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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土偶)의 집 (2014.11.24/자음과모음) 2017.05.22. 한지혜
권여선 - 1965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인하대 대학원에서 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비자나무 숲’ ‘안녕 주정뱅이’가 있고,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 ‘레가토’가 있다. 오영수문학상(2007), 이상문학상(2008, 사랑을 믿다), 한국문학상, 동리문학상을 수상했다. 솔직하고 거침없는 목소리로 자신의 상처와 일상의 균열을 해부하는 개성 있는 작품세계로 주목받고 있다.
‘토우의 집’은 <장독 뒤에 숨어서>라는 제목으로 계간<자음과 모음>을 통해 2014년 봄부터 가을까지 연재되었다.
작가의 트윗
5/9 기쁘다. 고등어구이와 비름나물에 소주 마셨다. 다만 바라건대, 실제 개표과정에서 문과 심의 지지율이 좀더 오르기를... 또 무엇보다, 안의 지지율이 제발 홍의 지지율을 눌러주기를... 샤이 안의 위력을 보여주길...
5/6 어제 사전투표를 한 까닭에, 무권자로 전락하고 나니, 후보들이 뭐라뭐라 떠드는 것도 더 이상은 나를 향해 하는 말이 아닌 것 같고, 뭔가 이 판에서 소외된 것 같고, 마지막 패를 다 쓴 것 같고, 하여 . . .
빨리 개표해라!
나 진짜 심심하다!
2014/11/18 2014년 11월 18일, 그러니까 어제, 유희열은 <<토이 7집>>을 내고, 나는 장편 <<토우의 집>>을 냈다. 아무도 그 연관성을 몰라줄까봐, 내가 억지스럽게 연관시켜,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양, 누설하는 중이다... (얼굴 가리고 후다닥~!)
줄거리
삼벌레 고개라 불리는 동네가 있다. 아랫동네에는 크고 버젓한 주택이 있는 잘 사는 사람의 동네고, 제 집이나 전세 월세 사는 사람들의 중간 동네가 있다. 윗동네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 모여 살고 있다.
그 중턱 우물집이 있는데 박만순, 김순분이 금철, 은철 두 아들을 데리고 사는 집에 새댁이 이사 오게 된다. 남편과 영, 원 두 딸을 데리고 온다.
은철과 원은 동갑내기로 스파이 놀이를 즐기면서 재미있게 비밀을 공유해 가는 친구가 된다.
새댁 식구들이 김밥을 싸서 소풍을 가기로 한 어느 날, 우물집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친다. 영, 원의 아버지가 검은 양복 입은 사람들에 의해 무작정 끌려가게 된다.
아무 일이 없었기 때문에 끌려가는 것 자체가 소문을 낳고, 동네 사람들은 별별 소문을 만들어 내는데, 원의 아버지가 온 몸이 성한 곳 없이 주검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후 필체도 좋았고 살림도 잘하고 아주 쾌활했던 원의 엄마가 정신을 놓아버리게 된다.
은철과 원은 우물 옆에서 장난삼아 동네 사람들에 대해 저주를 내리는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원은 아버지의 죽음이 그러한 것 때문이라 생각하고 말도 표정도 없는 인형처럼 변해버린다.
원의 아버지가 어떻게 구속되고 죽는지는 책에 나오지 않는다. 그냥 어렴풋이 민주화 운동과 연관된 것만 알 수 있는 정도 이다.
책에서는 이러한 사건에 대해 부당하다 아니다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다만 피해자들이 어떠한 지경에 처해있는지 보여준다. 원의 아버지는 무고한 죽음을 맞았고 남겨진 가족들은 살았으나 살아있는 것이 아니게 된 멍에를 지게 된다.
사건에 휘말릴까봐 두려운 이웃들은 시선을 회피하면서 그 사람들을 방기한다.
국가 폭력은 모든 사람을 통제하게 된다. 개인 뿐 만 아니라 시민 사회를 파괴하고 사회 공동체 전체를 파괴한다.
더 이상 억울한 죽음을 만드는 잘못된 권력은 이 땅에서 사라져야한다.
사람과 이야기
순분, 은철, 동네 사람들
효경, 덕규, 원
계란볶음밥, 닭발, 은철의 사고, 우물, 소문
채널예스 권여선 작가 인터뷰 일부(글 손민규) 2015.01.12.
『레가토』에 이어 『토우의 집』도 국가폭력을 다루셨습니다.
