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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12-1:
김정태: 『천지의 흰 눈을 밟으며-한국 등산운동의 60년사를 밝힌다』(김정태, 도서출판 케른, 1988.)
-기억의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차례
1. 글과 책
2. 소문의 벽
3. 구술과 기록
4. 독자의 상식과 책읽기
5. 비약과 생략의 내러티브
6. 평범한 글쓰기로의 귀환
1. 글과 책
‘한’ 사람을 이해하고, 공부하기 위하여, 그가 세상에 남긴 ‘글’과 ‘책’을 읽는 일이 유일할 때가 있다. 살아있는 생물체는 생의 끄트머리에서 흔적을 남긴다. 나무가 신진대사를 통해서 뿌리와 잎을 생장시키는 것이나, 사람이 글과 책으로 생의 희망과 절망을 남기는 것이나 매한가지이다. 삶의 갈망이 제 몸의 무게처럼 찍어 누를 때, 발자국과 같은 흔적인 글이 써진다. 생이 촛불처럼 흔들리며 어렵게, 힘들게, 홀로 견뎌낼 때, 글들은 모여 생을 밝히는 책이 된다. 오랜 시간을 담아낸 글은 지상에 남긴 삶의 또 다른 흔적이고, 글들을 묶은 책은 하늘에 새긴 별과 같다. 글과 책은 글쓴이의 삶, 그 생의 뿌리이면서, 액정이고, 그가 낸 목소리들의 울림이다.
지상의 길과 같은 글과 하늘의 별과 같은 길을 바위에 새기는 등반기는 독자의 손에 잡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삶이 온전하게 드러나지 않는 상징이며, 동시에 뚜껑으로 잠긴, 무거운 침묵을 뒤집어쓴 미결정체이기도 하다. 산악인이 쓴 글과 책은 산 위의 저자가 산 아래 독자에게 건네는 전언이며 유언이기도 하다. 독자는 그 말들의 길을 따라 저자의 삶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산으로 들어간다. 산악인이 남긴 글과 책은 삶과 자연이라는 신비에로의 초대이고, 동시에 알지 못할 수도 있고, 오해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의 미로, 미궁이기도 할 것이다. 독자의 시선은 두레박과 같은 저자의 내러티브를 따라 우물 속 심연으로 내려가고, 그다음에는 배낭을 메고 저 높은 곳을 향한다. 공감할 수 있는 것,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놀라운 것, 매우 사적인 것 등을 계곡과 바위, 그 사이를 잇는 길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산악인 저자의 삶은 경험과 사유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독자는 저자의 기억과 기록의 내러티브를 분석하고 해석하면서 저자와 독자의 삶 모두가 확장되는 경험에 이르게 된다. 궁극적으로 산의 매력과 산에 관한 글쓰기의 유혹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필자는 젊은 날부터 수첩 맨 앞에는 시인 고정희의 서시를 적어 놓았다. 그리고는 무시로 읽었다. 산에 가거나, 서재에 있거나, 그렇게 산과 산사람들을 그리워했고, 부러워했고,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제 삶의 무게 지고 산을 오르다/ 더는 오를 수 없는 봉우리에 주저앉아/ 철철 샘솟는 땀을 씻으면, 거기 / 내 삶의 무게 받아 / 능선에 푸르게 걸어주네, 산 / 이승의 서러움 지고 산을 오르다 열 두 봉이 솟아있는 서러움에 기대어 / 제 키만한 서러움 벗으면, 거기 내 서러운 짐 받아 /열 두 계곡 맑은 물로 흩어주네, 산산/ 쓸쓸한 나날들 지고 산을 오르다 / 산꽃 들꽃 어지러운 능선과 마주쳐 / 제 생애만한 쓸쓸함 묻으면, 거기 / 내 쓸쓸한 짐 받아 / 부드럽고 융융한 품 만들어주네, 산산산 / 저 역사의 물레에 혁명의 길을 잣듯 / 사람은 손잡아 서로 사랑의 길을 잣는 것일까 / 다시 넘어가야 할 산길에 서서 / 뼈 속까지 사무치는 그대 생각에 울면, 거기 / 내 사랑의 눈물 받아 / 눈부신 철쭉꽃밭 열어주네, 산, 산, 산” 고정희의 다른 시, 「땅의 사람들 1」 마지막 싯구처럼, 내게 알피니스트는 “거친 바람 속에서 밤이 깊었고, 겨울 숲에는 눈이 내리고 있”을 때, “모닥불이 어둠을 둥글게 자른 뒤...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서걱거”리는 아름다운 이들이었다.
2. 소문의 벽
산서를 읽으면서, 이웃들로부터 가장 많이 귀담아 들은 근대 산악인은 김정태(1916-1988)였다. 한국 산서회 카페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는 근대 등반사의 한 획을 그은 김정태일 것이다. 누구는 그를 ‘태산준령’이라고 떠받들고, 누구는 한국 근대 등반의 큰 어른이라고 하고, 등산과 스키 선구자 혹은 기록의 달인이라고도 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조선의 산하를 원하는 만큼 오른, 수많은 등반을 초등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산악인이기는 했지만, 그의 삶과 기록은 언제나 의문을 낳았다. 김정태가 쓴 자서전과 같은 유일한 책, 그가 살아온 삶의 원전과도 같은 책, 『천지의 흰 눈을 밟으며-한국 등산 운동의 60년사를 밝힌다』 속표지에 적혀있는 경력을 보면서, 그에 관한 자료들을 쉽게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김정태, 그는 일제 강점기 내내, 조선 산하를 내달려 화려한 등반을 했던 산악인이고, 해방 이후에도 스키 분야로까지 능력을 발휘한, 은둔한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산악, 한국 스키의 전경에서 좌장 노릇을 했던 중심인물이지 않았는가! “평생을 <한국 산악회>와 함께 살다간...그 자신이 곧 <한국 산악회>라 해도 부족함이 없”던 산악인이지 않았는가! (『한국 산악회 70년』, 한국산악회, 2016.)
