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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왜 쓰는가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를 중심으로
[노벨문학상 심사위원회]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
[출판사 서평]
끝나지 않은 오월, 피지 못한
아이들의 영혼을 위한 간절한 노래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간 있었던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상황과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철저한 고증과 취재를 바탕으로 한강 특유의 정교하고도 밀도 있는 문장으로 그려낸다.
5·18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소년 동호는 친구 정대의 죽음을 목격한 것을 계기로 도청 상무관에서 시신들을 관리하는 일을 돕게 된다. 매일같이 합동분향소가 있는 상무관으로 들어오는 시신들을 수습하면서 열다섯 어린 소년은 '어린 새' 한 마리가 빠져나간 것 같은 주검들의 말 없는 혼을 위로하기 위해 초를 밝히고, ‘시취를 뿜어내는 것으로 또 다른 시위를 하는 것 같은’ 시신들 사이에서 친구 정대의 처참한 죽음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정대는 동호와 함께 시위대의 행진 도중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쓰러져 죽게 되고, 중학교를 마치기 전에 공장에 들어와 자신의 꿈을 미루고 동생을 뒷바라지하던 정대의 누나 정미 역시 그 봄에 행방불명되면서 남매는 비극을 맞는다. 무자비한 국가의 폭력이 한순간에 무너뜨린 순박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과 무고하게 죽은 어린 생명들에 대한 억울함과 안타까움이 정대의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로 대변된다.
5·18 당시, 인구 40만의 광주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은 80만 발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엄혹한 분위기 속에서도 국가의 부조리에 맞서도록 어린 그들까지 시위 현장으로 이끌었던 강렬한 힘은 다만 ‘깨끗하고도 무서운 양심’ 하나였다. 그렇게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느끼며 수십 만 시민들이 모여 만든 위대한 ‘양심의 혈관’을 함께 이루었던 것이다.
소설은 동호와 함께 상무관에서 일하던 형과 누나들이 겪은 5·18 전후의 삶의 모습을 통해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단면들을 드러내 보인다. 살아 있다는 것이 오히려 치욕스러운 고통이 되거나 일상을 회복할 수 없는 무력감에 괴로워하는 이들의 모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당시 수피아여고 3학년 시절에 5·18을 겪은 ‘김은숙’은 ‘전두환 타도’를 외치는 데모로 점철된 대학생활을 포기하고 작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면서 담당 원고의 검열 문제로 서대문경찰서에 끌려가 ‘일곱 대의 뺨’을 맞기도 한다.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고귀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조 활동을 하다 쫓겨난 ‘임선주’는 이후 양장점에서 일을 하다가 상무관에 합류하게 되고, 경찰에 연행된 후 하혈이 멈추지 않는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상무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대학생 ‘김진수’ 역시 연행된 이후 ‘모나미 볼펜’ 고문, 성기 고문 등을 받으며 끔찍한 수감 생활을 했고, 출소 후 트라우마로 고통받다 결국 자살하고 만다.
소설은 이러한 국가의 무자비함을 핍진하게 그려내면서 ‘유전자에 새겨진 듯 동일한 잔인성’으로 과거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는 인간의 잔혹함과 악행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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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깨어있는 시간의 약 70%를 의사소통에 쓴다. 즉 태어나서生 죽는涯 인간의 생애生涯는 의사소통意思疏通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주로 음성언어(말하기, 듣기)와 문자언어(쓰기, 읽기)로 채워진다. 물론 의사소통 수단에는, 대중가요 노랫말 “눈으로 말해요!”가 확인해주듯, 비언어非言語(몸짓, 표정 등)도 있다.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로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공간은 참다운 사회社會가 못 된다. 그 까닭은 사회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더러 사회는 “깡패 사회”처럼 같은 무리의 집단을 지칭하기도 하고, 학생 ‧ 군인 ‧ 죄수 등이 자신들이 속한 영역 이외 범주를 두고 “사회에서는 안 그렇지!” 식으로 사용하는 어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특수한 쓰임이다.
사회 본연의 정의定義에 대해 생각해볼 일이다. 회會는 모임을 의미하니 그 속뜻을 굳이 헤아려볼 것도 없지만 사社는 다르다. 일상에서 상용하는 글자가 아닌 탓이다.