80년 광주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가 대학 1학년 때였는데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작가가 된 다음에 언젠가는 써야겠다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엄두가 안 나서 미뤄오다 몇 년 전에 『레가토』라는 장편에 썼어요. 2차 인혁당 사건도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놀라웠죠. 언젠가 써야겠다고는 생각했지만 어떻게 써야 될지 모양새가 잘 나와주지 않아서 고민을 오래 했죠. 『레가토』에서는 광주를 성인, 그것도 지식인의 입장에서 정면으로 다뤘는데, 인혁당 사건도 그렇게 쓸까 하다가 그러면 그 시대를 겪지 않은 사람에게는 보편적 호소력이 부족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사건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한 가족, 구체적으로는 한 개인들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중심에 놓고 쓰게 됐죠. 『토우의 집』은 가족 중에서도 특히 어린 아이들이 영문도 모르고 당하는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토우의 집』이 나온 시기가 미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교롭다는 생각은 했어요. 인혁당 사건이 박정희 대통령 때 있었던 일이고, 지금은 그 딸이 대통령이 되었죠. 그런데 그때 희생된 가족의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르잖아요. 소설을 쓰다 보니까 자꾸 현재의 시점으로 넘어오고 싶은 욕망이 강했습니다. 프롤로그나 에필로그에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는 모습을 보는 은철의 가족 얘기를 넣어 보기도 했지만 결국은 뺐어요. 제가 메시지를 주기보다는 가족을 잃는다는 것, 난데없이 불운이 닥쳐온다는 것에서 개개인이 얼마나 크나큰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는지에 집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하나 공교로운 것은 작년에 벌어졌던 세월호 역시 사람들이 난데없이 가족을 잃게 된 사건이었다는 점이죠.
『레가토』 주인공이 성인이라면, 『토우의 집』에는 아이가 주인공입니다.
『레가토』도 그렇고, 이전에 썼던 운동권 소설에서 주인공은 주로 학생이나 지식인이었고, 지식인이 아니라도 성인이긴 했어요. 성인은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데, 아이들은 다르죠. 아무 죄도 없고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아이가 당하는 고통이 훨씬 더 독자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지금도 어떻게 써야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흔들어 놓을 수 있을까, 그런 소설이 가능한가 고민을 많이 합니다. 중요한 화두죠.
정면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깔린 배경이 정치사회적인 사건입니다. 동시대인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토우가 되지 않아야겠죠. 몸에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 절대 권력이 행하는 공포 앞에서는 곧바로 굳어버리고, 진흙 인형처럼 변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듬거나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해요. 토우는 자기 안위만 염려하고 자기 가족만 챙기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 경직된 인간상태에 대한 알레고리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가 모두 토우가 되지 말아야 하는 거죠. 진시황 무덤 속의 그 많은 토우들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절대 권력을 가진 독재자들은 백성을 자기 무덤의 부장품처럼, 진흙 인형으로 만들고 싶어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기계적인 사물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도 우리가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다운 게 뭔가에 대한 답은 없겠지만,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작가님 작품에서 ‘토’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최근작인 『토우의 집』에서부터 첫 소설집인 『처녀 치마』에도 토가 등장하는데요. 이런 상징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몰랐는데, 언젠가 제 작품을 꼼꼼히 보는 어떤 평론가 선배가 그런 내용을 지적해서 ‘어, 그러네’ 했던 적이 있어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술을 좋아하고 많이 토해봐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뭔가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면의 구토증과 연관이 있는 듯해요. 구토물만큼 혐오를 유발하는 게 없는데, 뭔가를 제어할 수 없는 자신, 표현되지 않고 소화되지 않고 역류하는 뭔가가 있어서 제가 자꾸 제 인물들을 토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네요.
작가님의 작품 전반이 늦가을 같은 스산한 분위기인데요. 작품 전반에 담는 정서가 다소 어두운 것 같습니다.
막 봄 같지는 않죠. 『토우의 집』의 초반 분위기는 봄인데, 그게 또 읽다보면 뒷부분과 대비되는 장치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실제 삶도 기쁜 일보다는 애잔하고 쓸쓸한 일이 많은 것처럼 제 소설도 밝고 명랑하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적이라거나, 한 사람의 삶을 다룰 때 계속 비극적인 모습만 그린다고 볼 수는 없어요. 저는 한 인간이 잘 지내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맞게 되는 순간을 흥미진진하게 관찰하는 편인데요.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잘 유지하다 뜻하지 않은 일격이 올 때 사람이 석류처럼 툭 터져버리는 방식을 그리는 게 재미있어요. 저도 그럴 때가 많고요. 나는 누구였지? 이렇게 급진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그런 느낌이 있어요. 그러다 보니 스산한 늦가을에 가까운 분위기가 나지 않았나 싶네요.