이 책은 김정태가 스스로 정의한 것처럼, “등산의 초기시대부터 등산하게 된 동기를 포함해서 북한의 산과 등산을 중심으로 해방 전 20년간의 이야기”와 “해방 후 30년, 우리의 등산운동이 걸어온 발자취와 단체, 개인 등에 관련된 이야기들...의 개략”(책 머리말에서) 이다. 이 책 이외에 그에 관한 자료 찾기는 매우 힘들었다. 반면에 김정태는 자신이 오른, 초등 연대기는 자세하게 도표로 정리해서 이 책에 넣었다.(76-81쪽, 이하 책의 겹 따옴표 인용문에 이어지는 괄호 속 숫자는 책이 쪽수임.) 김정태의 글쓰기는 두 가지 큰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과거의 등반, 유람, 유산과의 대화가 생략된 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만의 알피니스트로서의 삶, 그 존재 증거로 쓰였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여타의 등반문학과 달리, 그의 기록에서 산과 삶을 향한 사유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김정태는 자신에 앞서서 누군가가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설악산, 북한산 등에 올랐을 수도 있다는 대화와 가정을 숫제 하지 않았다. 서양 알피니즘 방식으로 맨 먼저 올라야 했고, 맨 먼저 올랐다는 자신이 기록한 초등 역사만으로 그는 자신의 삶을 실존적으로 규정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판데믹 상황에 갇혀 지내면서, 필자는 김정태의 이 책을 여러 번 읽을 수 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한국산악계에 널리 퍼져 있는 김정태에 관한 거대 서사와 자연스럽게 맞닥뜨리게 되었고 그리고 논리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인수봉 ‘인수 B’를 오를 때마다, 숱하게 들었던 그에 관한 전설들을 뒤에 놓고, 그의 책을 앞에 놓고 읽고 또 읽었다. 그것은 그와의 결별이 아니라 그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필자는 그를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우울, 고통 속에서 정신적 빈곤의 삶을 살아야 했던 산악인으로 보고 싶어졌다. 그가 산과 자연 그리고 근대 등반과 알피니즘의 미학을 두루 포함한 깊이 있는 글을 쓰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김정태의 삶과 그가 이룩한 등반의 역사를 새롭게 일깨우는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과 더불어 건조한 구술, 기술, 서술의 내러티브만으로는 산악인 김정태 읽기와 이해는 쉽지 않았다. 그동안 김정태의 거사 서사만 전설처럼 전해졌던 터라, 한국 근대 등반사를 연구하는 분야를 비롯해 한국 산악계에서 김정태 기록의 진위를 묻고, 초등 등정에 관한 시비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김정태의 공과를 논하는 자리에서, 그가 이곳저곳을 초등했다는 늘 같은 말들이 반복되는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김정태를 연구한 글은,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전무하다. 그가 일제 강점기, 젊은 시절에 일본어로 쓴 일기를 몇 쪽 읽어보았지만, 글이 산만하고, 삶과 등반에 관한 구체적 내용을 적어놓지 않은 터라, 큰 도움을 얻지는 못했다. 오랜 시간 동안 김정태의 이 책은 내 서가에 비석처럼 꽂혀 있었다. 이 책에 대한 서평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관심을 끌기 위한 어떤 뜸을 들이기 마련인데, 좀처럼 그의 책은 두 손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겉잡아서 말하면, 김정태의 글은 단순하지만 생략이 많고, 문체는 건조하지만 주관적이다. 그의 글 속에서 일제 강점기 조선 산악인이 지닐 수밖에 없었던 삶의 편린을 찾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출생, 성장, 결혼 그리고 그다음에 이어지는 생의 통과의례가 이 책에는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책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주인공이 풀어놓는 입말을 편집 단계에서 가공하지 않고 들리는 그대로, 개인의 역사를 있었던 그대로 본문에 기록했다는 점인 데, 김정태의 이 책은 구술과 저술이 갖추어야 할 밑바탕이 빠진 채, 등반 기록 그 자체만이 우뚝 드러나고 있다. 이 책에서 김정태 개인의 삶과 등반과의 관계나 등반 행위의 앞뒤 맥락을 찾아보기 어려운 점이 가장 아쉽다. 그 대신, 초등을 앞세운 등반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터라, 독자로서 산과 근대 산악인, 삶과 등반을 하나의 고리로 묶어, 일제 강점기 근대 등반에 관한 플롯을 지어내기가 매우 어렵다. 이제라도 산악계에서 김정태를 중심으로 한 근대 등반 역사에 관한 공개 심포지엄, 저술 활동이 공유되면 좋겠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최근에 읽은 <조선 산악회>에 관한 순천대 박찬모 교수, 근대 등반 역사에 관한 오영훈의 논문이 참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김정태의 책을 거푸, 두루 읽으면서, 그에 관한 다른 자료를 구하려고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그것이 고인의 삶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다. 이 책의 맨 앞부터 맨 끝까지, 당대 최고의 산악인이었던 김정태의 성장과 생장이라는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연줄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등반했던 동아줄만 보인다. 그 외줄을 타고 한 사람의 삶, 그 역사를 가늠하는 것이 여간 위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국 근대 등반사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국립산악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김정태의 일기가 번역되고, 그에 관한 평전이 쓰여야 하고, 그의 등반기록에 대한 평가나, 그에 관한 크고 작은, 학제적 글들이 더 발표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에 국립 산악 박물관이 발행한, 2016 국립 산악 박물관 학술조사 보고서, 『사람, 산을 오르다-산악인 구술조사보고서』(1권, 2016), 안광옥 편(146-199쪽)을 읽고 난 후, 선생의 보여준 구술의 솔직함과 평생 산을 배경으로 살아온 산악인으로서의 삶의 연대기는 읽는 이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그리고 오영훈이 쓴, 「20세기 초 외국인들의 등반이 국내 산악계에 미친 영향」(『산악연구』 제 2호, 국립산악박물관, 2020, 67-87쪽)을 읽고, 식민지 시대 근대 등반에 관한 의문을 품게 되어, 다시 김정태의 책을 읽게 되었다. 필자의 이 서평이 한 인간의 깊이 있는 삶 그러니까 등반에의 도취와 식민지 시대 산악인의 삶의 태도를 두루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3. 구술과 기록
『천지의 흰 눈을 밟으며』는 김정태가 구술 혹은 글로 연재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중앙일보, 1975.11.20.-1976.01.20, 총 53회 연재)이 묶여 출간된 『등산 50년』 (한국산악회, 횃불사, 한국산악문고 4, 1976.)을 출판한 것이다. 이미 그는 1970년 전후 월간 『산』(당시 『등산』)지에 같은 시기 같은 주제의 같은 내용을 직접 기고한 적이 있었다. 이 내용을 기초로 하여 중앙일보에 기고하고, 연재한 글을 바탕으로 해서 『등산 50년』을 펴낸 거로 보인다. 그러므로 김정태의 삶을 온전하게 알기 위해서는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서 근대 등반사를 공부하는 조장빈, 김진덕 등 한국 산서회 회원들이 발품과 정성으로 찾아낸 옛 자료와 공들여 쓴 글들을 찾아 읽을 수 있었다.
