도 살 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핑계였다. 객지생활을 하는 아들에게 짐이 될까봐 그러셨던 것이다.
그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대구 동산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가 보니, 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신장병인데 자식들에게 부담을 안 주려고 숨겨오다가 요독증이 되어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단다. 그 어머니가 운명 직전 혼수상태에서 한 말이 ‘얘야, 학교일이 바쁠 텐데, 왜 왔니?’ 였다고 했다. 거기에서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은 막을 내렸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오로지 자식만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주고, 어머니는 빈손으로 그렇게 떠난 것이다.
선생님이 교사가 되어 상주 외남국민학교로 가셨을 때는 휴전 직후라 농촌생활의 어려움은 말로 다하기 어려웠다. 학교에서 미국이 보내주는 옥분과 전지분유로 죽을 끓여 주면 어린이들의 굶주린 배는 그것을 받아드리지 못하여 토하고 설사를 하는 형편이었다. 어린이들은 가난한 부모 일을 돕느라고 결석도 많았지만 학교에 나오는 어린이들도 집에 가면 날이 어두울 때까지 부모를 도와 농사일을 했고 밤이면 석유를 아끼느라고 등불을 켜지 못해 공부는 생각도 못 했다. 그래서 공부에 재미도 못 붙였고 고학년이 되어도 문맹이 많았다. 선생님은 문맹퇴치의 시급함을 느끼고 책을 읽히며 일기를 쓰이고 글짓기를 가르쳤다. 집에 가도 끼니가 어려운 어린이들을 집에 보내지 않고 남겨서 학교 사택에 모아 저녁밥을 해먹이고 책을 읽혔다. 그러나 당시 선생님의 봉급으로는 가족의 입 살기도 어려운 형편이라 사모님은 지숙골 친정에 가서 양식을 가져왔다. 땔나무는 손수하고 학교 실습지에 채소를 가꾸어 어린이들 먹이는데 보탰다고 한다. 이 책에는 그 때의 일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집에 보내면 끼니도 어렵고 농사일로 숙제도 할 수 없는 어린이들은 남겨서 밥을 해먹이고 책읽기와 글짓기를 가르쳤다.
◾쥐꼬리만한 선생봉급으로는 남겨서 공부하는 어린이들을 먹일 수가 없어서 아내는 지숙골 친정에서 양식을 가져왔다.
◾밤에 학교에 남겨서 공부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부형들의 불평도 있었지만 그들을 하나하나 이해시키며 설득해 나갔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며 신혼 때부터 그렇게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묵묵히 선생님이 하시는 일에 뒷바라지만 하신 사모님의 모습은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사모님이 계셨기에 상주가 대한민국에서 글짓기교육으로 제일가는 「동시의 마을」이 되었고, 선생님은 그 중심에 우뚝 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님은 상주글짓기교육을 선도하는 단체인 ‘상주글짓기회’ 대표로 제2회 경향교육상 본상을 받았다. 그로 인해 서울에 있는 사립학교에 특채가 되어 ‘복사골시대’가 시작 되었다. 그러나 농촌 출신으로 자연성 그대로 살아온 선생님은 도시생활이나 사립학교의 특성에 적응을 잘 하지 못 했다. 그것은 서울로 옮긴 뒤에 쓴 『서울의 달』,『밤 북악에서』,『만원버스』,『거리의 소음』같은 시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럴 때도 선생님을 흔들리지 않게 잡아준 것은 사모님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새로 부임한 서울의 학교가 제2회 대통령상타기 글짓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비롯한 문공부장관상 등 큰 상을 모두 가져와서 글짓기교육 최고의 학교로 만들었고, 담임 반에 붓글씨와 사군자치기 까지 가르쳐서 학급생 전원이 전국적인 서예대회에 모조리 입상의 영광을 갖게도 하였다. 당시 6학년으로서 선생님께 붓글씨를 배웠으며 CEO인 박기홍 사장의 『서화학습으로 보낸 졸업반』이란 수필을 보면 선생님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지도력이 세밀화처럼 그려져 있다. 거기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6학년이 되고 4월부터 시작된 선생님의 서예지도는 학교공부가 끝나고 방과 후 학습으로 이어져서, 우리는 하교가 언제나 늦었다. 