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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울고 말았지요
조연조
입동이 지나고 초경울에 접어들어 있을 곳을 찾아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니는데, 명보극장 앞 5거리 가로수 잎들은 그냥 두어도 떨어질 텐데 찬바람이 자꾸 흔들어서 잎들은 한잎 두잎 정든 가지를 떠나 비가 온 아스팔트 위를 치근덕 스럽게 뒹굴고 있었다. 어쩌면 내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며 극장 뒤로 가니 사무실 같이 쓸 사람을 구한다는 글이 건물 벽에 쓰여 있었다. 그래서 들어가 보니 책 편집도 하고 인쇄물 주문을 맡아 해 주는 기획실을 젊은 부부가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같이 있으려면 보증금 50만원에 월세20만원을 달라고 하였다. 부부와 앉아 내 어려운 처지를 솔직하게 말하며 열흘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월세도 보증금과 함께 그때 주겠다고 했다.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내 처지가 딱했던지 쾌히 승낙했다. 막상 있을 곳은 정했지만 돈도 안 주고 저녁에 잠까지 자겠다고 하면 거절 할까봐 며칠 동안 찜질방에서 지내며 보증금과 월세를 만들어야 했다. 무슨 놈의 신세가 한 가지 문제를 해결 하면 또 한 가지 문제가 생기는지 산 넘어 산이 아니고 산 넘어 바다이니 운명인지 팔자인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어려운 신세 타박만 하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그곳에서 나와 일찍 찜질방에 들어 가려고 하다가, 대한극장 앞을 지나다 보니 계절 탓인지, 곤궁한 신세 탓인지 문득 지난날 사귀던s가 생각이 났다.
나는 고등학교때 s라는 소녀를 사귀었다. 그녀는 학교은 같았지만 나이는 나 보다 3살 아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군대에, 그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대에서 화제가 될 정도로 전방까지 면회도 많이 와 주고 매월 현대문학과 새로운 신간 도서들을 구입하여 편지와 함께 보내 주었다. 군 제대를 하고 사회에 나오니 그녀는 나더러 문학에 소질이 있으니 자기가 뒷 바라지를 할 터이니 대학에 가서 문학 공부를 하라고 하였다. 앞에서 말한대로 가난의 굴레를 발리 벗어 나고자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고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 하였다. 그녀와 나는 어느덧 결혼을 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홀 어머니와 단 둘이었다. 나도 가족이 없어 외로운 처지라 이유로 서고 헤어지자고 하였다. 항상 다소곳 하고 순정적인 그녀는 내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썼다. 하루는 대한극장 앞에서 만나자고 하여 그곳에 갔더니,신영균,문회 주연의 "미워도 다시 한번" 영화를 보자고 하였다. 그녀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해어지려면, 서로의 주고 받은 편지를 교환 하자고하여 편지를 가지고 나갔더니 자가가 보내준 편지만 나한테서 받고 자기는 주지않았다. 사실 오늘날 글을 쓸 수 있는것도 온전히 그녀의 덕분인데 뭐 잘났다고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을까를 생각 하니 그녀의 저주를 받아서 내 몸이 이모양이 되었나 싶었다. 나는 찜질방에 갈 돈으로 저녁 밥으로 먹을 우유하고 방을 사가지고 극장에 들어 갔다. 영화를 보면서 지난날 그녀와 영화 보았던 기억이 병든 내 마음을 마구 마구 흔들어 댔다. 저녁을 따뜻한 극장 안에서 자려고 영화가 끝나고 청소원들이 왔다 갔다. 할적에는 의자밑에 숨어 있다가. 컴컴한 홀에서 의자에 앉나 있으니 온갖 상념들이 떠 올랐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흐른 다음 로비에 나가 어슬렁 거리고 돌아 다니다가 경비원한테 붙잡혔다. 경비가 나를 보더니 도둑 같지는 않은 모양으로 보이는지 빨리 나가라고 한다.
