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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1월 25일 월요일
[(녹)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홍]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순교자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어린양이 시온산에 서 있고, 십사만 사천 명이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시고,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그들의 이마에는 그리스도와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4,1-3.4ㄴ-5
나 요한이 1 보니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2 그리고 큰 물 소리 같기도 하고 요란한 천둥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들은 그 목소리는 또 수금을 타며 노래하는 이들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3 그들은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 명 말고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4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어린양을 위한 맏물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되었습니다.
5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인간은 자신이 더 많은 정성을 들인 것일수록 더욱 큰 애정을 느낍니다. 어떠한 것이든 자신의 시간과 노력과 자원을 많이 들일수록 그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되며, 더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내 것을 더 많이 내놓았을 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부은 사람만이 그 결과에 만족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의 결과를 진심으로 칭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얼마간만 사용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노력을 과소평가하고, 다른 사람의 업적을 진심으로 칭찬할 줄 모릅니다. 성실하게 노력한 사람만이 성실함과 노력의 진가를 알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 참으로 겸손할 수 있습니다. 적은 노력으로 좋은 성과를 내는 효율성을 자랑으로 여기고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노력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진정한 겸손을 알기 어렵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겼을 때, 많은 은총과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도와 봉사 등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 때, 더 많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최선을 다한 신앙인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존중하고 경탄할 줄 압니다. 내가 가진 일부를 봉헌하는 것과 삶 전체를 봉헌하는 것은 그 체험하는 바가 다릅니다.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 때에 남는 것 얼마를 주는 것보다,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떼어 나누어 줄 때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궁핍한 가운데 모든 것을 봉헌한 과부가,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예물을 바친 부자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듯 말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주님께서는 우리의 지극히 작은 봉헌과 희생을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자원봉사 활동을 왔을 때가 기억납니다. 사실 아이들이 자원 봉사 활동을 하러 오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성가시고 번거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적절한 봉사 활동거리도 찾아야 되고, 주의 사항을 잘 설명해야 되고, 옆에 붙어서 관리도 해야 하고 복잡합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뭔가 도와보겠다는 그 마음이 가상하고 기특해서 기쁘게 함께 하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더라도, 잘 했다, 고생했다고 칭찬하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함께 나누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 인간이 그분을 돕겠다고 나름대로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뛰어다닌다 할지라도, 사실 그분 보시기에 웃기는 일이거나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엄청 대단한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주님 보시기에 별 도움도 안되고,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도 우리의 그 작은 마음, 그 작은 봉헌, 그 작은 노력을 눈여겨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감격스러워하시고 행복해하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헌금함에 렙톤 두 닢을 넣은 가난한 과부를 크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 3-4)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 렙톤 두 닢은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 금액입니다. 렙톤은 당대 통용되던 화폐들 가운데 가장 가치가 낮은 그리스 동전이었습니다. 한 렙톤은 당시 노동자들 하루 품삯의 144분의 1가치를 지닌다고 하니, 우리나라 돈으로 5~600백원 정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한 렙톤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겨우 자판기 커피 한잔 뽑아 마실 수 있는 금액입니다. 성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적어도 5만원권이나 10만원, 100만원짜리 수표 정도는 넣어줘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딸랑 동전 두 개를 봉헌한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금액의 크기보다는 마음을 보시는 주님,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는 내면을 중요시 여기시는 주님이심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어 참으로 기쁩니다.
오늘 우리의 보잘것없는 봉헌, 오늘 우리의 아주 작은 희생, 오늘 우리의 티끌만한 봉사도 크게 어여삐 여기시고, 기쁘게 받으시는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그분께 드릴 작은 봉헌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2년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졸업정원제’를 채택했습니다. 입학 정원보다 더 많은 학생을 선발했습니다. 정부의 방침에 따라서 입학 정원의 30%를 더 선발했습니다. 신학생 정원이 80명이었는데 30%를 더 선발해서 104명이 입학했습니다. 입학 정원에 따랐으면 24명은 신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저를 포함해서 신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성소(聖召)’가 있었다고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졸업정원제는 문제가 있어서 폐지되었습니다. 졸업정원제가 있는 경우 학생들은 졸업에 필요한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학업에 대한 부담을 가중하고 정신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졸업 여부가 학문적 성취도나 역량보다는 정원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 실력과 상관없이 졸업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생길 수 있어 불공정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남학생들은 졸업정원에 해당하지 못하면 군대에 갈 수 있었지만, 여학생들은 졸업정원에 해당하지 못하면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신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부담이나, 졸업정원에 들지 못할 걱정은 없었습니다. 