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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저우 여행17 - 쑤저우 동쪽 큰 운하를 지나 동원으로 들어가 호수를 구경하다!
2023년 10월 26일 쑤저우 북광장 커운짠 (客运站) 에서 遊(유) 1 버스를 타고 북사탑과 쑤저우 비단
박물관인 소주사조박물관 을 보고 쑤저우 역사박물관 을 지나 졸정원(拙政园) 을 구경합니다.
스쯔린 狮子林(사자림) Lion Grove Garden 을 구경하고는 나와 걸어서 아기자기하고
예쁜 운하 외성하 (外城河) 에 이르니 젊은 남녀들이 카페나 또는 운하변의
벤치에 앉아 오후 시간을 만끽하는 것을 보니 가히 동양의 베네치아 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그러고는 다시 달동네 같은 골목길 을 걷는데 중국의 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
이 적나라하게 펼쳐지니...... 중국인들의 속살을 보는 것도 같습니다.
골목을 빠져나오니 큰 도로가 보이고 건너편에 훨씬 더 큰 운하 가 흐르고 있으니 가히 쑤저우(소주)는 운하의
도시 임을 알겠는데 东园(동원) 으로 들어가니 입구에서 공원 까지가 얼마나 먼지 한참을 걸어야 합니다.
이윽고 동원(东园) 에 도착해 바다 같이 넓은 호수를 구경하는데.... 계절이 늦가을이니 호수
에는 이제 연꽃 이 시들어버린지라 직원들이 배를 타고 건져 올리는 모습을 봅니다.
넓은 호수에 떠 있는 배들을 천천히 바라보다가 문득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가
동아일보에 쓴 “위안스카이, ‘中의 위협 요소’ 라며 조선 독립과 개혁 막아”
라는 글이 떠오르는데.... 원세개는 북양해군을 창설한 이홍장의 후계자 였습니다.
사람들 입길에 오르내린 김에 위안스카이(원세개) 와 그를 둘러싼 한중일 정세를 한번 살펴보자. 전근대
조선과 중국은 조공 책봉 관계였다. 독립과 종속 밖에 모르는 근대인의 개념에서 보면 참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인데..... 긴 설명은 생략하고 일단 중국은 조선에 군대와 관리(외교관) 를 상주시키지 않았다.
정기적인 조공사절단 과 그 보다 훨씬 빈도수가 적은 칙사 파견이 사실상 관계의 전부여서, 조선의
내정과 외교는 조선 국왕이 자유롭게 했다. 형식상 대등한 관계지만 서울
한복판에 군대와 대사관을 두고 한국 내정에 깊이 개입했던 해방후 한미 관계와 비교해 볼 일이다.
(이성계가 이인임의 후손 이라고 대명회전과 태조실록에 적은 것을 고쳐달라고 사신을 보내 수백년간
애걸해도 고쳐주지 않고, 처녀들을 바치라고 해서 세종대왕이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반가의
여식들을 잡아들여 진상 했다든지.... 또 명나라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7~8차례나 승인
을 거부 하고 사신이 와서 직접 임해군을 만나 조사 한다든지 하는 예외는 여러차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1882년 발발한 임오군란 으로 뒤집혔다. 대원군의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청은 1637년
병자호란 이후 처음으로 군대를 파견했고, 관리를 상주 시켰다. 이때 부터 청은 조선 내정에
깊숙이 개입 하기 시작했다. 그 주역이 아직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20대 청년 위안스카이(원세개) 였다.
위안스카이 는 과거에 연거푸 낙방한 후에 임오군란 때 오장경(吳長慶) 부대를 따라 23세의 나이로
조선에 왔다. 갑신정변 (1884년) 때 김옥균 세력을 전격적으로 진압한 것도 그였다. 그후
잠시 귀국했다가..... 임오군란 당시 청으로 잡혀 갔던 흥선대원군 을 데리고 1885년 다시 나타났다.