김정태, <조선 산악회> 등 한국근대 등반사에 한 발을 들인 참에, 변기태, 허재을 등으로부터 고맙게 받은, <조선 산악회> 회지인 『조선 산악』, 경성제국대학 산악부 회지인 『경성제국대학 산악부 회보』, <백령회> 회지(백령이라는 글자가 책 겉장에 덧붙여진) 『백령』, 경기고등학교 산악부 회보 『라테루네』 전체, 기타 한국 근대 등반사에 관한 자료들을 받아 읽을 수 있었다. 그럴수록 김정태가 쓴 글들이 다른 문헌들 속에 있는 기록들과 어긋나는, 두동진 것들이 보였고, 이에 대한 궁금증은 자연스럽게 커졌다. 때마침 한국 산서회 총무를 했던 김진덕이 자신의 블로그 ‘등산의 재구성’에서 한 김정태, <백령회> 등에 대한 김정태의 불문명한 서술, 등반기록의 진위에 관한 문제제기를 진지하게 읽었다. 그러나 서술과 기록에 관한 왜곡과 진위라는 문제제기에 대해서 깊이 있는 논의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 학문적 연구와 논쟁이 부재하는 이런 풍경은 지금, 여기 한국 산악계를 누르고 있는 무거운 침묵 혹은 장막처럼 보인다. 다음 기회에, 앞에 언급한 오영훈의 논문이 지닌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한 협애한 조선 근대 등반사 연구의 문제점을 제기하려고 한다.
김정태는 1916년 대구에서 태어나서, 국민학교 때 서울로 전학와서 지냈고, 등반을 시작한 후, 일제 강점기 내내 일본어로 일기를 썼고, 등반 기록을 남기고 정리했다. 그에게 ‘국어’는 일본어였다. 이 책에서 김정태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독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시대와 알피니스트의 삶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알피니즘과 등반 등 한국 근대 산악사에 중요한 사실들을 그의 방식대로 썼다. 회고와 구술이 배제와 선택의 결과라는 것을 전적으로 긍정하고 옹호하지만, 김정태는 이 책에서 하고 싶은 말만 했고, 쓰고 싶은 내용만 적었다. 예를 들면 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 법한, 1930년 인수봉 초등에 대한 간략한 내용이며, 1937년 일본인들이 만든 <조선 산악회>에 가입한 이력(198쪽)을 표지에 적지 않은 것이며, 1937년 <백령회> ‘조직’이라고 썼을 뿐, <백령회>의 연도와 성격을 포함한 실제 논쟁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며, 1941년에 일본인 중심의 <조선 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오른 백두산-마천령 종주 산행(<조선 산악회>, 소화 16년, 1941년12월 23일 서울을 출발, 백두산-마천령 산맥 종주, 소화 17년, 1942년 1월 23일 경성역에 도착)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 것이며, 1942년과 43년에 일본 제국주의 앞잡이였던 조선 체육진흥회가 주관한 1차, 2차 ‘백두산 탐구 등행 연성단’에 창씨개명한 이름과 등행단 위원 자격으로 참여한 친일 등반의 성격 (매일신보, 1942년 07월 24일 자에는 백두산 등행 연성대白頭山 登行 鍊成隊, 43명, 혜산진 출발, 김정태는 창씨 개명한 辰海泰夫란 이름으로 참가)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며, <조선 산악회> 이사가 되고, 1942년 동경 메이지 신궁에서 열린 친일과 황국 신민을 위한 ‘국민 단련회’에 조선인 대표로 참여한 사실도 말하지 않는 것이며, 1940년 타츠미 야스오辰海泰夫로 창씨개명한 것이며, 1945년 해방되자마자 앞의 <조선 산악회>를 이어받아 같은 이름의 <조선 산악회>를 설립한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1948년 <조선 산악회>를 <한국 산악회>로 개칭한 것들에 대해서 단 한 줄로 설명 없이 얼버무렸다. 이러한 것들을 팩트 체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료를 확인, 보완할 필요가 있겠다.
4. 독자의 상식과 책읽기
필자는 맨 먼저, 『천지의 흰 눈을 밟으며-한국 등산운동의 60년사를 밝힌다』를 일반 독자처럼 호기심을 지니며 읽었다. 그리고서 산서를 좋아하는 인문학 전공자로서 다시 읽었다. 초등기록에 대한 성찬과 진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이후, 한국 근대 등반사에서 으뜸가는 김정태라는 산악인의 삶을 통해서 그가 꿈꾸었던 이상이 무엇이었는지, 그가 생각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일제의 핍박 속에서 조선인 클라이머로서 그가 선택한 삶의 노정은 무엇이었는지 들여다보고자 했다. 그가 쓴 책을 통해서 힘들었던 생의 순간들, 산과 자연을 정직하게 혹은 달리 체험하고 기록한 바를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인문적’으로 그 폭을 넓혀보고 싶었다. 그러나 독자로서의 이런 의도는 벽에 부딪혔다. 산악문학과 근대 등반사에 관해서 필자의 공부가 부족한 탓인지는 몰라도, 김정태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에게 어떻게 산이 삶의 동력이었는지 궁금해졌다. 그에게는 산이 입신출세를 지향하는 욕망의 뿌리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저자의 회고, 구술, 서술 내용은 제한적이었고, 내용이 끊긴 채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점프와 뛰어넘는 스킵이 많았다. 독자로서 일제 강점기, 피식민지 조선인으로서, 클라이머로서 겪어야 했던 굴욕과 핍박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일반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이 책이 담고 있는 ‘거대 서사’의 진실성에 의문을 지니게 된다. 구술과 서술의 차이, 사실과 왜곡의 기록, 삶과 등반의 진위에 대한 가치 등과 같은 질문 앞에서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손목은 느렸고, 글을 쓰고자 컴퓨터가 있는 다른 책상으로 가는 발목은 지정거릴 수밖에 없었고, 책을 향한 시선은 글쓰기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쯤에서, 이 책의 큰 특징부터 말하는 것이 좋겠다. 이 책은 신문에 연재했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처럼, 구술로 시작하여 서술된 것으로 보인다. 구술과 문자화된 책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문자화와 개인적 차원에서 발화된, 언어의 구술성 사이의 차이이다.(구술문화에 대해서는, 월터 J. 옹, 이기우, 임명진 옮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문예출판사, 1995, 참조.) 구술과 서술의 차이에서 보면, 김정태의 이 책만 보면, 그는 자신의 등반기록을 위하여 삶을 지우고 ‘지독하게’ 산을 바라보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알피니스트는 자신의 삶을 위하여 산과 마주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고 보편적인 일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의 글을 읽다보면,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여기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평화출판사가 발행한 『산-77인 에세이』(1977년)는 손경석, 이숭녕, 이항녕, 윤형두, 김장호, 홍종인, 박철암, 김영도, 고상돈 등 당대 명망가들이 쓴 산에 관한 수필을 모은 책인데, 이 안에 당대 최고의 산악인이었던 김정태의 글은 없다.