중국 고대 어원으로 보면, 社는 토지土신神이다. 한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바꿔 말하면 같은 토지신을 섬기며 살아가는 25호 정도의 마을을 社라 했다. 현대사회에서는 상행위 또는 영리 추구 목적의 법인을 가리키는 데 주로 사용된다. 즉 社는 가족과 마을은 물론 교회, 계급, 국가, 정당, 조합, 회사 등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형태의 인간 집단을 뜻한다.
社와 동의어로 많이 쓰이는 개념어에 공동체共同體가 있다. 인류 최초이자 최소 공동체는 가족이고, 최대 공동체는 이상론에 지나지 않는 듯 여겨지는 지구촌地球村이다.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 그리스의 폴리스polis, 구호 “가족 같은 회사” 등도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생겨났다.
Polis든 “가족 같은 회사”든 ‘지구촌’이든, 수박 수준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이 아니라 홍당무처럼 겉과 속이 일치하는 진정한 공동체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구성원 사이에 의사소통부터 원활히 이루어져야 한다. 주체성이나 자유의지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단지 본능의 작동에 따라 모여 살면 그것은 군집群集일 뿐이다.
따라서 사람은, 군집 생활을 하는 여타 동물들은 그렇게 하는 법이 없지만, 어떻게 해야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는 공동체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깊이, 거듭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인간다운 삶이 가능해진다.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요인으로는 먼저 육체의 죽음, 그리고 치매를 들 수 있다. 동양적 사유로 말하면, 혼魂이 몸을 벗어나고 백魄이 시신과 더불어 소멸되면 타인과의 의사소통은 완전히 단절된다. 그 뒤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가 철저히 차단되는 사후 세계이다. 그래서 죽은 정대의 시신이 <소년이 온다> 제2장의 주인공으로서 서사를 이끌어간다.
한강 대표소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의 핵심 서사敍事는 한결같이 죽음에 닿아 있다(그리고 치매 또는 정신병으로 이어진다). 5·18 와중에 살아남은 대학생 김진수는 그 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사람들은 스물네 살인 그녀(김은숙)가 사랑스럽기를, 사과처럼 볼이 붉기를, 반짝이는 삶의 기쁨이 예쁘장한 볼우물에 고이기를 기대했지만, 그녀 자신은 빨리 늙기를 원했다. 빌어먹을 생명이 너무 길게 이어지지 않기를 원했다.”
석가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무리 비인간화된 삶일지라도 ‘살아있음’은 그 자체로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지상 최고 가치價値이다. <소년이 온다>의 노동자들이 “우리는 고귀해. 우리에게는 정당한 권리가 있어”라고 다짐하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김진수와 김은숙은 그러한 통속通俗의 세계관을 완강히 거부한다.
육체의 죽음을 원하는 이들은 그 전에 이미 정신의 죽음에 도달해 있는 법이다. 특히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라는 절규가 (한강 소설에 깊숙하게 드리워져 있는) 정신질환 또는 치매 같은 병이 아니라, 거대하면서 부당한 국가권력의 폭력 때문에 생성된 것이라면, 개인의 실존實存은 사실상 혼魂을 잃은 반죽음 지경으로 내몰린 상태이다.
<소년이 온다>가 보여주는 죽음의 세계는, 대한민국이 국민과 국가 사이에 의사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참된 공동체가 못 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즉 “한강은 우리가 우리의 상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묻는다.”주철현, <과학자가 본 한강 노벨문학상의 의미>(한겨레신문 2024년 11월 1일)
하지만 누군가는 “피해자인 내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서 할 말을 다한다면 내가 속한 공동체는 깨질 수 있네. 그래서 어떤 경우는 죽을 때까지 비밀을 품고 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가해자가 죽은 뒤에 그 비밀을 말하거나, 그 후손들의 명예를 생각해서 영원히 비밀에 부칠 경우도 있다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양심이며 기본적인 도덕률이네”한충원, 2024년 11월 7일 발표문, 여러 신문.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해요”라는 발언으로 대변되는 ‘죽은 사람은 죽었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식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소년이 온다>가 불편하게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그런 합리화도 한몫을 할 것이다.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정신적 요인은 불신不信과 이기주의利己主義다. 이들은 “다 널 위해서(<채식주의자>)”라는 수식을 단 거짓말과 폭력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상대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면 불신이 쌓이고, 나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 골몰하면 상대에게 거짓말을 하게 된다.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한약이라며 들이민 어머니의 거짓말에 속아 한 모금 먹었던 흑염소액을 변기에 모두 토해낸다. 병실에 있는 흑염소액 전부를 폐기하는 것은 물론이다.
