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상에서 성공한 수많은 사람들의 사례
김종훈 -고등학교를 학비가 없어 자퇴서를 써야 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현재 미국 포브스에 선정된 세계 500대 부자 중 한사람.
윤생진 - 고등학교를 40명중 30등으로 졸업하고 금호타이어에 고졸 생산직사원으로 입사하여,
국내 유일의 30대 상장기업의 상무이사로 승진, 조선대 교수로도 활동.
백성학 - 모자가게 점원으로 출발 연매출 2억 2천만 불(2001년 기준)에 이르는 세계최고,
최대의 모자 브랜드 ‘영안모자’의 창립자가 되었음.
메리 케이 - 실직당한 45세의 화장품 외판사원이었으나, 현재 세계 33개국 지점에서
연매출 30억불의 수입을 올리는 ‘메리 케이 코스매틱’의 창업주.
비틀스 - 삼류클럽을 전전하는 삼류 보컬밴드로 출발했지만,
결국 당신이 아는 비틀스의 전설을 만듬.
크리스찬 디오르 - 연필 쥐는 법조차 모르는 엉터리 디자이너였다.
하지만 20세기 유럽 패션계를 대표하는 불멸의 디자이너가 되었다.
강영중 (주)대교 회장 - 동네 과외방 교사였다.
김광석 참존 사장 - 부도로 경찰을 피해 전국을 떠돌아야 했던 때가 있었다.
김옥란 유학원 원장 - 한때 그녀는 파출부였고 청소부였으며 식당종업원이었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 원양어선 선원이었다.
김흥국 (주)하림 창업자 - 병아리 10마리로 시작했다.
김철호 기아자동차 창업자 - 막노동꾼이었다.
나성애 혜진대학 교수 - 15년간 호텔 객실 청소부였다.
박병엽 팬택 사장 - 3류 지방대 졸업.
박상돈 OGN 사장 (대표 브랜드 마루) - 초등학교 5학년 중퇴 후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보조로 시작.
신격호 롯데그룹회장 - 우유 배달부였다.
성호정 송학식품 사장 (국내 1위의 국수업체 사장) - 24살까지 뻥튀기 장사였다.
세스코 - 자본금 300만원, 직원 1명으로 시작했다.
이랜드 - 2평짜리 옷가게에서 시작했다.
이장우 한국 3M 사장 - 수세미 영업사원으로 사회생활 시작.
조운호 웅진식품 사장 - 상고출신에 야간대학 졸업.
정문식 이레전자 사장 - 고교시절 성적이 61명중 57등이었다.
최수부 광동제약 회장 - 최종학력이 초등학교 4년 중퇴. 제약회사 판매사원으로 시작.
최진순 (주)청풍 창업주 - 반신불수의 몸으로 공기청정기 개발시작.
허태학 에버랜드 겸 신라호텔 사장 - 지방대 농대 출신.
허진규 일진그룹(세계 3대 공업용 다이아몬드 생산업체) 회장 - 자기 집 창고에서 시작했다.
이상재 중대음대 수석졸업자 - 시각장애인이었다.
최민석 서울대 법대 정시합격자 - 두 눈을 전혀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수능 준비했다.
김동환 길라씨앤아이(연매출 100억대) 사장 - 소아마비에 고졸 중퇴 학력 소유자.
박경근 소년 한국일보, 스포츠신문 연재만화가 - 손가락이 하나도 없다.
두 살 때 화재로 열손가락을 모두 잃었다.
박지성 - 축구선수로서 가장 치명적이라는 평발 소유자.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 24살에 직원 2명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손위옹 - 50세에 공부를 시작, 서울대 법대에 합격함.
유상옥 코리아나 화장품 사장 - 50세에 창업했다.
음용기 이노티브 사장 - 50세에 미국유학, 회갑 때 벤처기업 창업.
정행화 - 50세에 에어로빅 시작, 뉴욕 플러싱 YMCA 에어로빅 강사가 되었고,
58세에 뉴욕 한의대에 입학하여 미국 한의사 국가고시 패스.
권원강 교촌치킨 사장 - 처음 치킨집을 시작하여 수 개월간 하루 이삼천 원의 수입을 올렸다.
