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Crusade War)는 유럽 중세기에 200여년간에 걸친 기독교 권력과 이슬람 권력 사이에 세력 다툼이었다. 이른바 종교간의 침략전쟁이지만 사실은 정치경제적인 동기에 깔려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시오노 나나미의 저서 <십자군 1, 2, 3 권>을 보면 잘 나와 있다. 나는 최근 K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유라시아 로드 7편-십자군 유럽을 깨우다 >를 보았다. 십자군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피어난 두 영웅의 인간적인 우정에 관한 이야기였다.
13세기 로마교황청(바티칸)이 기세를 떨치며 유럽의 모든 왕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을 무렵
교황의 명으로 유럽의 모든 왕들이 예루살렘 성지탈환을 기치로 십자군 전쟁에 나선다. 당시 중동의
이슬람 세력도 동방무역의 중계로 얻은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제 두 세력은 인류 역사상 가장 긴 장기전(거의 200년이라는)으로 들어갔다.
제1차 십자군 전쟁이래 거의 백년동안이나 수차례의 원정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완전정복은 이루지 못했고, 유럽의 제국은 재정고갈과 군사력 쇠퇴로 패색이 짙어갔다.
참다 못한 교황은 당시 시칠리아 왕국을 통치하던 프리드리히2세를 신성로마제국황제로 봉하고 이탈리아를 포함한 오스트리아와 지금의 독일 그리고 인근의 동구권 땅까지도 넘겨주어 통치토록 하였다. 조그만 섬나라 왕에서 졸지에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프리드리히2세는 교황의 성은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십자군 성전에 나서야 했다.
젊은 황제 프리드리히2세는 아람어(이슬람 언어)와 헬라어(그르이스어)를 비롯한 7개국 언어를 구사할만큼 지성적이었고 다양한 문화를 이해할 줄 아는 글로벌 교양을 갖춘 평화를 사랑하는 인물이였다. 성지탈환이라는 명분은 거창했지만 그로서는 억지로 나선 내키지 않는 전쟁이었다. 대규모 선단을 꾸려 지중해를 가로질러 예루살렘(이슬람 영토)로 항해하던중 장티푸스가 도져 많은 군사들을 잃고 자신도 병에 걸려 회항하고 말았다. 싸우지도 않고 돌아온 황제의 행동에 격분한 교황은 그를 파문(Excommunication)하고 주변국들로부터 왕따를 시켰다. 싸우지도 않고 돌아온 겁쟁이 왕이라고 비난하면서.
이후 프리드리히2세는 교황으로부터 면죄부를 받기 위해 고민하던중 당시 이슬람의 맹주로서 이집트를 통치하던 술탄 알카밀에게 편지를 썼다. 프리드리히2세는 놀랍게도 아랍어에 능통하여 친필로 쓴 편지를 알카밀에게 보내 자신의 사정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협조를 구했다. 수십차례의 편지교환으로 서로 깊은 이해와 친분이 생겨 나중에는 교황의 친위대격인 템플턴의 기사가 지키는 요새(오날날 이스라엘 해변에 유적지가 남아있다)에서 두 사람이 만나 중요한 협약을 맺었다.
알카밀-이슬람의 맹주 프리드리히2세-십자군의 리더
모두 8개조로 된 이 협약서는 오늘날에도 상상할 수 없을만큼 평화적이고 상호 존중의 신사협정이였다. 중요한 내용으로는 기독교입장에서도 예루살렘은 성지이고 이슬람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므로 예루살렘 통치는 기독교 세력이 하고 성소는 이슬람 세력이 관리하되 무기를 소지하지 않으면 누구나 자유로히 입장하여 자신의 종교로 예배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놀라운 협상을 성공으로 이끈 프리드리히2세는 숨가쁘게 교황과 이웃나라 왕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교황의 반응은 싸늘했다.
원수를 피로서 물리치지 않았고 성지를 완전정복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프리드리히2세는 다시 한번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확인하고만 셈이였다.
프리드리히2세는 비통하고 참담한 심경으로 로마교황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너무나 슬프고 외롭다. 교황은 양의 탈을 쓴 늑대다. 탐욕에 눈이 멀어 있다." 라고.