신학생들은 다른 이유로 사제 성소를 포기했습니다. 졸업할 때 이미 입학 정원이었던 80명에 미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요한이 보니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이 이야기하는 숫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입학 정원은 아닐 겁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졸업정원도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이야기하는 숫자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 이 숫자는 문자 그대로의 인원수를 의미하기보다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충만함과 완전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144,000은 12(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12(사도들), 그리고 1,000(큰 무리를 의미하는 상징적 숫자)의 곱으로, 구약과 신약의 모든 믿는 자들, 즉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에 걸친 하느님 백성의 완전한 수를 상징한다고 해석됩니다. 144,000명은 어린양 예수와 함께 서 있는 자들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로서, 영적으로 순결하고 하느님께 봉헌된 자들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느님 앞에서 정결하고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44,000명은 우상 숭배와 세속적 유혹에 저항하고, 하느님과 예수님께 충성 약속을 지킨 이들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들은 세상의 혼란과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지킨 자들을 나타냅니다. 144,000명은 문자적인 인원수라기보다 하느님께 선택되고 구원받은 모든 신자의 완전성과 충만함을 상징하는 숫자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과부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과부가 아주 작은 돈이지만 정성껏 봉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과부를 칭찬하신 겁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이 아닙니다.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은 우리의 인격을 감싸주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을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누는 우리들의 정성을 보십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16시간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십일조입니다. 예전에 선배 신부님께서 ‘인생은 흑자’라는 강론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순간을 살아도 우리 인생은 흑자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합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은 모두 날려버리고, 희망의 날개를 펴고 주님께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내님께 나를 드리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4)
더 가지려는
좁은 마음길을 닫고
더 나누려는
너른 마음길을 엽니다
늘 그러하신 내님처럼
탐스런 것에 앗긴
흐릿한 눈길을 멈추고
보잘것없는 것에게
맑은 눈길을 돌립니다
늘 그러하신 내님처럼
너 없는 나를 향한
모진 손길을 거두고
너와 더불어 나를 이루는
부드러운 손길을 건넵니다
늘 그러하신 내님처럼
밟고서라도 나가려는
거친 발길을 그치고
더디더라도 함께 이루는
고운 발길을 내딛습니다
늘 그러하신 내님처럼
오늘의 성인
성녀 가타리나(Catherine)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활동연도 : +310년경
같은이름 :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또는 가타리나)는 10세기경부터 동방 교회에서 가장 높이 공경해오던 성인 중의 한 명이지만 성녀에 대한 자료는 분명하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성녀 카타리나는 알렉산드리아의 상류 가정 출신으로 학식이 뛰어난 미모의 처녀였다고 한다.
그녀는 어떤 환시를 보고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였으며, 막센티우스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투옥시키라는 명령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는데, 이 놀랍고 뛰어난 논쟁으로 말미암아 50여 명의 이방인 철학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는 큰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녀는 만일 배교할 의향만 있으면 황제와 결혼시켜 주겠다는 회유책을 거부하고 두 시간 동안 매를 맞은 뒤에 투옥되었다. 그녀의 독방에는 비둘기들이 음식을 날라다 주었으며, 그리스도께서 발현하시어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큰 못을 박은 바퀴에 의한 고문을 당하였지만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구경꾼 여러 명은 그 바퀴에서 튕겨 나온 못에 의하여 죽었다고 한다. 그녀의 굳은 신앙과 인내심은 수많은 군인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그중에서 2백여 명이 개종한 후 곧 참수를 당하였다.
그로인해 마침내 분을 이기지 못한 관리들은 그녀를 참수하였다. 이때 그녀를 덮었던 수건에는 피가 아니라 우유가 묻어나왔다고 한다. 그녀의 시신은 시나이 산으로 옮겨졌으며(천사에 의하여), 그곳에 정교회 수도원이 세워졌다. 지금도 이 수도원은 성녀 카타리나 수도원으로 유명하다. 성녀 카타리나는 성녀 잔 다르크(Jeanne d'Arc, 5월 30일)가 들은 신비스런 목소리의 주인공 중의 한 명으로 철학자, 처녀 그리고 설교가들의 수호성인이다.
성 메르쿠리오 (Mercurius)
활동년도 : +250년경
신분 : 군인,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메르꾸리오, 메르꾸리우스, 메르쿠리우스
성 메르쿠리우스(또는 메르쿠리오)는 동방의 ‘군인 성인’으로 불리며, 그에 대한 전설은 매우 미화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로마군의 쉬티니아계 장교의 아들로서 그 역시 군인이 되었다. 그는 로마(Roma)를 침략한 야만인들을 상대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때 그는 천사의 도움을 받아서 승리했다고 굳게 믿었다. 승전 기념식에서 데키우스 황제가 왜 앞으로 와서 신들에게 승리의 희생을 바치지 않는가 하고 묻자, 메르쿠리우스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그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카이사레아(Caesarea)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고문을 받다가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복녀 엘리사벳 (Elizabeth)
활동년도 : 1386-1420년
신분 : 동정녀
지역 : 로이테(Reute)
같은 이름 :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독일 뷔르템베르크(Wurrttemberg)의 발트제(Waldsee)에서 태어난 엘리사벳(Elisabeth)은 요한과 안나라 부르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천진난만하고 부드러운 천성이 두드러졌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착한 베시'로 알려졌다. 그녀가 14세 되던 해부터 고해신부인 콘라두스(Conradus)가 그녀의 생활을 지도하였고, 작은 형제회 재속 3회원이 되도록 추천하였다. 17세에 그녀는 베를 짜는 어느 부인과 함께 로이테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하였고, 콘라두스 신부의 도움으로 이 작은 공동체는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일생동안 이 작은 공동체에서 지낸 그녀는 중세의 신비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고, 극도의 엄격한 생활과 환시 등으로 그녀의 성덕이 아주 높았음이 입증되었다. 특히 그녀는 수난 받으신 주님의 오상을 받았다. 가시관을 쓴 흔적이 뚜렷하고 매 맞은 자국이 선명하였는데, 성 금요일과 사순절 동안에는 선혈이 낭자하였다고 한다. 물론 그에 따른 고통도 극심하였다. 엘리사벳에 대한 공경은 1766년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