필자의 이 서평, 첫 번째 글(책읽기 12-1)은 김정태 기억과 구술에 의한 텍스트, 그 내러티브 분석에 속한다. 구술과 서술의 기초는 개인의 경험이고, 그것이 기억 속에 저장되고, 어떤 계기에 말로 발화되어 글로 문자화된다. 문제는 개인의 기억 속에 저장된 체험된 사실이 얼마나 사실로 보존, 유지될 수 있는가에 있다. 과거의 경험들은 시간과 더불어 기억의 심층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그대로 재현될 수도 있고, 다른 모습으로 변형될 수 있다. 김정태의 이 책에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그가 보여주는 내러티브의 특징이다. 그것은 그가 구사하는 단어의 선택과 구문에 관한 것이고, 주제 선택과 배제를 통해서 보이는 그의 ‘절대적인’ 태도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면, 책 안에 삽입된 사진들이 대부분 ‘김정태 소장’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쓰면 누가 언제 어디서 사진을 찍은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이이야마 다츠오飯山達雄가 찍은 사진이 되기도 하고, 김정태가 찍은 사진이 되기도 하고, 사진 속 불분명한 인물이 곧 김정태가 될 수도 있다. 많은 시비의 대상인 <백령회>에 대해서, 그는 창립, 설립이란 단어 대신에 “1937년 <백령회> 조직”이라고 했다. 그가 관여한 다른 단체의 경우에는, “1945년 한국산악회 설립, 1946년 대한 스키협회 설립”이라고 했다. 김정태에게 있어서 조직과 창립 혹은 설립의 차이는 무엇인가? 창립과 설립 그리고 조직을 구분해서 쓰는 발화 의식은 무엇인가? 조직은 주체가 불분명하고, 창립과 설립은 주체가 분명한 것인가? 그리하여 조직이라고 쓰면서 주체로 밝히는 것을 애매모호하게 비껴가는 것인가?
기억은 질료member가 재re 구성된 회상re/member이다. 기억은 원기억대로 보존되지 않는다. 시간과 환경에 따라 달리 변모하고, 다른 모습으로, 다른 내용으로 포장되어 드러난다. 역사학에서는 그런 현상을 "원형을 보존하면서도 시간의 무게에 따라 그 위에 새로운 것들이 이어지고, 포개지는 일종의 거듭 쓴 양피지 사본palimpsest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테사 모리스 스즈키 지음, 임성모 번역, 『변경에서 바라본 근대』, 산처럼, 2006, 287쪽.) 김정태가 <백령회>를 주도한 것처럼 서술한, 이 책 제 3부, 「비밀결사 <백령회>」 내용이 이에 해당한다. 애초 “산악친목회”이며 “한인 등산클럽”(134쪽)이었던 <백령회>가 “민족적인 반발심과 자각”(131쪽)을 지닌 “정치적인 밀담”의 모임으로, 그리하여 “민족적인 자각과 자립의 적극적인 신념”(131쪽)의 터전이 되었다는 진술 정의이다. 이렇게 쓰면서, 김정태는 (<백령회>) “조직을 가지게 된 것이다.”(131쪽)라고 애매하게 확대해서 쓰고, 조직의 주체로서 비껴갔다. 말미에는 <백령회> 회원들이 “일본의 주요 업체에 끼어들어 일조 유사시에 대비하는 사업도 전개하였다...(이 일로) 징용이 면제되어...어려운 고비를 생활과 신분보장을 받으며 여유 있게 넘기면서 산과 민족애의 정열을 마음껏 구가할 수 있었다.”(132쪽)라는 진술에 이르게 된다.
김정태의 이런 진술 정의는 김정태의 기억의 밑바탕 즉 일본 제국주의를 대하는 태도, 피식민 조선인으로서 자신의 입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으로 읽힌다. “일조 유사시一朝 有事時”는 하루아침에 급한 일이 생긴다는 비상사태를 뜻하는데, 이에 대비하는 사업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고, 일제 식민통치가 끝나는 것을 상정하는 것이라면, 뒤에서 징용이 면제되었다는 것, 신분 보장을 받았다는 것, 여유 있게 산과 민족애의 정열을 구가할 수 있었다는 것 등은 앞의 내용과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특혜와 같은 신분보장과 여유 있는 생활, 산과 민족애의 정열을 구가하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그런 충만한 삶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맥상 ‘일조유사’가 없어야 했다. 김정태의 이런 식의 내러티브는 사건을 축소해서 설명하고, 본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하는, 자신의 삶 전체, 방향, 태도, 입장 그리고 얼개를 드러내는 중심 기제이다.
이런 것들을 기억에 관한 내러티브로 해석하자면, 김정태의 구술, 진술, 서술은 자신의 경험을 ‘현재 자기 위치’를 가늠하는 사회적 관심에 따라 아무렇지도 않게 달리 한 결과처럼 보인다. 그것이 그의 삶과 두동진 글에 드러난다. 김정태가 지닌 기억’의 실재는 무엇인지, 그의 기억이 과거 이야기를,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것인지, 발화된 기억이 유효한 것인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즈음에서 아래 인용문은 이 글을 쓰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구술사는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기록)를 역사로 만드는 과정이다. 생산과정에서 주관성이 개입되고, 녹취과정에서, 해석과정에서 또다시 주관성이 개입한다. 해석자에 따라, 해석자의 연구 방향과 의도에 따라 해석의 옷이 덧입혀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구술자의 의도는 소외되거나 기층으로 가라앉을 수 있다. 문헌사에서 보이지 않는 인간의 흔적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이 구술사 연구방법론이다. 연구의 과정은 ‘후손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기억을 공유하고자 하는 구술자를 모욕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토대를 이루는 과정이기도 하다.”(정혜경, 「구술사-기록에서 역사로」, 『한일민족문제연구』 28권, 2015년, 254쪽)
5. 비약과 생략의 내러티브
좀 더 책으로 들어가면, 우선, 책을 놓고, 겉표지, 속표지, 뒤표지를 들여다보자. 책 제목이 있는 겉표지는 두 사람이 구형 배낭을 메고 백두산 어디쯤을 걷고 있는 사진이다.(이 사진이 215쪽에 있는 사진과 비슷한 실루엣을 지니고 있다. 짐작건대 김정태 소장.) 뒷 표지는 두 줄로 거친 암벽을 오르는 클라이머를 담은 사진작가 김근원의 사진(30쪽에서 설명)이다. 거대한 바위와 그 암벽에 붙어있는 클라이머는 검은색으로 왼쪽을, 나머지 반은 회색빛으로, 텅 빈 하늘이다. 사진 속 좌우 흑백의 대비가 훌륭하다. 이 책은 앞 사진에 대해서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누가 찍은 사진인지, 두 장의 사진 속 걷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 언제 찍은 사진인지를 밝히지 않았다. 앞에서처럼 김정태 소장이라고만 쓰고 있다.(215쪽) 그렇게 되면, 김정태의 글 내용과 사진은 하나로 연관된 실체로 오버랩되고, 글쓴이와 사진 속 인물은 하나로 연동되기 마련이다. 독자들은 글의 내용을 소장한 사진으로 환원해서 인정하게 된다. 사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실체가 없는데, 그로 인해서 기억이 사실로 확인, 확증되는 것이다.