아무튼 그 협약으로 유럽의 기독교세력과 이슬람세력은 예루살렘에서 평화적인 공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십년후 당시 아랍권 맹주였으며 협상 당사자 알카밀이 죽자 협약은 파기되고 다시 불화와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리드리히2세는 괴로와 했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였다. 알카밀이 죽고
몇년후 프리드리히2세도 죽었다.
두 지도자가 죽은 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역사연구팀이 관을 열어보니 서로에게 보낸 선물과 편지들이 빼곡히 들어있었고 오늘에도 거의 완전한 상태로 전해진다. 프리드리히2세의 관에 장식된 문양은 아랍문양이며 아랍어로 씌어진 문자는 친구 알카밀에게 보내는 미사여구의 찬사로서 사죄의 마음이 새겨져 있다.
프리드리히2세는 아랍어로
"친구여! 위대한 자여! 정직한 자여! 지혜로운 자여! 승리자여!"
라고 쓰어진 수의를 입고 지난 800년 동안 친구 알카밀에게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관 속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알카밀과 프리드리히2세가 친할 수 있었던 것은 프리드리히2세가 아랍어에 능통했고 아랍문화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는시칠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시칠리아는 지중해 중간에 위치해 있어 예전부터 유럽문화와 이슬람문화가 평화스럽게 공존하던 문화에 깊이영향을 받았다. 아랍어 친필 편지와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오랜 앙숙관계의 지도자들을 상호 절친(Best Friend)로 만들 수 있었다. 그 영향인지 놀랍게도 독일
의오래된 성당에서 아랍문양과 아랍의 신화가 그려진 벽화나 천정을 더러 볼 수 있다.
독일 아헨Aachen의 한 성당에 들렀을 때 돔 천장에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의 신이 나체로 앉아 있는 장면이 타일로 그려져 있었고 아랍어로 새겨져 있다. 마치 두 강의 신이 천지창조와 같은 장면을 묘사하듯이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왜 로마교황은 십자군전쟁을 일으켰고 굳이 무력으로 이슬람을 정복하기 원했을까?
당시 로마교황청은 유럽의 제국에게 기독교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고 사치와 탐욕으로 타락의
극치를 달리던 때였다. 교황의 권위 대해 회의를 품는 나라에게 본때도 보여줄겸 십자군전쟁을 일으켜 기강을
세우는 한편 동방무역을 가로막는 이슬람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함으로서 막대한 부를 쌓으려 했기
때문이다. 실제 유럽의 십자군이 성지인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자 로마교황의 친위대인 템플턴의 기사들은
제일 먼저 입성하여 성소와 이슬람 부호들로부터 막대한 황금과 재물을 약탈하여 교황에게 바쳤다.
이것은 엄연히 기록되어 내려오는 역사이고 진실이다.
다만 우리는 그런 것을 가끔씩 '다빈치코드'라는 추리소설이나 영화로 볼 뿐이고 사람들이 잘 보지 않은 케이블TV <히스토리채널>에서나 드물게 볼 뿐이다.
종
지난 2001년 로마교황 요한바오로2세는 처음으로 이슬람 땅을 밟고 키스를 하며 이슬람 형제들
에게 그간의 도발에 사과하며 화해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 진정성이 온 기독교인과 이슬람인에게 확실히 전해져 천년을 묵어온 그 앙금이 해소되고 상호 형제애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란다.
몇해전 노르웨이에서 폭탄테러와 무차별 총격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인 희대의 살인마, 안드레스 베링 브레이빅도 삐뚤어진 인종차별관과 종교관으로 스스로를 옛 교황의 친위대 템플턴 기사단을 자처했는데 아직도 이런 종교적인 편견이 안타깝기만 하다.
새로 선출된 프란체스코 교황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독일의 유태인 학살을 바티칸이 묵인함으로써 나치의 악행에 동조했던 일을 사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악행을 참회하는 데에는 늦은 때라는 것은 없다. 자신이 선행을 솔선수범하고 타인에게 권장하는 것이 종교의 기본인데도 오히려 악행을 저지르고 숨기는 일이 종교조직 안에서 일어났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당신이 믿는 종교는 과연 정직한가, 선한 길을 가고 있는가 자문해보아야 한다. 당연한 것을 의심하고 살펴보야한다. 자신의 발밑은 살펴보고 코밑을 주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