청과 일본은 톈진조약 을 맺었는데, 이 조약으로 일본은 사실상 조선에서 손을 떼었다.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는 이홍장(李鴻章)에게 청이 주도권을 쥐고 조선 내정을 개혁해 달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청 조정으로 부터 정식으로 주찰 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 (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에
임명된 위안스카이의 독판이 펼쳐졌다. 그는 명함에 통감(統監) 을 의미하는 ‘Resident’ 를 박아 넣고 다녔다.
위안스카이는 서양이 조선에서 세력 을 갖기 전에 “고위 관원을 특별히 파견하여 감국 (監國)
을 설치하고 대규모 병력을 통솔하면서 내치와 외교 를 모두 대신 처리하고자
한다면, 지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 조선은 류큐나 베트남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만약 다른 나라에 도움이 되게 한다면 중국이 어찌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간청하건대, 먼저 증기선 군함 십수척과 육군 수천명 을 파견하여 남의 나라에 앞서
주둔시켜야 합니다” (‘원세개전집1·袁世凱全集1’) 라며 조선 내정 개입 을 앞장서 주장했다.
조선 정부와 조선 주재 외국 공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청국의 일개 공사 에 불과했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공사라는 직함을 한사코 거부 했고, 다른 나라 공사와 다른 특별대우를 강요 했다.
청이 ‘공사(公使)’ 라는 명칭을 수용한 것은 1899년 에나 가서였다. 외국 공사는 대궐 문 앞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지만 그는 가마를 타고 궁궐에 들어가기를 고집했다. 이번
‘싱하이밍 사건’ 도 그가 스스로를 여느 대사와 동렬이라고 생각했다면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주한 중국 대사 싱하이밍 사건 이란..... 몇년 전에 시진핑 주석은 트럼프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자 자금성에서 연회 를 열고는 와손녀 아벨라가 중국어로 노래를 부르고 중국의
옛 시를 읊는 장면을 보고 칭찬하고, 플로리다주 팜비치 회담 에서는 한국은 실제로 중국의
일부였다 는 발언의 연장선상에서 모 정당 대표를 초정해 일장훈시 를 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위안스카이의 내정 간섭에 대해서는 러시아와 밀약을 시도했던 고종을 폐위 하려 했던 사건, 또
1887년 박정양의 주미 공사 파견을 집요하게 방해 한 일 등이 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최근 나온 서울대 김형종 교수의 연구 (‘19세기 한중관계사론’) 에 의거해 다른 문제를 살펴보자.
먼저 전신선 설치 문제 이다. 청은 갑신정변 후인 1885년 조선에 차관을 제공해 서로전선
(西路電線·의주∼인천선) 을 가설하기 시작했다. 이어 한성∼인천 간 전신선과 경부 ·
원산선도 청이 설치하고 운영했다. 조선은 서로전선 회수를 요구했지만 묵살당했고,
북로전선 (北路電線· 한성∼함흥선) 설치를 시도했으나 청의 거부로 1891년에나 실현되었다.
남로전선 (南路電線·한성∼부산선)도 조선 정부가 가설하려고 시도했으나 청이 장악해 버렸다. 당시
전신선의 장악이 군사·외교·안보 에서 갖는 중요성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조선의
정보 중추신경을 완전히 장악했던 것이다. 전신선뿐 아니라 세관 장악, 다른 외국과의 차관 교섭
방해, 화 폐 주조 개입 등으로 청과 위안스카이는 조선이 자주적으로 개혁하려는 움직임을 봉쇄했다.
청에서 독립하려는 조선 과 그런 조선을 찍어 누르려는 위안스카이 간의 갈등은 1890년 승하한 신정
왕후 조대비 (神貞王后趙大妃) 조문 문제를 두고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서울 주재 각국 외교관
들은 함께 모여 조문 방식에 대해 의논하고자 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조선과 청의
관계는 특수 하다며 이를 거부하고 따로 입궁하여 조문하려 했지만 조선 조정에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그는 다른 수를 들고 나왔다. 조대비 승하 소식을 알리러 베이징에 간 조선 사신 (고부사·告訃使) 은 청의
조문 사절을 사양 하며 부의(賻儀)만 받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전통대로 조문 칙사를 파견하면, 조선 국왕
은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 에 나가 (인조가 병자호란때 삼전도에서 했던) 고두(叩頭) 의 예로 영접 해야했다.