나는 이왕 이렇게 된것 날이 맑으면 나가겠다고 하니, 만일 윗 사람들이 알면 자기 밥줄이 끊긴다는 말에 그곳을 나와 진양상가 주변 건물 처마밑에서 하룻밤 전세내어 자는둥 마는둥 하룻밤을 새웠다. 아무튼 나는 보증금과 월세를 마련하는것이 급 선무였다. 전국 사진관에 관한 정보는 소상하게 알고 있는 터라 성남시 사진관협회 지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매월 한 번씩하는 회의를 언제 하느냐고 물으니 며칠날 이라고 했다. 마침 보증금을 약속한 날 이전이어서 책 한 짐을 들고 성남까지 가다 쉬다 앉다 하며 죽을 고생을 하며 갔다.
서태진 지부장에게 사진관에 관할 책을 발간하며 판매하다가 몸에 병이 들어 약값이나 하려고 하니 회원들에게 책을 소개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했다. 모임 날짜에 참석하기로 약속하고 가지고 간 책을 그에게 기증하면서 몸이 불편하여 책을 들고 다니기가 힘드니 그날 모임에 견본으로 이 책을 가지고 오면 고맙겠다고 하고 돌아와서 기다리다가 모임 날짜에 회의 장소가 어디냐고 문의 하면서 다시 한번 잊지 말고 내가 준 견본책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랬더니 누가 와서 책을 가져가 버렸다고 하지 않는가 ? 책 무게가 8킬로그램 이나 되는데, 내 몸도 움직이기 힘든 상태에서 또 그걸 들고 성남까지 갈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였다. 7~8개월간을 김치에 밥만 먹다가 여관을 나온 다음부터는 그나마도 먹을 때 보다는 굶을 때가 많았으니 뭄이 쇠약해 질 대로 솨약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4호선 전철을 타고 성남을 가려면 수서역에서 갈아 타야했다. 무거운 책을 들고 계단을 오르 내리려면 눈알이 빙빙 돈다는 표현이 맞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조금 들어다주면 좋으련만 모두 바쁘니 무정하게 지나쳐간다.
계단을 힘들게 쉬었다 가다 하는데 아기를 업고 걸리고 가는 아주머니가 "제가 좀 들어다 드릴게요" 하면서 뺏다시피 하여 책을 들고갔다. 그런데 방금까지 옆에 따라오며 동생을 엄마 등에서 내려놓고 자기를 업어 달라고 칭얼대던 꼬마 녀석이 울음을 그치고 나를 처다보며 따라왔다. 그 아이도 힘들게 가는 내 모습을 보았을까? 나는 그녀에게 고맙다고 몆 번이나 인사하고 꼬마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이라도 주었으며 그 애가 좋아 했을 텐데 돈이 없어 그러지를 못하고 있는데 그 아이가 자기 엄마가 빨리 오라고 하여도 나를보며 어설프게 웃어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지금까지 그 아이의 웃음의 의미가 할아버지 우리엄마 고맙지요 일까 아이야 마음씨 고운 엄마의 사랑으로 지금은 많이 컸겠구나! 그때 네 엄마의 고마움을 항상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단다. 이제 할아버지 몸도 많이 나았단다. 부디 착하고 아름답게 자라거라! 안녕... 도로가에 서 있으니 여름 옷이라 저녁바람이 파고들어 몹시 추웠다.
한참 서 있으니 서 지부장이 와 그의 차를 타고 분당에 있는 모 사진관으로 갔다. 그곳에는 사진관 영업주들이 먼저 와서 돼지고기에 숙을 먹으면서 나에게도 술을 권했다. 술을 못 먹는다고 하니 그러면 돼지고기라도 먹으라고했다. 마음 같아서는 돼지고기를 덥석 덥석 체면 불구하고 먹고 싶지만 책이 팔려야 사무실내고 월세 한 달분 치르고 겨울옷과 내복을 사입을 텐데 생각하니 긴장이 되어 음식에 손이 선뜻 가지 않았다.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한쪽에 우두쿠니 앉아 있으니, 도대체 무엇하는 사람인지 하고 그들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 보았다.