김장훈 - 92년도 대학로 소극장에서 첫 콘서트에 다섯 명의 관객이 들었는데
그 중 3명이 초대 관객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 신인시절, 특종 TV연예 ‘신인무대’에 출연, 사상 최악의 심사평을 받았다.
조용모 제일화재 부장(전북권 최고 세일즈맨) - 입사시험만 108번을 보았고 전부 퇴짜.
송승환 - 난타를 들고 6개국을 돌며 홍보활동을 벌일 때, 외국인들로부터
‘한국에서도 연극이란 걸 하느냐?’는 조롱을 들었다.
자, 위의 수많은 성공인들이 어제 말씀드린 당신의 변명에 하나도 해당되지 않은 사람들입니까?
이 성공인들이 처음부터 배운 것이 많았고, 처음부터 가진 것이 많았으며,
처음부터 남들보다 건강하고 훌륭해서 이런 성공을 했는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막노동을 하며 살아가던 이십대 청년 김철호는 어느 날 자전거 가게를 열고 자전거 안장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자전거 안장을 만들면서 그가 품었던 꿈은
“나는 언젠가 자동차도 만들고, 비행기도 만드는 사람이 된다.” 는 것이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기가 막힌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전거포 주인 김철호는 자신의 말대로 기아자동차 창업자가 되었습니다.
서울시 중구 을지로 1가 25번지에서 톱밥난로 하나 갖다놓고 사업을 시작했던 삼십대 청년
신용호의 꿈은 한국에서 제일 큰 보험회사와 서점을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사업계획서를 100명의 저명인사가 검토했는데,
99명이 ‘한국에서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하다’라며 반대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99명의 부정적인 의견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밀고 나갔는데,
그가 세운 회사의 이름이 ‘교보’였습니다.
월트 디즈니는 사업에 실패하고 쥐들이 들끓는 빈민가로 내몰렸을 때
‘디즈니랜드’의 꿈을 가졌습니다. 이 ‘꿈’이 있었기에 그는 남들이 먹다 버린 빵을 주워 먹는
생활을 하면서도 매일 팔이 아플 때까지 만화를 그릴 수 있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펀드매니저라 불리는 조지 소로스는 생계를 위해 술집에서 웨이터 생활을 할 때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겠다’ 는 꿈을 가졌습니다.
이 ‘꿈’이 있었기에 소로스는 손님들이 남기고 간 음식 찌꺼기로 식사를 대신하면서,
돈을 모아 ‘런던 경제 스쿨’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100만 명에 달하는 뷰티 컨설턴트가 활동하는 ‘메리 케이 코스 매틱사’의 창설자 매리 케이는
실직하고, 남편은 사망하고, 병까지 걸린 45세의 나이에
‘여성이 무한한 가능성을 펼칠 수 있는 회사를 만들겠다.’ 는 꿈을 가졌습니다.
이 ‘꿈’이 있었기에 그녀는 변호사와 회계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돈 5,000달러로 화장품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세기의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오르는 ‘당신은 디자이너 일에 맞는 사람이 아닙니다.’
는 소리와 함께 수십 곳의 회사로부터 취직 거절을 받은 상황에서
‘위대한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 는 꿈을 가졌습니다.
이 ‘꿈’이 있었기에 그는 끝까지 도전할 수 있었고 마침내 자그마한 의상실에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유럽의 억만장자 보도 섀퍼는 신용카드를 남발하다 파산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상태에서
‘경제적으로 자유로워 지겠다.’ 는 꿈을 가졌습니다.
이 ‘꿈’이 있었기에 그는 인생을 포기하고 부랑자로 떠도는 대신 열정적으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치병인 근육무력증에 걸려 5년간이나 침대생활을 할 때,
한국에서 가장 바르고 정직한 기업을 세우겠다는 꿈을 세웠습니다. 이랜드의 박성수 사장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업에 실패한 뒤 해결사에게 언제 죽을지 몰라 가슴에 유서를 품고 다닐 때,
전국을 제패하고 세계로 뻗어나가는 사업체를 세우겠다는 꿈을 세웠습니다.
헤리코리아의 김철윤 사장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한강 둔치에서 3년씩 노숙생활을 할 때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에센시아 신충식 대표입니다.
『성공은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자세히 자신을 평가해보세요 ^^
남들이 모르는 당신만이 선보일수 있는 가장 멋진 매력을 지니고 있을지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