속표지 상단에는 산악회 심벌처럼 보이는 문양이 박힌 검은 색 모자와 선글라스를 낀 김정태의 상반신 사진(김근원이 찍은) 이고, 그 아래는 약력이 적혀있다. 김정태의 얼굴은 코와 광대가 크고 강건한 무인형의 전형이다. 당시 유행하던 방한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라 겨울에 찍은 사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 삽입된 여러 사진처럼, 김정태와 사진 작가 김근원은 서로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 김정태의 약력은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1916년 대구 출생 /1929년 백운대를 중심으로 처음 등반 시작
1937년 <백령회> 조직 /1934-45년 금강산, 백두산 지역 등 초등반
1945년 한국산악회 설립 /1946년 대한 스키협회 설립
1946-55년 남한지역 국토구명사업(태백산맥 소백산맥, 차령산맥, 울릉도, 독도 등)주관
1956년 수도여자사범대학 총무과장 겸 교수
1962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65년 한국산악회 30주년 공로상 수상
1968년 그레노블 동계 올림픽 스키선수단 감독 /1976년 등산 50년 발간
1978년 안나푸르나 원정대 단장 /1979년 세계스키지도자대회 한국 대표
1972-1985년 한국산악회 부회장 /1986년 대한스키협회 40주년 공로상 수상
1988년 서울에서 영면
이러한 약력과 등반기록만 보면, 김정태는 결코 은둔자가 될 수 없는 존재로 보인다. 그는 산으로의 도피나, 산으로의 은둔이나, 산에서의 고립 같은 것을 상정해보지 않은 일제 강점기 근대 산악인이었다. 당대 나라를 빼앗긴 피식민지 조선 지식인들이 사회에서 이탈해서 저항하는 힘을 키우는 것과 비교하면, 김정태는 산 혹은 산과 같은 고독 속에서 은거하는 인물이 될 수 없는 존재로 보인다. 그도 산에서, 산 아래 일상의 삶에서 고독한 적이 있었을까?(필자는 이것을 참으로 알고 싶다.) 그는 1941년 메이지 신궁에서 열린 국민단련회에 참석하면서, “일본의 제철 권위자이고 등산가로도 국제적으로 이름난 구로다 박사 부부에 접근해서 친교를 맺을”(132쪽)만큼 적극적이었다. 이 책에서 김정태는 피식민 조선 산악인의 권태와 우울 그리고 고통을 이겨낸 존재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일본 산악인들에게는 열정적으로 산에 집착하는, 쓸모있는 조선 산악인이라는 존재가 되기 위하여 매우 적극적이었던 인물로 그려진다. 김정태는 산에 같이 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비교적 자세하게 말하고 있지만, 산에 갈 때, 산을 오를 때 보거나, 만날 수밖에 없었던,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과 폭정을 피해 산에 도피해서 살아야 했던 화전민들의 척박하기만 했던 삶을 비롯한 평범한 조선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김정태가 책 속표지에 적은 그의 약력을 달리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약력은 삶 전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정리한 삶의 연대기이다. 일제 강점기 산악운동이 일본 제국주의의 지원으로, 학교 산악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을 전제하면, 김정태는 자신의 등반 입문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말하고 않았다. 김정태는 자신의 책에서 아주 간단하게 언급한,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보)를 거쳐 일본대학의 유학’에 이르기까지 어떤 학교에서, 누구와 어떻게 산과 인연을 맺고, 등반에 입문했는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등반활동은 학교체육에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을 터인데도 말이다. 이 부분에 관해서, 책 안에는 “부친이 관직에 있어 대구에서 나서, 유치원을 다녔고, 심하게 말을 더듬었고, 교동초등학교 전학, 중학 1년(고보), 1936년에는 내가 진학관계로 일본 가서 꼼짝 못 한 한 해(44쪽), 나의 일본대학 유학(54쪽)...나는 일본 대학에 다닐 때(132쪽)”라고 쓴 것이 유일하고, 전부이다. 반면에 김정태는 당시 다른 이들의 등반 활동과 학교 산악부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서술했다. “당시 한인 등산 클럽은 <백령회>가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37-38년간에 발족한 연세의전 산악부, 보성전문 산악부, 양정고교 산악부, 반도 산우회 등이 있어 북한산. 도봉산 등의 암벽등반에서 가끔 만나게 되었다.”(134쪽)라고 썼다.
김정태는 생의 통과의례와 같은 자신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등반입문에 대해서도 참고할 만한 것들을 언급하지 않아, 독자가 산과 등반에 관한 그의 근원적인 감정, 욕망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가 자신의 성장과 산행 입문에 대해서 쓴 것은 의외로 적다. “외아들 응석받이”로 태어나, 1927년, 열한 살, 보통학교 5학년 때, “완전히 (그의) 혼백을 불태웠던”, 백운대를 오른 것이 그의 최초의 경험이었다. 그리고 1929년 5월에 열세 살 때 “...크랙, 슬랩, ㄴ형 슬랩 그리고 마지막 뜀바위 침니까지를 연속등반으로”(19쪽), “서양인 선교사들이 밧줄에 매달려 암벽등반 하는 것을 보고”(17쪽) 난 다음, 백운대 정면 벽을 올랐다고 쓴 것이 전부이다. 열세 살 때, 백운대 오른 것 말고는 등반 경험이 없던 김정태는 열네 살에 동네 친구들과 함께 비에 젖은 바위에 올라 인수봉 초등을 한 것을 말할 뿐, 당시 그가 본 두 편의 산악영화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최초 등반입문 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열네 살, 열다섯 살 때, 백운대, 인수봉 등반에 관한 서술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1930년 9월, “부슬거리던 비로 바위를 적실 정도”(28쪽)였던 때, 그는 “종형 친구 이씨, 백운대 때와 같은 5명”과 함께 “인수봉에 올랐다. “단성사에서 독일 산악영화 <몽블랑의 폭풍>과 <마의 은령>”을 보고 나서, “암벽과 빙벽을 오르며 자일 다루기, 확보법 등 모든 기본을 보여주어 몇 번이고 침을 삼키면서 보고...마니라삼 15밀리미터쯤,, 길이는 20미터”(28쪽) 줄을 가지고 갔다고 썼다. 그들이 정상에 올라섰을 때, “비는 계속 부슬거리며 내려 옷들이 흠뻑 젖어서 생쥐 꼴이 되었고 조망조차 안개로 거슴츠레 볼품이 없었으나, 천상의 제왕이 부럽지 않게 소리소리 천하를 호령하듯 떠들고 노래했다...멋있고 통쾌한 알피니즘 등반을 인수봉에서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29쪽)고 썼다. 그리고 다음 해(1931년) 그는 중학 2학년 때, 같은 나이의 사촌 아우와 함께 도봉산 만장봉을 올랐다. 김정태는 이때 자신을 “소년”(33쪽)이라고 했다. 그 다음 해(1932년)에는 “만장봉에 다시 가서 혼자 남, 서 두 코스를 올라 보았으며, 자운봉 다음에는 우이암을 올랐다.”(40쪽) 그리고 1934년,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때, “봄에 만난”(44쪽) 제화 기술자 엄흥섭(1947년 작고)과 함께 백운대 정면벽을 초등했다고 썼다.(76쪽) 전체적으로 이러한 등반에 이어지는 구술, 서술은 충분하지 않고, 애매하다. 해방 전에는 등반을 같이 했던 일본인 이시이石井 이름을 딴 ‘석정 공업사’ 소속이었던 김정태는 1945년 8.15 해방 때, “우리들의 직장은 ‘태창공업’으로 개편되어 운영부위원장을 맡”(225쪽)았다고 썼다.