“너, 이것이 얼마짜린 줄 아냐? 니 에미에비 피땀이 어린 돈이다. 네가 그러고도 내 딸이냐?”
어머니의 언어 폭력은 “다 널 위해서”라는 자신의 말이 진정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며, 그것이 자기만족을 위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낸다.
<소년이 온다>는, <채식주의자>의 영혜에게 개인적으로 엄습한 가정 단위의 상징적 수준이 아니라, 거대하고 구체적인 국가의 거짓말을 보여준다. <채식주의자>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너를 위해” 폭력을 행사하듯,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의 국가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다는 거짓말을 내세워 ‘국’군으로 ‘국’민을 학살한다. 거짓말도 폭력이지만, 거짓말로 뜻한 바를 얻지 못한 ‘그들’은 일반국민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너무나 참혹한 폭력을 행사한다.
그와 같은 불가해한 사회를 중3 동호가 이해할 수는 없다<작별하지 않는다>의 인선에게도 “밤낮이 어신(없는) 거라이, 군사 작전이라는 건”이라는 아버지의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여겨진다.. 군인들에게 가족을 무참히 잃은 유족들이 시신을 태극기로 감싸고 애국가를 부른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고3 은숙 누나가 대답한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 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동호는 “혼란”에 빠진다. 그렇게 국가의 거짓말은 공권력을 동원한 대규모 무차별 폭력으로 이어진다. 같은 이유로, <작별하지 않는다>의 제주에서도 수 만 명이 국가권력의 폭력에 학살당한다. 이 또한 국가와 국민 사이에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대한민국을 진정한 공동체로 볼 수 없다는 증언이다.
(스무 살 김진수가 ‘서른이나 마흔쯤 되는 사내인 것처럼’ 중3 동호에게 “적당한 때에 너는 항복해라. 알겠지? 손들고 나가. 손들고 나가는 애를 죽이지는 않을 거야.”라고 말한 이후) 군인들의 명령대로 이층 복도에 머리를 박고 있던 우리들이 도청 마당으로 끌려내려 간 건 동틀 무렵이었습니다.
뒤로 손이 묶인 채 마당 가장자리에 일렬로 무릎 꿇고 앉은 우리들에게 한 장교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흥분해 있었습니다. 한 사람씩 군화로 등을 밟아 흙바닥에 머리를 박게 하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씨팔. 내가 월남 갔다 온 사람이야. 내 손으로 죽인 베트콩 새끼들이 서른 명도 넘는다! 더러운 빨갱이 새끼들.” (중략, “내가 월남에서 베트콩 일곱을… 하고 시작되는 레퍼토리를” 입에 달고 사는 아버지가 <채식주의자>에 나온다.)
다섯 명의 어린 학생들이 이층에서 두 손을 들고 내려온 것은 그때였습니다. 계엄군이 대낮같이 조명탄을 밝히며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소회의실 캐비닛에 숨으라고 명령했던 네 명의 고등학생과, 소파에서 김진수와 짧은 실랑이를 벌였던 중학생(동호)이었습니다. 더 이상 총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들은 김진수의 말대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러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저 새끼들 봐라.”
김진수의 등을 밟고 있던 장교가 여전히 흥분한 채 소리쳤습니다.
“씨팔 빨갱이들. 항복이다, 이거냐? 목숨은 아깝다, 이거냐?”
한 발을 여전히 김진수의 등에 올린 채 그는 M16을 들어 조준했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 없었던”) 학생들에게 총을 갈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봤습니다.
“씨팔. 존나 영화 같지 않나.”
치열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그가 부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사회적 동물인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현상에 어떤 방식으로든, 얼마만큼이든 반응해 움직이게 된다. 그래야 ‘식물인간’ 아닌 그냥 사람이고, 그래야 공동체의 당당한 구성원이다.