한창 뛰어놀고 싶은 우리들은 이때나 저때나 서예시간이 없어질 것을 고대했지만 선생님은 아예 여름방학까지 반납하고 반 어린이들을 불러내어 서예를 가르치셨다. 이런 선생님의 열정으로 7월, 9월에 반 전체 35명이 모두 전국서예대회를 휩쓰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래서 뛸 듯이 기쁘면서도 이제는 해방이겠거니 했는데, 또 화가선생님을 초빙해서 사군자 치기를 가르치셨다. 이렇게 선비정신을 강조하며 서예를 가르친 선생님 덕분에 필자는 생활에 개칠을 하지 않고 삶을 올곧게 살아가는 밑천이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한국교육출판사를 통해 발행된《어린이 서화집》으로 남아있는데, 거기에 담긴 선생님의 노력 뒤에 숨은 사모님의 내조를 읽기는 어렵지 않다. 당시 거의가 방과 후 과외수업을 받는 사립학교 어린이들을 늦도록 학교에 붙들어놓고 입시에도 없는 붓글씨 지도를 한다며 매일같이 값비싼 옷에 먹칠을 해서 보내는 선생님에 대한 학부모들의 원망도 사모님을 괴롭혔고, 그러느라고 가정은 하숙집이 되어버린데 대한 섭섭함도 있었지만 사모님은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이러한 선생님의 무심함은 사모님이 편찮았을 때도 남편인 선생님보다 오히려 선생님을 자식처럼 아끼시던 이원수선생님이 먼저 알아채셨다. 그래서 이원수선생님은 사모님을 데리고 인천 제물포까지 내려가서 용한 한의원에서 진료를 받게 했단다. 이 일은 삶이 힘들고 몸이 아파도 선생님 앞에 내색을 안 하셨던 사모님이기에 일어난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바로 이런 성품의 사모님이기에 상주에서 부터 ‘복사골시대’까지 온갖 어려움을 묵묵히 견디어 내셨던 것이다.
선생님은 한 평생 ‘집안은 사모님의 책임 아래 잘 돌아가고 있겠거니 하고 맡기시고’ 자신은 교육과 문학에만 혼신을 다하셨다. 추상같은 꾸짖음으로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으실 때는 엄하셨지만, 사랑하는 제자들의 부족한 실력을 갈고 닦아서 큰 대회에 입상케 하여 평생 잊지 못할 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셨다. 그것은 1988년 8월 8일에 나이가 70에 가까이 된 상주의 제자들이 뜻을 모아 어린 날 선생님과 함께 했던 학교 길에 기념시비를 세운 일에서도 증명이 되고 있다.
오늘날은 참교육이니 뭐니 하는 이름으로 교실을 버리고 거리로 뛰쳐나가는 교사들과 자신들의 본분인 교육보다 정치적인 일에 더 관심을 갖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일을 종종 본다. 무엇이 참다운 교육이고 어떤 것이 진정한 어린이 사랑일까?
우리는 단일민족 단군의 자손임을 자랑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예전과는 달리 교실은 단일민족의 자손들 집단이 아니기에 많은 고민들이 충돌하고 있다. 다문화가정 어린이, 결손가정어린이, 보육시설의 어린이, 새터민 어린이들이 한 교실에서 공부를 한다. 단일이 아니라 혼합이다. 내가 아니라 우리이며 지구마을 인간가족이 함께 하는 시대이다. 이렇게 교육환경이 바뀐 때에 우리는 진심으로 어린이들을 보듬어주는 선생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이 필요하다.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들어주면서 눈물을 닦아주는 선생님. 따뜻한 손길로 아픔을 감싸서 위안과 꿈을 주는 선생님, 뒤떨어지는 어린이들을 모아서 방과 후 늦게까지 함께 놀아주고 나머지공부도 시켜주는 그런 선생님이 그립다.
《한두실에서 복사골까지》는 그런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길을 가르치고 있다. 바른 삶을 찾아서 올바르게 가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누군가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남성이지만 그 남성을 움직이는 것은 여성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위대한 어머니의 모습과 훌륭한 아내의 길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울러 선생님이 살아오신 길에 끝없는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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