서 지부장은 회원들이 더 오지 않을 모양이라면서 나를 그들에게 소개하면서 책을 설명하라고 했다. 평소 같으면 설명을 매끄럽게 했을 텐데 몸도 마음도 춥고 배고프니 설명이 제대로 되지않았다. " 이책은 여러분의 스튜디오에서 쵤영하는데 필요한 자료로 한 질에 30만원 인데 치료비와 약값을 하려고 절반값에 판매하니 필요하신 분은 주문하면 내일 택배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랬더니 한 사람이 지난번에 당신 외판 사원한테 30만원에 구입했다고 했다.
그런데 개량 한복을 입고 머리는 꽁지머리를 하고 있는폼 없는폼을 잡으면서"내가 전임 성남 지부장이오" 하더니 "이 책10만원에 구입한 사람들도 있소" 했다. 꽁지 머리전임 지부장 때문에 장사 틀렸다고 생각하였다.
오늘 책을 10만원씩이라도 팔아야지, 아니 5만원에 달라면 주어야지 지금 춥고 배고픈데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안은가 생각하며 아무 말도 않고 물기 묻은 눈방울만 굴리고 있었더니 "나는 30만원에도 샀는데 반값이니 한질씩사지! 그래도 스튜디오에 이런 책 한 질씩은 있어야 손님들이 보면 공부하는 영업주하고 생각하지. 안 그래?" 하며 다른 회원들의 동의를 구했다. 그 회원은 또 상품이라는 것은 그때 그때 상황에 다라 구입하잖아" 하면서 "백화점도 가끔 바겐세일 하잖아" 했다. 꽁지머리가 무슨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꽁지머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책을 출간한 뒤 200만원이 급해 성남에 있는 경원대학 사진학과 이종옥교수에게 학생들한테 팔아 달라고 카드로 10만원씩 20질을 팔았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동냥은 못 주나마 바가지는 깨지 말아야 한다. 그날 10질을 팔았다. 회원이 15명 모였는데 서 지부장에게 한 질 기중하고 두 명은 우리 판매 사원에게서 구입하고 한 사람은 나이가 들어 사진관을 정리 한다며 구입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꽁지머리 전임 지부장만 사지 않는 결과었다.
사진관 주인 한 사람이 견본 사진집을 들고 가려면 힘들테니 자기를 달라고 하면서 15만원을 주기에 1만원씩 활인해주고 모임 총무에게 회식비 보태라고 10만원을 주고 사진관을 나오면서 고맙다고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나는 그 사람들이 너무 고마워 허리를 구부린 채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고 말았다. 흔히 사람들은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한다. 바로 이런 때를 말하는 것이리라.
울면서 사진관 계단을 뭄을 뒤틀며 내려오는데 젊은 사장 한 사람이 걸어가려면 힘드니 미금역까지 태워다 주겠다며 굳이 사양하는 나를 차에 태워 역까지 데려다 주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울고 있는 나에게 화장지를 주면서 오늘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회원들에게 책을 소개 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몸을 흔들거리면서 불안하게 가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인간은 모든 것이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내가 그들을 만나 딱한 처지를 굳이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들은 물기 묻은 내 두 눈에서 모든 것을 읽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더불어 살아간다. 나처럼 병들고 보잘것 없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도와 주어 이제 병도 낫고 이런 글도 스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누가 이 세상이 인정과 사랑이 메말랐다고 하는가." 그때 그 사장님들 참 고마웠습니다. 언제 한번 찾아가 많은 건강해진 내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안녕히들 계십시오
나는 "이제 광화문 4거리에서 송대관의 쨍하고 해뜰날 돌아 온단다. 아니 김양의 우지마라를 불러야 하겠다.