말을 사회활동의 최고 수단으로 여기는 직업군은 정치인들이다. 히틀러는 “글보다 말”이라 했는데, 이 또한 대부분의 대중이 말을 의사소통 수단으로 삼을 뿐 글은 그보다 훨씬 덜 선호한다는 사실을 꿰뚫은 발언이다. 말은 논리의 타당성을 세밀하게 따질 겨를 없이 듣는 즉각 감정에 휩싸여 반응하기 십상인 까닭에 정치인이 군중을 선동하는 데에 글보다 훨씬 유용하다. 테는 독서를 “과거 현인과의 대화”라 했지만, 일반 대중은 음성언어만 대화로 여길 뿐 문자언어는 아니라고 여기는 경향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성인의 60%가 한 해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것도 그런 인식에서 비롯된 참담한 문화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글이 아닐뿐더러 진정한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대박’식 표현의 소굴 ‘카톡’이 성행하는 것은 크게 우려할 일이다.글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꼼꼼하게 분석한 후 반응할 뿐더러 군중심리가 작동할 여지도 없으니, 그만큼 정치선동에 불리하다는 것이 히틀러의 통찰(?)이다.
신라시대 ‘해가海歌’의 배경설화도 그같은 이치를 말해준다. 향가 ‘헌화가獻花歌’가 지어진 며칠 뒤, 강릉태수로 부임하기 위해 길을 가던 김순정이 임해정에서 일행과 점심을 먹는 중에 해룡海龍이 수로水路부인을 납치해 사라진다.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는 김순정 앞에 어떤 노인老人이 나타나 방책을 알려준다.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이는 법입니다. 아무리 바다 속 물건이라 해도 수많은 입은 두려워 할 것입니다.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막대기로 언덕을 두들기면 부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따라 김순정이 노래를 짓고 대규모 군중을 동원해서,
龜乎龜乎出水路 구호구호출수로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掠人婦女罪何極 약인부녀죄하극
남의 부인을 빼앗은 죄가 얼마나 큰 줄 아느냐.
汝若悖逆不出獻 여약패역불출헌
네가 만약 거역하여 바치지 않으면
入網捕掠燔之喫 입망포략번지끽
그물로 잡아서 구워먹고 말겠다.
하고 합창하며 땅을 두드리니, 용이 부인을 도로 내놓았다. 중구삭금衆口鑠金, 다수 군중 사이에 형성된 여론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이 사자성어는, 말이 대중의 도구로 합쳐져 동시다발로 쓰이면 큰 권력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에 견줘 소설가는 그저 개인이고, 말로 대중을 선동해 정신적 ‧ 물질적 이익을 취하는 정치인도 아니다. 즉 소설가는 글로 사회에 반응하게 된다.
그런데 때로는 펜이 총칼보다 강하다는 격언이 실존實存에 구현되기도 한다. 한강 작가의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은 “(많은 사람들이) 지난 44년 동안 고통받고 힘들었던 것을 작가 한 명이 세계적으로 순식간에 알려”내는 감동을 창조했다(MBC스트레이트 2024년 10월 27일, 박강배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제가 작품을 썼다기보다 소설 속 주인공인 소년과 80년 광주를 체험했던 시민들이 작품을 썼다”는 한강 본인의 말은(미디어오늘, 2024년 10월 11일) 작가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연약한 삶“들을 소설에 담았고, 그 결과 본인도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섰다는 노벨문학상 심사위원회의 평언이 아주 적확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한강 작가는 이미 죽어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게 된 소년과, 그 뒤 치매를 앓아 역시 의사소통이 어렵게 된 소년의 어머니와, 당시를 겪은 많은 사람들과, 나아가 우리나라 ‘국’민들과, 더 나아가 지구촌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국가권력과 개인 사이에 반드시 필요한 활발한 소통 문제에 대해 ‘5 · 18’을 화두로 소통하고자 했다.
“저기 밝은 데” “꽃도 많이 폈”는 곳으로 가자면서,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라는 여섯 살, 일곱 살 소년의 말에 함께 귀를 기울이자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소설을 쓰는 동안, 아니 소설을 쓰기 위해 자료조사를 할 때부터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던 작가는 그래서 “저는 제 소설을 읽은 사람이 슬펐다는 독후감을 들려줄 때가 제일 좋아요(한겨레신문, 2024년 10월 18일)”라고 밝혔다.