관려도서 참고자료 ‘유신’에서 발췌,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2014.01.
1975년 4월9일 새벽, 국제법률가협회가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 부른 그날 박정희 정권은 인혁당 사건 관련자 7명과 여정남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아니, 그것은 사형의 집행이 아니라 연쇄살인이었다.
오전 4시 30분 4월 혁명 후 민주민족청년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서도원이 제일 먼저 끌려갔다. 53세로, 그날 사형당한 분들 중 가장 연장자였다. 대법원에서 형 확정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어 20분 만에 끝이 났다.
두 번째 희상자는 5시 30분 김용원이었다. 새벽잠에 빠진 같은 방 수감자들을 깨울까봐 미제 새 가죽수갑을 찬 채, 까치발로 살금살금 걸어 나와 형장으로 갔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나와 경기여고 물리교사로 있다가 잡혔는데, 강금실 변호사와 이화여대 김혜숙 교수 등이 그 제자였다. 김 교수는 김용원 선생님께 학기 초 잠깐 수업을 받다가 잡혀가셨는데 참 조용하고 좋은 분이라고 회고하셨다.
세 번째는 이수병. 김용원에 대한 집행이 끝나고 15분 후인 6시5분에 시작되어 딱 20분 만에 끝났다. 1960년 남북학생회담 때 경희대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위원장으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란 유명한 구호를 만든 분이었다. 갓 마흔, 두 아이의 아빠였다.
네 번째는 우홍선. 이수병을 보내고 10분 만이 6시35분 시작, 20분만에 끝났다. 전쟁 때 고교생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여 육군 대위로 예편한 참전 용사였다. 4월혁명 후 통일민주청년동맹 위원장이었고, 사건 당시에는 골든스탬프사 상무로 기업가로 일하고 있었다. 45세. 네 아이의 아버지였다.
다섯 번째는 송상진. 박정희의 대구사범 후배로, 초등학교 교사 시절 교원노조 활동도 열심히 했다. 우홍선을 보내고 뭐가 그리 급했는지 7분 만인 7시 2분에 형집행이 시작되어 20분 만에 끝이 났다. 향년 48세.
여섯 번째는 여정남. 송상진 집행 후 13분 만인 7시 35분 시작되었다. 대구의 준걸이라, 박근혜 신랑감을 대구에서 찾는다면 제격이라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인혁당 관련자로서가 아니라 민청학련 관련자로 사형판결을 받았는데 두 조직의 연결고리로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겨우 서른 두 살.
일곱 번째는 특무대 중사 출신으로 북한 방송을 노트에 받아 적은 하재완이었다. 감옥에서 김지하를 만나 인혁당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되었음을 폭로했다. 네 아이의 아버지였고, 여정남은 이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다. 하재완이 세상을 하직할 때 겨우 네 살이었던 그의 막내아들은 동네 형아들이 간첩새끼라며 새끼줄로 묶어 끌고 다니다가 총살시키는 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 골목에 살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모두는 그 새끼줄 한 자락을 잡고 있었던 셈이다.
마지막은 도예종. 10년 전 1차 사건의 주역으로 1974년 당시에는 삼화건설 회장이었다. 하재완을 보내고 10분 만인 8시 30분 시작되어 8시 50분에 끝났다.
4시 30분에 시작된 그 새벽의 연쇄살인극은 4시간 반 만에 끝났다.
저들은 가족들에게 시신을 돌려주려 하지 않았다. 고문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어 그랬다고도 하고, 유족들이 한데 모여 억울한 죽음을 호소할까봐 그랬다고도 한다. 경찰은 마지막 미사를 드리기 위해 응암동 성당으로 향하던 송상진의 영구차를 벽제 화장장으로 강제이송하려 하여, 유가족들과 4시간 20분 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유가족과 종교인들은 차에 시동을 걸지 못하게 열쇠구멍에 껌을 밀어 넣기도 하고, 차 앞에 드러눕기도 했다. 서른여섯 젊은 신부가 차 앞에 드러누웠지만 경찰은 크레인을 동원해 신부를 타고 넘어 영구차를 끌고 갔다. 그 젊은 신부는 그때부터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거리의 신부, 문정현 신부다.
박정희 정권 시절 최악의 공안조작사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의문사위원회와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조사를 토대로, 2007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유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1심에서 490억의 배상판결을 받았고, 상당한 액수를 가집행 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자가 과잉계산 되었다며 배상액수를 대폭 삭감하였고, 국가는 이를 토대로 배상금을 받은 유가족과 사건 관련자 77명을 상대로 ‘부당이득’ 251억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인혁당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