이튿날 책을 택배로 보냈더니 한 사람도 빠디디 않고 5일 안에 입금을 해 주었다. 30-40년 물건을 팔면서 수금이 그렇게 잘되디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선 수금된 돈 중 보증금 50만원과 월세 20만원을 주면서 부부간에 밥을 해 먹으려고 사다 놓고 부엌을 이용하기 않고 있기에 내가 쓰면 어떻것느냐고 했더니 그러라고 승낙하면서 한손으로 밥을 해먹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살기 위하여 어떻게든 해 먹어야 한다고 하고, 그리고 저녁에 소파에서 잠을 좀 자자고 햇더니 부부가 어처구니가 없는지 서로 얼굴만 보고 있기에 그 대신 내가 책 출판 할 때 편집일고 다른 곳에서 인쇄일도 주문을 맡아 주겠다고 했더니 여자가 떫은 감을 씹은 시늉을 하며 고개를 그덕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돈 몇천원 달랑 있고 잠 잘 곳도 없던 사람이 갑자기 돈도 60-70만원이나 남아 있고 사무실과 잠잘 곳도 해결 하였으니 이 세상이 내 것인양 기뻣다. 그동안 신세진 사람들을 만나서 고마움을 표하려고 찾아가면 일부는 또 도움을 청하러 온 줄 알고 얼굴빛이 별고 안 좋아지는 사람도 있었고 전화하면 뭄이 어떠냐고 해야 할텐데 왜 전화 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름옷을 입었지, 몸에서는 냄새 나지, 몰골은 앙상하지 하니 자기 직원들 보기가 창피했던 모양이다.
유행가 가사처럼 그걸 모른 내가 바보였지! 한번은 조카뻘 되는 변호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더니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하여 영문도 모르고 밖에 있다가 봉투에 돈20만원을 신세 진 일이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내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그랬던 것을, 거듭 그걸 모른 내가 바보였지! 남대문시장에 가서 겨울옷과 내복 양말, 속옷등을 사고 겉에 입을 코트를 하나 샀으면 했는데 너무 비싸 포기 하고 사우나에 목역을 하는데 한 손을 못쓰니 때를 밀수없어 가지 아버지와 함께 목욕 온 중학생에게 그의 아버지가 다른 곳으로 갔을 적에 등 좀 밀어달라고 하니 문대는 시늉만 했다. 밀기를 끝낸 중학생더러 "야" 너 오늘 자원봉사햇어" 하니 씩 웃었다. 나는 그 웃음처럼 아름다운 웃음은 지금껏 본일이 없다. 한번을 책을 들고 길을 가다가 중학생 네댓명이 가기에 한 학생에게 책을 들어 달라고 하니 이 녀석이 싫은 기색없이 들고갔다. 헤여지면서"너 오늘 자원봉사했어" 했더니 이 녀석들이 짐을 든 학생의 머리를 때리기도 하고 만지기도하면서 웃고 가는 모습이 보기 좋아 한참 서서 바라보았다. 참 고마운 녀석들 이었다. 나는 미래의 새싹들이 전철역 출구 한쪽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알면서도 왜 여기 서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자원봉사를 하라고 하여 서 있다고 말하는 그들에게 허리 굽혀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장애인들을 도와주라고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열이면 열 수줍어 하면서 미소를, 그것도 아주 아름답게 짓는다. 우리 모두 새싹들을 보면 미소를 한번쯤 지어보여 주면 어떨가 싶다.
참으로 오랜만에 목욕하고 식당에서 설렁탕 한 그릇을 먹고 나니 살것같았다.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거처가 정해져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으니 돌아다니지 않고 또,식사를 거르지도 않고, 소고기국에 시장에서 김치와 다름 반찬을 사다가 먹고 한 열흘쯤 지나니 얼굴에 살이 붙기 시작하여 몰골이 앙상하던 모습은 차즘 좋아저 갔다. 그리고 몸 상태도 좋아저 가고 삶의 의욕도 행기기 시작했다. 가끔 같은 사무실에 있는 사장 부인이 밑반찬과 김치를 가져다 주기도 했다.식사 때 같이 밥을 먹자고 해도 사양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럴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왼쪽 한손으로 그릇을 씻으면 그릇이 빙글빙글 돌아버려 씻기가 어려웠다. 그 래서 밥을 먹고 그릇과 수저를 냉장고에 넣어 놓고 또 다음 밥때가 되면 먹고 씻지 않고 먹고 했으니 그런 밥을 누가 같이 먹을 것인가. 참으로 지금 생각하면 고마운 부부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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