소설의 여고생이 도청 앞 분수대를 틀지 말라 하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쉰넷 여성작가가 세계가 전쟁 중인데 무슨 기자회견이며 파티냐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수피아여고 3학년 때 5‧18을 겪은 후 대학에 진학했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작은 출판사에 취직한 김은숙은 수배자에게 번역을 맡긴 회사 일로 기관에 연행돼 ‘평범’장교는 ’치열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소년들을 마구 사살한다. <소년이 온다> 133쪽.한 얼굴의 사내에게 “개 같은 년. 너 같은 년은 여기서 어떻게 돼도 아무도 몰라. 쥐새끼 같은 년. 쥐도 새도 모르게 죽기 싫으면 내 말 들어. 그 새끼 어딨어?” 소리를 들으며 뺨에 실핏줄이 터지는 폭행을 당하던 중)
짧게 감은 눈꺼풀 속에서 (전남 도청 앞) 유월의 분수대가 눈부신 물줄기를 뿜었다. 버스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가던 열아홉 살의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하나의 물방울들이 내쏘는 햇빛의 예리한 파편들이, 달궈진 눈꺼풀 안쪽까지 파고들어 눈동자를 찔렀다.
집 앞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그녀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책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주먹으로 훔치며 전화기에 동전을 넣었다. 114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도청 민원실 부탁합니다. 안내받은 전화번호를 누르고 다시 기다렸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오고 있는 걸 봤는데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떨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
방학하는 날까지 그녀는 날마다 정류장 옆 공중전화 부스에서 도청 민원실에 전화를 걸었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물을 잠가주세요.”
손바닥에서 배어나온 땀으로 수화기가 끈적끈적했다.
“예예, 의논해 보겠습니다.”
민원실 직원들은 인내심 있게 그녀를 응대했다. 꼭 한 번 나이 든 여사무원이 말했다.
“그만 전화해요, 학생. 학생 같은데 맞지요? 물이 나오는 분수대를 우리가 어떻게 하겠어요. 다 잊고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면 <작별하지 않는다>와 같은 제목을 소설에 붙이게 된다. 이젠 공부를 해요.”
“(한강이) 러시아,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치열해 날마다 죽음들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고 기자회견을 하겠느냐고 하더라. 딸이 한국에 살고 있지만 글로벌한 감각을 지닌 작가로 바뀐 것(한승원, 2024년 10월 11일)”
“(한강 작가가 기자회견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폭력과 죽음이 도사린 세계에서 작가의 영광은 한줌 재와 같다는 의미다. 한강은 그런 폭력과 트라우마의 세계를 정면으로 직시한 작품을 쓴 소설가다. 그와 어울리는 결정을 했다는 평가다.(서울신문, 2024년 10월 14일)”
그렇다면, “‘5 · 18’, ‘4 · 3’을 피해자가 섰던 자리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시선에 불편해하는 독자(조선일보, 2024. 10. 12.)”는 어째서 존재하는가?
대한민국 일부 ‘국’민들은 무엇 때문에 한강 소설을 “역사 왜곡”, 노벨상 수상을 “출판사 로비”라고 외치는가?
노벨상 수상 발표 직후 열린 국정감사장에서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이 5 · 18민주화운동을 왜곡 · 폄훼하는 ‘북한 개입설’을 반복하는 식의 ‘반국가’ · ‘반지구촌’ 인식이 끝없이 이어지는 현상은 무엇 때문인가? (북한 개입이 사실이라면 당시 정부 지도층과 국군 최고 지도부에게 엄중 문책이 뒤따를 텐데,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생각은 해보고 주장하는가?)
주제, 구성, 문체를 소설의 3요소라 배웠다. 구성과 문체의 뒷받침에 힘입어 주제가 설득력 있게 펼쳐졌는지를 살피고 즐기는 것이 소설 감상의 요체다. 주제에 공감이 가고, 구성과 문체가 제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여겨지면 그 소설은 ‘내 스타일’이다.
‘훌륭한 작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라면 예술가의 범죄는 용인될 수 있다(김동인, <광염 소나타>)’식이어서 주제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주제에는 동의하지만 구성과 문체가 미진하게 여겨지면 내 스타일이 아니다. 작가는 주제 그리고 구성과 문체를 결정할 권리가 있고, 독자는 그 작품을 읽고 안 읽을 선택권이 있다.