이 글을 쓰면서, 김정태가 1940년(24세)때, 클라이머 60여 명(인수봉에 모인 58명, 출장 촬영기사 1명 포함)을 데리고 인수봉 정상에 오른 사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사진 맨 밑에 "혈맥血脈이 통하는 암우岩友’, 인수봉에서, 15. 11.3"이란 일본어로 쓴 문구가 적혀있다. 김정태는 이 등반에 대하여 그의 책에서 아래와 같이 적었다. 전문이다.
“그런데 (19)40년 가을 어느 휴일을 기해서 <백령회> 동지들이 힘을 모을 수 있는 한인만의 지도적인 클라이머들을 얼마나 규합할 수 있을까도 싶어 비상소집을 해보았다. 장소는 클라이머들만이 오를 수 있는 인수봉 정상이었다. 사흘을 앞두고 은밀한 구전이 동지들을 통해서 오갔다. 그날 새벽부터 눈을 피해서 몇 군데로 나누어진 암릉 루트를 삼삼오오 자유로이 등반하면서 모인 동지들이 뜻밖에 대성황, 리더급 만으로도 60여명이나 되어 서로 놀라고 감격했다. 아마 전무후무한 인수봉의 민족적인 대집단 등반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날 인수봉 정상에 우연히 모인 듯 다과와 점심을 들고 내가 대표로 우리 산악인들의 건투를 빌며 산을 다니면서 서로 연구하고 수련하며 친근히 지냅시다 하는 정도의 인사말을 한 후 기념사진을 찍었을 뿐이었지만, 우리 <백령회>는 어떤 험지에서도 생사고락을 불사한다는 지도적인 클라이머들의 정신적인 단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만큼 <백령회> 동지들은 만만치 않은 지도력을 가지고 뼈대있는 등산을 하고 있었다. 이 등반 직후 일경이 무언가 심상찮은 낌새를 차려 내사하려듯 했으나 우리가 당분간 시골에 피신함으로써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133-134쪽)
1940년 11월 3일, 인수봉 등반에 관한 김정태의 이 글은 그가 당시에 일본어로 쓴 일기를 통해서만 보충되고 보다 분명해진다. 이 서술을 통하여, 스물네 살인 김정태는 자신이 1940년에 이미 조선 산악인들의 대표처럼, 조선의 지도적인 클라이머들을 비상 소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그런 우두머리 조직인 <백령회>에서 리더로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연대기를 살펴보면, 일본 제국주의는 1937년에 아시아 패권을 차지하려는 야욕으로 중국대륙침략(중일전쟁)을 시작했고, 1945년까지 이를 계속했다. 1939년은 국민 징용령이 공포되어 1945년까지 조선인 45만 명이 연행되었던 시기였다. 1940년 10월에 이르러서는 조선 총독부가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해 기존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확대·강화하여 발족시켰다. 이를 계기로 조선 총독부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 총동원 업무를 관방으로 이속시킴과 동시에 본부와 각도에 국민총력과를 신설하였다. 창씨개명이 조선인들에게 강제되었고, 이를 확인하려는 '명자 교환회'라는 총독부 행사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일본 제국주의는 이렇게 악랄하게 식민지 조선의 뿌리를 고문, 착취하면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즈음 10호를 1개 반으로 구성하는 체제로 조선 전체를 재편함으로써 제국주의 권력이 중앙에서 촌락의 개별호에 이르기까지 ‘침투’할 수 있는 일원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던 터라, 1940년은 그 어느 때보다 식민통치가 가장 극악했던 때였고, 조선 민중이 가장 고통받고 헐벗었을 때였다. 1940-41년은 일본 제국주의가 대동아 공영권 결성을 내세워 침략정책과 전쟁을 정당화했던 혹독했던 때였다. 1941년 12월 12일에는 대동아 전쟁 즉 일본 제국과 영국, 네델랜드, 소련, 중화민국, 등의 연합국과의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의 수많은청년들과 민중들은 그들의 전쟁에 황국신민으로 참여해야 했다.
이 사진에 대해서 드는 가장 큰 의문은 김정태가 자신의 등반기록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민족적 대집단 등반' 사진을 책에 넣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이 등반에 '민족적'이라는 큰 의미를 둔 것에 비하면 그가 책에 서술한 다른 내용은 협소하기만 하다. 1940년 11월 3일자 일본어로 쓴 일기에서, 이 '클라이머 명자 교환회'라고 맨 앞에 제목처럼 크게 써놓았다. 이 등반행사가 일본인 중심인 <조선 산악회>가 마련한 행사인지, <백령회>가 준비한 것인지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1988년, 그의 책에서는 <백령회>가 중심으로 진행한 행사라고 쓰고 있다. 뒤의 서술이 옳다면 <백령회>는 1940년 이전부터 있었다는 뜻이 된다. 김정태는 일기에서 이 등반 행사를 ‘명자 교환회’라고 썼지만, 참여한 이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 후 40년이 지난 후, 책에서는 ‘명자 교환회’를 지우고 ‘민족적인 대집단 등반’이라고 달리 썼다. 이런 내용들의 변화, 자세한 설명없이 글을 달리 쓰는 김정태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참고로, '명자(名刺메나시) 교환회'는, 일제 강점기, 일본 제국주의가 실행했던, 이름을 기재하여 누가 왔노라고 알리는, 명함을 주고 받는 신년 하례식과 같은 연례행사였다. 조선 총독부는 1940년 11월 3일, 일본 명치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명치절明治節 혹은 명치가절에, 특별하게, 새로 창씨 개명을 하였으니 이를 기념하고 일본 이름으로 새로 박은 명함을 교환하는 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는 그 해 8월부터 준비된 것이었다.(매일신보, 1940년 8월 21일자 기사 '창씨명자교환회, 동민회서 개최 준비' 참조) 장소는 경성 부민관, 행사 이름은 '창씨 명자교환회', 그 당시 신문 기사(매일신보, 1940년 11월 5일자)는, "내선일체의 역사에 빛나는 기록을 님긴 창씨 개명을 기념하는 동민회 주최의 명자 교환회는 이날 오후 한 시반부터 부민관 강당에서 거행되었다. (조선총독부) 대야大野 정무총감, 염원鹽原학무국장, 영천鈴川 경기도지사, 창무倉茂군보도부장을 비롯하여 창씨 개명한 관민 500여명이 참집하여...인사를 교환하고, 궁성요배, 국가합창...동민회 회장 평림린사랑平林麟四郞씨의 동양인의 융합에 대한 인사가 있은 후, 대야정무총감, 영천 경기도지사의 축사가 있었다. 끝으로 만세 삼창...이 있었고, 동 3시반에 산회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공교롭게도 김정태는 명치절, 이 날 등반행사를 통해서, 창씨 개명한 클라이머들을 호출해 인수봉에 오르게 한 후, 이름을 쓰게 했고, 기념 사진을 찍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서로 모르는 이들이 인수봉에서 만났을 때, 김정태가 일기에 쓴 단어처럼, '곁눈질'을 했던 것이었으리라.