이미 독립 의식을 갖게 된 조선 조정은 이를 피하기 위해 굳이 칙사 파견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사대질서 회복의 기회 라고 생각한 위안스카이는
칙사 파견을 강행 했다. 20세기를 불과 10년 앞둔 시점에 벌어진 일이다. 하는 수 없이 칙사
를 맞이하며 고두례(叩頭禮) 를 행한 고종,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조선 백성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병자호란때 인조는 청태종에게 三跪九叩頭禮(삼궤구고두례) 를 했는데 이번에는 청나라 황제가 아닌 황제
를 대리하는 사신에게 하기 때문에 한번씩 줄여서 이궤육고두례 를 했으니 고종이 땅바닥에 2번
엎드리고 그때마다 머리를 3번씩 땅에 찧었는데..... 이걸 외국 사신들이 모두 보고는 혀를 찬 것 이었습니다)
김형종 교수는 “(원세개는) ‘속국’ 조선의 조정 위에 군림 하면서, 이홍장의 지시와 후원 아래 누구 보다도 강경
하게 조선을 감시·억압 하고, 그 이익을 훼손시키면서 청의 국익을 일방적으로 앞세우는 정책을 실행하였다.
또한 조선이 국제법적으로 사실상 청의 속국 임을 끊임없이 확인하고자 하여 조선의
자주· 독립의 의지를 꺾고자 하였다” 고 평가했다. 적어도 청일전쟁
(1894년) 때까지 조선의 독립과 개혁을 방해한 것은 일본이 아니라 청과 위안스카 이였다.
(그후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고 아관파천으로 친일파 정권이 무느지고
친러파 정권이 들어서니 독립국이 된 조선에서는 독립협회가 저 영은문을 허물고 중국
에서 독립을 표방했으며 고종은 황제를 칭했는데.... 독립신문등 기사를 보면 일본이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구해준 것이니 일본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는 글들을 볼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옛날일을 회상하면서 뚱위안(东园 동원) 을 둘러보는데.... 게시판에 지도는 여기에
건축물이 엄청 많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그럼
우리가 극히 일부만 본 것으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환성하를 지나 다른 건축물 인 듯 합니다.
우원과 동물원(动物园) 은 저쪽 아래쪽에 있는 모양인데.... 시간이 없으니 거기 까지는 갈수 없는지라
넓은 공원인 동원을 걸어나와 다시 큰 도로를 건너서 망사원이나 아님 창랑정 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조금전에 호숫가에서 본 풀 들을 생각하다 보니 문득 이소연 기자가 동아일보에 쓴 “닥종이는 조선의
반도체... 당대 최고 수출품” 이라는 기사가 떠오르는데... “닥종이는 ‘조선의 반도체’ 였습니다. 당대
최고 수출품 이었을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어떤 나라도 따라 할수 없는 독자 기술력을 가진 산업 이었어요.”
한반도 닥종이의 발전사를 조명한 ‘장인과 닥나무가 함께 만든 역사, 조선의 과학기술사’
(푸른역사) 를 최근 출간한 이정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교수(51·사진) 가 말했다.
이 교수는 30일 인터뷰에서 “조선 백자 처럼 아름답지도, 조선 후기 과학서만큼 사료가 방대하지도 않지만
닥종이야말로 조선의 과학기술사를 대표하는 발명품” 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의 혁신적 기술이 과학자
장영실(1390∼?) 이나 실학자 정약용 (1762∼1836) 이 아닌 이름모를 지장(紙匠) 에 의해 발명 됐다는 얘기다.
닥종이 는 고대 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최고의 상품 이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종이를 만드는 기술자를 촌장이나 부족장급인 5두품으로 인정했다. 신라산 닥종이 는 당나라와
일본에 수출되며 인기를 끌었다. 송나라 재상 손목이 남긴 ‘계림지 (鷄林志)’ 에는 “고려 닥종이는
윤택이 나고 흰빛이 좋아 ‘백추지 (白硾紙· 다듬이로 반드럽게 만든 흰 종이)’ 라 불린다” 는 기록이 나온다.