<소년이 온다>의 주제가 잘못이라는 말은 웬만해서는 차마 발설할 수 없고조선일보 2024년 11월 14일 : “노벨상 수상으로 인하여 (중략) 조카(한강)의 작품에 대한 평가로 한국 사회가 두 쪽으로 갈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예감이 들었다”, “(제주4·3사건, 6·25한국전쟁, 광주5·18 등) 이해관계가 첨예한 사건을 한쪽의 관점만으로 평하는 듯한 시각을 작품에서 드러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이제는 문학 작가도 이념이나 지역 갈등을 부추겨 정치 이익을 얻으려는 정치인의 세몰이에 영합하는 듯한 작품을 쓰지 말고 공평한 자세로 써야 한다”, “과거의 상처를 헤집지 말고 양쪽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써야 한다”- 한강 작가의 삼촌 한충원 목사, 구성의 3요소를 이루는 소설 속 사건이 ‘왜곡’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소설을 정치 선전물로 치부하기도 한다. 문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척하면서, 일간신문에 공공연히 “읽다가 말았다”고 큰소리치는(?) 언론인까지 있다. 그래서
(167쪽: ‘5 · 18’ 관련 논문을 쓰기 위해 증언을 해달라는 학자에게)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 번 후벼 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2년 동안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라고 되묻는 임선주를 소설에 등장시킨 작가 한강을 비난한다.
이는, 복잡한 구성 탓에 읽기가 불편했다는 토로와는 차원이 다르다. 실제로 <소년이 온다>는, <작별하지 않는다>와 <채식주의자>도 만만하지 않지만, 대단하다.
제1장은 15세 소년 동호를 ‘너’라는 2인칭 서술자로 내세우고,
제2장은 동호보다 먼저 사살된 그의 친구 정대가 죽은 시신이면서도 1인칭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제3장은 ‘5 · 18’ 때 여고 3학년이었던 김은숙이 3인칭으로서 당시를 회상하고, 사회인이 된 뒤 또 경찰서에 끌려가 폭행당하는 현재를 말하고,
제4장은 도청에 있었던 교대 복학생 ‘나’가 다시 1인칭으로 등장해 학살과 고문을 증언하고,
제5장은 20대 초반 임선주의 노조와 도청 활동 및 극악한 고문 실상을 ‘당신’이라는 2인칭으로 돌이켜보고,
제6장은 치매를 앓게 된 동호 어머니가 길에서 아들의 환영을 쫓는 장면을 1인칭으로 서술하고,
제7장은 작가 본인이 직접 출연해 ‘에필로그’를 언급한다.
세계문학사에서 길이 대비 가장 복잡한 구조를 가진 소설이라 해도 괜찮을 만하다. 왜 이렇게 한강 작가는 장마다 주인공을 바꿔가며, 인칭을 달리해 구성을 복잡하게 만들었을까?
“제가 작품을 썼다기보다 소설 속 주인공인 소년과 80년 광주를 체험했던 시민들이 작품을 썼다”는 한강 본인의 말대로, ‘5 · 18’을 겪은 모든 사람들이 소설의 주요 인물, 즉 우리 사회에서 하나같이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5 · 18’은 어느 누구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 없는 역사를 품고 있는 시대정신의 표상이라는 의미이다.
인칭을 장마다 달리한 것은, 1인칭으로 서사를 전개할 수밖에 없는 제2장과 제6장, 그리고 1인칭보다는 2인칭 또는 3인칭이 더 적절한 다른 장들의 성격을 아주 절묘하게 감안한 선택으로 보인다. 한강 작가 본인의 말을 옮기자면 “작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한겨레신문, 2024년 10월 18일: 한강은 다른 작가 작품의 추천사를 쓴 적이 거의 없다. 그가 운영한 동네서점에서 그랬듯, 누구보다 책을 읽어내고, 꼽아 그 매력을 알리는 데 애썼다. 우리 문학을 읽지 않는다는 시인과 소설가도 적지 않지만, 한강은 그래 본 적 없다. 17일 국내 첫 수상소감이 잘 말해준다. 심지어 동료 작가의 장편 마지막을 읽을 때 “연민”을 느끼는 이가 한강(2007년 대담)이다. ‘그 작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역사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가꾸어가자는 <소년이 온다>를 폄훼하는 기행이 이어지면 지구촌 공동체가 대한민국을 기이한 군집群集으로 낮춰보게 될 것이다. 노벨상이라는 ‘권위’가 얹힌 세계문학 <소년이 온다>에 지구촌 공동체가 감동으로 젖었는데, 우리 스스로가 역사 왜곡 · 로비 · 번역 승리 등을 해가海歌처럼 불러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