1940년 11월 3일, 인수봉 등반 사진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한국산서회 다움 카페, 자유게시판, 조장빈이 올린, 우산 손경석의 『한국 등산사』 읽어보기 20, 1940년 인수봉대집단 등반사진 참조.) 조장빈은 이 사진 아래에, 김정태가 쓴 일기 일부분을 올려놓았다. 조장빈이 쓴 글은 다음과 같다. “김정태 유고집의 김정태가 이 책에 적은 ‘인수봉의 민족적 대집단 등반’은 1940년 11월 3일 일기에 보면, ‘클라이머 명함 교환회クライマー名刺交换會’로 기록하고 있어 클라이머들의 친선도모를 목적으로 모인 행사로 여겨진다. 흐린 날씨에 三國商會 엄흥섭과 임원들 모두 참여하였고 한 시간 후에 인수봉 산록에 도착하여, 선발대로 양두철, 위형순, 채숙이 올랐다. 당시 경성에서 활동하던 반도산악회半島山岳會 등 클라이머들이 모였고 1940년 11월 3일 일요일로 총 참여 인원은 58명이다.”
김정태가 이 등반에 관해서 책에 한글로 쓴 내용과 일기에 일본어로 쓴 내용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일기에는 사진 촬영을 마치고, 오후 4시 반쯤부터 한 시간 정도, 안자일렌 방식으로 모두 내려왔다고 쓰여 있다. 일기와 책에서 참여한 이들이 누구인지,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았다. 일기에는 이날 등반했던 몇몇 일본인 이름들도 등장한다. 마츠카다松方(월북한 산악인 방봉덕으로 짐작), 다카우치孝內(김효중으로 짐작) 등. 그리고 함께 한 모인 이들은, 김정태가 일기에 적은 것처럼, 서로 “곁눈질”을 할 만큼, 모르는 이들이었고, 16개 파티가 참석했고, 그 가운데 2개 파티가 일찍 하산했다고, 김정태는 11월 3일 자 일기에 적었다.
김정태 일기를 중심으로 이 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40년 11월 3일에 있었던 ‘클라이머 명자 교환회’라는 이름의 인수봉 등반 행사는 약속장소에서 아침 8시경에 출발하는 차편에 올라탈 수 있었고, 도착해서 엉흥섭과 마타(?)가 선발대로 먼저 인수봉을 향해 떠났다. 한 시간쯤 뒤에 인수봉 기슭에 도착해서 물을 끓여 놓고 기다리고 있었고, 요미우리 빌딩 사진부 누군가에게 여러 번 촬영을 부탁했지만, 성사되지 못해, 출장 사진사를 불렀다는 내용이 일기에 적혀있다. 사진 한 장 값이 30전이라고 쓰여 있다.
필자가 그때 찍었다는 사진과 그의 일기를 읽고 지닌 의문은 다음과 같다. 1) 1940년 11월 3일, 60여 명이, 경성 복판에서 오전 8시경에 출발해서 우이동까지 가는 전차나 기차 혹은 버스를 탔을 수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창동(지금의 창동역)에서 내려 우이동을 거쳐 인수봉 기슭까지 걸어가는 길을 상정하면, 길이 매우 열악했을 때인데,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어떻게 이른 시간에 인수봉 등반을 시작할 수 있었는지, 2) 그 당시 24세 조선인 김정태가 ‘비상소집’을 할 만큼 위치에 있었는지, 인수봉을 만만하게 오를 수 있는 조선 클라이머들이 많았고, 그들을 한 곳에 오게끔 할 주소, 통신망 혹은 조직, 단체가 있었는지, 김정태 말고는, 다른 이들은 이때의 등반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는지, 3) 11월 초, 비 오고 흐린 날, 추워서 떨었던 날, 어떻게 60명 정도가 짧은 시간에 다과와 점심 식사를 인수봉 정상에서 할 수 있었는지, 4) 선발대가 인수봉 기슭에 도착해서 물을 끓여 준비해 놓았다는 것은 날씨는 추웠다는 뜻인데, 사진 속에 60명이 사용한, 각자의 배낭 등 등반장비가 사진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 5) 몇 군데로 나누어진 암릉 루트로 삼삼오오 올랐다고 하는데, 김정태는 많은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루트를 따라 올라갔는지, 다른 등반에 관한 자세한 기록과 달리, 일절 설명하지 않았다. 1940년, 당시 인수봉에 오르는 루트가 여러 개였는지, 6) 넥타이를 맨 이들이 가장 쉬울 것으로 보이는 인수봉 후면코스와 ‘고독의 길’로 올랐다고 가정하더라도, 60명이 열악한 장비를 가지고 그 시간에 오를 만큼 당대 조선 클라이머들의 등반능력이 탁월했는지, 아니면 그 시절 인수봉은 아무나 쉽게 걸어서 오를 수 있었던 곳이었는지, 7) 김정태는 요미우리 빌딩의 사진부 누군가에게 부탁했지만 여의치 않아, 다시 출장 전문사진사에게 부탁해서 한 장에 30전씩 하는 ‘카비네’ 판으로 찍었다고 했는데, 사진사가 어떻게 인수봉 정상까지 카비네 판으로 찍는 사진기를 들고 올라갈 수 있었는지, 8) 전무후무한 ‘민족적 대집단 등반’이라고 하면서 등반의 큰 의미를 내걸었고, 날짜까지 명기했는데 참여한 60여 명에 대한 이름을 남기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앞에서 인용한 김정태의 글 말미에 적힌 “우리 <백령회>는 어떤 험지에서도 생사고락을 불사한다는 지도적인 클라이머들의 정신적인 단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문장도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많은 논쟁을 낳고 있는 1940년에 이미 <백령회>가 있었는지가 의문이고, 주어인 <백령회>가 조선 클라이머들의 정신적인 단합을 확인할 수 있었고, <백령회> 동지들은 “지도력을 가지고 뼈대 있는 등산을 하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글자 그대로 일본인 중심의 <조선 산악회>의 부속기관도 아닌 <백령회>가 왜 조선 클라이머들의 “정신적인 단합”을 꾀하고 확인해야 했는가? 클라이머들끼리 정신적인 단합이란 무엇인가? 그 결과 <백령회> 동지들이 “뼈대 있는 등산”을 하는 존재가 되었고...“지도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백령회>는 이처럼 우월적 지위를 스스로 말할 만큼, 일제 강점기 속에서 당대 조선 클라이머들로부터 동의나 용인 등을 얻은 조직 혹은 단체였는가? 전체적으로 그는 생에 관한 진술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건너뛰면서 매조지 한다.