이 교수는 여기서 ‘찧다’ 는 뜻의 한자 ‘추(硾)’ 에 주목했다. 그는 “이 한자는 우리 옥편에선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중국에선 쓰지 않는다. 고려의 지장(紙匠) 들이 중국에 닥종이를
수출하면서 ‘石(석)’ 자와 늘어뜨린다는 뜻의 ‘垂(수)’ 자를 합성해 새 글자를 지은 것” 이라고 했다.
나무껍질에서 얻은 섬유를 맷돌로 완전히 갈았던 중국과 일본 의 지장과 달리, 한반도의
지장은 돌위에 놓고 다듬이질하듯 빻았다. 이 교수는 “강한 섬유를 살려냈던 당대
지장들의 기지가 더 질기고 강한 종이를 발명해 냈다” 고 설명했다. 이렇게 만든
닥종이를 다시 다듬이질 하는 도침(搗砧) 공정 은 조선시대 지장들이 완성시킨 기술이다.
1425년 명나라 황제가 이 비법을 알아내기 위해 세종에게 ‘종이 만드는 방법을 적은 글’ 을 바치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이 교수는 “도침 공정을 거친 닥종이는 밀도가 높아져 현대의 플라스틱 과
유사한 성분 구조를 갖게 된다. 이로 인해 조선의 닥종이는 방수 기능 까지 갖추게 됐다” 고 말했다.
이교수는 “닥종이의 독특한 특성이 조선에 ‘휴지(休紙) 문화’ 를 만들어냈다” 고도 했다. 15세기 중반 닥종이
수요가 폭발하면서 지장들은 사용된 종이를 물에 풀어 다시 새 종이 로 만들기 시작했다. ‘승정원일기’
등에는 실록 편찬 뒤 남은 초고를 ‘271권 4장 반’ 등 반 장까지 낱낱이 집계해 보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재활용 하기 위해 종이를 보관하는 ‘휴지 행정’ 이 자리잡은 것이다. 지장들은 휴지로 옷과 가방, 물통 을 만들
기도 했다. 계암일록(溪巖日錄) 에 따르면 17세기 유지의 (襦紙衣·종이로 만든 겨울옷) 는 비단저고리
보다 비쌌다. 이 교수는 “닥종이를 변신시킨 지장들의 발명은 종이의 발명만큼이나 위대했다” 고 강조했다.
그런데 지장들은 사람대접을 받았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데.... 조선의 우수한 상품은 인삼과 종이 말고도 붓 이
있었으니, 붓은 축(軸) 과 수(穗) 로 이루어지니 수(穗)는 족제비꼬리털인 황모(黃毛) 와 날다람쥐털
인 청모(靑毛) 가 최고급으로 양반과 관리들은 붓을 재료값도 안되는 가격으로 후려치니... 늘 손해를 본
장인은 손가락을 잘라 모면 하기도 했으며 이후 양반집에서 재료를 갖춘후 수공비를 준다고 불러야만 응합니다.
귤이 열매를 맺으면 관리가 그 수를 세는데 바람에 떨어지고 지나가는 아이들이 따먹어도 원래 갯수대로
세금을 징수하니 수탈에 시달린 제주 농부가 귤나무에 독약을 발라 고사 시킨 것과 같으며.... 제주
해녀는 남자 였는데 전복 수탈로 수입이 없으니 장가도 못가고 위험한 일이라 죽기도 하니 육지로 도망
치자 여자들에게 물질 을 시켰으며 도망갈까봐 육지로 가는 배에는 아예 여자들이 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런저런 옛날 생각을 접고는 东园 (동원) 을 뒤로 하고 걸어나와 큰 도로를 건너서 버스정류소
를 찾아가는데 원래 계획대로 쌍탑원(双塔园) 과 그 남쪽에 있는 왕스위안 网丝园
(망사원) 을 볼까..... 아님 시간이 모자라니 창랑팅 沧浪亭(창랑정) 으로 바로 갈까 망설입니다.