6. 평범한 글쓰기로의 귀환
<백령회>에 관해서 김정태가 쓴 용어는 창립이나 설립이 아니라 ‘조직’이다. 김정태는 1937년에 <백령회>를 조직했다고 그의 책에 썼다. 한국 산악회와 대한 스키협회에 대해서는 설립이라고 쓰면서, 조직과 설립이라는 애매한 용어 사이에 자신의 역할을 위치시켰다. 책에서는 일본대학에서 유학했다고 썼지만, 그때가 언제이고 공부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생활했는지 밝히지 않았다. 책 속표지에는 ‘1956년 수도여자 사범대학 총무과장 겸 교수’라는 직책을 명기했지만, 그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지 모르겠다. 책 안에서는 강의과목, 내용, 교수가 되기 전과 후에 대해서 어떠한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책의 뒤표지에는 김정태의 산악관을 엿볼 수 있는 교훈적이며 범박한 글귀가 적혀있다.
①“인간 능력의 극한 상황을 자초하며, 생사의 분기점을 넘나드는 등반을 인간은 왜 하는가. 모험과 개척지향의 인간본능과 더불어 개인적으로는 체력과 정신력의 자기증명인 동시에 단련증강에 그 뜻에 있다. 특히 산악이 인간에게 불어넣어주는 정신적 에너지는 무한하고 값진 것이다. 또한 등반은 고귀한 관용과 협동심을 기르는 첩경이 된다. 그것은 곧 인간생활에 원만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정신적 양식이라 할 수 있다.”(11-12쪽에서 발췌)
②“국내외적으로 한국의 산악운동이 크게 도약하고 있는 이 때 필자의 반평생을 장식한 등반 체험담과 한국 산악계의 지난날을 되돌아봄에 큰 의의를 느끼며 감회가 새롭다.”(13쪽에서 발췌)
③“나는 망천후 옆에 치솟은 한반도의 절정 장군봉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감동에 못 이겨 당시는 감히 입에 담지도 못했던 대한독립만세를 몇 번이고 소리소리 불렀다. 찬란한 천지를 내려다보는 대백두봉두에 선 감격이 너무나 벅찼던 것이다. 평생토록 진 빚을 다 갚은 듯 홀가분한 기분으로 되내려올 때...”(216쪽에서 발췌)
①②③은 출판사의 의도였는지 모르지만, 김정태가 내세우고 싶은 이 책의 핵심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①은 그의 산악활동의 가치에 관한 대범한 설명이긴 하지만, 교과서적인 발언이다. 상투적인 내용이라서 오히려 주어가 없는 문장으로 읽힌다. ②는 구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 것인데, 체험담이지만, 자신의 이야기가 개인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한국 산악계의 지난날을 대변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문장이다. 개인의 체험이 한국 산악계 전체가 되고, 그 중심에 놓이는 데서 이 책의 의의가 있고, 감회가 새롭다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이처럼 한국 산악계에서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었다. ③은 자신의 등반 기록 가운데,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1941년 일본인 중심의 <조선 산악회> 회원들과 등정한 동계 백두산 마천령 산맥 종주에 관한 것이다. ③에 다음의 글이 이어진다. “그제(서)야 비로소 홀어머니와 처자식이 있는 집 생각이 났다.” 그 때 그는 “결혼 5년째로 당시 26세였다”(216쪽)고 썼다. 이 책에는 그가 언제 누구와 결혼했는지, 등반 이외에 어떤 일을 하면서 가정을 영위했는지 일절 언급된 바가 없다. 위의 구절이 집과 가족에 대한 유일한 내용이다.
1941년, 스무 살에 결혼한 그가 스물다섯 살 청년이었던 때였다. 책에서는 그의 결혼에 대해서, 처와 자식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가, 열네 살에 처음 백운대 오르고 나서부터 겨우 십 년 밖에 되지 않은 스물다섯 살인 그가 “평생토록 진 빚”이란 무엇일까? 빚을 안고 살다가, 조선 총독부의 허락과 지원을 받아, 백두산 장군봉에 올라 “대한 독립만세를 소리소리 불러...감격에 벅차”게 된 덕분에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던 것이라 한다면, 그 빚이란 그동안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지 못했다는 자괴감, 열패감, 모멸감과 같은 것인가? 조선인 자신이 창씨 개명한 이름, 타츠미 야스오辰海泰夫로 일제 강점기 일본인 중심의 <조선 산악회>에 가입하고 이사로 활동하고, 같은 '때'는 아니지만, 1942, 1943년 조선 총독부가 주최한 연성회, 국민 단련회에 참여한 친일적 행위를 자각하고 있었다는 뜻을 나중에 이 글을 쓰면서 말하는 것인가? 이 문장 역시 전후 문맥, 맥락이 어긋나는 예에 속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김정태의 이 책의 내용과 서술에는 비약과 생략이 많은 편이다. 내러티브 방식은 전후 맥락이 탈각되어, 내용이 애매하고, 모호해졌다. 김정태는 이 책 끄트머리에 “등산 풍조의 전위대를 선진국가들이 개발한 세계의 정상으로 이끌어 올림으로써...국력을 배양하는 길을 말해두고 싶다.”(253쪽)라고 결론지었다. 필자의 관심은 그가 이룩한 초등의 역사나 설산, 고산의 정상에 이르려는 거대 서사가 아니다. 책읽기를 통해서 그가 “경험해온 산”을 통해 어떻게 일제 강점기 근대 산악인으로서 생의 “공포를 극복”했는지, 그가 말한 “인간의 진실한 삶”(책의 맺음말에서, 253쪽)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싶을 뿐이다.그가 남긴 글과 책을 통해서, 일본 제국주의 아래 굴욕과 핍박을 견뎌내며 조선 알피니스트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던 김정태를 깊게 이해하고 싶을 뿐이다. 필자의 이 글에 이어지는 두 번째 글에서는 이 책에 들어 있는 산행기, 초등을 비롯한 등반기록에 대한 내러티브 방식을 분석하려고 한다.(계속)
첫댓글 이런 엄청난 글에 제 이름도 명기되어 있네요~~ 너무 어려운 글이라 이해하려고 몇번에 걸쳐 나눠서 읽었읍니다.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허재열>허재을
재을 형, 제가 실수를 했네요. 미안합니다. 새해 앞머리부터...오늘 아침에 수정했습니다. 읽어주어 고마뭐요. ㅇㅊㅇ
교수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김정태를 입체적으로 바라보려면 자신의 기록뿐 아니라 김정태를 기억하는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도 중요할 텐데, 그분들이 이제 거의 다 사라져서 안타깝네요. 제가 만났던, 김정태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도 틈틈히 기록해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